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책을 읽는가
샤를 단치 지음 | 이루
왜 책을 읽는가
샤를 단치 지음
이루 / 2013년 4월 / 288쪽 / 13,800원
1. 낯선 사유로 단조로운 세상을 읽는다
글을 배우려는 욕망이 독서의 문을 열다
왜 책을 읽는가? 내게 독서란 걷는 일과 같다. 심지어 나는 걸으면서 책을 읽기도 했다. 그 덕분에 웃지 못할 에피소드도 참 많았다. 언젠가 책에 정신이 팔린 채 걸어가다가 주차권 발행기에 부딪힌 일이 있었다. 나도 모르게 “어이쿠, 죄송합니다!”라는 말을 하고 고개를 들어 보았더니, 저런… 주차권 발행기가 아닌가! 걷거나 읽는 일은 자발적인 행위다. 그러나 독서는 걷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행위는 아니다. 왜냐하면 독서는 후천적인 노력을 통해서 습득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솔직히 책을 읽는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모든 사람이 책 읽는 법을 쉽게 배우는 것도 아니다.
위대한 독서가들은 읽는 법을 쉽게 배웠을까? 내 경우엔 쉬운 편이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깨우쳤을 정도로 말이다. 며칠 동안 알파벳을 따라 읽었을 뿐인데, 어느 날 갑자기 눈앞이 환해졌다. 그리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어쩌면 글자를 늦게 배우기 시작해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1년 전부터 나는 불만이었다. 친구들은 거의 다 그 무렵에 글을 배웠던 것이다. “왜, 나만 글자를 안 가르쳐줘요?” 나는 이런 질문으로 끊임없이 부모님을 귀찮게 했다. 그러면 부모님께서는 이렇게 대꾸하곤 하셨다. “학교에서 가르쳐줄 테니 기다려. 다 때가 있는 법이야!”
나는 영화 포스터건 거리의 간판이건, 혹은 잡지 표지건 글씨가 쓰여 있는 것은 뭐든지 눈에 띌 때마다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저기 뭐라고 쓰여 있어요?”라고 묻곤 했고, 제대로 가르쳐주지 않는 것은 정말로 나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면 세상을 이해하는 내 첫걸음은 타의에 의해 남들보다 늦어진 셈이다.
여섯 살의 아이들은 매우 똑똑하다. 그리고 순진하다. 나는 글쓰기를 통해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이해했던 것 같다. 공공연하게 그러나 신비스럽게 이루어지는 그 모든 일들에 대해 발생 동기는 그다지 궁금하지 않았다. 오로지 그 일들이 어떻게 서로 연결되는지가 궁금했을 뿐이다. 도대체 이 모든 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 걸까? 나는 절박한 마음으로 글쓰기에 매달렸고, 글을 통해 그런 것들을 말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말은 글만큼 믿음직스럽지 않았다. 특히 부모님의 말씀이라면…. 나는 부모님 말씀의 속뜻을 헤아릴 여지조차 없이 단지 겉으로 드러나는 권위의식에 대해 거부감부터 가졌다.
나는 늘 권위가 싫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상대방의 반박을 잠재우기 위해 권위에 기대어 내뱉는 말처럼 화가 나는 일도 없다. 권위를 내세우는 사람들은 논리적인 말, 놀랍도록 멋진 이성적 대화를 거부하는데, 내겐 이성적인 대화처럼 멋진 것도 없었다. 이성적인 대화는 신뢰를 바탕으로 한다. 반면 권위의식에서 나온 말은 그 기저에 상대방을 무시하는 마음이 깔려 있다.
