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근두근 자동차톡
김우성 지음 | 미래의창
두근두근 자동차톡
김우성 지음
미래의창 / 2012년 5월 / 320쪽 / 15,000원
제1부 Design_ 난 네게 반했어!
수퍼카 Supercar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 페라리의 본산, 마라넬로에 가다
이탈리아 마라넬로(Maranello)는 기대와 달리 '깡촌'이었다. 도로는 차 두 대가 서로 엇갈려 지나기에도 비좁을 지경이었고 종일 거리를 돌아다녀도 마주친 사람이 몇 되지 않았다. 아주 간혹, 멀리서 들려오는 배기음만이 이 심심한 동네에서 뭔가 심상찮은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알려주는 단서였다. 그렇다! 이곳이 바로 모터스포츠의 명가, 페라리의 본거지다. 세계 최고의 수퍼카가 바로 여기, 믿기 어려울 정도로 한적한 이탈리아 북부 촌 동네에서 만들어지고 있다.
수퍼카는 말 그대로 고성능 스포츠카의 범주를 뛰어넘는 초능력 차다. 이 영광된 명칭을 처음 부여받은 차는 1967년에 데뷔한 람보르기니 미우라(Miura)였다. 거장 마르첼로 간디니가 그려낸 예술품 같은 보디에 V12 4.0리터 350마력 엔진을 올린 이 차는, 미적으로나 성능으로나 당시 모든 스포츠카를 뛰어넘는 존재였다. '수퍼'라는 수식어가 붙은 이유도 그래서다.
트랙터 제조로 큰돈을 번 페루치오 람보르기니(Ferruccio Lamborghini)가 엔초 페라리(Enzo Ferrari)로부터 모욕적인 말을 듣고 욱하는 마음에 스포츠카 회사를 세운 일화는 자동차 역사상 유명한 사건이다. "무엇을 하든 페라리 이상"을 모토로 내건 그가 미우라를 만들어 선보이자 페라리도 질세라 초강력 스포츠카를 내놓았고, 포르쉐와 부가티 등 유서 깊은 스포츠카 브랜드들도 앞다퉈 성능 높이기에 뛰어들었다. 소위 '수퍼카 전쟁'이었다. '과연 시속 250km로 내달리는 차가 우리 일상에 필요한가?'라는 논쟁은 늘 있었지만, 어쨌든 그 경쟁의 와중에 고성능과 고품질이라는 부산물을 얻을 수 있었으니 수퍼카는 어떤 식으로든 제 역할을 톡톡히 했다.
그러면 엄청난 배기량의 엔진을 올리고 무서운 성능을 뿜어내면 무조건 수퍼카일까? 일단 5P(Power · Performance · Proportion · Passion · Price)를 모두 충족시켜야 한다. 그래도 아직 수퍼카는 아니다. 가장 결정적인 요소 하나가 더 첨가돼야 한다. 바로 브랜드 가치다. 앞의 다섯 가지는 기술적으로 어떻게 해볼 수가 있지만 브랜드 가치는 원한다고 얻어지는 게 아니다. 그래서 자동차 강국 일본도 아직 진정한 의미에서 수퍼카를 갖지 못하고 있다. 얼마 전 렉서스가 LF-A를 내놓았지만 아무도 이 차를 페라리나 람보르기니와 비교하진 않는다. 성능만 놓고 보면 흠잡을 데 없으나 LF-A에는 가슴 뛰는 흥분 대신 냉철한 이성이 자리 잡고 있어서다. 토요타(혹은 렉서스)는 분명 좋은 브랜드이지만 아무도 그 로고를 보고 흥분하지 않는다. 골목길에서 우연히 맞닥뜨린 토요타 차에 환호성을 지르며 다짜고짜 카메라를 들이대는 일은 무척 드물다. 거듭 말하지만, 토요타는 훌륭한 자동차회사다. 기술적 차이를 말하는 게 아니다. 좋은 차를 만드는 브랜드와 수퍼카를 만드는 브랜드 사이에는 이런 '정서적 간극'이 존재한다.
