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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틱낫한 지음 | 명진출판
기도틱낫한 지음 명진출판 / 2013년 4월 / 200쪽 / 13,000원



당신에게 기도가 무의미했던 이유



당신이 종교를 가진 사람이라면기도는 의무일 수 있으며신과 연결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통로이다그래서 기독교 신자는 하느님을 향해불교 신자는 붓다를 향해이슬람교 신자는 알라를 향해자신이 가진 종교의 방식으로 기도를 한다.

그러나 당신이 종교가 없는 사람이라 해도필요한 순간에는 기도를 한다.신을 믿지는 않지만급박한 위기가 닥치거나위대한 힘의 도움이 절실해질 때면두 손을 모으고 신에게 의지하고 싶어진다.하지만 신의 도움이 필요한절박한 순간이 지나고 나면 당신은 더 이상 기도하지 않는다.

당신이 기도하지 않는 이유는그렇게 간절하게 도움을 요청했는데도아무런 응답이 없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비슷한 이유로, 종교를 가졌으면서도기도의 의미를 크게 못 느끼는 사람이 있다.그들은 신을 믿으면서도자신의 기도에 응답해 주지 않을 거라는막연한 불신을 가지고 있다.그래서 의무적이거나 형식적인 기도를 한다.

그런데 정말 기도의 응답이 없는 것이신이 존재하지 않거나 기도해도 소용없기 때문일까?둘 다 아니다.사람들이 기도의 응답을 받지 못했다고 느끼는 것은기도의 원리를 알지 못한 채 기도의 행위만 반복하기 때문이다.우리가 간절하게 기도할 때는어려운 일이 생기거나자신이 할 수 없는 것을하느님이나 붓다가 와서해결해 주기를 바라는 경우이다.사랑하는 가족이 큰 병에 걸리면병의 완치를 원하는 기도를 올리고,파산의 위험에 처했을 경우이 위기에서 구해 달라고 청하기도 한다.자신의 필요에 따라 신의 위대한 힘을 요구하는 것이잘못된 일은 아니다.

문제는 기도의 원리를 알지 못한 채무작정 요구나 주문을 하는 것이다.하지만 신은 우리의 심부름꾼이나 채무자가 아니다.그런데도 우리는 기도를 몇 번만 계속하면신이 마치 택배회사 직원처럼자신이 주문한 것을 정확히 가져다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그리고 자신의 바람이 원하는 형태대로현실화되었을 때 우리는비로소 기도에 응답받았다고 믿는다.하지만 기도의 응답은 내가 원하는 형태로 나타날 수도 있고아닐 수도 있다.

신의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보자.요구나 주문이 담긴 기도를 들었을 때그 청을 들어줘야겠다고 생각할까?“하느님, 제 자식이 이번 시험에 합격하면교회에 헌금을 많이 하겠습니다.”처럼거래하자는 제안이 들어오면과연 이를 받아들일까? 이것은 어린아이가 자신의 소중한 보물인 유리구슬을 가지고어른과 거래를 하려고 드는 것과 같다.유리구슬은 아이에겐 중요한 물건이지만어른에겐 가치 없는 것이듯인간이 거래로 제안하는 모든 것은 인간에게나 중요한 것이다.또한 제안한 조건 때문에기도에 응답해 줄지 말지를 결정하는 신이라면,결코 우리가 믿고 따를 만한위대한 존재라고 볼 수 없다.기도는 말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도깨비 방망이가 아니다.그리고 기도의 응답은그렇듯 1차원적으로 실현되지 않는다.

원망과 미움이 담긴 기도는 기도가 아니다



도박에 빠진 남편 때문에 몹시 괴로워하는어느 여인이 있었다.그녀는 자신과 아이들을 내팽개친 채 가산을 탕진하고 있는 남편을 원망하고 미워했다.남편 대신 집안을 돌보기 위해밤낮없이 일해야 하는 자신의 고달픈 신세도 한탄했다.

