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촌방향
설재우 지음 | 이덴슬리벨
서촌방향
설재우 지음
이덴슬리벨 / 2012년 11월 / 336쪽 / 14,500원
구석구석 서촌 공간
마음이 치유되는 곳, 서촌 골목길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을 걷다 보면 묘한 포근함과 추억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담장에 적힌 짓궂은 낙서들, 바람에 펄럭이며 햇살을 듬뿍 받고 있는 빨래들, 골목 사이 집집마다 놓인 화단과 나무들을 보고 있으면 왠지 어린 시절이 생각나고 정겨운 느낌이 우리와 동행한다. 골목은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마법 같은 효과가 있다. 갈수록 각박해지고 메마르는 인심과 일상에 지쳐서일까? 요즘 골목에 대한 얘기를 많이 들을 수 있다. 비단 서촌뿐만의 얘기는 아니다. 책으로, 잡지로, 영상으로 다양한 매체와 방법으로 그동안 소외되고 방치되었던 골목이 재조명되고 있다. 그야말로 골목의 재발견이다. 골목은 서촌을 이해하고 느끼는 데 가장 중요한 키워드이기도 하다. 서울 시내에서 유일하게 조선시대의 지적도(토지에 관한 여러 가지 사항을 기록한 지도)와 현재의 지적도가 가장 근접하게 일치하는 곳이 바로 서촌이라고 한다. 그 정도로 서촌의 골목은 역사가 깊다. 그래서일까. 흔히 서촌하면 많이 떠올리는 곳이 바로 이 골목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골목은 좁고 많이 불편한 존재다. 탈선장소로도 쓰일 수 있고 무엇보다도 화재 시 소방차가 접근하기가 어려워 여러모로 위험하다. 또한 공공도로와는 성격이 많이 다르다. 분명 누구의 것이 아닌 길인데도 말이다. 골목은 상당히 주민친화적이고 사유도로에 가까운 성향을 띤다. 골목은 거기에 사는 사람들이 열심히 일구어놓은 스티로폼 꽃밭과 화분들이 길을 막고 있는, 때론 쓰레기가 아무렇게나 나와 있으며, 눈이 오면 직접 비질로 길을 내는 노력이 뒤섞인 곳이다. 그렇기 때문에 거의 항상 텃세가 존재한다. 또한 골목에는 거기서 살아온 사람들 각각의 사연과 눈물과 아픔이 있다. 내가 알고 있는 서촌과 골목에 얽힌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서촌 골목길, 잃어버린 동심을 돌아보다: 골목길의 서정성은 청춘보다는 동심에 가깝다. 골목은 누구나 그러하듯 나에게도 역시 어릴 적 술래잡기, 숨바꼭질을 하던 주 무대였다. 그러나 학교를 다니기 시작하면서 인적 없고 으슥한 골목은 두려움의 길로 변했다. 골목 곳곳에는 동네 불량배 형들이 숨어 있었고, 툭하면 돈을 뺏기곤 했다. 한두 사람만 겨우 지나다닐 수 있는 골목에서 불량배들을 만나면 꼼짝없이 당했던 것이다.
한편 서촌의 골목은 또 다른 방황의 도피처였다. 골목에는 지름길도 있지만 한없이 뱅뱅 돌아가는 길도 있다. 뱅뱅 돌아가는 길을 걸으면 골목과 방황은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한 쌍의 조합이 된다. 예를 들면 시험을 못 봐서 집에 가기 싫을 때 말이다. 서촌에 골목이 없었더라면 그때 그 시절 나는 어디에서 방황할 수 있었을까?
서촌 골목길에서 위로를 받다: 김창준 미국 연방 하원위원의 서촌 골목 이야기도 기사를 통해 화제가 되었다. 그는 한때 미국 연방 하원위원에 세 차례나 당선된 성공한 한국인이다. 그러나 미국 언론들이 연일 그의 정치자금 의혹과 비리를 제기하면서 결국 의원직을 잃었고 순식간에 추락했다. 결혼 생활은 파탄 났고 애써 키워온 회사도 망했다. 모든 걸 잃은 사람이 마지막으로 돌아갈 수 있는 곳은 결국 고국과 고향이었다. 그는 불현듯 어릴 적 자신이 살던 인왕산으로 향하는 골목길이 떠올랐다고 한다. 스무 살이 넘어 고국을 떠난 후 잊고 살던 동네, 바로 서촌이었다. 그는 한국행 비행기를 타고 인왕산 골목길을 찾았다. 골목길에 들어서자 지난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 한참을 울었다.
