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산 안창호
이광수 지음 | 세시
도산 안창호
이광수 지음
세시 / 2013년 5월 / 304쪽 / 12,000원
제1부 투쟁, 생애
소년시대 - 쾌재정(快哉亭)의 웅변
선생의 이름은 창호, 호는 도산, 1878년 무인년 11월 12일에 대동강 하류에 있는 도롱섬 한 농가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 고향에 있는 사숙에서 공부했는데, 그 천성의 영민함이 이미 드러나서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청일전쟁이 일어난 갑오년은 도산이 17세 되던 해였다. 그는 평양에서 일본군과 청군이 접전하는 모습을 보고, 어찌하여 일본과 청국이 우리 국토 내에 군대를 끌고 들어와서 전쟁을 하게 되었나 생각하였다. 그의 소년시대의 동지요, 수년 연상인 필대은과 이 문제를 토의하느라고 야심토록 담론하였다. 그래서 도산은 한 가지 결론을 얻었다. “타국이 마음대로 우리 강토에 들어와서 설치는 것은 우리나라에 힘이 없는 까닭이다.”
그즈음 미국에 오랫동안 망명하였던 서재필이 미국 시민 자격으로 조선 정부의 고문이 되어서 한성에 돌아왔다. 그는 나라의 독립과 부강이 국민의 각성과 단결에 있음을 역설하여 이상재, 이승만 등 동지를 규합하여 독립협회를 조직하고 《독립신문》을 발간하였다. 그 뒤 독립협회는 세를 확대하여 만민공동회가 되었다. 이때에 안창호는 필대은 등과 함께 평양에서 궐기하여 쾌재정에 만민공동회 발기회를 열었다. 그 자리에서 감사 조민희를 앞에 놓고 수백 명 집회 중에 일대 연설을 하여 조민희로 하여금 감탄을 금하지 못하게 하고, 안창호의 명성이 관서 일대에 진동케 되었다.
도산은 힘이 독립의 기초요, 생명인 것을 통감하였는데, 그럼 힘이란 무엇이냐? 국민이 도덕 있는 국민이 되고 지식 있는 국민이 되고 단합하는 국민이 되어서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남에게 멸시를 안 받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한 국민이 되는 길은 무엇이냐? 국민 중에 덕 있고 지(智) 있고 애국심 있는 개인이 많이 생기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길은 무엇이냐? 우선 나 자신이 그러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공부하자. 도산은 이렇게 결심하였다. 이런 사고 방법은 도산이 평생 동안 쓴 방법이었다. 도산은 22세 때에 부인과 함께 인천서 미국선을 편승하고 미주로 향했다.
미주 유학시대 - 교포의 조직과 훈련
도산이 미국에 온 목적은 학업에 있었으나 당시 미국에 이민 온 한국 동포들의 현상은 도저히 그로 하여금 학업에 전념할 틈을 주지 않았다. 샌프란시스코에 상륙한 지 얼마 안 된 어떤 날 도산은 길가에서 한인 두 사람이 상투를 마주 잡고 싸우는 광경을 미국인들이 재미있게 보고 있는 것을 보았다. 도산은 그들의 싸움을 말리고 싸우는 연고를 물었다. 그들은 인삼 행상을 하는 이들이었는데, 싸움의 이유는 협정한 판매 지역을 범하였다는 것이었다. 도산은 이것이 인연이 되어서 샌프란시스코에 재류하는 동포를 두루 찾아 그 생활 상태를 조사하였다. 그래서 “당당한 독립 국민의 자격이 없다. 이들이 이러하기 때문에 미국인들이 우리 민족 보기를 미개인이라 하고 독립 국민의 자격이 없다고 보는 것이다.” 하고 결론을 내렸다.