불교 신자인 그녀는 날마다 절에 가서 붓다에게 간절히 기도를 올렸다.제발 남편이 도박의 늪에서 빠져나와가정을 잘 돌보는 좋은 남편이 되게 해달라고.그런데 이 여인의 기도는 제대로 된 것일까?누구라도 여인과 같은 처지에 있다면 그렇게 기도했을 것이다.문제는 그녀가 남편을 원망하는 마음으로 기도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사랑하는 이가 잘못된 길을 가고 있으면그를 변화시키기 위해 기도를 한다.그런 기도를 할 때 불교의 스승들은‘반드시 스스로를 통찰하라’고 가르친다.우리가 명상을 하면 자신과 다른 이와의 연관성과문제의 진정한 원인을 깨닫게 된다.이러한 이해 없이 미움과 원망, 질투와 분노의 마음으로기도하는 것은 올바른 기도가 아니다.

기도로 예정된 운명을 바꿀 수 있을까?



종교를 가진 사람들 중에는 ‘신이 의도했다면 그것은 이미 이루어진 것’이라고말하는 사람들이 있다.이 여성은 몇 살에 암으로 죽을 운명이고,저 청년은 몇 살에 교통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될 예정이다.신의 결정으로 이러한 불행이 예정되어 있다고 치자.그렇다면 병에 걸리지 않고 건강하게 해달라고,혹은 사업이 번창해서 부자가 되게 해달라고기도하는 건 아무 효과도 없는 무의미한 짓일까?어차피 예정된 운명은 바뀔 수 없으므로결국 기도는 시간낭비에 불과한 것일까?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의 의지’는불교의 ‘인과응보’에 해당한다.어떤 이가 칼로리가 높은 기름진 음식만 먹고활동은 전혀 하지 않은 채 게으르게 생활한다면 어떻게 될까?아마 고도비만이나 각종 성인병에 걸릴 것이다.이것은 그가 과거에 했던 행위가 가져온 당연한 결과이다.이것을 불교에서는 ‘카르마’, 즉 ‘업’이라고 한다.카르마는 이미 결정된 것이다.결코 신이 예정해 놓은 것이 아니다.

여기서 불교 신자들은 의문이 생길 것이다.이러한 카르마에 대해 기도하는 것은 효과가 있을까?우리의 카르마로 인해 그러한 운명이 예정되어 있다면,기도로 그 예정된 운명을 바꿀 수 있을까?

불교에서는 ‘모든 것이 무상하다’고 말한다.이는 ‘만물이 변화하고 있다’는 뜻이다.오늘 아프던 몸이 내일 나을 수도 있고,어제까지는 실패를 거듭하던 일이 모레부터는 쉽게 풀릴 수도 있다.이처럼 예측하기 어려운 모든 현상은‘원인과 결과의 법칙’에 따라 일어나는 것이다.과거의 어떤 행위가 오늘의 결과를 가져왔듯이 오늘의 어떤 행위가 미래에는 다른 결과를 일으킬 수 있다.

그렇다면 과거의 좋지 못한 행위를 올바르게 잡아주고미래에 더욱 좋은 결과를 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그 해답은 오늘 우리가 좋은 행위를 하는 것이다.기도는 그 과정에서 좋은 변화를 이끌어주는 선순환의 도구이다.

기도는 우리의 몸에 새로운 에너지를 불어넣어 준다.게으름에 찌든 몸과 마음에 활기를 심어주고,쾌락으로 붕 뜬 몸과 마음을 차분하게 만들어준다.기도가 일으킨 새로운 에너지는 우리의 몸과 마음에 새 장을 열어준다.

기도하는 사람은 사랑의 에너지를 보낼 수 있다



어느 날 밤, 나는 좌선 수행을 하며베트남 하노이에 있는 한 자매를 떠올렸다.그녀는 병에 걸려 무척 고통스러워했다.나는 정신과 마음을 집중하고 온 정성을 다해그녀에게 자비의 에너지를 보냈다.이렇게 정신과 마음을 집중하여에너지를 보내는 것도 기도의 한 방법이다.

다른 이에게 사랑과 자비를 보낼 때그들이 그 사실을 아느냐는 중요하지 않다.중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에 사랑이 존재하며,그것을 세상으로 내보낸다는 사실이다.그리고 사랑을 외부로 보낼 때 우리 내면에도 변화가 일어난다.