수퍼카의 정서를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차가 1971년에 등장한 람보르기니 카운타크(Countach)다. 람보르기니의 존재감을 세상에 널리 알린 차이기도 하다. 키 177cm가 넘는 사람은 드나들기도 어렵고 겨우 올라탄다 한들 후방 시야는 '완전 꽝'이어서 후진할 때마다 도어를 열고 몸을 밖으로 완전히 빼내야 했던 이 차에 많은 사람이 열광한 건 바로 무지막지한 힘과 말도 안 되는 성능, 감당 못할 정도로 힘든 운전, 그리고 세상 모든 디자이너들이 꿈꾸는 요소를 몽땅 모아놓은 듯한 멋진 스타일 때문이었다. 그 누구도 카운타크의 비실용성에 시비를 걸지 않았다.
속도에 대한 탐욕으로 치자면 페라리를 따라갈 브랜드가 없다. 페라리는 설립 초기부터 모든 기술력을 오직 고성능에만 집중해왔다. 창업자 엔초 페라리부터가 걸출한 레이서 출신이었다. 설립 40주년을 맞아 1987년에 발표했던 최고출력 478마력의 수퍼카 F40은 엔초의 고집이 가장 잘 구현된 차이자 그의 유작이 되었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페라리는 F50과 엔초, 최근의 458 이탈리아(Italia)와 FF에 이르기까지 엄청난 계보를 형성하며 최강 수퍼카 브랜드로 군림하고 있다. 페라리와 람보르기니뿐 아니라. 맥라렌 F1(McLaren F1)이나 파가니 존다(Pagani Zonda)도 비현실적이기로 치자면 둘째가기 서러울 차들이다. 조그만 버튼 하나까지 일일이 깎아 만들고 실내 바닥에까지 최상급 가죽을 깔아놓은 파가니 존다는 미치지 않고서는 도저히 만들 수 없는 차다.
수퍼카는 이처럼 뜨겁고 비이성적이다. 화끈한 성능과 함께 예술적 감성도 있어야 한다. 일일이 짚어가며 논리정연하게 설명할 수 있다면, 그건 완벽하게 잘 만들어진 기계이지 수퍼카는 아니다. 마라넬로라는 소도시가 존재하는 이유는 오직 페라리뿐인 것 같았다. 로터리 한가운데에도 페라리 로고가 우뚝 서 있고 도시 곳곳에 페라리 공장과 페라리 박물관, 페라리 기념품점, 페라리 디자인센터가 흩어져 있다. 심지어 가장 큰 호텔과 레스토랑도 페라리로 먹고산다.
관광객들은 페라리를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에서 느끼고 싶어 기꺼이 이곳을 찾는다. 그들은 페라리 로고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어쩌다 식당에서 페라리 팀 드라이버와 마주치기라도 하면 흥분에 몸서리친다. 남이탈리아의 한적한 시골 마을은 페라리 로고 하나 때문에 세계에서 가장 화끈한 도시로 돌변했다. 페라리가 정녕 좋은 차인지 아닌지, 휘발유를 잔뜩 들이키며 시속 300km로 달리는 이 차가 과연 요즘 세상에 어울리기나 하는지 같은 걸 따지는 이는 아무도 없다. 묻고 따질 필요도 없이 보기만 해도 마냥 흥분되는 존재, 그게 바로 수퍼카다.
제2부 History_ 태초에 꿈이 있었다
창업자 Dream makers 꿈꾸는 그들이 없었다면 이 재미있는 자동차 세상도 없을 것!
