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엄마가 일하는 게 싫어
안느마리 피이오자, 이자벨 피이오자 지음 | 아름다운사람들
난 엄마가 일하는 게 싫어
안느마리 피이오자, 이자벨 피이오자 지음
아름다운사람들 / 2013년 5월 / 331쪽 / 15,000원
우는 아이를 집에 두고 나설 때마다 늘 죄스러웠어요_ 워킹맘 드니즈의 사례
아이에 대한 죄의식으로 따지면 저만 한 사람이 또 있을까요! 그것 때문에 병이 날 지경이었으니까요. 우는 아이를 집에 두고 나설 때마다, 다른 사람에게 아이를 맡기는 게 늘 죄스러웠어요. 그러고 나면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할 일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며 괴로워했고요. 무엇보다 아이들이 힘들 거라 생각하면 미안해서 늘 잘해주려고 애썼지만, 일을 마치고 저녁에 녹초가 돼서 돌아오면 집 안은 엉망이었고 해야 할 일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어요. 그럴 때면 제가 집 안에서 청소와 요리만 하는 사람처럼 느껴졌어요. 이렇게 가정과 직장 사이에 끼어 있을 때 가장 힘들어요. 물론 저는 일을 좋아해요. 그래서 일단 출근하면 일에만 집중하고 집 걱정은 잠시 잊죠. 하지만 일을 하든 하지 않든 저한테 최우선순위는 늘 아이들이었어요.
엄마라면 아이와 모든 순간을 함께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직장에서 일할 때는 아이들에게 죄스러웠어요. 이렇게 해야 한다고 저 나름대로 세워놓은 기준이 있는데 그만큼 해내지 못했거든요. 퇴근을 해서 집에 오면 저는 아이들을 돌보고 저녁식사를 준비하느라 정신없는데 남편은 이렇게 말했어요. “뭐야, 아직 식사 준비도 안 된 거야? 애들은 언제 재우려고 그래?” 그때는 항변할 생각도 못했어요. 다 제가 잘못해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가족을 위해, 내 일을 위해 모든 일을 다 잘 해내려고 늘 노력했죠.
아이들에게는 과잉보호라 할 만큼 정성을 쏟았어요. 아이들에게 제 걱정거리는 숨기고 직장과 가정 사이에서 늘 아슬아슬하게 곡예하며 가정의 평화를 유지했죠. 하지만 아이들은 제가 왜 이렇게 바쁜지도 모르면서 엄마는 집안일보다 직장 일로 더 바쁜 사람이라고만 생각했어요. 자신들이 편안히 지내는 것도 다 제가 뒷바라지 하는 덕분인데 말이에요. 아이들을 다시 기를 기회가 주어진다 해도 저는 분명히 지금과 똑같이 할 거예요. 같은 실수를 반복하면서 말이죠. 일을 하지 않았다면 더 큰 죄의식에 시달렸을 테니까요.
저는 집에 가만히 있으면 마음 한구석이 텅 빈 듯하고 때때로 ‘의미도 없는 일에 시간을 투자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휩싸이거든요. 반면에 바깥 활동을 할 때면 사회적 존재로서 의미를 되찾는다고나 할까요. 제 인생에 사회적 가치가 다시 부여되었어요. 솔직히 말하면, 가정에서의 저는 특별한 가치가 없는 사람처럼 느껴졌어요. 하지만 직장에서는 그렇지 않았죠. 한 남자의 아내나 아이들의 엄마가 아니라 ‘드니즈’로 대해주었거든요. 전 직장생활을 하면서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저에 대한 긍정적 이미지를 되찾게 되었고, ‘멋진 여자’가 될 수 있었어요. 이런 기분이 얼마간 스트레스를 견디는 힘이 되었죠. 하지만 가족을 생각하면 슬프기도 하고 죄스럽기도 했어요. 제가 가족에게 이런 감정을 가져서 혹시 나쁜 일이 생기지는 않을까, 천벌을 받지는 않을까 불안하기도 했고요.