“산등성이의 진달래며 개나리, 그리고 길가의 목련이 이렇게 아름다웠던가. 나는 봄꽃이 피어나고 있는 골목길을 아주 천천히 걸었다. 그 꽃들은 아마도 내가 어릴 적부터 그렇게 피어 있었고, 나는 그 곁을 스쳐 지나갔을 것이다. 세상 욕심만 가득했던 내 눈에, 내 마음에 그 꽃이 보일 리 없었다. 꽃이나 나무에 내 마음을 줄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성공에 대한 집착과 욕망을 모두 털어버리고 세상을 겸허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되었을 때 마음의 평화가 내게로 찾아왔다. 인왕산 골목길에서 나는 다시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조선일보》 2011년 1월 5일 기고문에서 발췌
사람들이 가끔 나에게 서촌의 매력을 물으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곤 한다. “서촌은 힐링 플레이스(healing place)다. 서촌에는 우리의 지친 마음을 달래주고 치유하는 힘이 있다.” 그리고 힐링 플레이스의 근원은 바로 골목길이라고 생각한다. 이 길에서 우리는 모진 풍파를 견디며 힘겹게 살아왔던 시간 동안 잊고 지낸, 이제는 다 사라졌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추억과 순수함이 남아 있음을 발견하고, 그것에 정화되는 것이 아닐까? 오늘도 난 서촌 골목길을 걸으며 위로받고 치유 받는다.
인왕산 아래 깊고 푸른 동네, 옥인동, 수성동 계곡
낡고 오래된 단층주택, 연립, 빌라들이 옹기종기 모여 인왕산 기슭에 한적하게 자리 잡고 있는 동네가 있다. 먼발치로는 남산과 시내가 한눈에 보이고 뒤로는 인왕산이 아름다운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산에서는 소음이 사라지고 아름답게 지저귀며 노래하는 새소리만 들린다. 이 동네에 들어서면 삶에 지친 사람들을 편안하게 흡수하는 느낌을 받는다. 엄마의 마음처럼 포근한 동네, 바로 옥인동이다.
옥류동천과 인왕산과의 만남: 옥인(玉仁)이란 지명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옥류동과 인왕동이 합쳐지며 각각 한 자씩 따서 지어진 이름이다. 옥류동은 옥빛처럼 맑은 물이 흐르는 동네라는 뜻이다. 실제로 동네의 이름을 따 옥류동천이라 불린 개울이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현재는 도로, 집 등으로 복개되었다. 옥류동천 맑은 계곡에 인왕산 깊고 푸른 산이 만난다는 아름다운 뜻만큼이나 옥인동이란 이름은 어감에서도 맑고 깨끗한 느낌이 난다. 자연이 주는 편안함과 영감 때문이었는지 수많은 예술가들이 옥인동을 사랑했고 시와 노래, 그림으로 표현했다. 시인 윤동주가 젊은 시절을 보냈고, 화가 이중섭이 최초의 전시회를 준비했으며, 조선시대의 천재 화가 겸재 정선이 사랑한 수성동(水聲洞)이 있는 곳 옥인동에는 예술과 문화, 역사의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 있다.
조선시대 천재 화가 겸재 정선이 사랑한 동네: 옥인아파트 일대는 조선시대에는 수성동으로 불렸다. 문화재청은 홈페이지를 통해 “수성동은 빼어난 풍경 덕분에 조선시대 역사지리서인 《동국여지비고》, 《한경지략》 등에 ‘명승지’로 소개되고, 겸재 정선의 ‘수성동’ 회화에도 등장했다”라고 소개하고 있다. 특히 옥인아파트 9동 뒤에 있는 돌다리는 겸재 정선의 그림에도 등장하는 ‘기린교’다. 여기서 기린은 목이 긴 그 기린이다. 기린교는 국내에서 유일하게 원래의 위치에 원형 보존된, 다듬지 않은 통돌로 만든 제일 긴 다리라는 점에서 교량사적으로 매우 가치가 있어 화제가 되었다.