도산은 여러 날 고민한 끝에 공부한다는 목적을 버리고 우선 미주 재류 동포가 문명한 국민다운 생활을 하도록, 그리하여서 보기에 한국인은 문명한 민족, 넉넉히 독립국가를 경영할 만한 소질도 실력도 있는 국민이라고 볼 수 있는 정도까지 끌어올리도록 노력하리라고 결심하였다. 도산은 이 뜻을 동지로 동행한 이강, 김성무, 정재관 등에게 통하였다. 그들도 동감이라 하며 우리 4인은 이 목적을 달하기까지는 이 사업을 중지하지 말자고 약속하고, 또 도산의 생활비는 다른 3인이 벌어 댈 테니 도산은 동포 지도에 전력하라고 격려하였다. 도산은 더욱 감격하여서 그날부터 일을 시작하였으니, 이것이야말로 그가 몸을 바쳐서 민족 운동을 한 첫날이었다.
그는 그날부터 호별 방문을 시작하여 그들의 생활 상태를 시찰하였다. 첫째로 그의 눈에 띈 것은 동포들이 거주하는 거처가 불결한 것이었다. 둘째로 눈에 띄는 것은, 문 앞이 더러울뿐더러 오는 손님을 기쁘게 하는 화초가 없는 것이요, 셋째로는 실내가 불결하고 정돈되지 아니하며 미화되지 않은 것이었다. 그리고 여러 집을 찾아다닌 결과 발견된 것은, 집에서 불쾌한 냄새가 나는 것이었다. 이에 도산은 몸소 한 집 한 집 청소 운동을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동포들이 도산의 하는 일을 의심도 하고 거절도 하였으나 차차 신임하여서 도산을 환영하였다.
이것은 몇 달이 지나지 않아서 동포의 생활을 일변케 하였다. 그것은 다만 거처의 외양만 일변한 것이 아니요, 그 정신생활에까지 변화를 일으켰다. 동포의 신뢰를 얻게 되매 도산이 처음으로 동포 간에 제의한 것은, 인삼 행상의 구역을 공평하게 정하되 1개월씩 서로 구역을 교환하는 것과, 인삼의 가격을 협정하여서 서로 경쟁하여 값을 떨어뜨리게 하는 폐단이 없게 하는 것이었다. 도산은 이 모양으로 점차 동포에게 협동과 준법의 훈련을 하여서, 될 수 있으면 인삼 행상들을 단합시키고 계를 만들어 매입과 매출을 하나의 큰 조직에서 관리함으로써 신용과 이익의 안전을 보장하려 하였다.
둘째로는 노동력의 공급에 관한 것이니, 한인의 노동력을 통합ㆍ공급하는 기관을 만들어서 거기서 미국인의 노동력 주문을 받고 한인의 노동력을 공급함으로써, 노동자들의 최저 임금을 보장하고 또 실직이 없게 하자는 것이었다. 여기서도 도산은 그의 평생의 사업 원리를 적용하였으니, 그것은 점진적으로 민중의 자각을 기다려서 하는 것, 민중 자신 중에서 지도자를 발견하여 그로 하여금 민심을 결합케 하고, 결코 도산 자신이 지도자의 자리에 서지 아니하는 것이었다. 공립협회를 세우고 《공립신문》을 발간하고, 다시 확대하여 미주국민회가 되고, 《신한민보》라는 신문이 될 때에도 도산은 늘 배후에 있었다. 그가 국민회장이 된 일이 있으나 그것은 훨씬 후의 일이었다.
도산이 북미주 동포를 조직하여 놓았을 때에 러일전쟁이 끝나고 조국의 운명이 그 당시 우리 신문지상에 예투(상례가 된 버릇)로 쓰는 문자로, ‘누란급업(累卵及業, 계란을 포개 놓은 듯 몹시 위태로움)’이었다. 이에 도산은 북미 동포의 재촉으로 일본을 경유하여 고국에 돌아왔으니, 이른바 을사 신조약이 이미 한국의 자주 독립권의 일부를 박탈하여 일본의 한국 병탄이 오늘인가 내일인가 할 때였다.
