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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소드 한국사: 조선편

표학렬 지음 | 앨피
에피소드 한국사: 조선편

표학렬 지음

앨피 / 2013년 4월 / 332쪽 / 14,800원





고려를 무너뜨린 스캔들_ 공민왕?우왕



고려 말 마지막 개혁 군주 공민왕에게는 ‘반야’라는 후궁이 있었다. 그녀가 낳은 아들이 훗날 공민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우왕이다. 그런데 우왕의 아버지가 공민왕이 아니라 요승 신돈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과연 우왕은 신돈의 아들 ‘신우’인가, 아니면 공민왕의 아들 ‘왕우’인가?

온건파 vs 혁명파

1388년 여름, 요동 정벌에 나섰던 이성계의 군대가 퍼붓는 장맛비를 뚫고 고려의 수도 개경으로 밀어닥쳤다. 고려의 전 군대가 요동 정벌에 나섰으므로 이성계를 막을 고려군은 어디에도 없었다. 무기력한 고려 정부는 이성계에게 항복했고, 권력은 이성계의 수중에 떨어졌다. 이성계는 우왕을 폐위하고 권문세족의 우두머리인 최영 장군을 처형했으며, 새로 창왕을 즉위시키고 자신은 최고 관직인 시중에 올라 정치를 좌지우지했다.

이렇게 권력의 핵심에 다가가기까지 이성계에게 힘을 실어 준 두 명의 핵심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정도전과 정몽주가 그들이다. 그런데 두 사람은 이성계가 권력을 잡은 뒤 의견을 달리했다. 정몽주는 5백 년의 역사를 이어 온 고려왕조를 개혁하여 새로운 전성기를 이룩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정도전은 5백 살이나 먹은 늙은 고려왕조에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며 고려를 멸망시키고 새로운 왕조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몽주를 지지하는 온건파와 정도전을 지지하는 혁명파의 갈등이 점차 고조되었다. 혁명파에게 필요한 건 명분이었다. 5백 년은 엄청나게 긴 시간이다. 대한민국의 역사가 채 70년도 안 되었음을 생각해 본다면, 5백 년간 존속해 온 고려의 백성들이 나라를 버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을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고려왕조를 무너뜨리려면 그럴 만한 명분이 필요했다.

‘신우’냐 ‘왕우’냐

이때 혁명파가 주목한 것이 우왕의 출생에 얽힌 소문이었다. 당시 고려의 귀족들 사이에서는 우왕이 공민왕이 아니라 신돈의 아들이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우왕의 어머니 반야가 신돈을 통해 공민왕과 만났기 때문이다. 공민왕을 도와 토지제도와 노비제도를 혁신하는 등 강력한 개혁 정치를 펼쳤던 신돈을 눈엣가시로 여기고 있던 귀족들은, 반야가 신돈의 첩이었으며 신돈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에서 공민왕의 후궁이 되었다고 떠들었다. 이 소문은 공민왕의 귀에도 들어갔고, 이 때문에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말들이 많았다. 만약 공민왕이 갑자기 살해당하지 않았다면 우왕의 즉위를 장담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왕조 국가에서 왕과 다른 성을 가진 사람이 왕위에 올랐다면 이미 나라는 망한 것이나 다름없다. 신돈의 아들이 왕이 되었다면 고려는 이미 망한 것이다. 혁명파에게 이보다 더 좋은 명분은 없었다. 혁명파는 몇 가지 단서들, 즉 반야가 공민왕을 만나자마자 임신해서 열 달 만에 출산했다는 것(공민왕은 불임 의심을 받고 있었음), 반야가 출산 직후 죽었다는 것, 공민왕이 죽기 직전 우왕의 출생 배경을 의심했다는 것을 들어 우왕이 신돈의 아들이라는 ‘신우설’을 공식적으로 제기했다. ‘신우설’에 따르면, 신돈은 반야를 임신시켜서 공민왕의 후궁으로 들여 아들을 낳게 한 뒤, 훗날 자기 아들이 왕위에 오르면 신씨의 핏줄임을 밝히고 새로운 ‘신씨의 나라’를 건설하려 했는데, 반야가 비밀을 공민왕에게 누설하자 그녀를 살해했다. 이로써 진실은 은폐되고 신돈의 아들이 왕위에 올랐다는 것이다.

