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떻게 죽음을 맞이해야 하나
이시토비 고조 지음 | 마고북스
우리는 어떻게 죽음을 맞이해야 하나
이시토비 고조 지음
마고북스 / 2012년 11월 / 250쪽 / 15,800원
1장 노인요양원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나
2005년 12월 1일 노인요양원의 상근 배치의로 처음 출근한 날, 소장의 안내를 받아 위루관으로 영양을 공급받고 있는 16명의 노인들을 만났을 때 나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을 느꼈다. “인간이 이렇게까지 해서 살아 있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일까? 지금까지 수많은 시련을 견디고 극복해 온 인생, 그 끝에 또 이 같은 시련을 견디지 않으면 안 되다니….” 그것이 그때의 솔직한 내 느낌이었다.
그로부터 4년, 나는 거의 매일 아침 이분들을 회진한다. 가족 입장에서 보면 하루라도 더 살아 계시기를 바라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대다수 입소자는 말을 할 수 없는 상태이다. 코에 줄이 끼워진 채 하루 세 번 우주식 같은 액체를 공급받고, 정해진 시간마다 대소변 시중을 받는다. 이분들에게 사는 즐거움이 있을까? 이분들은 누워 있으므로 위의 내용물이 역류하여 만성적인 흡인성 폐렴을 일으키고, 방광기능도 쇠약해져 요로 감염이 일어난다. 이것은 치료일까? 무엇을 위한 영양 보급일까? 가족 입장에서 보아도 솔직히 말해 회의가 들지 않을까? 나는 그곳에서 의료기술의 진보와 연명주의가 가져온 자승자박의 비극을 목격한 느낌이었다.
내가 근무하는 도쿄에 있는 로카홈은 1995년 설립된 정원 100명의 노인요양원이다. 설립 때부터 상근 배치의를 포함해 24시간 간호 체제로 운영된다. 입소자의 금전적 부담은 1개월에 5만~15만 엔 정도로 사설 요양원에 비해 무척 저렴하다. 때문에 대기자가 늘 수백 명에 달한다. 입소자 100명의 평균 연령은 89.3세, 치매 9할, 평균 케어 필요 4.2(케어가 필요한 정도를 가장 가벼운 1에서 가장 무거운 5까지 나누어 판정)인 만큼 의료 처치 업무가 대단히 많다. 노쇠한 끝에 치매가 된 사람은 중추신경 장애로 말미암아 입을 통해 받아들인 음식물을 삼키는 반사 기능이 저하된다. 무리해서 먹으려 하면 기관에 음식물이 들어가서 폐렴을 일으킨다. 병원으로 옮겨 항생제를 처방하면 폐렴은 낫지만 삼킴장애 자체는 낫지 않는다. 그래서 병원은 위루술을 시도하자고 한다. 이때 치매 환자는 “그런 조치는 싫다.”라고 말할 수 없다. 의사의 설명을 들은 환자들은 위루술을 거절하기 쉽지 않다. 결국 위에 튜브를 달고 요양원으로 들어오는 분들이 계속 늘어나게 된다. 이렇게 되면 10명 이하의 간호원으로는 환자들을 제대로 돌보기가 어려워진다.
치매 환자의 경우 중추신경 기능이 저하되어 먹을 때 음식물이 기관으로 들어가 버린다. 살기 위해 먹어야 하지만 먹은 행위가 거꾸로 목숨을 빼앗는 역설이 생기는 것이다. 요양보호사의 중요한 일 중 하나가 식사 케어인데, 여기에 이처럼 모순되는 작업을 하는 면이 존재한다. 입소자 중 30%가 삼킴장애를 가지고 있다. 이들에게는 신중하게 조금씩 입안으로 음식물을 넣어 드려야 한다. 목구멍 깊은 곳에 음식물이 남아 있는지, 이제 다음 한 입을 떠 넣어도 될 타이밍인지 확인하고 신중하게 먹여야 한다. 그러나 천천히 시간을 들여 식사 케어를 할 여유가 사실 없다. 한 사람당 평균 20분 이내로 식사 케어를 마치지 않으면 다음 업무에 지장을 주게 된다. 요양 보호사의 숫자가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아직 음식물이 입에 남아 있는데 다음 한 입을 입안으로 밀어 넣는 일이 발생한다. 결과적으로 흡인성 폐렴을 유발하는 것이다.