그 자매가 플럼빌리지에 왔을 때,이곳 스님들은 지극정성으로 그녀를 보살폈다.그때 쏟아부은 사랑의 에너지가 아직도 그녀와 우리 안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누군가에게 보낸 사랑의 에너지는어딘가로 사라지거나 빼앗기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퍼내면 퍼낼수록 더 맑은 물이 솟아나는 샘물처럼사랑의 에너지는 누군가에게 보낼수록 더 강하고 충만하게 채워진다.그래서 우리는 언제라도 자기 안으로 들어와그 에너지를 만날 수 있다.바로 그때, 또 다른 이의 몸과 마음을 치유할 수 있는더 많은 에너지가 샘솟는다.

기도를 위한 명상



명상은 불교 수행의 정수이다.명상의 목적은 수행자로 하여금 만물의 실체와 본질에 대한깊은 이해와 통찰에 도달하게 하는 것이다.이러한 이해와 통찰만이 우리를 두려움과 걱정, 우울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다.더 이상 걱정하지 않겠다는 결심만으로는우리는 걱정의 굴레에서 벗어나 수 없다.‘왜 걱정하고 있는가?’, ‘무엇을 걱정하는가?’를스스로 깨닫고 이해할 때에만 우리는걱정과 슬픔과 불안의 사슬에서 벗어나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다.불교의 명상 수행은 심적 고통에 시달리는 많은 이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다.그래서 20세기 후반부터 서구인들은 명상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우리가 원하는 행복은 영적인 삶을 유지할 때 가능해진다.영적인 삶은 거창하거나 어려운 삶이 아니다.항상 ‘깨어 있는 온 마음 mindfulness’ 상태로 사는 것이다.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며 충실하게 사는 것이다.그래야 우리의 마음에서 자비심이 우러나올 수 있다.이 자비심이 자신과 모두의 삶을 향상시킬 수 있다.그래서 명상은 영적인 삶의 기초이다.또한 기도의 전 단계이다.마음속이 온갖 잡념과 부정적인 감정으로 가득 찬 상태에서는제대로 기도에 집중하기 힘들다.기도에 집중하지 못하면 기도의 에너지는 일어나지 않는다.그러므로 기도하기 전에명상을 통해 마음에 고요와 안정이 깃들게 해야 한다.그래야만 자신이 신께 기도하려는 진짜 목적과내용을 깨달을 수 있다.

앉으나 서나, 걷거나 누워서도



가장 일반적인 명상 방법은 앉아서 자신의 호흡을 의식하는 것이다.플럼빌리지에서는 종소리가 울리면 모두 하던 일을 멈추고 호흡명상을 한다.숨을 들이마시며 나는 살아 있음을 느낀다.숨을 내쉬며 나는 삶을 향해 웃는다.

숨을 들이쉬며 마음을 고요히 하고,숨을 내쉬며 웃는다.이렇게 의식적으로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걸세 번 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마음 챙김을 할 수 있다.

수행은 앉아서만 할 수 있는 건 아니다.우리는 걷거나 서서, 또는 누워서도 수행할 수 있다.빨래를 하거나 나무를 베면서,채소에 물을 주거나 차를 운전하면서도 할 수 있다.우리가 어떤 자세로 무엇을 하든,몸과 마음에 마음 챙김과 집중의 힘만 지니고 있으면 그것이 수행이다.

행복에는 비밀이 있다



현대 사회의 많은 이들이 감각적 욕망을 추구하며 살아간다.그러나 욕망을 통해서는 결코 진정한 행복을 만날 수 없다.삶은 유한하지만 욕망은 무한하기 때문이다.무한한 욕망을 좇다 보면 결국 우리가 맞닥뜨리는 건 불행밖에 없다.