신민회시대 - 한말 풍운과 민족 운동
도산은 귀국 후 미국서부터 품고 온 것을 실행하기로 결의하고, 신민회와 청년학우회의 조직에 착수했다. 그가 동지를 구하는 데는 두 가지 조건이 있었다. 하나는 믿을 만한 사람이요, 또 하나는 각 도에서 골고루 인물을 구하는 것이니, 이것은 지방색이란 것을 예방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리하여 구한 동지가 이동녕, 이회영, 전덕기, 이동휘, 최광욱, 이승훈, 안태국, 김동원, 이덕환, 김구, 이갑, 유동열, 유동주, 양기탁 등이었다. 이러한 동지를 기초로 신민회를 조직하니 그 목적은 국민에게 민족의식과 독립사상을 고취할 것, 동지를 발견하고 단합하여 국민운동의 역량을 축적할 것, 교육 기관을 각지에 설치하여 청소년의 교육을 진흥할 것, 각종 상공업 기관을 만들어 단체의 재정과 국민의 부력을 증진할 것 등이었다. 신민회는 비밀 결사로서 각 도에 한 사람씩 책임자가 있고, 그 밑에는 군 책임자가 있어서 종으로 연락하고, 횡으로는 서로 동지가 누구인지를 잘 모르게 되어 있었다. 신민회 그 자체는 비밀 결사였으나 사업은 공개하였다. 그 사업으로 가장 드러난 것은 평양 대성학교, 평양 마산동 자기 회사, 평양ㆍ경성ㆍ대구의 태극서관과 여관 등이었다. 도산은 평양 대성학교의 무명한 직원으로서 교장을 대리하는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도산이 무엇에나 자신이 표면에 나서지 않는 사업 방침에서 나온 것이어서, 실제로는 도산이 대성학교의 교주요, 교장이었다.
도산이 대성학교에 전심력을 경주한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의 인격의 감화력이 어떻게 위대한가는 잠시라도 대성학교의 생도였던 사람은 평소에 도산을 앙모하게 된 것과, 어떤 사람이든지 대성학교의 교원으로 들어오면 수주일 내에 도산화한 사실로 보아 추측할 수 있다. 남강 이승훈이 오산학교를 세운 것도, 함북에 경성중학이 선 것도, 그 밖에 크고 작은 무수한 사립학교들이 서북 지방에 울흥(蔚興, 성하게 일어남)한 데는 도산과 대성학교의 공이 대단히 컸다.
한편 민족문화 향상, 민력 발휘의 근원으로 중요시하는 도산은 자연히 문사(文士)라는 것을 대단히 존중하였다. 그는 좋은 문사가 민족 힘의 중요한 구실을 한다고 믿었다. 그가 후에 조직한 수양 단체를 흥사단(興士團)이라고 이름 지은 것은 유길준의 흥사단을 전습하는 동시에 ‘사(士)’를 양성하는 단체라는 뜻이었다. ‘사’라는 것은 천하 국가를 위하여 살고, 일신의 이해 고락, 생사 영욕을 초월한 사람을 일컬음이니 ‘사’에는 두 가지 부류가 있어 하나는 문사요, 하나는 무사라, 국가는 이 양사에 의하여 수호되고 발전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도산이 생각하는 ‘사’는 우리가 종래에 생각하던 사류(士類)와는 달랐다. 종래의 사류라는 것은 학문과 문무로만 업을 삼는 일종의 계급적 존재지만, 도산에 의하면, 농(農)이나 공(工)이나 상(商)이나 선공후사(先公後私)하여 나라의 이익과 백성의 복을 염두에 두는 자면 다 사류였다. 그가 신민회원으로 모으고자 하는 것이 이러한 사류였다.
망명 - 실국(失國) 전후의 극적 사안
일본의 한국에 대한 병탄의 의도는 기를 따라 명백하여지고 그 압력은 날로 심하여졌다. 이토 히로부미가 한인의 손에 죽었다는 것을 이용하여, 또 군벌에게는 적이던 이토 히로부미가 없음을 좋게 여겨, 군벌 거두 가쓰라 다로 일본 수상은 육군 대신이요, 역시 군벌 거두인 데라우치 마사타케를 한국 통감으로, 야마카다 이자부로를 부통감으로, 육군 소장 아키라이시 모토지로는 경무총감으로 하여 한국에 파견하니 이것이 바로 경술년 7월이었다.
