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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을 바꾼 발명품의 매혹적인 이야기

위르겐 브뤼크 지음 | 비즈니스북스
일상을 바꾼 발명품의 매혹적인 이야기

위르겐 브뤼크 지음

에코리브르 / 2013년 8월 / 388쪽 / 23,000원





1 사무실과 공적인 삶



마우스

치즈는 먹지 않는: 공상가들이 없었다면 우리는 오늘날처럼 컴퓨터 기술을 마음껏 이용하면서 살 수 없었을지 모른다. 더글러스 엥겔바트(Douglas Engelbart, 1925~2013)가 바로 그런 공상가들 가운데 하나였다. 그는 이미 1950년대에 컴퓨터의 가능성에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에 철학박사였던 그는 버클리에서 철학을 가르치고 있었는데 어느 날 한 동료가 좋은 뜻으로, 만일 학생들을 계속 가르치고 싶으면 컴퓨터는 잊어버리라고 충고했다. 미래에는 컴퓨터가 별 쓸모가 없을 거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만일 엥겔바트가 이 충고를 받아들였다면, 우리의 책상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하지만 그는 이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의 기이한 취미를 용인해주는 스탠퍼드 대학으로 적을 옮겼다. 그러고는 다른 연구원들과 함께 컴퓨터 장비에 관련된 체제를 연구했다. 연구를 하는 가운데, 컴퓨터 화면을 힘들이지 않고 더 쉽게 제어할 수 있는 장비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당시에 알려져 있던 모든 장비(예를 들어 조이스틱, 라이트펜 등)를 모아서 하나의 장비로 통합했으니, 바로 컴퓨터 마우스였다. 이 장치는 발명하자마자 마우스(쥐)라는 이름을 얻었는데, 당시에도 이미 쥐처럼 생겼기 때문이다.

잉크

맥주로 글을 쓰기: 종이가 발명되기 훨씬 전부터 사람들은 글을 썼다. 이때 종이 대신에 다양한 재질, 예를 들어 파피루스나 양피지를 사용했다. 이런 경우 새기거나 끌로 파지 못했고, 다른 기법을 사용해야 했다. 그리하여 잉크가 등장하게 되었다. 잉크는 4500~5000년 전에 이집트에서 발명되었으며, 최초의 잉크에 들어간 내용물은 검댕이나 산화된 흙과 물 그리고 다양한 접합제였다. 이집트인들은 필기도구로 관 모양의 펜을 사용했다. 중국 사람들도 잉크 생산에서 상당히 앞서갔다. 이곳에서는 잉크 제작자가 침엽수를 태울 때 나오는 검댕을 사용했고, 이를 등불에 넣는 기름 및 젤라틴과 혼합했다. 이 혼합물을 말렸다가 필요할 때는 물에 녹여서 사용하기도 했다. 기원전 400년경에 사람들은 이후 수백 년 동안 잉크 제조법의 표준이라 불리는 제조법을 발명했다. 이에 따르면 잉크에는 가루로 된 오배자(五倍子), 철황산염 혹은 구리황산염, 아라비아고무와 용해제(여기에는 물, 맥주, 포도주 혹은 식초가 들어감)가 들어갔다.

점자

손으로 읽기: 세 살 때 프랑스인 루이 브레일(Louis Braille, 1809~1852)은 사고를 당해 시력을 잃고 말았다. 다른 아이들은 읽기와 쓰기를 배웠으나, 브레일은 당시의 다른 시각장애인들처럼 배울 수가 없었다. 열 살이 되어 브레일은 파리에 갔는데, 가슴속엔 읽기와 쓰기를 배우고 싶다는 바람이 가득했다. 파리에서 브레일은 장교 샤를 바르비에(Charles Barbier, 1767~1843)가 발명한 비밀문자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병사들은 이 특별한 글자를 밤에는 물론 빛이 없는 상태에서도 읽을 수 있었다. 바로 장님들에게도 적합한 글자였다. 이 글자는 열두 개의 점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종이에 오톨도톨하게 솟아오른 부분을 손으로 만져 내용을 판독해야 했다. 바르비에의 글자 시스템은 매우 복잡해서 쉽게 배울 수 없었다. 그래서 브레일은 이보다 훨씬 간단한 시스템을 고안해내려 노력했고, 주사위처럼 여섯 개의 점으로만 이루어진 시스템을 개발했다. 여섯 개의 점만으로 예순세 개의 다양한 부호를 만들어낼 수 있었고, 이를 통해 철자, 숫자, 심지어 악보까지도 표현할 수 있었다. 이 프랑스 남자는 1829년에 점자를 대중에게 소개할 수 있었다. 그리고 1990년대부터 브레일이 만든 점자는 전 세계에서 인정하는 표준 문자가 되었다.