그러나 온건파는 ‘신우설’을 억측일 뿐이라고 일축했다. 반야는 귀족의 딸로서 공민왕의 후궁이 되어 그의 아들을 낳았고 출산 직후 사망했을 뿐이다. 당시 출산 직후 산모가 사망하는 것은 오늘날 교통사고만큼이나 흔한 일이었다. 흔하디흔한 일로 왕의 출생을 의심하는 것은 정치적 음모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혁명파가 퍼뜨린 ‘신우설’은 온건파로서는 돌이킬 수 없는 스캔들이었다. 권력의 정점에 있는 이성계가 ‘신우설’에 힘을 싣는다면 새로 즉위한 창왕과 온건파 유신들은 파리 목숨이나 다름없었다. 결국 우왕의 아들 창왕은 폐위되고 공민왕의 먼 친척인 공양왕이 즉위했다.

5백 년 왕조의 몰락

우왕과 창왕은 폐위되는 데 그치지 않고 고려왕조를 찬탈하려 한 반역자로 지목당해 처형되었으며, 그들을 따르던 신하들도 몰살당했다. 이렇게 해서 고려왕조를 지키려 했던 수많은 고려의 유신들이 합법적으로 처단되었다. 공양왕은 아무런 권력 기반도 없는 허수아비 왕일 뿐이었다. 고려를 지킬 사람은 거의 남지 않았다. 한때 이성계의 오른팔이었던 정몽주가 외로이 고려를 지키려고 노력했지만 대세는 이미 기울었다. 그마저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이 보낸 자객의 손에 선죽교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짐으로써, 고려왕조는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신우설’, 그것은 역사에 숱하게 등장하는 단순한 스캔들이 아니었다.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5백 년을 이어 온 고려왕조를 무너뜨리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엄청난 사건이었고, 그렇기에 6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일 게다.



민심이 곧 하늘이다_ 언론 정치



조선의 9대 왕 성종은 첫 아내를 잃고, 1474년(성종 5년) 18세의 나이에 총애하던 후궁 윤씨를 두 번째 아내로 맞이했다. 이 여인이 바로 유명한 ‘폭군’ 연산군의 어머니다. 성종은 총 열한 명의 후궁을 두었으니 조선의 왕치고는 꽤 많은 후궁을 둔 편이었다. 성종은 그중 윤씨를 왕비로 맞이한 뒤, 또 다른 후궁 윤씨와도 가깝게 지냈다. 왕비 윤씨는 후궁 윤씨와 성종 사이를 질투했다. 두 사람의 갈등이 점점 고조되던 1479년(성종 10년) 어느 날, 왕비 윤씨가 성종과 실랑이를 하다가 그만 남편 성종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내고 말았다. 다음 날 아침, 성종이 경연에 나가 강론 내용을 묻자 신하들은 이렇게 아뢰었다. “전하, 수신(修身) 제가(齊家) 후에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이옵니다.” 경연은 왕의 학교로서 왕이 신하들과 함께 학문을 연마하고 국정을 협의하는 자리다. 그 자리에서 성종은 가정을 잘 다스리지 못한다고 신하들에게 정면으로 비판을 받은 것이다.