기린교는 수백 년의 세월을 거쳐 1950년대까지 존재하다가 1960년대에 옥인시범아파트를 건립하면서 없어진 것으로 알려졌는데, 운이 좋았는지 2007년 대통령 경호실이 청와대 부근의 문화유적을 조사하는 과정으로 옥인시범아파트 옆 계곡 암반의 벽 사이에 남아 있는 것을 확인했다. 이로 인해 서울시는 옥인아파트 일대가 당시 수성동 풍경을 오늘날에도 그대로 유지하고 있으므로 ‘전통적 경승지’로 보존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여 서울시 기념물로 지정했다. 회화 속에 등장하는 풍경 자체가 문화재(서울특별시 기념물 제31호)로 지정되는 건 처음 있는 사례라고 하니 동네의 큰 영광이 아닐 수 없다. 결국 옥인아파트는 도시녹지계회시설의 일환으로 철거가 결정되었고, 주민들에게 보상을 마치고 현재는 수성동 계곡을 예전 모습으로 복원하고 있다.
인왕산 밑에 병풍처럼 자리 잡고 있던 옥인아파트는 현재 가림막이 쳐진 채 공원 조성을 위한 철거 및 정비 공사가 한창이다. 그 커다란 아파트들이 어떻게 이렇게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 있을까? 놀랍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다. 아파트가 사라지며 주민들은 자연스레 동네를 떠났지만, 남아 있는 주민들은 이곳을 여전히 ‘옥인아파트 입구’라고 부르며 단단한 존재감을 기억하고 있다.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이 아름다운 옥인동. 나의 유년시절 추억이 사라질 건 아쉽지만 수성동의 복원으로 예전의 모습을 찾을 예정이라 앞으로 더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 받을 거라 기대되는 곳이다.
입으로 즐기는 맛있는 서촌
요리사의 자부심이 느껴지는 중국
중국음식점 하면 주로 철가방 휘날리며 바람처럼 배달하는 모습을 습관적으로 연상하게 된다. 그렇지만 간혹 배달도 안 하고 가게에 직접 가서 먹어야만 하는 중국집들이 있다. 그런 곳은 오로지 맛으로만 승부하는 곳이라 봐도 무방할까? 절대 배달은 하지 않고 매장 손님만 받으면서, 영업시간도 오전 11시 30분부터 오후 7시까지, 심지어 그전에 재료가 떨어지면 영업종료! 이렇게 가게 운영에서부터 주인장의 철저한 고집과 철학이 느껴지는 곳, 모 일간지에서 암행어사 형식으로 몰래 취재해서 기사를 쓰는 코너를 통해 호평을 받았던, 서촌 청운동에 있는 중국집 ‘중국’이다. 경복고등학교 학생들이 공부하다 말고 담 넘어와 한 젓가락에 쓸어넣었다는 짜장면으로도 유명하다.
중국의 맛을 그대로: 실내에 들어가면 ‘吉祥如意(길상여의: 좋은 일이 뜻대로 이루어짐)’라는 멋들어진 현판이 눈에 띈다. 알고 보니 중국 복건성에서 직접 맞춰온 것이라고 한다. 그릇이나 잔들도 참 예쁜데 이것 또한 중국에서 직접 공수했단다. 식당 주인 문경철 씨는 중국에서 요리를 직접 배웠다고 한다. 중국에서 취득한 조리자격증이 한쪽 벽에 믿음직스럽게 걸려 있다.
메뉴는 요리 대여섯 가지에 식사 서넛으로 간단하다. 깐펑지(깐풍기), 탕수육, 볶음밥, 짜장면 등 일반 중식당과 별다르지 않다. 하지만 뭐든 가짓수가 중요한 게 아니라 하나라도 얼마나 맛있는지가 중요한 게 아닌가. 이곳의 음식은 맛이 특별하다. 특별하다기보다 중국 본토 맛에 더 가깝다.