인간은 본래 입을 통해 먹은 것에서 에너지를 얻어 살아간다. 그런데 나이를 먹어 몸이 약해지면 결국 어느 순간 먹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그렇게 해서 옛날에는 자연스럽게, 조용하게 숨을 거두었다. 그러나 지금은 누군가가 혼자서 조용하게 죽어 있다면 큰일이다. “아파트에서 노인 고독사”라고 신문에 큼지막하게 보도된다. 왜 이것이 대사건이 되었을까. 지금은 입으로 먹을 수 없게 되어도 살아갈 방법이 있기 때문이다. 고농도의 포도당과 그 밖의 영양제를 굵은 정맥으로 밀어 넣는다. 게다가 최근에는 복부 벽에 관을 심은 후 그 관을 통해 우주식과 같은 유동식을 공급하는 위루술(PEG)이 늘어나고 있다. 이를 통해 또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먹을 수 없다 = 죽은”이라는 전제가 무너졌다. 몸이 영양분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된 경우에도 가족들은 생명 연장 조치를 취하지 않는 것은 나쁜 짓이라는 느낌을 갖게 된다. 그리하여 이런 조치들이 정말 당사자를 위한 것인지 아닌지 판단을 하지 못한 채 의사 말에 따른다. 의식이 분명한 사람이라면 이런 조치를 통해 살아가고 싶지 않다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 일본은 고령화 사회와 더불어 치매가 늘어나고 있다. 85세 이상에서는 4명 중 1명이 치매다. 치매를 앓는 사람은 의사표시를 할 수 없다. 하지만 가족들은 이대로 그냥 보낼 수 없다고 생각하여 위루술을 허락한다. 하지만 폐렴을 방지하기 위해 위루술 등을 하여 경관영양으로 전환한 분들에게도 폐렴은 일어난다. 위에 들어간 유동식이 몸의 위치에 따라 쉽게 식도를 역류해서 목구멍까지 올라오기 때문이다.
입으로 먹을 수 있는 경우는 본인의 몸 상태에 따라 수분량과 열량이 식욕에 의해 자동 조절된다. 그러나 누워서만 지내는 노인들은 ‘오늘은 먹고 싶지 않아’ 등의 의사표시를 할 수 없다. 치매를 앓는 노인들은 식욕을 컨트롤하는 뇌의 기능에 이상이 와서 과식이나 이식(종이나 옷 등을 먹는 것) 증상을 보인다. 90대 전후 초고령자들은 음식물이 조금만 많이 들어가도 금세 토한다. 기도로 넘어가면 폐렴에 걸린다. 우리 요양원에는 위루관 등을 통해 영양 공급을 받는 분들이 15명 정도 있다. 평균연령이 90세를 넘는다. 누워서만 지내는 데다 사지 근육이 오그라들어 있는 분들이 대부분이다. 그런데도 내가 부임했을 당시 공급되는 칼로리는 하루 평균 1,000킬로칼로리에 수분량은 평균 1,400밀리리터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 많았다. 부지런히 폐렴을 만들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병원에서 갑자기 위루술을 제안받고 입소자 가족이 당황하는 것을 우려한 로카홈에서는 가족 모임을 열어 공부하는 기회를 가졌다. 제목은 “입으로 먹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 이미 돌아가신 입소자의 유족과 현재 거주하고 계신 입소자 가족들이 발언했다. 직원들과 유족 모두 가능하면 위루술은 하지 않고 마지막을 맞이하는 게 좋겠다는 의견이 대세였는데 어떤 여성 한 분이 “내게는 누구보다 사랑하는 어머니가 이 세상에 살아 계시는 것이 중요하다. 위루술뿐만 아니라 어떤 수를 쓰더라도 하루라도 더 사시게 하고 싶다.”라고 말했다. 3개월 후 그 여성이 나를 찾아와서 “최근에 저는 어머니께 위루술을 한 것에 대해 어머니를 괴롭히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견딜 수 없어요.”라고 말했다. 위루술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그것은 이토록 가족을 괴롭히는 문제이다.