견제와 비판의 정치

태종 대부터 성종 대에 이르기까지 조선은 ‘민심은 천심’이라는 기치 아래, 여론을 수렴할 수 있는 제도와 기구를 정비하는 데 많은 노력을 쏟았다. 이를 토대로 조선의 언론 정치가 이루어졌으며, 언론의 비판과 견제가 있었기에 조선이 5백여 년이나 유지될 수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언론 기구는 양사(兩司), 즉 사헌부와 사간원이다. 양사는 고려시대 언론 기구를 계승, 발전시킨 것으로 서경권과 간쟁권 등을 행사했다. 서경권은 왕이 관리를 임면할 때 의견을 제시하고 비판할 권리고, 간쟁권은 왕의 정책을 비판할 권리다. 특히 서경은 오늘날 인사청문회에 비할 정도로 엄격하게 이루어져 왕의 측근 세력이 발탁되는 것을 철저하게 견제했다. 그 외에도 집현전을 발전시킨 홍문관, 왕의 학교인 경연 등도 간접적으로 언론 노릇을 했다. 특히 학문 연구 기관인 홍문관은 유교 교리나 선왕의 정책에 빗대어 왕의 잘못을 비판하곤 했다. 그래서 연산군은 ‘양사도 아니면서 왜 왕의 정책에 간섭하느냐’며 홍문관을 비판하고, 경연에는 아예 나가지도 않았다.

왕이 직접 백성의 여론을 청취하기도 했다. 세종은 세금 제도를 정비하기 위해 수십만 명의 백성들을 대상으로 일종의 여론조사를 실시했는데, 그 규모와 내용을 처리하는 과정이 오늘날 민주정치에서의 여론 수렴 절차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세종 외에도 여러 왕들이 왕궁 밖으로 행차할 때 시골 백성들을 직접 만나 고충을 묻곤 했다. 세조는 온양온천에 갈 때, 영조는 종종 종로에 시찰을 나가 백성들의 이야기를 듣고 정책에 반영했다. 임진왜란 때 민심을 수습하려고 선조와 광해군이 가장 열심히 했던 것도 바로 여론 청취였다.

언론의 두 얼굴

조선이라는 나라는 봉건적인 양반의 나라요 후진적인 농업 국가였다. 하지만 5백 년 동안 두 번밖에 전쟁을 치르지 않았고, 오랜 평화 기간 동안 적극적으로 백성들의 말에 귀 기울이며 그들의 생활을 돌보려고 노력했다.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분명 이전 시대보다 선진적인 나라였다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덧붙인다면, 언론이 언제나 좋은 역할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조선 후기 당파 싸움이 극에 달했을 때 양사를 비롯한 언론 기구가 여론을 선동하고 왜곡하여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키기도 했다. 뭐든지 잘 활용할 때 의미가 있는 것이지, 그 자체가 ‘선’이고 ‘악’인 것은 없다.



바야흐로 열린 사림의 시대_ 붕당정치



16세기 후반 선조 때 사림(士林; 주로 조선 중기에 사회와 정치를 주도한 세력을 가리킴)은 중앙 정계의 중심 세력이 되었다. 그러나 훈구파(勳舊派; 조선 초기 세조 때 이후 공신세력을 중심으로 형성된 관료집단을 이름) 척신 정치의 잔재 청산을 둘러싸고 믿을 만한 훈구와는 협력해야 한다는 기성 사림과, 모두 배척하자는 신진 사림으로 분열되었다. 마침내 이조정랑 임명 문제를 둘러싸고 갈등이 깊어져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었다. 어제의 진보는 오늘의 보수가 되고, 오늘의 진보는 내일의 보수가 된다. 그렇게 오늘 새로운 진보가 나타나고, 내일 또 새로운 진보가 나타난다. 그게 역사다.

노장파와 소장파

윤원형과 훈구 대신의 횡포가 나라를 흔들고 왕권을 위협할 정도로 커진 가운데, 훈구파의 절대적 후원자였던 문정왕후가 세상을 떴다. 명종은 자신을 짓누르던 어머니의 압력이 사라지자 개혁 세력, 즉 사림을 등용하여 즉각 훈구 대신들을 제거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훈구 대신들은 역사 속에서 사라지고, 바야흐로 사림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당시 사림을 이끈 사람은 퇴계 이황 선생이다. 이황은 성리학을 완성한 조선 유교의 교황 같은 존재로서, 개인적으로는 윤원형이 일으킨 사화 때 형을 잃은 원한을 갖고 있었다. 이황은 철저한 개혁을 지지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젊은 소장파 관료들은 훈구파를 대대적으로 숙청하고 이상적인 유교 사회를 만들고자 노력했다.