붓다는 인간의 욕망을 ‘덫’에 비유했다.욕망의 덫에 걸린 이들은 자유를 잃고 절망하며 불행해진다.우리가 진정한 자유와 편안함을 느낄 때는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졌을 때이다.더 많은 돈을 벌고자 하는 집착이나직장을 언제 잃을지 모르는 두려움에서 자유로워지면,우리는 단순하고 건강한 삶에 감사하고 만족할 수 있을 것이다.자신이 현재 가진 것에 감사할 줄 아는 지혜를 지녀야 한다.자신이 가진 것 이상을 바라지 않는 자족의 삶,적게 쓰고 적게 가지는 소박한 삶이 주는많은 행복을 깨달을 줄 아는 지혜를 지녀야 한다.

이것이 내가 제안하는 작지만 소중한, 행복의 비밀이다.또한 기도는 시공을 넘어서 집단의 마음에 영향을 준다.기도는 집안의 마음에도 영향을 미쳐 부정적인 마음을 치유시킨다.이를 이해하면 한 집단과 그에 속한 이들을 치유하는 길을 알 수 있다.성공이라 여겼던 모든 것들을우리는 더 이상 맹목적으로 원치 않을 것이다.누군가 우리를 시기하여 모함한다 한들,그 평화와 행복을 건드릴 수 없다.

기도는 몸과 마음과 말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



사람들 사이의 의사소통은대부분 말이나 글을 통해 이뤄진다.그렇다면 기도의 대상과 우리는 어떻게 의사소통을 할까?우리는 기도할 때 두 손을 모으고 두 눈을 감은 채 조용히 읊조리거나 마음속으로 말한다.하지만 말로만 하는 기도는 충분치 않다.기도는 온몸과 온 마음을 다해서 해야 한다.몸과 언어, 일상생활 모두를 통해 기도해야 한다.

불교 승려나 가톨릭 수사들은 기도할 때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으고 머리를 조아린다.불교나 이슬람교, 그리스 정교의 기도에는 절이 포함된다.절은 자신을 낮추고 마음을 열어 땅에 엎드리는 겸허한 자세이다.효과적인 기도에는 이렇듯 몸과 마음모두의 집중이 필요하다.

몸과 말과 마음이 하나가 될 수 있는유일한 방법이 ‘깨어 있는 온 마음’이다.몸과 마음과 말이 하나가 되어완전히 깨어 있는 상태일 때,우리에게 어려운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는기도의 에너지가 생겨날 수 있다.그 에너지에는 사랑과 믿음이 가득할 것이다.우리가 기도 후에 평화와 안정을 얻을 수 있는 것도사랑과 믿음에 찬 에너지를 느꼈기 때문이다.

절을 하는 대상은 내 안의 불성이다



불교에서는 불상 앞에 두 손을 모으고 절을 하는 절 수행이 있다.이 역시 기도의 한 방법이다.그래서 불교 신자들은 불상 앞에 두 손을 모으고 절을 한다.

우리가 절하는 이와 불상과의 관계를 깊이 살펴볼 필요가 있다.절하는 이는 누구이며, 절을 받는 불상이 상징하는 바는 무엇인가?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절만 한다면,그 행위는 미신적인 의식으로 흐르기 쉽다.붓다가 우리와 동떨어져 존재하는외부의 대상에 불과하다면 저 불상 역시 그러할 것이다.

나는 여기서 절을 올리기 위해 서 있고,불상은 저기 단상 위 높은 곳에 앉아 있다.겉으로 보기에 우리는 분리되어 있고,서로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 같다.그러나 실상 붓다는 내 안에 불성으로 존재하고 있다.불교에서 모든 중생은 붓다가 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도우리 안에 붓다를 닮은 불성이 있기 때문이다.우리 모두는 붓다처럼 깨달음을 얻어 해탈할 수 있는가능성을 가진 소중한 존재이다.

그러므로 나와 붓다는 결코 분리된 두 존재가 아니다.외부의 불상은 이러한 우리의 관계를 시각화한 상징에 불과하다.따라서 불상을 향해 절하는 것은 내 안에 있는 불성을 향해 절하는 것이다.우리가 절할 때는 그 불상의 모습이 어떻든 간에 자기 내면의 붓다를 상상하며 한다.가능하면 자신이 그릴 수 있는 가장 고귀한 붓다의 모습을 상상해야 한다.불상을 향해 절할 때는 붓다와 내가 깊이 연관되어 있다는 중요한 사실을절대로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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