그래서 제가 아이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표현하려고 했지만 문제는 제가 아이들을 위해 뭔가 열심히 해도 아이들은 그게 자신들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모른다는 거였어요. 그렇다고 해서 그걸 말로 표현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어요. 저는 아이들에게 화를 잘 내지 않았어요. 제가 아이들에게 정말 화를 낸 건 평생에 두세 번도 되지 않을 거예요. 물론 아이들이 화를 돋울 때도 있었어요. 그때마다 화를 내면 안 된다고 자신을 타일렀죠. 아이를 사랑하는 엄마라면 아무리 화가 나도 아이 탓을 하지 않을 거라고 믿었거든요. 실제로는 아이들과 남편 그리고 주위의 상황 때문에 몇 년 동안이나 화가 나 있었으면서 말이죠. 하지만 그런 감정을 내보이고 싶지 않았어요. 우울증을 겪은 것도 그 때문이었죠.
저와 비슷한 다른 엄마들을 보면 모두 현재를 살지 않았어요. 사무실에 있을 때는 저녁에 무슨 반찬을 할지 걱정하고, 식사 준비를 할 때는 밀린 빨래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죠. 저도 늘 다음 일을 생각하고 걱정하느라 신체적, 정신적으로 너무 힘들었어요. ‘좋은 엄마’로는 만족하더라도 정작 직장생활에 완전히 집중할 수 없어서 죄의식을 느끼기도 했죠. 그렇다고 일을 하지 않으려니 아무런 사회적 위상도 갖지 못하는 게 아쉽기도 하고요. 저도 다섯 아이를 기르고 남편의 가게 일을 돕지만, 독립적인 일이 아니다 보니 아이가 학교에서 가져온 서류에 엄마의 직업을 ‘무직’으로 적거든요. 이제는 그동안 제가 다른 사람들의 기대에 맞춰 좋은 딸, 좋은 아내, 좋은 엄마라는 인정을 받기 위해 의무를 다하려 노력했다는 걸 알아요. 그때 저에게는 맡은 일에 따른 책임감이 중요했거든요.
Dr’s note: 드니즈는 일하느라 아이들을 돌보지 못한 것을 보상하려는 마음으로 가족에게 지나치게 잘하려고 노력했다고 말했다. 또 일하는 엄마가 계속 겪을 수밖에 없는 갈등, 자책과 타인의 질책, 육체적 고통 등 가정생활의 어려움을 털어놓은 한편, 사회적 지위나 개인의 가치 실현, 우울증 예방 등 직장생활의 좋은 점도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그녀는 자신이 남편과 아이들에게 느끼는 불만과 반항심을 억누르고, 오로지 다른 사람의 요구와 이상적인 가정의 모습에 자신을 끼워 맞추려고 노력하다가 우울증에 빠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드니즈는 아이들을 돌보지 않고 일하는 것을 죄스러워하며, 남편에게는 무조건 복종하고 자신은 비하하면서 죄의식을 점점 더 크게 느끼는 것 같다.
일하는 엄마에게서 책임감을 배운다
한계를 인정하는 것은 책임감을 키워나가는 데 필요한 첫걸음이다. 두 살배기 딸을 둔 베로니크는 머릿속에 이상적인 어머니상을 그리고 있었다. 아이에게 헌신하며 물질적인 것뿐만 아니라 정서적인 면까지 모두 세심하게 돌보는 엄마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일을 해야 했기에 엘로디를 어린이집에 맡겨야만 했다. 이렇게 하루하루가 지나자 베로니크는 자신이 꿈속에서 그리던 엄마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현실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그녀는 일을 했기에 아이에게 전적으로 헌신할 수 없었고, 매일 아홉 시간 이상 떨어져 있었기에 아이의 일상을 소소한 부분까지 챙겨줄 수 없었다. 베로니크가 죄책감 대신 책임감을 갖고자 한다면 이상적인 어머니상부터 버려야 한다. 이를 바람직하게 소화한 베로니크의 심리에 나타나는 몇 가지 단계를 살펴보자.