2장 노인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나
노쇠 그리고 죽음은 필연적이며 자연스러운 사건이다. 하지만 인간은 욕망하는 동물이다. 중국 진나라의 시황제, 안티에이징 제제를 구입하는 현대인들 모두 조금이라도 더 오래 살고 싶어 한다. 한편으로 겐코 법사(일본 3대 수필의 하나인 ‘도연초’의 저자)처럼 “오래 살면 허물도 많은 법, 길어도 마흔 못 미쳐 눈 감는 걸 마땅하게 알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어쨌거나 늙어서 뼈만 남을 때까지 살고 싶지는 않다는 생각은 납득할 수 있다.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물론 개인의 자유이다.
질병이란 어떤 이유에 의해 몸이 고장 난 상태이며, 그 고장을 고치는 것이 의료행위이다. 그러나 노쇠는 고장이 아니다. 이미 기계가 수명이 다한 것이다. 고령자는 노쇠로 죽는 경우가 많지만 노쇠라는 병의 양태가 인식되지 않는다는 기묘한 현실이 존재한다. 하지만 노쇠는 현실에서 고령자에게 흔히 볼 수 있는 병이다. 노쇠는 멈추게 할 수 없다. 의료 조치는 오히려 당사자에게 어려운 문제를 떠맡기게 하는 것이 될지 모른다.
요양원에 86세 여성이 한 분 있었다. 일상사는 거의 자신이 해결하고 나와 세상 이야기며 건강에 대해 이야기를 곧잘 나누곤 했다. 하루는 38도 전후의 고열이 나서 가까운 병원에 검사를 의뢰했다가 그대로 입원하게 되었는데 약 3주 후 요양원에 돌아왔을 때는 너무 말라 몽유병자처럼 변해 있었다. 입원 중에 순환기 계통 검사를 비롯하여 많은 검사를 받았고, 요로감염으로 항생제를 투여했다고 한다. 병원 침대에서 보낸 3주간의 생활 환경 차이였을까, 아니면 감염증이 문제였을까. 심각한 병이 아니라면 요양원에서 항생제 복용으로 해결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나는 병원 수진을 권했던 것을 내심 후회했다.
입소자가 누구든지 노쇠는 확실하게 진행된다. 이것은 어떻게 해도 멈출 수 없다. 하지만 의사들은 노쇠의 경우도 질병과 마찬가지로 치료하는 경향이 있다. 이 현상의 무의미함을 의사들도 느끼고 있지만, 최근 일어났던 치료에 대한 소극적 접근이 위법행위로 추궁당한 사례가 여기에도 그림자를 늘어뜨리고 있다. 하지만 사회의 인식은 이미 달라지고 있다. 고령사회가 현실이 된 지금, 의료상의 연명 조치에 대한 차가운 시선이 급속하게 퍼지고 있다. 본인의 목숨은 본인이 결정해야 마땅하다. 노인의 의료에서는 더 말한 나위가 없다. 인생은 자신의 것, 막을 내리는 방법도 자신의 선택에 따르는 것이어야 한다는 의식도 높아져 가족도 그에 부응하는 판단을 하는 경우가 많은 것처럼 보인다. 지금은 의료계와 법조계 모두 현재 상황을 인식하고 적절한 대응을 해야 할 시점이다.
시간의 길이를 기준으로 죽음의 방식을 구별하면 돌연사, 언제 죽을지 미리 알 수 있는 죽음, 좀처럼 오지 않는 죽음의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심근경색이나 동맥류 파열에서는 죽음이 갑자기 찾아온다. 암의 경우 언제 막이 내릴지 대략 알 수 있다. 그런데 지금 노인들 가운데는 치매를 앓는 분들이 늘어나고 있다. 중추 기능은 장애를 입었지만 육체 기능은 유지되고 있으므로 배회하고 충돌하면서 마지막은 좀처럼 오지 않는다. 그러고는 넘어져서 다리뼈가 부러지고 영영 일어나지 못한 채 죽음을 기다릴 뿐인 시간이 계속된다.