권위에 대한 본능적인 혐오는 흡사 마법에 걸린 양 글쓰기에 대한 무한한 신뢰로 나타났다. 거친 야생아에 불과했던 내게 문장은 무언가를 열 수 있는 열쇠처럼 느껴졌다. 더구나 문장 속의 글씨들은 그 자체가 마치 열쇠 모양 같았다. 내가 알지 못하는 단어들을 표현한 검고 길쭉한 열쇠 모양의 글씨들. 그야말로 우리 집 서가에 가득 찬 이 열쇠 꾸러미들은 내게 보물 창고의 문을 활짝 열어주었다. 글쓰기는 내게 추상적인 존재인 것은 물론, 어떤 목적이 있어서 하는 말이 아니었다. 즉, 이해관계를 떠난 것이었다.
나는 문학에 대해 잘 알지 못했고 막연히 느낌만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름 정의를 내려 보자면 문학은 실용성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유일한 글쓰기 형태이다. ‘왜 읽는가?’라는 질문은 바로 ‘왜 문학을 읽는가?’에 갈음하며, 내가 구하고자 하는 답은 바로 이 질문에 해당한다.
우리는 지식을 얻기 위해 역사 회고록이나 정치 프로그램, 천문학 관련 논문, 게임 설명서 등을 읽기도 하지만 사실 지식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지식은 누구나 가질 수 있다. 교양이 없거나 어리석기 그지없는 수많은 이들조차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단순히 지식을 채우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바로 ‘유추(類推)능력’이다. 그리고 문학 중에서도 특히 픽션은 유추의 형태를 띤다. 즉 유추를 통해 자신이 이해한 바를 풀어낸다. 좀 더 엄밀하게 말하자면, 지성(知性)을 넘어 감성(感性)에 반응하는 유추를 통해 사물을 이해한 것이 바로 문학이다. 유추와 감성, 이는 사물을 이해하는 또 다른 형태이며, 분석과 지성에 기대는 철학이 문학과 갈리는 지점이기도 하다.
당연한 말이지만, 감성은 문학을 매혹적으로 만들어주는 것이나, 또한 문학을 위험에 빠트리는 것이기도 하다. 감성은 그 자체의 이미지로 우리를 기만할 수 있으며, 철학이나 심리학보다 더 빨리 이러저러한 사물들을 파악하게 만들 수도 있다. 책을 통한 사물의 이해, 책을 통한…. 나는 ‘책을 통한’이라는 표현에 담긴 다소 경멸적인 의미를 인정할 수 없다. 이 표현은 아직 야만성을 벗지 못한 사회가 소위 문명이라고는 하나 겨우 식탁 예절에 불과한 세련된 탈을 뒤집어 쓴 주제에 정신적인 것에 집착한다는 경멸적인 뜻이 포함되어 있다.
그렇다면 논리는 어떠한가? 나는 사람들이 논리를 좋아하는지조차 모르겠다. 아이가 부모를 성가시게 하면 부모는 그 아이를 따지기 좋아하는 불손한 애로 취급한다. 우리는 ‘문학’과 관련한 수많은 표현들을 즐겨 사용한다. “참, 문학스럽구먼.”, “소설 좀 그만 쓰시지!”, “시가 따로 없네!” 같은 표현을 비롯하여 추잡한 어떤 사건들을 보면서 “개판이군!”이라는 말도 한다. 견공들이 들으면 분통을 터뜨릴 일이지만, 개가 됐든 문학이 됐든 그 자체가 가증스러운 것은 아니다. 문학과 연관된 단어들을 경멸적인 의미로 사용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잘못임을 깨달을 것이며, ‘책을 통한’이란 말이 얼마나 좋은 표현인지를 알게 될 것이다. 내가 배우고 얻은 것은 대부분 책을 통해서였다. 세상에 대한 이해 혹은 나의 작은 지식들은 경험을 하는 순간부터 모호해지기 시작한다.
어린 시절, 내가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밖에 좀 나가 놀아라!”였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부모님이 독서가 건강에 해롭다고 생각한 건 아니었다. 더욱이 학식이 없던 분들도 아니었다. 그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단지 내 관심사를 다양하게 넓혀주기 위함이었다. 어린 내게 관심의 대상은 오로지 책뿐이었다. 때때로 나는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나가서 놀기도 했다. 어머니의 다정한 시선을 받으며 분필로 그린 길을 따라 작은 자동차를 밀며 놀곤 했지만, 금세 싫증이 났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린 시절은 의무적인 일들 때문에 괴로워하며 보냈던 것 같다. 놀아야 한다는 그 특별한 의무 때문에….