한국에서 중국음식을 먹을 때 본토와 가장 다르다고 느끼는 점 중 하나가 ‘물기’이다. 국이 없으면 밥 못 먹는다고 할 정도로 국물을 유달리 사랑하는 한국인 입맛에 맞춘 결과겠지만, 한국의 중식은 소스가 너무 흥건하다. 깐풍기를 예로 들어보자. 깐풍기의 뜻은 ‘닭고기(鷄)를 국물 없이 마르게(乾) 요리한다(烹)’이다. 그런데 한국 중식당의 깐풍기는 소스가 너무 많아서 튀김옷이 다 젖어버린다. 반면 이곳의 깐풍기는 아주 건조하다. 소스가 없다시피 하다. 덕분에 닭고기 튀김이 아주 바삭하다. 씹으면 깨지는 것처럼 바삭 하고 부서진다. 튀김옷은 보통 물과 녹말가루, 달걀을 섞는데 이 식당은 달걀을 넣지 않는다. 쫄깃한 맛이 줄어드는 대신 바삭함의 강도가 높아진다. 마른 고추와 다진 피망, 완두콩, 설탕으로 만든 소스는 아주 맵다. 중국 호남성 요리에서 힌트를 얻어 개발한 소스라고 한다. 볶음밥도 훌륭하다. 수분을 충분히 제거한 밥알이 서로 엉겨 붙지 않는다. 훅 불면 날아갈 듯하다. 밥알 하나하나 잘 볶아져 기름이 돌지만 여분의 기름은 제거해 보송보송하고 느끼하지 않다. 이 과정에서 밥에 배어든 ‘불맛’이 구수한 훈제향을 낸다.
중국의 음식들은 크고 유명한 중식당 못지않은 감동과 만족을 준다. 온가족이 사이좋게 운영하는 곳이고 손님들은 주로 단골에 가족 단위이기 때문에 늘 왁자지껄하고 정신없이 돌아가서 처음에는 좀 부담스러울 수 있다. 하지만 음식이 나오면 음식 외에는 다른 것들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집중하게 되는 매력이 있다. 사장님은 가게 근처의 경복고등학교 학생들에게 교훈이 되라는 뜻에서 훗날 큰 성공을 뜻하는 사자성어 ‘붕정만리(鵬程萬里)’를 현판으로 걸어놓고 효자동 지킴이 방범 순찰도 하며 동네사랑을 적극 실천하는 멋쟁이다. 비록 가게 규모는 크지 않지만 세세히 들여다보면 볼수록 주인의 철학과 자부심이 느껴지는 ‘완소(완전 소중한)’ 중국집이다.
서촌 토박이, 그들만 아는 이야기
적선동 떡볶이 할머니
경복궁역 2번 출구 바로 앞에 있는 금천교시장(혹은 적선시장이라고도 불린다)의 좁은 골목을 따라 약간 올라가다 보면 오른편에 솥뚜껑 같은 철판 앞에 빨간 플라스틱 원형의 자가 놓인 곳이 있다. 반짝이는 간판도 없고 조명이 있는 번듯한 가게도 아니다. 한 평 남짓한 공간에 그저 비닐천막으로 주위를 둘러쌌다. 약 40년 동안 그 좁은 한 평짜리 장소에서 떡볶이만을 팔아온 김정연 할머니의 가게이자 보금자리다. 김정연 할머니는 거의 100세가 다 되었지만 지금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날마다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하지만 친절하고 정 많은 할머니를 기대한다면 오산이다. 할머니의 입은 퉁명스럽고 손님에겐 관심도 없어 보인다. 할머니가 만드는 떡볶이는 이름 그대로 떡을 볶아 만들어내는 떡볶이다. 떡볶이에선 투박한 된장과 간장 맛이 진하게 난다. ‘원조 할머니의 손맛!’, ‘떡볶이계의 새로운 경험!’ 사실 할머니의 떡볶이 맛은 이런 환상들과는 거리가 멀다. 특이한 방법이지만 특별한 맛은 아니다. 매스컴에도 나온 적이 없어서 외지인들에게도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네 사람들이 할머니는 존경하고 끊임없이 찾는 이유가 있다.