지금은 이 세 번째 그룹에 속한 분들이 많아지고 있다. 간호 부담은 늘어나고, 가족은 지칠 대로 지친다. 그래서 시설에 맡길 수밖에 없다. 로카홈 입소자 중 약 90%가 알츠하이머나 뇌경색 등으로 잘 움직일 수 없다. 그들이 종종 흘리는 말이 “더 이상 사는 게 싫어”이다. 죽음은 당사자 개인의 것이라는 생각이 있는 한편, 당사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해도 위루 장치를 해서 오래도록 살게 하는 것이 허용되어서 좋은 것일까? 죽음에 이르는 시간의 문제를 더 진중하게 다루어야 하지 않을까.
대다수 일본인은 병원에서 죽는다. 노인요양원에 입소했더라도 실제로는 병원에서 숨을 거두는 것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이미 수명이 다했다는 것을 알고 있어도 입소자 상태에 어떤 변화가 오면 가족이나 요양원 직원 모두 병원에 입원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느낌에 사로잡혀 병원에 대응을 부탁한다. 병원에서 사망하면 마지막까지 손을 써 보았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본질은 연명주의라는 시스템이다. 특히 질병 치료를 사명으로 하는 의료 관계자는 그렇게 교육을 받아 왔다. 그러나 지금 보고 있는 대상은 생물학적으로 수명이 다했고, 본인도 조용하게 막을 내리고 싶어 하며, 주변에서도 평온한 마지막을 바라고 있다. 이것은 질병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늘이 준 수명을 다한 것이다. 여기서 마지막 시간을 정하는 것은 의료가 아니다. 말 그대로 시간의 흐름에 몸을 맡겨야 하는 것이다. 둘째, 아무 조치도 하지 않은 채 환자가 사망한 경우 현재 일본 형법에서는 보호책임자유기치사죄에 해당될 염려가 있다는 것이다. 이런 법률상의 문제 때문에 병원의 의사들은 “이미 수명이 다했으므로 위루술은 그만둡시다.”라고 좀처럼 말하기 어려운 것이다.
노쇠하여 마지막을 맞이한 몸은 수분이나 영양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다. 무리하게 공급하면 부담을 줄 뿐이다. 덕이 높은 스님이 임종 시기에 이르면 곁에 물그릇이 놓인다. 미야케 섬에서는 노인이 생의 마지막 시기에 이르렀을 때 물만 공급한다. 이처럼 자연의 흐름에 맞춰 대응하는 편이 당사자로 하여금 편안하게 마지막을 보낼 수 있도록 한다. 이 사실을 증명한 구미의 문헌은 적지 않다. 실제로 로카홈에서 입소자가 먹지 못하게 된 이후 마지막 며칠간의 모습을 지켜보아도 목의 갈증이나 공복을 호소하는 분은 없었다. 몸속에 들어가는 게 아무것도 없는데 소변이 나온다. 마치 자신의 몸속을 정리 정돈하고 있는 것 같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얼음이 녹아서 몰이 되는 것처럼 몸이 죽음에 친숙해져 가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이 상태에서는 몸에서 자연스럽게 마약성 물질인 엔도르핀이 분출된다고 한다. 그래서 고통이 없다는 것이다. 이처럼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갈 수 있는 것을 수액주사나 영양 공급, 산소 흡입으로 무리한 분발을 요구한다. 우리는 의료에 지나치게 의존한 나머지 자연의 섭리를 잊고 있는 것이 아닐까?