나는 언제나 놀이보다는 책에서 더 많은 기쁨을 느꼈다. 운동에 대해서는 특별한 기억이나 할 말이 없다. 형형색색의 미니카들을 가지고 놀다가 부모님이 흡족해하시면 곧바로 내 최고의 행복인 책 읽기에 몰입했다. 물론 그때의 행복감은 책 읽기의 또 다른 이유였고, 독서는 내게 다른 어떤 놀이보다 더 재미있는 일이었다.
2. 독자는 벌거벗은 채 거리를 활보하는 작가들의 공모자다
독재자는 왜 책을 읽는가?
지도자를 뽑을 때 우리가 따져 보아야 할 게 있다면, 그것은 바로 “혹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불을 지를 사람은 아닐까?”이다. 이런 의혹이 전혀 들지 않는다면, 그 지도자가 너무나 순하고 무서울 게 전혀 없는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반대로 그런 의혹이 든다면, 심히 우려스러울 정도로 저속한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예언자 무함마드의 사위인 칼리프 오마르는 고대시대에 가장 풍부한 장서량을 자랑했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불태우라고 명령함으로써(642년 무슬림의 이집트 정복 때) 저속한 광기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인물로 기록되어 있다.
훌륭한 혈통을 자랑하는 독재자들의 파렴치함은 아무런 배경 없는 가난한 야심가들에 의해 이용당하는 신앙만큼이나 치명적인 결과를 낳는다. 개천에서 용이 된 사람들이 종종 보수적인 성향을 띠는가 하면, 최악의 독재자들이 독서를 권장하는 일 또한 드물지 않다. 옛 소비에트연방에서 책은 어딜 가든 쉽게 볼 수 있었다. 학교에서는 사회주의가 봉건사상에 대한 승리임을 증명하기 위해 제정 러시아 시대의 문학을 가르쳤고, 위대한 문인들의 원고 또한 소중하게 보관했다. 책으로부터 탄생한 볼셰비즘이 책을 보호한 것이다. 마르크스 역시 푸시킨을 비롯한 문인들을 구해냈다!
나는 흑해에서 보냈던 어느 여름날을 떠올릴 때마다 감상에 젖는다. 그때 흑해 연안에 있는 한 별장의 테라스에서 조셉 스탈린의 『마르크스주의와 언어학의 제 문제(Le Marxisme et les problemes de linguistique)』(내가 보기에는 러시아 원제인 『사회주의의 경제학적 문제들』이 더 옳은 것 같다.)를 다시 한 번 정독했다. 더 없이 행복한 여름이었다. 하지만 나라면 그들에게 사람을 불태우지 말고, 차라리 내 책들을 불태우라고 부탁했을 것이다.
나의 어둠을 인식하기 위해 책을 읽다
억눌린 모든 것이 해방되었다. 나는 읽고 또 읽었으며, 마치 빛을 본 것만 같았다. 그 느낌은 찰나에 지나지 않았지만 내가 보았던 것, 그리고 내가 인식했던 것은 18세기 계몽시대를 상징하던 바로 그 ‘빛’이었다. 왜 책을 읽는가? 지식의 경계를 확장하고, 편견을 없애며, 이해의 폭을 넓히기 위해서다. 왜 책을 읽는가? 자기 울타리 안에 갇혀 편견 속에 살면서 무지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다.
어둠은 인식을 위한 유용한 수단이고, 의도적이든 아니든 문학의 일부이다. 어둠은 문학을 문학답게 만드는 고유한 특성이다. 독서가들은 순수성과 완전함과 공정함을 내세우지 않는 유일한 문학가들이며 그런 요소가 없이도, 자랑할 것이 없어도(여기서 루소는 제외한다) 그 자체로 중요한 요소가 된다. 우리는 숨기고 싶은 자신의 결점들이 다른 사람들에게서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보기 위해 책을 읽는다.