아키라이시 모토지로는 서울에 부임하여 도착하는 즉시로 한국의 명사를 초연하여 그 의향을 타진하고, 다수의 밀정을 놓아서 민간 유지들의 행동을 염탐하였다. 그리하여 친일파, 배일파의 명부를 작성하여 7월 하순경에 벌써 민간 유지의 헌병대 검속이 시작되었으니, 안창호는 개성 헌병대에, 이갑, 이동휘, 이동열 등은 용한 헌병대에 유치되었다. 이때에 밖에서 운동한 것이 최석하였다.
최석하는 도쿄 메이지 대학 법과 출신으로 일본말에 능하고, 또 러일전쟁에는 학생으로서 통역으로 종군한 일이 있으며, 외교적 재능이 있어서 이토 통감 시대 이래로 일본 측과 교섭하여 온 경력이 있었다. 데라우치는 최석하에게 일본의 본의는 한국의 독립을 존중하여 사이좋은 이웃을 만드는 데 있지만, 한국 황제와 정부가 매양 일본과의 언약을 저버리고 제3국에 대하여 음모를 일삼으며, 또 한국의 내정도 예정대로 개선이 아니 되니, 이대로 가면 필시 제3국의 간섭을 끌어들여 화가 일본과 동양에 미칠 것을 염려하므로, 일본으로서는 중대한 결의를 아니할 수 없거니와, 만일 한인이 자진하여 일본에 대한 모든 조약의 신의를 이행한다면, 그런 다행이 없으니 안창호 내각을 조직하여 일본과 협력케 함이 어떠하냐 하였다. 이에 최석하는 자기가 그대로 힘쓸 터이니 각 헌병대에 구금된 안창호 등을 즉시 석방하기를 청했다. 데라우치는 곧 아키라이시 모토지로에게 안창호 등의 석방을 명하였다.
그 후 최석하는 이갑의 집에 도산 등 주요 인물을 모으고 데라우치의 의향을 얘기하였다. 그리고 밤이 깊도록 이 문제를 토의하였다. 이 좋은 기회를 놓치지 말자는 의론이 많았다. 이러한 논의에 대하여 도산은 시종 침묵을 지키고 다만 경청하고 숙려하는 양을 보였다. 마침내 최후에 도산은 입을 열어서 일본의 제안에 응하는 것이 불가하다고 단정적으로 반대하고 서서히 그 이유를 말하였다. 데라우치가 통감이 되어서 온 것은 일본으로서는 한국에 대하여 이미 최후의 결심을 하고, 가장 세계에 비난을 적게 받고 한국 병탄의 목적을 달하자는 의도라는 것이었다.
도산의 이론에 수긍은 하면서도 최후 일전의 호기를 놓치는 듯한 생각이 누구에게나 있는 동시에 기울어지는 나라를 버틸 길이 없는 안타까움이 북받쳐 올랐다. 도산은 최후의 단안을 내렸다. 우리 애국자에게 남은 길이 오직 하나가 있다. 그것은 눈물을 머금고 힘을 길러 장래를 준비하는 것이다. 국내에 있을 수 있는 자는 국내에서, 국내에 있을 수 없는 자는 해외에서 수양ㆍ단결ㆍ교육ㆍ산업으로 민력을 배양하는 것이 조국을 회복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하며 도산은 눈물을 흘렸다. 만좌가 느껴 울었다. 이리하여 망명이 결정되었다. 우선 데라우치에게 며칠 동안 고려할 여유를 청한 뒤에 안창호, 이갑, 이동녕, 이시영, 유동열, 이동휘, 이종호, 신채호, 조성환 등이 망명할 준비를 하였다.
