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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눈에는 희망만 보였다

강영우 지음 | 두란노
내 눈에는 희망만 보였다

강영우 지음

두란노 / 2012년 3월 / 299쪽 / 14,000원



나의 장애는 축복이었다



장애를 딛고 명문 가문을 만들다

2011년 크리스마스 아침, 나는 크리스마스 예배를 드리고 아내와 동생들 내외와 함께 큰아들 진석이네 집을 찾았다. 정말 오래간만에 온 가족이 한자리에 모여 크리스마스를 보내게 되니 가슴이 벅차올랐다. 어느 때보다 나의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가득 피어오르고 있었다.

시력을 잃고, 부모님마저 떠나보낸 후 누나와 두 동생과 함께 단칸방에 나란히 누워 있던 그 옛날, 누군가 나에게 행복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 테니 희망을 가지라고 말했다면, 그딴 헛소리는 집어치우라고 했을지도 모른다. 누나마저 하나님 곁으로 떠나보내고, 맹학교로, 철물점으로, 고아원으로 뿔뿔이 흩어졌던 우리 삼 남매가 처음으로 한집에 살게 되었을 때, 그때도 나는 이런 미래를 꿈꾸지 못했다. 열 평 남짓한 집에서 우리 삼 남매가 나란히 누워서 생각했던 미래는 그리 밝지만은 않았다. 그때는 배불리 먹는 게 소원이었고, 살아남는 것만이 삶의 목표였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나는 참 많은 것을 이루었고, 참으로 복 받은 삶을 살아왔다. 내가 좀 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했느냐, 얼마나 큰 명성을 얻었느냐, 얼마나 힘들게 장애를 극복했느냐를 떠나서, 지금 이렇게 행복한 미소를 머금고 가족들과 함께 인생의 마지막을 준비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축복받은 삶을 살아왔다고 생각한다.

50년 전, 세상에는 우리 삼 남매만 덩그러니 남겨졌었다. 그리고 40여 년 전, 미국으로 내가 유학을 왔을 때 나와 사랑하는 아내, 그렇게 단 둘뿐이었는데, 이번 크리스마스에 모두 모이고 보니 이민 1세대인 우리 삼 남매와 배우자들의 합이 여섯이요, 이민 2세대인 우리 아들들과 조카들, 그리고 녀석들의 배우자를 합해 열네 명이나 되었다. 그리고 그 아래로 올망졸망 미국 강씨네 3세대인 손주들이 여섯이나 된다. 지금 나는 세상 사람들에게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다. 나는 축복받은 사람이고, 나의 장애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내리신 저주가 아닌 축복이었다고. 하지만 내가 항상 축복받은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니다. 나도 한때는 하나님께서 나한테 저주를 내리셨는지도 모른다고 좌절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지금 나는 당당히 말할 수 있다. 나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복된 자녀이다.

장애는 저주인가, 축복인가?

화물차 대신에 소가 달구지를 끌고, 한강에 뱃사공이 있는 돛단배가 떠다니던 시절에 나는 경기도 양평군에 있는 작은 시골 마을 문호리에서 태어났다. 위로는 예쁜 누나가 있었고, 아래로는 고집쟁이 남동생이, 그리고 막내로 귀여운 여동생이 하나 있었다. 아버지는 농사도 제법 크게 지으셨고, 강줄기를 따라 운송업을 하시기도 했다. 부모님은 문호리에 교회를 직접 지을 정도로 독실한 기독교 신자셨다. 부모님은 이북에서 남쪽으로 내려오신 목사님과 전도사님들을 늘 기쁜 마음으로 거두어 주셨다.

내 동생 영수는 아직도 가끔씩 어머니가 즐겨 부르시던 찬송가 411장(새 563장) "예수 사랑하심은"이라는 찬송을 흥얼거린다. 60년의 세월 속에서 이제는 어머니의 얼굴조차 가물가물하다는 동생의 기억 속에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는 건 어머니의 찬송이었다. 그렇게 우리 집에서는 찬송 소리가 떠난 적이 없었다. 나도 가끔씩 내 손주들을 부여안고 저절로 흥얼거리는 노래가 어머니가 불러 주시던 찬송이라는 게 가슴을 따뜻하게 한다.