글쓰기는 정숙하지 못한 성행위다
책을 끝까지 읽는다는 건 쉽지 않지만, 그만큼 달콤한 일이다. 마치 황홀했던 섹스처럼 사랑스런 추억을 남겨 준다. 독자는 책과 함께 오르가슴에 빠진다. 독서는 궁극적으로 글쓰기로 나아가며, 글쓰기란 정숙하지 못한 성행위와도 같다. 작가로서의 데뷔 시절이 단지 첫걸음에 불과했다면, 처음으로 책을 출간하고 난 직후에는 거리로 나가는 것조차 부끄러울 것이다. 아무도 입 밖에 내지 않는 자신의 은밀한 신체 부위 같은 나의 두려움과 기쁨을 어떻게 밖으로 내보일 수 있겠는가?
그러나 너무나 분주한 요즘 사람들은 마음을 열 틈이 없어서 벌거벗은 자들에게 무관심할 뿐 아니라, 심지어 쳐다보지도 않는다. 어쩌면 너무나 예의가 바르기 때문일 수도 있고, 어쩌면 못 본 척 하는 것일 수도 있으리라. 그것도 아니라면 우리가 쓴 책을 읽지 않는 것일 수도…. 생제르맹 거리에는 매일매일 나체로 활보하는 사람들이 있다. 체포되지도 않는 그들은 바로 작가이며, 독자는 그들의 공모자이다.
3. 책에 조언을 구하지 말고 책 속의 보물을 훔치라
이성에 반대하기 위해 읽는다
예술에 있어서 이성은 살아 있는 사람들의 것이고, 광기는 죽은 사람들의 몫이다. 그런 이유로 고인이 된 아나톨 프랑스는 썩은 생선처럼 버려졌고, 알프레드 자리는 아직까지 재미를 보고 있다. 작가는 죽어야 한다. 살아 있는 작가들은 자신 앞에 드리워진 ‘예의’라는 스크린 때문에 제대로 평가받기가 어렵다. 살아 있는 작가들이 불행해지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자신의 에너지는 그대로 살려 두되 사람들의 환심을 사는 것이다. 독자인 내게 광기는 즐거움을 주는 반면, 이성은 뒷걸음질 치게 한다. 독서는 비이성적인 행위다. 중요한 인물들은 독서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일이 많다고 말한다. 맞는 얘기다. 그래도 우리는 휘파람을 불며 명예나 돈과는 상관없이 계속 책을 읽을 것이다.
비밀을 캐내기 위해 책을 읽다
남들의 비밀을 캐내기 위해 책을 읽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고는 기어이 찾아내고 만다. 안타깝게도…. 그런데 도대체 비밀이란 무엇인가? 비밀은 옷장 뒤에 감추어진 먼지 덩어리 같은 것이다. 신기한 것은 뻔한 비밀일수록 진실은 더욱 은폐된다는 사실이다. 마치 누군가 그렇게 되기를 원하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은밀히 감추어진 비밀을 캐내려는 사람들의 욕망은 마치 증오심이나 질투심에 불타오르는 듯 강박적인 특성이 있다. 그러므로 나만의 비밀이 탄로 나고 싶지 않다면 때로는 집단적인 공격을 막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 혼자만 애태우는 쓰라린 짝사랑 같은 비밀은 누구에게나 항상 있는 법이다.
비밀은 말 자체가 풍기는 마력에도 불구하고 실은 매우 단순한 것이다. 비밀은 은닉된 잘못이거나 혹은 음흉하게 감춰진 멋진 제스처일 수 있다. 어찌 됐건 사람은 누구나 자기만의 비밀 속에 살아간다는 믿음은 순진한 생각이 아닐 수 없다.