2007년 늦가을 어느 날, 서울 강남의 한 특급 호텔. 코엑스와 삼성동 일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24층 라운지에 초조하게 앉아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문이 활짝 열리더니 탄탄한 체구의 중년 사나이가 들어왔다. 그의 이름은 호라치오 파가니(Horacio Pagani). 안경 너머에서 반짝이는 두 눈은 깔끔하게 빗어 넘긴 헤어스타일과 어울려 주위 공기마저 압도하는 긴장감을 자아냈다. 그는 세계 최고의 수퍼카 브랜드 중 하나인 파가니의 설립자이자 사장이다. 수퍼카 시장의 강자인 그가 한국을 방문한 것도 뜻밖이고 인터뷰 요청에 선뜻 응해준 것도 의외였다. 이탈리아어를 속사포처럼 쏟아내는 그는 언뜻 보기에도 다혈질에 자존심 덩어리였다.
20여 년 전까지 람보르기니에서 일하며 수퍼카 디자이너로 명성을 떨쳤던 파가니는 '가장 이상적인 수퍼카'를 만들고 싶다는 자신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회사를 설립했다. 그리고 1999년 제네바오토살롱에 존다 C13을 내놓으면서 이름을 알렸다. 연간 20대 정도만 100퍼센트 수공으로 만드는 파가니는 한 대에 10억 원을 훌쩍 넘는 가격과 놀라운 디자인, 압도적 성능과 한정생산의 희소성을 앞세워 순식간에 수퍼카 시장의 강자로 떠올랐다.
그가 만들고 있는 존다 F는 편집증적 성격과 광적인 집착의 산물이다. 차체 디자인을 완성하는 데만 4년이 지나갔고 인테리어 디테일을 다듬고 작은 레버를 하나 만드는 데 넉 달이 또 걸렸다니 할 말이 없을 노릇. 서른다섯 명의 엔지니어가 일일이 손으로 만드는지라 차가 완성되기까지는 주문 후 6개월에서 1년이 걸린다. 그럼에도 늘 50~60명 정도의 대기고객이 '자신만의 보석 같은 수퍼카'를 느긋하게 기다리고 있다. 세상에 똑같은 존다 F는 단 한 대도 없는 데다 희소성이 워낙 강하다 보니 구입하고 몇 년 지난 중고차 값이 신차보다 오히려 30퍼센트 이상 오르기도 한다. 파가니의 위상은 지난 2011년 제네바오토살롱에서 공식 발표한 후에이라(Huayra)로 인해 더더욱 높아지고 있다. 존다 시리즈의 후속작이라 할 후에이라(잉카어로 '바람'을 뜻한다)는 예술작품 같은 수제작 차체에 메르세데스-벤츠의 V12 6.0리터 700마력 AMG 엔진을 얹고 시속 100km 가속을 단 3.3초에 끊는 아름다운 수퍼카다. 데뷔 당시 가격은 우리 돈 15억 원 안팎. 이 차의 가치 역시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점점 더 올라갈 게 분명하다.
그는 일반적인 글로벌 브랜드의 CEO들과는 완전히 달랐다. 브랜드에 대한 자부심은 감히 건드릴 수 없을 정도였고, 얘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 순간 나 역시 '파가니 마니아'가 돼버렸을 만큼 강력한 설득력과 카리스마를 갖고 있었다. 바로 창업자의 힘이다. 그는 말했다. "파가니는 람보르기니나 페라리에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작은 회사입니다. 하지만 100퍼센트 내 소유인 회사이고 내가 세운 브랜드죠. 모든 걸 내가 책임지는 데다 내가 만들고자 꿈꿨던 차를 그대로 만들 수 있어요. 그것만으로도 내겐 정말 매력적입니다. 거대 브랜드에서 일할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어요."
에너지가 철철 넘치는 그와 얘기하다 보니 '자동차 역사를 만들어온 창업자들은 다들 저랬겠구나' 싶은 생각이 절로 들었다. 지금이야 유명 자동차회사의 설립자로 영원한 명성을 누리고 있지만 그들 대부분은 당대에 괴짜나 문제아 취급을 받았던 인물들이다. 못 말릴 정도로 차에 미쳐 있거나, 혹은 괴상한 상상만 하고 다니는 걸로 낙인찍혔던 사람들.