한편, 사림들 중에는 개혁의 속도를 조절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무리도 있었다. 상대적으로 노장파에 속하는 사림 관료들은 지나치게 과격하고 급진적인 개혁은 갈등을 증폭시키고 혼란을 일으켜 궁극적으로 개혁을 망칠 거라고 생각했다. 이들은 관용과 포용을 바탕으로 한 온건한 개혁을 주장했다. 노장파와 소장파가 합의점을 찾지 못하면서 개혁 세력은 내부 분열로 나아갔다. 노장파는 과격 급진 세력이라며 소장파를 위험시했고, 소장파는 권력에 안주하여 개혁을 망각한다며 노장파를 적대시했다.

이조정랑, 분열의 씨앗

두 세력의 대립이 폭발한 사건은 이조정랑 자리를 둘러싸고 일어난 김효원과 심의겸의 갈등이었다. 이조정랑은 인사행정을 담당하는 자리였다. 16세기 이후 조선에서는 과거 합격자 수가 대폭 늘어난 반면 관직 수는 제한되어 있어 과거에 합격하고도 관직을 얻지 못해 실업자 생활을 하는 이들이 꽤 있었다. 이들을 ‘백수’, ‘선달’이라 불렀다. 그러다 보니 인사행정을 담당하는 이조정랑이 상당히 중요한 직책이 되었다. 노장파와 소장파가 각기 자기 사람을 관직에 등용시켜 세력을 확장하고자 이조정랑 자리를 독점하려 하면서 갈등이 폭발한 것이다. 소장파가 지지하는 김효원과 노장파가 지지하는 심의겸이 이조정랑 직을 둘러싸고 대립하면서 사림은 둘로 분열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당시 김효원은 서울 동쪽, 심의겸은 서울 서쪽에 살아서 소장파는 동인, 노장파는 서인이라 부르게 되었다.

양당 체제의 확립

동서로 분열된 이후 개혁의 방향과 속도를 둘러싼 사림의 갈등은 점점 깊어졌다. 개혁 세력이 집권한 지 10년이 지나도록 분열의 문제가 해결되기는커녕 갈등의 골이 깊어졌으니 안타까운 일이었다. 이를 수습하기 위해 율곡 이이가 나섰다. 이이는 1570년(선조 3년) 이황이 죽은 뒤 실질적으로 사림을 이끌고 있었다. 이이는 주기론의 거두로 이황에 필적하는 성리학 이론가이면서 ‘십만양병설’로 대표되는 현실 정치인이었다. 그는 동인과 서인을 하나로 합치기 어렵다고 보고, 차라리 두 세력이 적절히 갈등하며 공존하는 것이 더 나을 거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열세인 서인에 가담함으로써 동서 균형을 맞추었다. 마침내 이황의 영남학파를 중심으로 한 동인과, 이이의 기호학파를 중심으로 한 서인의 양당 체제가 완성되었다.

동서분당이 정착된 뒤 약 10여 년간 조선은 평온했다. 개혁은 조선왕조 체제 내로 흡수되면서 그럭저럭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하지만 1589년(선조 22년) 동인 정여립이 일으킨 반란 사건(기축옥사己丑獄事)으로 동서 대립이 격화되면서 3년여의 혼란을 겪고, 그 여파로 임진왜란에서 참패하면서 조선은 암흑기에 빠져들고 만다. 그리고 17세기 들어 사림은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고자 사회 변화를 원치 않는 보수 세력이 된다.