1단계_ 부정 : ‘저는 완벽한 어머니상에 걸맞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2단계_ 분노 : ‘일과 아이 사이에서 늘 괴로워요. 이건 정말 불공평하고 참을 수 없는 일이죠. 자식을 희생하면서까지 일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 반대 상황도 마찬가지예요. 사회에서 엄마들을 더 많이 도와주어야 한다고 봐요. 게다가 남편은 저와 번갈아가며 딸아이 곁에 있으려고 한 적이 한 번도 없어요. 정말 화가 많이 나요. 다른 아이들은 어린이집에 쉽게 적응하는 것 같은데 우리 아이만 까다로운 것 같아요. 힘든 일은 왜 저한테만 일어나는 거죠?’ 이러한 내적 대화에는 자신을 향한 분노도 있다. ‘온종일 아이를 보는 것보다 일하는 게 낫다고 느끼는 나 자신이 정말 끔찍해.’
3단계_ 타협 : “일하면서도 이상적인 엄마가 되려고 최선을 다할 거예요.” 베로니크는 가능한 한 딸과 오래 있으려고 갑절의 노력을 기울인다. 하지만 그렇게 하다 보면 결국 지칠 수밖에 없고 어느 순간 자신이 이상적인 엄마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것이다.
4단계_ 우울 : “더는 못해요. 제가 바라는 만큼 아이를 잘 돌볼 수가 없어요. 아이와 온종일 같이 있을 수 없어서 너무 속상해요.” 상황이 더 나쁜 경우 이렇게 생각하기도 한다. “나는 나쁜 엄마야. 딸아이가 잘 자라지도, 행복하지도 않을 거야.”
5단계_ 수용 :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고요. 제가 바라는 만큼 딸아이를 돌볼 수 없다는 걸 깨달았거든요. 이제 버거운 요구사항은 버리고 제 한계도 생각하려고요. 그편이 딸아이와
저 자신에게 더 긍정적일 것 같아요.”
이 단계에 이른 베로니크는 이제 자신의 의무 때문에 고통스러워하지 않는다. 힘들긴 하겠지만 ‘워킹맘’으로서 자신의 삶을 즐겁게 꾸려나갈 새로운 의욕으로 가득 차 있다.
우리가 느끼는 감정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위의 발전 단계를 잘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견뎌내야’ 하는 상황이 되고, 각 단계에 지나치게 오래 머무르거나 다음 단계로 성장하지 못하여 이전 단계로 물러서게 될 위험이 있다. 이러한 정체 상태에서는 특히 두 번째와 네 번째 단계에서 쉽게 죄의식에 시달리게 된다. 나도 두 번째 단계에서 분노가 일어나는 순간을 맞이했다. 이러한 분노를 인정하고 표현했다면 그 상태에서 벗어나 세 번째 단계로 더 빨리 나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분노를 숨기고 억누르려는 사이, 도리어 그 감정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즉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나 자신에게 불만을 품게 된 것이다.
네 번째 단계에서는 나 역시 우울하고 슬펐다. 나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지고 맡은 일을 제대로 해낼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더 높은 수준에 이르지 못하는 자신을 스스로 깎아내리면서 자존감은 현저히 낮아졌다. 두 번째와 네 번째 단계에서처럼 죄책감은 다른 감정의 연장선상에 있거나 그 감정에서 생긴 결과다. 첫 번째 가장 원초적 감정은 분노이며, 두 번째는 슬픔이다. 이러한 감정은 밖으로 표현함으로써 감정의 물꼬를 터서 다른 감정으로 흘러가게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슬픔 뒤에 기쁨이 이어질 수도 있고, 분노 뒤에 기쁨이 이어질 수도 있다. 제때에 부정적인 감정을 배출하고 나면 그 대신 긍정적인 감정이 자리 잡을 수 있다.