유명한 자동차회사 설립자들이야 수두룩하지만 특이하기로 치면 프랑스 시트로엥의 설립자인 앙드레 시트로엥을 빼놓을 수 없다. 1919년 시트로엥을 설립한 그는 엔지니어 출신이라는 사실이 무색할 정도로 탁월한 마케팅 감각을 발휘했다. 오늘날까지도 '마케팅의 귀재'라 불리는 이유는 그래서다. 명문 에콜 폴리테크니크를 졸업하고 기어박스 회사에서 일하던 그는 어느 순간 자동차의 매력에 빠져 회사 설립을 결심했다. 하지만 프랑스에는 이미 르노와 푸조가 확실한 자리를 굳히고 있던 상태. 후발주자로서 눈에 띄자면 뭔가 큰일을 저질러야 했다. 회사 설립 후 두 번째 차인 모델 B2를 발표한 그는 돌연 차를 몰고 사하라사막 횡단에 도전했다. 프랑스 자동차회사로서는 최초의 시도. 여기에서 성공한 시트로엥은 이어서 아프리카대륙 횡단까지 해내며 단번에 인지도를 끌어올렸다.
1925년에는 순 강철로 만든 B12를 내놓고 지붕에 코끼리를 올린 채 파리 시내를 돌아다니며 다른 차들보다 앞선 차체 강성을 과시했다. 탄력을 받은 상상력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에펠탑에 전구 수십만 개를 박아 넣어 1925년부터 1934년까지 10년간 매일 밤마다 시트로엥이라는 글자가 반짝이게 한 것도 그의 아이디어였다. 40km 밖에서도 볼 수 있었던 이 문구는 사상 최초의 옥외 전광판 광고로도 알려져 있다. 신차를 발표할 때는 미래의 고객인 어린아이들에게 정교하게 만든 미니어처를 선물하기도 했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아기가 세상에 태어나 처음 배우는 말이 엄마, 아빠 그리고 시트로엥"이라는 우스갯소리가 돌 정도였다. 그렇다고 이벤트에만 몰두한 건 아니다. 하이드랙티브(Hydractive)라는 첨단 서스펜션 시스템을 발명한 것도, 차가 회전하고 나면 스티어링 휠이 알아서 제자리로 돌아오는 셀프센터링(Self-centering) 시스템을 처음 개발한 주역도 시트로엥이었다. 만약 이게 없었더라면 우리는 스티어링 휠을 돌릴 때마다 몇 바퀴를 돌렸는지 기억하며 운전해야 했을지 모른다. 그는 진정 탁월한 엔지니어이자 마케팅의 천재였고, 자신이 만든 브랜드에 온전히 미친 사나이였다.
혼다의 설립자인 혼다 소이치로 역시 자동차에 완전히 미친 삶이 어떤 것인지를 제대로 보여준 사람이다. 그는 일본 천황으로부터 훈장을 받을 때조차 밤샘작업을 하던 작업복 차림 그대로 달려가 화제가 되었을 만큼 지독한 자동차광이었다. 1963년에야 자동차 생산에 착수한 혼다가 바로 이듬해 F1 출전을 선언했을 때는 자동차업계가 어이없어하며 코웃음조차 치지 않았다. 하지만 혼다는 1965년, F1 그랑프리를 시즌 6위로 마감하며 모두의 말문을 막아버리고 만다. 혼다는 세상에 태어나던 바로 그 순간부터 '기술제일주의' 브랜드였다. 오늘날까지도 엔지니어 출신만을 사장으로 임명하는 전통 또한 설립자의 뜻이 고스란히 살아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자동차산업은 분명 제조업이지만 다른 제조업과는 조금 다르다. 제조업이면서 서비스업 같기도 하고 레저산업 같기도 하다. 뭐라 하나로 단정 지을 수 없는 성격이다. 굳이 말하자면 '꿈을 만들어내는 제조업'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쇳덩어리 기계 가운데 여체(女體)에 비견되는 물건은 자동차뿐이다. 아무도 드림노트북, 드림휴대폰, 드림오디오, 드림TV라고 말하지 않지만 자동차시장에는 엄연히 드림카(Dream car)가 존재한다. 그러니 기계에 흠뻑 빠진 몽상가들이 자동차산업에 뛰어들었을 것이다. 자동차산업이 거대한 글로벌 비즈니스가 된 지금, 규모는 더 커졌고 냉철한 전문가들은 넘쳐나지만 예전처럼 차에 미친 몽상가들은 점점 찾아보기 어려워지는 것 같다. 그래서 오랜만에 만난 '괴짜' 호라치오 파가니가 더 반가웠던 건지도 모르겠다.