발자크는 ‘시인’이라는 단어에 찬사를, ‘비밀’이라는 단어에 경멸을 담아 표현했다. 그러나 그의 경멸감은 그리 크지는 않았나 보다. 그는 마치 비밀을 캐내는 것이 인생의 목표라도 되는 듯 끊임없이 비밀을 만들어내고 밝혀냈다. 상업적이라는 이유 때문에 문단에 아직 그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가운데 평판조차 좋지 않았던 발자크는 “비밀”이라는 말로 자신을 드러냈다. 독자들은 잘 모르겠지만 책 제목으로 쓰인 비밀이라는 단어는 삼류영화에 나오는 창녀의 교태 같은 것이다. “이리 오세요. 즐겁게 해드릴게요.”
발자크의 “비밀”은 동시대인들에게는 책을 읽기도 전에 내용을 추하게 만들어버리는 망측한 언어였다. 그러나 그의 책을 읽고 또 읽으며 그의 천재성을 경험한 우리에게 그 생동감 넘치는 플롯은 책이라는 틀을 뛰어넘으며, ‘비밀’이라는 단어 역시 더 이상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카디냥 공주의 비밀』에서 ‘비밀’이라는 단어가 주는 천박함은 사라져 버린다. 『사교계 여인들의 흥망기』에서 ‘사교계의 여인들’이라는 단어도 문제가 많다. 그것이 실제든 은유든 제목만 보면 선정적인 것으로 물든 세상을 떠올릴 수 있다.
『내 미모의 비밀』, 『게놈의 비밀』 등등 책 제목에 ‘비밀’이라는 단어를 집어넣는 건 아무것도 없는 내용을 가리기 위한 포장에 불과하다. 아니면 100% 사기일 수도 있다. 푸슈킨의 『비밀 일기』가 그렇다. 비밀이라는 말은 완전히 거짓이다.
나는 비밀이 밝혀지는 것에 찬성하는 입장이다. 비밀이 모든 문의 열쇠여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기 때문이다. 비밀의 문을 열면 또다시 골방으로 연결된 은밀한 비밀 문이 떡 버티고 있다. 그러니 빨리 비밀을 밝혀버리고 본질로 들어가는 편이 낫다. 미국 TV 드라마 <브라더스 & 시스터즈>를 보면 등장인물들 사이엔 비밀이 없다. 새로운 사실이나 숨겨졌던 사건이 밝혀졌을 때 그들은 곧바로 이렇게 말한다. “아빠한테 정부가 있었어?” “조나단에게 네가 워렌과 잤다고 얘기해야 돼.” 솔직함을 최고로 여기는 미국적인 가치 때문인지도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이러한 솔직함은 빈약한 비밀의 드라마를 허물어뜨리고 있다.
비밀은 게으른 작가들의 애용품이기도 하다. 알프레드 히치콕의 작품 세계는 비밀 위에 세워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뛰어난 재능을 생각하면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의 영화를 보면 수많은 장면에서 그의 재능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히치콕은 자신의 재능 따위는 안중에 없었고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 급급했다. 그의 조롱하는 듯, 거드름을 피우는 듯한 분위기는 아마도 그로 인한 불편함 때문일지 모르겠다.
문학에서의 히치콕을 찾자면 에드거 앨런 포가 될 것이다. 그 엄청난 재능을 미스터리를 만들어내는 데 쏟아붓다니! 마술의 비밀이 밝혀지고 나면 도대체 뭐가 남는단 말인가? 인형을 조종하던 피아노 줄? 소설은 인물의 미스터리가 밝혀지는 과정을 보여준다. 사실 타인의 눈에 비치는 우리 모습은 단순하기 그지없다. 우리는 언제나 타인에게 한 가지 모습만 보여주며, 피차 하나의 캐릭터로 비치는 것을 더욱 원한다. 그러나 우리가 죽고 더 이상 친절할 필요가 없게 되면, 우리는 복잡한 인물로 변신한다. 마치 시신을 해부하듯 인물을 파헤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