죄책감은 ‘주부로 남을 것인가’, ‘다시 일을 할 것인가?’의 양자택일이 있기 전부터 존재한 것 같다. 죄책감에서 책임감으로 옮겨간다는 것은 슈퍼맘에 대한 환상을 버리는 동시에 현실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감정에 귀 기울이며 그것을 인정하고 표현한다는 뜻이다.
일 때문이 아니라 엄마가 행복하지 않기 때문에 아이는 불행하다
부정해도 대물림되는 엄마 노릇: 우리가 인터뷰한 사람 중 아니는 지독한 인습주의자인 부모님 때문에 매우 보수적인 환경에서 자랐다. 아니는 커가면서 자신이 얼마나 외롭고 부모님께 이해받지 못하며 애정 결핍에 시달렸는지, 또 부모님과 신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나쁜 아이로 느껴졌는지를 기억하고 있다. 자신에게 강요된 완벽한 수준까지 이르지 못한 행동에 대해 그녀는 늘 죄책감을 느꼈다. 어린 시절 내내 그녀는 이렇게 되뇌었다. “나는 나중에 절대 부모님처럼 살지 않을 거야! 내가 원하는 건 뭐든지 할 거라고! 아이를 낳으면, 절대 엄마, 아빠처럼 키우지 않을 거야! 아이들이 원하는 대로 하도록 둘 거라고.”
엄마가 되었을 때, 아니는 아이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희생이든 기꺼이 치를 준비가 완벽히 되어 있다고 여겼다. 아이가 실망하거나 분노를 느낄만한 일은 모두 막아주려고 애썼다. 제때에 젖을 먹이고 조금이라도 울면 안아주고, 아이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내려고 항상 대기하는 보초처럼 아이를 길렀다. 하지만 이러한 지나친 관심은 아니에게 너무 많은 걱정을 안겨주어 아이와의 관계에 오히려 긴장감을 만들어냈다. 아이에게 유연하게 대처하는 ‘너그럽고 좋은 엄마’가 되려고 결심했던 것은 아니지만, 이런 긴장 상태는 엄마로서의 역할을 더 힘들게 만들었다. 긴장감은 아기에게도 영향을 미쳐서 아기는 젖을 잘 먹지 못하거나 밤낮의 수면 리듬이 바뀌는 등의 반응을 보였다.
아니는 자신이 좋은 엄마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고 엄마 역할을 이상적으로 해내지 못한 자신에게 크게 실망하는 동시에 고통을 느꼈다. 사실 아이는 엄마와 함께 있으면서 편안한 분위기와 즐거움을 누리고 싶어 했지만, 이를 깨닫지 못한 아니는 엄마의 교육 방식에 대한 반작용으로 자신이 세워둔 ‘부모의 의무’라는 틀에 갇히고 말았다. 틀에 갇힌 교육 방식은 아이와 함께 느끼는 대로 행동할 자유를 앗아가고, 자연스러움과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게 만들었다.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겨야 하는 날이 되었다. 엄마가 아닌 여성으로서의 삶을 인식하게 되면서 엄마라는 핑계로 자아실현을 게을리하지 않겠노라는 결심으로 복직을 하는 날이었다. 이는 아니와 같은 세대의 여성들이 쉽게 하는 생각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녀는 엄마로서, 직장인으로서 모두 성공했다는 인정을 받고 싶었다. 하지만 엄마로서 느끼는 불안은 어린 딸에게도 그대로 전해져 아이 역시 불안해했다. 아이를 보호하려고 할수록 걱정은 늘어만 갔고, 시간이 지나면서 신경은 점점 더 곤두섰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아이 역시 자연히 신경질적으로 변했고 불안을 느꼈으며 증상이 겉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우유를 잘 먹지 않거나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는 일이 잦아지면서 아니는 아이를 다른 사람에게 맡겨야 한다는 사실이 더욱 불안하기만 했다. 이렇게까지 하면서 자신이 일해야 할 이유가 있는지 괴로워했다. 내심 직장인과 엄마로서의 역할을 모두 잘 해낸다는 것이 무리이며 아이를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것도 끔찍한 일이라고 느꼈다. 이성적으로 이해한 일이라도 현실이 되려면 자신에 대한 깊은 통찰과 한 세대 이상의 긴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