제3부 Technology_ 달리기 그 이상의 예술
스마트카 Smartcar "How to drive smart? 자동차는 이제 IT 제품입니다"2001년, BMW는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그해 등장한 뉴 7시리즈는 충격 그 자체였다. 당시 BMW 디자인 총책임자로 부임한 디자이너 크리스 뱅글은 이전까지 우리가 알고 있던 BMW의 모든 것을 단번에 바꿔놓았다. 그 급작스러운 변화가 비인기 모델이나 엔트리급 차종이 아닌 기함(Flagship)에 처음 적용되었다는 사실은 파격적이다. 자동차 라인업에 있어 기함이란 말 그대로 브랜드의 이미지와 기술력, 품질 등 모든 것을 대표하는 최상급 차종이다. 어떤 회사든 기함에는 함부로 손을 대지 않는 게 그때까지의 불문율이었는데, BMW는 엄청난 충격파를 던지며 완전히 새로운 7시리즈를 세상에 선보였다.
뉴 7시리즈의 얼굴에서 이전의 흔적이라고는 좌우 각각 두 개씩인 동그란 헤드램프와 BMW 특유의 키드니 그릴(Kidney grille, 좌우 대칭형인 프론트 그릴의 생김새가 마치 '신장' 모양 같다고 해서 붙은 이름)뿐. 이렇듯 새로운 7시리즈가 베일을 벗자 혹평과 비난이 쏟아졌다. 특히 위로 불쑥 부풀어 오른 듯한 트렁크 리드(Trunk lid)는 뭇매를 맞았다. 가장 혁신적인 변화였기에 가장 많이 회자되기도 한 이 부분은 훗날 뱅글 부트(Bangle boot)라는 별칭을 얻으며 BMW 스타일링 혁신의 대명사로 자리 잡았다. 논란의 중심에 서 있었지만 크리스 뱅글이 그려낸 뉴 7시리즈는 판매와 브랜드 이미지 제고 등 모든 면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고, 결국 다른 자동차회사들의 혁신과 진화를 부추겼다.
그로부터 몇 달 뒤, 그 차를 시승할 기회가 왔다. 첫인상은 역시나 낯설고 어색했다. 하지만 운전석 도어를 여는 순간, 외관상의 변화는 새 발의 피였음을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시동조차 걸 수 없었다. 낯선 모습에 당황해서만은 아니다. 일단 스마트키(Smart key)라는 것을 슬롯(Slot)에 끼워 넣어 전원을 연결한 다음 그 옆에 있는 스타트 버튼(Start button)을 눌러서 시동을 거는 방식! 지금은 국산 소형차에도 쓰일 만큼 보편화된 기술이지만 10여 년 전만 해도 너무도 낯선 방식이었다.
시동을 걸고는 또 차를 움직이는 게 문제였다. 스티어링 칼럼(Steering column)에 달린 6단 자동기어 레버는 이전까지 알고 있던 미국식 칼럼 시프트(Column shift)와는 본질적으로 달랐다. 손가락 끝만 갖다 대면 섬세하게 D나 R 레인지로 이동하는 형태로 순도 100퍼센트의 전자장비 같다고나 할까? 하지만 일단 움직이고 나자 BMW 특유의 후련한 주행감이 전해져왔다. 아날로그적인 주행 감각이 느껴지자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