부족한 것 없이 넘치는 사랑 속에서 자라오던 나를 시기라도 하듯 불행은 갑자기 찾아왔다. 한국전쟁 동안 여러 번 피난을 떠났던 우리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는 아버지의 사업 밑천이었던 돛단배들이 모두 불타 버린 후였다. 갑자기 기울어진 가세에 고향에서의 재기가 힘들 것이라고 판단한 아버지는 식구들을 데리고 서울로 이사를 하셨다. 그때까지도 나는 참 평화로운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서울로 이사한 지 채 1년도 되지 않아 아버지가 병환으로 세상을 떠나시고, 집안에 불운이 겹치기 시작했다.

망막박리 진단을 받다: 내가 중학생이었던 1958년의 어느 봄날이었다. 나는 언제나처럼 숙제 대신 친구들과의 축구를 택했다. 골키퍼였던 나는 골대 앞에서 "수비! 수비!"를 외치고 있었다. 그러나 공은 이미 상대편 친구의 발끝을 떠나 나를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그때도 승부욕 하나는 누구 못지않았던 나는 날아오는 공을 향해 몸을 날렸다. 순간, 공이 내 왼쪽 눈을 세차게 때렸다. 어찌나 아프던지 비명도 제대로 지르지 못했던 것 같다. 달려온 친구들이 나를 둘러싸고 물었다. "영우야, 괜찮아?" 나는 아이들의 걱정에 아무렇지도 않게 툭툭 흙을 털고 일어나서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 뭐 이런 것 가지고 호들갑이냐?" 나는 사나이 체면에 울고불고할 수 없었다. 그래도 머릿속으로는 오만 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눈 주위가 시퍼렇게 멍이 들거나 부어서 집에 가면 어머니한테 공부 대신 축구한 사실이 들통 나 혼이 날 테니 말이다. 지금 생각하면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행동이었나 싶다. 하지만 그 당시 나는 어머니한테 혼이 나고 어머니를 실망시켜 드리는 것이 가장 두려웠다.

문제는 눈 주위의 통증은 바로 사라졌는데, 공을 맞은 후 보이기 시작한 무수한 점들이 며칠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상황이 이 정도가 됐으면 사태의 심각성을 스스로 깨닫고 어머니에게 이실직고를 했어야 했는데, 그때는 내가 너무 무지했다. 당시 나는 지독한 근시였다. 지금이야 고도의 근시가 망막박리의 원인이 되고, 망막박리가 되면 눈앞에 무수한 점이 보인다는 것을 모르는 안과 의사가 없지만 당시의 의료 수준은 지금과는 많이 달랐다. 내가 저절로 눈이 나아지기만을 기다리면서 보낸 시간이 3주였고, 망막박리라는 진단을 받기까지 5명의 안과 전문의를 만나야만 했다. 그렇게 6개월이란 시간이 속절없이 흘렀다.

망막박리, 그러니까 망막이 떨어지는 것은 벽에서 벽지가 떨어지는 것과 비슷하다. 망막이 떨어지면 바로 붙여야지, 그렇지 않으면 망막에 영양 공급이 되지 않아 망막이 말라 비틀어져 죽어 버리고 만다. 그런데 내가 처음 망막박리 진단을 받았을 때는 이미 가망이 없는 상태였다. 하지만 포기할 수는 없었다. 나는 앞으로 한 집안을 책임질 장남이었고, 우리 어머니의 꿈과 희망이었기 때문이다. 어머니와 나는 하나님께서 함께할 것이라는 믿음을 굳게 붙들었다.

절망 가운데 붙든 기도: 매일매일 새벽기도로 하루를 시작하시던 어머니의 기도와 바람 속에서 나의 치료는 시작되었다. 100일 동안 나는 절대 안정요법을 처방받았다. 침대에서 먹고, 마시고, 싸고, 목욕을 하고, 그렇게 100일가량을 보냈지만 결과는 실패였다. 길어지는 입원, 반복되는 수술로 전쟁 통에 얼마 남지 않았던 재산마저 모두 탕진하고 말았다. 그래도 난 작은 꿈이 있었다. 국립의료원 병실의 창가 쪽 침대에서 입원 생활을 할 때 난 많은 시간을 옥상에 올라가 혼자 보내곤 했다. 그 시절 나의 소박한 꿈은 시력을 회복해서 다른 학생들처럼 교복을 입고 학교를 가는 것이었다. 하나님께 약속도 참 많이 했다. 눈만 잘 보이게 되면, 또 내 꿈만 이루어 주신다면, 동생하고 싸우지도 않고 어머니가 원하시는 대로 정말 공부도 열심히 하고, 교회도 더 열심히 다니겠다고 말이다. 그렇게 보낸 시간이 2년이었다.