역사를 책임진다는 것

임진왜란에서 나타난 무능력하고 혼란스러운 모습 때문에, 많은 이들이 동서분당을 무조건 비판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개혁 과정에서 온건파와 급진파의 대립은 늘 나타나는 현상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수습하고 역사적으로 책임지는 과정이다. 우리 근현대사에서도 1987년 민주화 운동 이후 민주개혁 세력이 중요한 정치 세력으로 부상했고, 그 과정에서 다양한 목소리가 나오면서 분화를 겪었다. 그렇게 25년의 시간이 흘렀다. 25년이면 16세기 사림이 권력을 잡고 정여립의 난이 일어날 때까지와 비슷한 시간이다. 과연 오늘날 한국의 개혁 세력은 어떻게 역사를 책임질 것인가. 추한 기억, 안타까운 역사로 남은 4백 년 전의 동서분당과 같은 역사가 반복되지 않기를 바란다.



“나는 게장을 먹지 않소이다”_ 영조



영조가 왕위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은 1728년(영조 4년), 반란 사건이 일어났다. 반란 주모자를 잡아 국문하는데 죄인 중 한 명이 큰 소리로 외쳤다. “나는 갑진년 이후 게장을 먹지 않고 있소이다.” 죄인이 말한 ‘갑진년’은 경종이 죽은 해를 말한다. 갑진년 그해, 경종의 병세가 악화되자 세제(왕위 계승권을 가진 동생) 연잉군이 직접 의원들을 지휘하여 병구완을 도왔다. 경종의 병세가 약간 차도를 보이자 연잉군이 경종의 식욕을 돋우려고 게장과 감을 올렸는데, 경종이 이를 먹은 뒤 심한 복통과 설사를 앓다 죽었다. 연잉군, 곧 훗날의 영조는 경종의 동생으로 숙종이 무수리 출신 나인 최씨와 동침하여 낳은 아들이다. 숙원에 봉해진 무수리 최씨는,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죽이려고 저주하였다고 고발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외로운 왕, 경종

노론은 남인을 제거하고 장희빈을 죽이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세자는 살아남았다. 노론으로서는 장희빈의 아들이 장차 왕위에 오르는 것을 그대로 두고 볼 수 없었다. 그들은 세자를 제거해야 한다고 숙종을 압박했고, 숙종도 세자가 장차 왕 노릇을 하기 어렵다고 보고 서인이 지지하는 연잉군으로 점차 마음이 기울었다. 세자가 폐위되는 건 시간문제로 보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숙종이 갑자기 죽고 말았다. 그리하여 세자가 왕위에 올랐으니, 그가 바로 경종이다. 이제 노론은 경종을 왕위에서 끌어내리려고 압박을 가했다. 막 왕위에 오른 젊은 왕에게 동생 연잉군을 후계자로 책봉하라고 강요하고, 청나라에는 경종이 자식을 생산할 수 없으며 오래 살지도 못할 거라고 전달했다.

심지어 즉위한 지 1년도 안 되었는데 연잉군에게 대리청정을 시키라고 요구했다. 대리청정이란 인사권을 제외한 모든 통치권을 후계자에게 넘기는 것을 말하니, 경종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선언과 다름없었다. 그들은 또한 공공연하게 왕을 모욕했다. 하마패를 보면 말에서 내려야 하건만, 노론 대신들은 경종과 관련된 하마패 앞에서는 내리지 않았다. 자기들은 경종에게 신하의 의리가 없다는 이유였다. 경종은 이러한 반역을 바보처럼 잠자코 받아들였다.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이 조성될 때를 기다린 것이다. 과연 소론 개혁파들이 들고 일어나자, 경종은 전격적으로 노론 대신들을 처형하고 정권을 소론에게 넘겼다. 이것이 신축환국(경종 1년)이다. 경종은 소론을 중심으로 정권을 구성하고 다시 한 번 개혁을 추진했다. 당시 소론에는 당대의 걸출한 개혁가들이 포진해 있었다. 노론을 비롯한 기득권층은 아우성쳤지만 경종은 숙종보다 더 강력하게 개혁을 밀어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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