2 놀이와 여가



레고

덴마크에서 만든 컬트 조각: 어떤 아이들의 방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장난감이 있다면, 바로 레고일 것이다. 위쪽에는 독특한 돌기가 있고 아래쪽에는 구멍이 나 있는 작고 알록달록한 플라스틱 조각들은 어린아이들에게(지금은 좀 더 큰 아이들을 위한 로고도 나온다) 국가와 상관없이 가장 잘 팔리는 상품이다. 덴마크에서 가구공이었던 올레 키르크 크리스티안센(Ole Kirk Christiansen, 1891~1951)은 1932년에 자신이 운영하는 작은 회사에서 양다리 사다리, 다리미와 나무 장난감을 생산하려 했다. 그는 이 작은 회사를 레고(LEGO는 덴마크어 ‘Leg godt’에서 따온 이름으로, “잘 놀아”라는 뜻이다)라고 불렀다. 사업은 특별히 잘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형편없이 굴러가지도 않았고, 크리스티안센은 다른 이들처럼 제2차 세계대전을 겪었다. 1947년에는 덴마크에서 최초로 플라스틱 같은 재료로 원하는 부품을 만들어내는 기계인 ‘사출 몰딩(Injection molding)’을 만들었다. 아들 고드프레드와 함께 1949년부터 이 회사는 오로지 플라스틱 조각으로 조립하는 장난감을 만드는 데 주력했는데, 아이들은 지붕, 바닥, 바퀴 등을 조립하며 놀 수 있었다. 1966년에 이미 최초의 기차가 나왔고, 1년 후에 이른바 두플로 조각이 나왔는데, 아이들은 이제 두 배는 더 길고 더 높게 조립할 수 있었다. 이때부터 쏟아져 나온 수많은 신제품들은 모두 예전의 레고와 연결할 수 있었다.

영화 필름

그림을 빨리 넘기다: 19세기 말에 많은 발명가들과 꼼꼼하게 뭔가를 연구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움직이는 모습을 찍어서 다시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을 찾는 데 몰두했다. 오늘날 인류 역사상 누가 최초로 필름으로 사진을 찍었는지는 설명할 수 없지만 제일 유력한 사람으로 엔지니어 윌리엄 딕슨(William Dickson, 1860~1935)을 지목할 수 있다. 그는 에디슨 밑에서 일했는데 축음기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사진을 보는 데도 관심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하여 1893년에 띠 모양의 긴 필름에 그림을 담을 수 있는 기계를 조립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 기계를 키네토그라프라고 불렀다. 이 기계로 찍은 그림들은 키네토스코프라고 불리는 또 다른 기계로 봐야만 했다. 하지만 이런 초기 장치는 15미터 필름이어서 유감스럽게도 상영분이 20초에 불과했다. 이로부터 2년이 지난 후에야 프랑스인 형제 오귀스트 뤼미에르(1862~1954)와 루이 뤼미에르(1864~1948)가 관중에게 몇 분 동안 영화를 보여줄 수 있는 기계를 소개할 수 있었다. 이 기계는 카메라와 환등기 일체형이었는데 1895년 12월 28일 파리에서 처음 상영되었다. 열두 개의 짧은 필름이 소개되었고, 뤼미에르 형제는 대단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풍선

강의실에서 어린아이들 방으로: 풍선은 아이들에게 즐거움을 줄 뿐만 아니라 격언 작가와 호언장담을 일삼는 사람에게도 항상 신선한 자극을 준다. 보통 풍선은 입으로 불고, 하늘로 올라가고, 터진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풍선에 대한 기본 사실만을 얘기하고 철학적인 관찰은 철학자들에게 일임할 것이다. 고무 풍선을 발명한 사람은 영국의 물리학자이자 화학자인 마이클 패러데이(Michael Faraday, 1791~1867)라고 알려져 있다. 그는 원래 자신의 이름을 따서 지은 ‘패러데이 새장’으로 유명했다. 패러데이는 생고무를 동그랗게 잘라내고, 두 장이 서로 붙지 않도록 에나멜을 발라 포개놓은 뒤 가장자리를 압착했다. 이어 고무 안에 수소를 집어넣었다. 패러데이가 1824년에 학술지 《저널 오브 사이언스》에 보고했듯이, 풍선은 한껏 팽창했고 투명해졌으며 천장으로 올라갔다. 물론 생고무는 매우 끈적끈적해서 패러데이의 발명품이 오늘날의 풍선이 되기까지 여러 차례 변형을 거쳐야만 했다. 1847년에 런던에서 잉그램(J. G. ingram)은 최초로 오늘날 사용하는 방식에 따라 생고무에 황신을 넣어 탄성고무로 가공해서 풍선을 생산했다.