1960년 7월의 어느 날, 밤 10시가 넘은 늦은 시간에 나의 주치의이신 구본술 박사님이 나를 부르셨다. "아무리 의술이 발달한 나라로 간다고 해도 지금의 의술로는 너의 시력을 회복할 수가 없을 것 같구나. 이제 너는 재활의 길을 찾아야만 한다." 이미 예상하고 있었지만, 의사 선생님이 직접 내가 시각장애인으로 살아야만 한다는 이야기를 하니 그 사실이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나마 남아 있는 시력도 언젠가는 잃게 될 것이라는 말에 나는 그 자리에서 주저앉고 말았다. 어쩌면 어머니의 충격은 나보다 더 컸을지도 모른다.

어머니는 내가 평생을 시각장애인으로 살아야 한다는 말을 들으시고,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한 채 결국 뇌졸중으로 얼마 후 세상을 떠나셨다. 내가 눈을 잃은 그날, 나는 어머니도 잃었다. 졸지에 가장이 된 큰누나는 학업을 포기하고 평화시장 봉제공으로 취직했다. 밤낮없이 그렇게 거의 2년을 일만 하다가 누나도 어머니를 따라 하나님 곁으로 가 버렸다. 누나가 떠나던 그날, 나는 어린 두 동생을 끌어안고 울고 또 울었다. 세상에 이런 가혹한 형벌이 또 있을까? 내가 무슨 죄를 그렇게 크게 지었다고 이런 벌을 내리시는 건지 하나님이 원망스럽기만 했다. 불과 4년 만에 나는 부모도, 누나도, 나의 눈도 잃었다. 나는 절망 속에서 몸부림치고 있었다. 그래도 나는 단 한 번도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다만 나의 믿음이 부족해서 고쳐 주시지 않는다는 생각 때문에 오히려 죄책감에 시달렸고, 급기야는 하나님에게 버림받았다고 믿었다.

하나님의 대답은 "노(No)": 내가 나도 알 수 없는 너무나 큰 죄를 지어 평생토록 믿고 의지하며 살아온 신에게까지 버림받은 쓰레기 같은 존재라는 생각이 내 머릿속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도대체 이제 15살인 어린 내가 얼마나 큰 죄를 지었기에 하나님께서 이러시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수십 번, 수백 번을 하나님께 여쭈었다. "왜요? 왜 하필 나지요?" 그리고 꼭 부탁드렸다. 눈을 고쳐 달라고. 당시 나는 하나님께서 나의 기도에 응답을 안 하고 계신다고 생각했다. 하나님의 대답이 "노(No)"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정말 꿈에도 하지 못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얼마나 위대한 계획을 세워 놓고 계시는지 그때 나는 알지 못했다.

1964년 나는 우연히 기독교 방송의 <인생 상담>이라는 프로그램을 청취하게 되었다. 진행하시는 분이 고향 문호리교회를 통해 잘 알고 있었던 반병섭 목사님이었다. 어찌나 반갑던지 방송이 끝나기도 전에 나는 이미 나의 갈등을 고백하는 편지를 써 내려가고 있었다. "왜요? 왜 내 기도에 응답하시지 않는 것일까요?" 반병섭 목사님이 주신 대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대답하셨습니다. '노(No)'라고요. 하나님께서 당신을 위해 준비하시는 일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두 곳을 인용해 말씀해 주셨다. 이것이 나의 장애 극복의 첫 걸음이었고, 나의 신앙적 갈등을 해결하는 열쇠가 되었다. 첫 번째 말씀은 요한복음 9장 1-3절이다.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어려서부터 그렇게 성경 구절을 외웠는데, 왜 이 부분은 기억하지 못했는지 모르겠다. 반병섭 목사님의 말씀을 듣는 순간 나는 커다란 망치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왜 이 사실을 모르고 그렇게 나를 미워하며 열등감에 빠져 살았을까? 나의 실명은 죄의 대가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하나님의 놀라우심을 드러내기 위한 방법이라는 것을 그때 처음 깨달았다. 두 번째 말씀은 고린도후서 12장 7-10절의 말씀이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때에 강함이라."

그제야 나는 나의 믿음이 부족한 것이 아니었다는 걸 깨달았다. 사도 바울이 믿음이 부족해서 고쳐 주시지 않은 것이 아니라 약함 속에서 주의 권능을 드러내시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분명히 나의 고난에도 주님의 계획과 목적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이후로 나는 단 한 번도 나의 눈을 고쳐 달라는 기도를 드리지 않았다. 드디어 나는 장애를 극복해야 할 이유를 찾았던 것이다.