몇 해 전 김정연 할머니는 전세금 800만 원과 은행에 저금해서 모은 1,500만 원을 합친 2,300만 원을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유산으로 기탁했다. 젊을 적에는 채소와 꽃을 팔고, 나이 든 후로는 떡볶이로 악착같이 번 돈이었다. 또한 할머니가 사회에 내놓은 건 유산뿐만이 아니었다. 70대에 이미 신체 전부를 기증하기로 했다. 이렇게 가진 모든 것을 내놓는 데에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것일까?
김정연 할머니는 원래 이북 출신으로 개성의 부잣집 딸로 태어나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랐다고 한다. 그리고 한 남자와 결혼을 하게 되었다. 그들 사이에 건강한 세 아이가 태어났고 집에선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순조롭고 행복한 나날을 보내던 어느 날, 멀리서 포탄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전쟁이 난 것이다. 살림은 갈수록 어려워졌고, 어머니의 장사를 돕던 그녀는 밀린 외상값을 받으러 혼자 서울로 내려왔다. 그런데 그녀가 잠시 집을 떠난 사이 북쪽으로 가는 길이 영영 끊겼다. 그녀는 순식간에 이산가족이 되어버렸고 그 뒤로 가족들을 영영 만날 수 없었다. 할머니는 그 후로 일상에서 즐거움을 잃었다고 한다. 가끔 즐겁다가도 코가 막힌다고 한다. 이북에서 늙은 어머니가 자식들 데리고 고생할 생각 때문이다. 죄스러워 제대로 웃지도 못한다고 한다. 아마 할머니는 모든 걸 잃은 느낌이었을 것이다. 어머니, 남편, 어린 자식들 그리고 웃음까지….
그래서일까? 할머니는 평소에 통 웃질 않는다. 그래서 더 불친절하고 퉁명스럽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가족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은 어딘가로 이어졌다. 할머니는 어렵게 모은 돈으로 자식 같은 학생들을 돕기 시작했다. 그리고 할머니가 등록금을 대준 학생들은 또 다른 자식들이 되었다. 매년 어버이날에는 꽃이 열댓 개씩 들어와서 시장 상인들이 “할머니 꽃 장사해도 되겠다!”고 농을 던진다. 뿐만 아니라 나이가 든 학생들이 가끔씩 찾아와서 용돈도 주고 간다. 그게 그렇게 기쁘단다. 그런 자식 같은 사람들이 있기에 할머니는 그 외롭고 긴 세월을 살아올 수 있었으리라.
적선(積善)이라 함은 사전적 의미로 ‘착한 일을 많이 함’이다. 김정연 할머니는 떡볶이를 팔아 돈을 버는 장사꾼이 아니라 사회의 큰 적선가였다. 신문에서 보고 듣기만 하던 그런 적선가가 이름 그대로 적선시장에, 이렇게 가까이 우리 동네 서촌에 살고 있을 줄이야. 내가 낸 떡볶이 값이 할머니가 또 누군가에게 전달할 적선금이 될 것이라 생각하니 떡볶이를 먹고 나서 마음도 배불러지는 느낌이 든다. 할머니의 오랜 벗인 작은 흑백 TV 옆에 놓여 있는 고운 카네이션 한 송이가 유난히 반짝인다.
서촌의 미래
영원한 추억의 빵집, 효자베이커리
얼마 전 홍대의 명소인 리치몬드 제과점이 경영난과 임대료를 버티지 못하고 결국 문을 닫았다는 소식에 많은 사람들이 안타까워했다. 끊임없이 확장하는 프랜차이즈 제과점으로 인해 동네 제과점을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하지만 서촌에는 주민의 절대적인 사랑을 받으며 프랜차이즈 제과점과 당당히 경쟁하는 곳이 있어 든든하다. 시끌벅적한 도심 한가운데 시간이 멈춘 듯한 서촌에 장인정신으로 지켜온 오래된 동네 빵집, 통인동 ‘효자베이커리’가 있다. 통인시장 입구 근처에서 무려 26년을 묵묵하게 빵만을 고집한 효자베이커리. 대형 프랜차이즈 빵집들처럼 세련되거나 멋스럽진 않지만 어렸을 때 즐겨 먹던 빵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어 옛 추억을 상기시켜준다. 효자베이커리 빵을 사겠다는 이유만으로 강남에서 건너오는 손님까지 있을 정도니 뭔가 특별한 것이 있는 게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