엄마의 현명함이야말로 딸에게 값진 유산: 이상적 역할 모델이라는 형태로 세대를 거쳐 이어지는 문화의 역할을 살펴봄으로써 오늘날 젊은 부모가 느끼는 불안과 모순을 부분적으로나마 알 수 있었다. 아무리 심리학이 발달한다고 해도, 아이가 보고 배울 모델로서 부모의 역할은 그대로일 것이다. 실제로 아이들의 정서적 발달은 자신을 길러주는 양육자들과 어떠한 관계를 형성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따라서 우리의 자아를 형성하는 데 영향을 미쳤던 부분을 잘 이해할수록, 자녀를 키우며 만나는 모순된 상황을 잘 해결할 수 있다. 또 자신을 잘 이해하는 일이야말로 아이들의 요구에 귀를 기울이는 ‘적당히 좋은’ 엄마가 되는 확실한 방법이다.
행복한 딸이 좋은 엄마가 된다
어른이 되고 부모가 되면서 좋든 싫든 자신의 유년기와 청소년기에 겪는 일들의 영향을 받는다. 누구나 유년기에는 이해할 수 없는 순간도 많았고 갈등도 많았으며 말로 잘 표현하지 못했고, 하지 말라는 금지도 많았으므로 저마다 상처를 받았다. 아무리 아이를 사랑하고 ‘학식’을 갖춘 부모라 하더라도, 아이를 유년의 상처로부터 완전히 보호해줄 수는 없다. 물론 자신의 상처 가운데는 부모에게 그 책임이 있는 일도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생각에서 벗어나야만 부모에 대한 건강하지 못한 의존성에서 벗어날 수 있다.
유년 시절에 겪은 아픔을 극복하지 못한 여성은 누구에게든 그 보상을 요구하려는 무의식이 있는데, 이것이 자기 아이들과의 관계로 옮겨갈 위험이 크다. 예를 들어 어떤 여성이 유년 시절 엄마가 자신을 위해 이런저런 일을 해주지 않은 것에 원망을 품고 있다고 해보자. 이 여성은 이후 자기 아이에게 그 모든 것을 해주려고 들겠지만 그 노력은 실패할 확률이 높다. 이 같은 행동이 겉으로는 아이를 위하는 일 같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과거에 대한 보상으로, 자신을 위한 행동일 개연성이 크기 때문이다.
이처럼 부모와 반대로 행동하는 것은 결국 똑같이 행동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단순히 유년 시절 자신이 부모에게서 받고 싶었던 것을 아이에게 투사하여 행동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이의 실제적인 필요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는 교육 방법인 셈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이러한 문제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 그 당시 느꼈던 고통스러운 감정을 다시 느끼더라도 자신이 유년 시절에 느낀 분노와 고통을 다시 살펴보자.- 나에게 부모를 향한 분노가 있음을 인정하자(이러한 감정을 털어 놓지 않고 속으로 조용히 원망만 하거나 마음의 거리를 두는 것보다는 낫다).- 나를 화나게 하고 나에게 상처 주었던 일에 대해 부모님에게 이야기하자.
이러한 행동은 아마도 부모가 거부 반응을 보이거나 특히 연세가 지긋한 부모의 경우 괜스레 마음을 아프게 할까 봐 그동안 하지 못했던 일일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솔직한 마음을 부모에게서 이해받고 대화로 문제를 풀어나가려면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변함없는 애정을 담아서 무례하게 굴지 않고도 얼마든지 해낼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