3장 왜 노인요양원에서 죽을 수 없는가
일반적으로 노인요양원에는 의사가 상주하지 않는다. 일생의 막 내림을 좌우하는 의료를 받을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검토하는 현장에 의사가 없는 것이다. 대부분의 요양원 배치의는 개업의가 비상근으로 겸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1주일에 2시간 정도 요양원에 와서 간호사의 보고를 받고 약 처방과 검사를 지시하는 게 주된 역할이다. 차분하게 가족의 이야기를 듣고 서로 인간관계를 맺을 시간 같은 건 거의 없다. 이에 비해 상근 의사가 있으면 언제나 입소자의 상황에 대응할 수 있으므로, 요양원에서 용태를 지켜 볼 것인지, 병원에서 치료를 받게 할 것인지 적절하게 판단하여 대응할 수 있다. 그러나 상근 배치의가 있는 곳은 매우 드물다. 그 이유는 노인요양원의 상근 배치의는 보험의(일본에서 건강보험 가입자에 대한 진료를 할 수 있도록 허용된 의사) 자격을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노인요양원 배치의가 보험 진료를 할 수 없도록 한 정부의 규제는 많은 낭비행위를 파생시킨다. 예를 들어 배뇨장애를 가진 분의 방광유치 카테터 정기 교환은 요양원의 배치의나 간호사가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교환만을 위해 입소자가 병원까지 가야 한다. 위루관 교환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노인요양시설에서 의료가 마땅히 지녀야 할 모습은 연명치료에 편중된 것이어서는 안 된다. 앞으로 지역에서 의지할 만한 노인요양시설로서 그리고 마지막 거주지로서 적절하게 그 기능을 완결시켜야 한다. 그러려면 상근 의사에 의한 보험 진료가 당연히 가능해야 한다. 정부는 병원에서의 사망을 줄이고 재택 또는 요양시설에서의 간병을 추진하려 하고 있지만 실제로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시책은 펼치지 않고 있는 셈이다. 병원이 구원해야 하는 대상은 평온한 죽음이 필요한 노인들이 아니다. 병원에는 병원의 역할이 있다.
평온한 마지막을 맞고 싶다는 것은 인간이 가지는 기본적인 욕구이다. 하지만 일본의 노인요양원은 개인의 의지가 존중된, 자연스럽게 인간의 마지막을 맞이하는 시설로서 그 목적을 완결할 수 있는 시스템으로 되어 있지 않다. 요양형(일본 개호보험제도에 규정되어 있는 요양보호형 의료시설), 개호노인 보건시설, 특별양호노인홈, 갖가지 형태의 재택 서비스 등등… 노인들은 의료 서비스를 어디서 어떻게 받으면 좋을 것인가. 병을 앓는 노인을 끼고서 가족들은 정처 없이 떠돈다. 길을 잃고 난민이 되어 쓰러질 지경이다. 왜 이런 사태가 일어난 것일까?
현실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 시대 변화에 따른 추이를 생각해보자. 그 밑바탕에는 물질 우선 문화가 있다. 물질적인 생활을 추구하면서 부부가 맞벌이를 하며, 가정은 핵가정화되었다. 의료기술 발달에 따라 장수하는 인구가 늘어났고, 결과적으로 치매도 늘어났다. 가정에서의 케어에는 한계가 있다. 사회 전체에서 조직적으로 돌보는 요양보호제도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그 후 거품 경제가 붕괴하면서 장기요양보험 보수에 대한 재검토가 이루어지고 노인의 사회적 입원은 제한되었다. 그에 더해 최근의 경제 위기, 실업자 증가, 가족이 일하지 않으면 굶어 죽게 되는 현실, 부모를 집에서 돌보면 수입원이 없어지므로 시설에 맡기지 않을 수 없는 현실 등이 보태졌다. 가족만으로는 감당이 안 되는 것이다. 한편 병원에 머물면 비용이 늘어난다. 위루 장치를 달고 요양원으로 돌아오는 편이 경제적으로 덜 부담된다. 결과적으로 위루 장치를 단 고령자가 요양원에 늘어나게 된다. 이 사태는 임시방편 땜질식 행정이 낳은 것이다. 제도를 전체적으로 재검토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