희망에 장애는 없다



우리는 누군가의 등대요 지팡이다

아내와의 첫 만남: 지금으로부터 50년 전 5월 나는 세상에서 가장 어여쁜 내 아내를 처음 만났다. 보슬보슬 내리던 가랑비를 맞으며 나는 조선일보사 뒤쪽에 있던 당시 중앙 소녀단 건물을 향해 터덜터덜 걸어갔다. 그곳에서는 여대생들이 걸스카우트 지도자가 되려고 훈련을 받고 있었다. 그때 나는 서울 맹학교의 수업료 때문에 힘들어하고 있었는데, 그 사정을 알게 된 권순귀 씨가 그 모임에서 나의 등록금 일부를 모금하는 특별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되었다. 그래서 나도 그 행사에 참석하게 된 것이다. 재잘거리는 여학생들 사이에서 뻘쭘하게 서 있으려니 어지간히 힘이 들었다. 시간이 어떻게 지났는지도 모르게 모임이 끝났고, 권순귀 씨가 "내가 영우를 버스 정류장까지 바래다주고 올 테니까 잠깐들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라고 했다. '아, 이제 집에 가는구나' 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데 또랑또랑한 목소리의 한 여대생이 "언니, 제가 다녀올게요" 하고 자원을 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밝고 명랑한 어조로 자기는 숙명여자대학 영문과 1학년인 석경숙이라고 소개했다. 나는 그때 희미하게나마 세상을 볼 수 있었다. 큰 눈에 환한 미소를 한 '누나'는 거침이 없었다. 내가 시력 회복을 위해 보낸 시간을 알지 못했던 그녀는 중학생 교복을 입고 서 있던 나를 아무렇지도 않게 동생으로 만들어 버렸다. 구김살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여대생 누나와 중학생 교복을 입고 서 있던 나. 그것이 우리의 첫 만남이었다. 아내는 비교적 부유한 집안의 무남독녀 외동딸로 태어나 양친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다. 천성적으로 인정이 많은 부모님 아래서 자라면서 자연스레 자신보다 힘든 사람들을 도우며 살아야 할 것을 배운 아내는 나를 돕는 것을 전혀 어색해하지 않았다. 불쌍한 처지에 놓인 나에게 온정의 손길을 내미는 것이 그녀에게는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던 것이다.

석은옥 이름 석 자로 프러포즈를 하다: 그렇게 6년 동안 항상 내 곁에서, 나를 응원하고 지켜줄 것이라고 생각했던 누나가 어느 날 중요한 문제를 상의하고 싶다고 했다. 나를 도우면서 시각장애인 재활에 관심이 깊어졌던 누나는 미국으로 1년간 연수를 떠날 것을 결정한 것이었다. 미국 말 중에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out of sight, out of mind)"라는 말이 있지만 누나를 향한 나의 마음은 변함이 없었다. 아니, 갈수록 애틋해져만 갔다. 길고도 긴 1년이 지나 돌아온 그녀는 하얀 지팡이 하나를 선물로 들고 왔다. 나에게 미국에서 배운 보행 교육을 시켜주겠다는 그녀에게 나는 불쑥 마음에도 없는 말을 했다. 그녀의 마음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미국에서 좋은 남자 만날 줄 알았는데, 그냥 왔네? 누나가 빨리 시집을 가야 내 순서도 오지." 그러자 한참 동안 신이 나서 지팡이 사용법을 이야기하던 그녀가 뾰로통한 목소리로 "연대에서 맘에 드는 아가씨라도 만났나 보지?"라고 되물었다. 그때 난 알았다. 그녀의 마음이 나와 같다는 것을. 그날 나는 그녀에게 프러포즈를 했다. 눈알만 한 다이아몬드 반지 대신에, 나는 그녀에게 이름 석 자를 선물했다. "석. 은. 옥."

내가 학교를 졸업하고 유학을 하면서 지내야 하는 자갈밭을 걷는 것과도 같은 힘든 '석의 시대 10년.' 아이들을 양육하고, 직장에서 자리를 잡고, 열심히 사회의 일원으로 자라는 '은의 시대 10년.' 그리고 우리가 받은 은혜와 사랑에 보답하며, 봉사하는 삶을 살아가는 '옥의 시대 10년.' 이렇듯 그녀에게 지어준 이름 석 자에 나의 꿈과 미래, 그리고 비전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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