미주활동시대 - 살아 있는 태극기와 애국가
도산은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집에 5년 만에 돌아왔다. 거기에는 부인과 2남 1녀가 있었고, 여러 친우와 동지가 있어서 반갑게 맞았다. 그러나 나라를 붙들러 갔다가 잃고 돌아온 도산에겐 기쁨이 없었다. 도산은 곧 토목공사의 인부가 되었다. 그러나 그의 체력으로는 이러한 근육노동을 오래 계속할 수가 없어서 서양인 주택의 소제(청소) 인부가 되었다. 그러나 미국 재류 동포들은 도산을 가만둘 수 없었다. 도산은 국민회 총회장으로 선출되었다. 도산의 목표는 회원의 품격을 높여 교거(僑居)하는 나라 백성들에게 존경을 받고 근검 저축을 장려하여 회원 각원이 독립하고 풍족한 생계를 가지게 하며, 단체적으로 거류국 관민의 신뢰를 얻어 동표의 권익을 보호할뿐더러, 그리함으로 일본으로 하여금 한국인을 간섭하는 구실을 가지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상해시대 - 임시정부에서 대독립당까지
1919년 제1차 세계대전이 휴전에 이르렀다.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국민회 중앙총회는 이승만에게 파리평화회의에 참석할 것을 청하여 대한인군민회 중앙총회장의 신임장을 가지고 우선 워싱턴으로 갔다. 이승만은 워싱턴에 갔으나 유럽에 가는 여행권을 얻지 못하였다. 마침 상해에 있는 신한청년단에서 김규식을 파리에 파견하였기 때문에, 그가 우리 민족 대표로 활약하였고, 이승만은 구미 위원부장으로 워싱턴에서 외교와 선전의 일을 하기로 되었다. 그리고 안창호는 국민회의 특파로 원동을 향하여서 미국을 떠났다. 도산은 선중에서 3월 1일 국내의 독립선언 보도를 접하였다. 그리고 홍콩을 거쳐서 상해로 왔다.
도산이 상해에 도착한 것이 4월 상순, 즉 4월 10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조직 발표된 직후였다. 그 정부는 이승만을 국무총리로 삼고, 안창호, 이동휘, 이동녕, 이시영, 김규식, 신규식 등을 각 부총장으로 하였고, 여운형, 신익회, 윤현진, 이춘숙 등 소장파를 차장으로 한 것이다. 도산은 상해에 오는 길로 신병으로 하여 홍십자 병원에 입원하였다. 윤현진, 신익회 등 차장 측들은 연일 도산을 방문하여서 내무총장으로 취임하여 국무총리를 대리할 것을 간청하였으나 도산은 처음에 듣지 아니하였다. 하지만 계속 그의 출마를 간청하는 소장 동지들에 대하여 두 가지 조건을 제출하였다. 하나는 각지에 있는 거두들을 상해로 모으는 일이요, 둘은 그들의 모임을 기다려 임시정부의 국무총리 대리를 도산이 사면하고 다른 이에게 원하자는 것이었다. 독립운동이 이처럼 벌어져도 모이지 않은 거두들에게 대하여 굳세게 불만을 가졌던 소장파들은 도산이 제안한 제1조건에 반대하였다. 아직도 임시정부가 있는 상해로 모이지 아니하는 것은 그 거두들에게 성의가 없거나 딴 뜻이 있거나 한 것이다. 그들을 억지로 모아놓는다고 하여도 결국 의견의 불일치와 파쟁이 있을 뿐이니, 도산이 중심이 되어서 소장파 내각으로 일을 진행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도산은 의리에 있어서 평생을 애국지사로 바친 선배를 무시하는 것이 불가하고, 도리와 체면에 있어서 이 모든 지도자들이 임시정부에 협력함이 아니면, 민족의 총의를 망라하였다는 사실도 명분이 서지 아니하므로, 각지에 산재한 거두들을 모이게 하는 것은 독립운동의 절대 조건인 동시에 도산 취임의 절대 조건인 것을 역설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