3 살림과 주거



자명종

인정사정없는 동반자: 1787년에 미국인 레비 허친스(Levi Hutchins, 1761~1855)가 발명한 이래 자명종은 비밀스럽지만 조금 소란스럽게 우리의 일상으로 살금살금 기어들어와 포기할 수 없는 물건으로 자리 잡았다. 오늘날 우리는 햇살에 혹은 닭 울음소리에 깨어날 수 없다. 날이 흐리거나 비가 내려 해가 보이지 않아 지각을 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 정확한 것을 원하는 사람은 당연히 원하는 시간에 경보를 울려주는 믿을 만한 장치가 필요하다. 그런데 허친스가 발명한 자명종에는 오로지 새벽 4시에만 깨워줄 수 있다는 단점이 있었다. 프랑스의 발명가 앙투안 레디에(Antoine Redier, 1817~1892)가 1847년에 특허를 받은 모델은 이보다 훨씬 기능이 향상되었다. 이 모델로 사람들은 원하는 시간에 깰 수 있게 설정해둘 수 있었다.

진공청소기

먼지 송풍기가 작동하지 않아서: 진공청소기의 역사는 먼지 송풍기라고 불렸던 또 다른 장치에서 출발한다. 왜냐하면 영국의 엔지니어 허버트 세실 부스(Herbert Cecil Booth, 1871~1955)가 어느 아름다웠던 날에 런던에 있는 엠파이어 뮤직홀에서 바로 그런 장치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이 기계의 작동 원리는 매우 간단했다. 즉 먼지를 통에 불어넣었던 것이다. 하지만 어이없게도 마침 작동이 잘 되지 않았다. 그러자 부스는 먼지를 흡입하게 하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전문가들에게 문의했으나 그런 기계의 제작은 기술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답이 돌아왔다. 진공청소기에 대한 아이디어는 엠파이어 뮤직홀에서 먼지 송풍기의 소개에 실패했던 날부터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어느 날 부스는 사용하지 않은 깨끗한 손수건을 꺼내 의자의 덮개 위에 펼치고는 힘껏 빨아들였다. 그러자 의자의 덮개 면과 맞닿았던 손수건에 먼지 얼룩들이 붙어 있는 것이 보였다. 진공청소기의 원리에는 문제가 없었던 것이다. 1901년 8월 30일, 때가 왔다. 부스는 이날 최초의 진공청소기로 특허를 신청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기계는 너무 무겁고 소음이 커서 다루기가 쉽지 않았다. 7년 뒤 미국에서 이 기계보다 훨씬 가벼운 장치가 나와 특허를 취득했으며 후버 사에서 판매를 맡았다.

통조림 따개

통조림을 겨냥해서 쏘기: 시장에 내놓는 발명품은 아직 시장에 내놓을 정도로 완성된 상태가 아닌 경우도 많다. 그런가 하면 시장에 내놓기에 충분하지만 제품의 사용을 돕는 보조수단이 필요한 상태일 때도 있다. 예를 들어 깡통은 1810년에 발명되었다. 그리하여 식량을 안전하고 밀폐된 상태로 보관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렸지만, 결정적인 문제가 있었다. 즉 음식은 깡통 안에 있으며, 깡통은 꽉 막혀 있다는 점이다. 어떻게 하면 깡통 안에 들어 있는 음식을 꺼낼 수 있을까? “통조림 따개가 필요하지”라고 당신은 말할지 모른다. 그런데 이런 도구를 발명하는 일은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간단했다면 왜 1855년까지 기다려야 했겠는가? 그러니까 로버트 예이츠(Robert Yeates)가 통조림 따개로 특허를 획득할 때까지 말이다. 그때까지 통조림을 구입한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지시사항에 따라야 했다. “망치와 끌을 사용해서 깡통의 윗부분을 동그란 모양으로 떼어내시오.”(실제로 북극으로 탐사를 떠났던 캐나다 원정대에 참가한 사람들은 그런 설명서를 받았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남북전쟁이 일어났을 때 배고픈 군인들은 총을 쏘아서 깡통을 열었다. 반면 예이츠의 획기적인 발명품, 통조림 따개는 날카로운 날을 통조림에 꽂아서 동그랗게 돌리는 방식이었다. 나비볼트와 절단용 바퀴를 이용해 깡통 가장자리를 따라 움직일 수 있는 최초의 모델은 1870년에 나왔으며 미국인 윌리엄 라이먼(William Lymen)이 발명했다.



4 기술과 도구



거짓말탐지기

배신하는 심장의 고동: “거짓말은 오래 못 간다”는 속담이 있다. 진실은 언젠가 드러나게 마련이고 그때가 되면 거짓말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뜻이다. 전문가에 따르면, 심장이 뛰는 속도가 빨라진다거나 혈압이 달라지는 신체 반응은, 질문을 받은 사람이 진실을 말하지 않았다는 증거라고 한다. 이러한 원칙을 기본으로 해서 발명된 도구가 거짓말탐지기인데, 1931년 1월에 경찰관 레너드 킬러(Leonard Keeler)가 특허를 신청했다. 그는 이미 10년 전에 캘리포니아 의대생이던 존 라슨(John Larson)이 발명한 장치를 좀 더 개선해서 발명품을 만들었다. 거짓말탐지기는 질문을 받은 사람이 대답하는 동안 그의 혈압, 맥박, 호흡을 측정한다. 측정한 수치는 즉각 종이테이프에 기록되고 이를 분석하면 된다. 측정 수치가 정상 수치와 확연하게 차이가 나면, 이는 질문을 받은 사람이 진실을 말하지 않았다는 증거로 간주된다. 물론 거짓말탐지기 조사 결과는 100퍼센트 거짓말을 했다는 확실한 증거가 되지 않으므로(질문을 받는 사람이 긴장을 해도 수치가 정상에서 벗어날 수 있다), 법정에서는 증거자료로 인정받기 힘들다.

소화기

화약은 꺼지지 않는다: 사람들의 공포심을 이용하면 항상 좋은 장사를 할 수 있다. 그렇듯 소화기에 관한 옛날이야기는 그야말로 온갖 야바위와 마술로 가득하다. 16세기와 17세기에는 불을 끌 수 있다는 이상한 가루들이 큰 장에서 팔렸다. 20리터 물과 2킬로그램의 화약으로 채워진 통도 시장에 나왔다. 불이 난 곳에 이 통을 던지면 화약이 폭발하고(실제로 그랬다) 그러면 물이 방출되면서 불을 끄게 될 거라는 말이었다(실제로 그러지는 않았다). 최초로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소화기는 1852년에 필립(W. C. Philip)이 영국에서 조립했다. 그는 불을 끄기 위해서 증기를 이용했다. 복잡한 화학 과정을 거치면서 이 장치 안에 있던 물이 가열되었고 대략 1분 만에 증기가 되어 빠져나갔던 것이다. 이 장치가 잘 작동되자, 영국의 전쟁부에서는 모든 전함에 이 소화기를 구비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하지만 1856년 이 성공 스토리에 급작스러운 변화가 일어나는데, 필립의 소화기 공장에 불이 났던 것이다. 소화기를 생산하는 공장에서 일어난 화재는 최악의 광고였다.

와이퍼

운전하다가 볼 수 있게: 비 오는 날 운전은 즐겁지 않다. 차 안에 있어 비를 맞지는 않지만 와이퍼가 열심히 작동하기 때문에 시야가 탁 트여 있다고 말할 수 없는 상태에서 계속 운전하는 일은 별로 재미가 없다. 물론 미국 여성 메리 앤더슨(Mary Anderson)이 1903년에 와이퍼를 발명하기 전에는 비 오는 날 운전이 훨씬 더 불편했을 것이다. 이때는 차에서 내려서 직접 유리창을 닦아야만 했다. 앤더슨이 발명한 모델은 사치스러운 물건이 아니었으나(당시에는 수동으로 작동되었다), 운전자나 동승자가 더 이상 비에 젖지 않을 수 있었다. 그 후 1922년이 되자 카뷰레터가 와이퍼를 조정할 수 있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 와이퍼에도 단점이 있었는데, 경우에 따라서 빠르게 혹은 느리게 작동된다는 점이다. 이로부터 4년 후, 독일 회사 보쉬가 전기로 작동하는 와이퍼를 최초로 시장에 내놓았다. 이 와이퍼는 분당 서른 번 움직였다.



5 옷과 액세서리



단추

장식과 폐쇄를 위해: 단추는 이미 오래전부터 사용되었는데, 스위스 알프스에 있는 외츠 계곡에서 발견된 미라를 봐도 알 수 있다. 후기 신석기시대의 이 미라가 입은 옷에서 단추 비슷한 것이 발견되었다. 원시 단추는, 특히 기능 면에서 우리가 오늘날 사용하는 단추와는 비교가 안 된다. 당시의 단추는, 특히 금속으로 만든 단추는 순전히 옷의 장식품으로 생산되었다. 안전핀의 원조였던 예전의 연결 쇠붙이는 옷의 폐쇄장치로 가장 널리 사용되었다. 오늘날처럼 구멍이 있는 단추는 13세기에 독일에서 발명되었다. 이처럼 실용적인 액세서리는 14세기부터 유럽 전역에 퍼지게 되었다. 물론 당시의 단추가 어떻게 생겼고 어떻게 완성되었는지 알 수 있는 자료는 충분치 않지만, 늦어도 19세기부터 몇몇 지역에서는 단추를 생산하는 공장이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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