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페포포 기다려
심승현 지음 | 홍익출판사
파페포포 기다려
심승현 지음
홍익출판사 / 2012년 4월 / 284쪽 / 12,800원
어느 시인의 사랑
15세 소녀 엘리자베스는 낙마 사고를 당하여 척추를 다쳤고, 몇 년 후엔 가슴동맥 파열로 인해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았다. 엘리자베스의 유일한 낙은 책을 읽고 시를 쓰며 시간을 보내는 것이었다. 그녀는 39세 때 시집을 냈고, 그해 어느 날 편지 한 통이 날아왔다.
“당신의 시를 온 마음 다해 사랑합니다. 당신의 시는 내 속으로 들어와 나의 한 부분이 되었습니다. 온 마음 다해 그 시를 사랑하고, 그리고 사랑합니다, 당신을.” - 1845.1.10.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여섯 살 연하인 로버트의 사랑을 거부했다.
“나에게서 볼 만한 것은 아무것도, 들을 것 또한 아무것도 없어요. 제가 쓴 시가 저의 꽃이라면 저의 나머지는 흙과 어둠에 어울리는 한낱 뿌리에 불과해요.”
하지만 로버트는 이에 굴하지 않고 끈질기게 구애편지를 보내고 또 보냈다.
“그대여, 사랑해 주지 않으시렵니까? 그대의 사랑이 지속되는 한 언제까지나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죽음이란 아무것도 아니랍니다. 그대, 사랑해 주지 않으시렵니까.” - 로버트 브라우닝
결국 주위 사람들의 만류에도 한결같은 로버트의 마음을 받아들여 둘은 부부의 연을 맺게 되었다.
이후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행복하게 살았고, 로버트의 지극한 사랑 덕분에 엘리자베스는 병을 견뎌냈다. 그리고 4번의 유산 끝에 마침내 사랑스러운 아들을 낳았다. 이들의 행복한 결혼생활은 결국 15년 만에 엘리자베스가 로버트의 품에서 죽음을 맞이하며 끝났지만 둘의 진실한 사랑은 영원히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엘리자베스가 남편 로버트 브라우닝에게 바친 시
내가 당신을 어떻게 사랑하느냐구요? 헤아려 보죠.
존재와 영원한 영광의 끝에 이를 수는 없을지라도
내 영혼이 닿을 수 있는 그 깊이만큼, 넓이만큼, 높이만큼 당신을 사랑합니다.
일상의 모든 것이 햇살과 촛불을 소중히 여기듯이 당신을 사랑합니다.
권리를 위해 싸우는 투사들처럼 자유롭게 당신을 사랑합니다.
사람들이 칭찬을 바라지 않고 착한 일을 하듯이 순수하게 당신을 사랑합니다.
나를 슬프게 만들었던 오랜 비탄을 이기려 했던 열정으로,
어린 시절의 맑고 순수했던 동심으로, 당신을 사랑합니다.
나의 잃어버린 성자들과 함께 사라진 줄 알았던
그 지극한 정성으로, 당신을 사랑합니다.
내 모든 삶의 숨결과 미소, 그리고 눈물로써 당신을 사랑합니다.
신이 허락하신다면 나의 죽음이 닿는 그 너머까지, 아니 그 이상으로 더욱 당신을 사랑하겠습니다.
귀를 기울이면
중학교 2학년 때, 나는 학생들 사이에서 눈에 띄지 않는 아이였다. 공부도 잘하지 못했고, 운동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 뛰어난 외모도, 활달한 성격도 아니어서 친구들에게는 있는지 없는지조차 모르던 아이였을 것이다. 어느 날 미술시간에 석고 데생을 그리게 되었다. “자, 오늘은 아그리파(로마제국의 장군이자 정치가, 얼굴 윤곽이 뚜렷한 석고상)를 그릴 거예요.”
선생님은 완성이 덜 된 내 그림을 아이들에게 보여 주었다. “자, 주목! 데생은 이렇게 그리는 거예요.” 난 얼굴이 빨개졌다. 그런 말을 듣는 게 어색했고, 주목받는 것 또한 너무나 창피했기 때문이다. 수업이 끝나자 미술 선생님은 “파페는 교무실로 와!”라고 하셨다.
선생님은 책상을 열어 열쇠를 하나 꺼냈다. “그림을 그리고 싶을 땐 언제든지 미술실에 와. 알겠지? 자! 받아.” 하지만, 열쇠를 들고서도 나는 미술실에 들어가지는 못했다. 그 뒤로 한두 번 미술실을 지나친 적은 있지만 사춘기 시절의 이유 없는 반항심이 내 맘 속에 가득 차 있었기에 미술 선생님의 배려가 참견 같아 싫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미술 선생님은 나의 소질을 알아보고 큰 배려를 해주셨던 것인데…… 그때 난 그림 그리는 사람이 될 줄 상상도 못했고, 미래에 대한 꿈조차도 없었다.
하지만 난 지금 그림을 그려 먹고사는 만화가가 되었다.
선생님은 이런 나의 미래를 미리 알고 계셨던 것처럼 미술실 열쇠를 선뜻 건네주셨던 것이다.
당신은 그림을 잘 그리시는군요.
당신은 아주 좋은 목소리를 가지고 계시네요.
글을 잘 쓰시네요.
누군가 이렇게 귀띔을 한다면 한번쯤 그의 말에 귀를 기울여 보기 바란다. 그 한 마디가 먼 미래 자신의 삶에 가장 중요한 부분이 될지도 모르니까……
멘토와 멘티
TV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훌륭한 멘토를 만나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참가자들을 보며 문득 부러움을 느낀 적이 있다. 스무 살 무렵의 나에게도 멘토가 있었다면 지금의 내 인생은 많이 달라져 있을 텐데…… 캄캄한 밤길을 걷고 있을 때, 인생이 내게 던지는 질문에 답을 찾을 수 없을 때, 누군가 내게 등불 하나 건네주며 등을 두드려 준다면 그 사람이 바로 나의 멘토다.
어느 역사의 미화원 아저씨
차근차근 쓸어 나갑니다.
정성을 다해 꼼꼼히 씁니다. 좌에서 우로, 우에서 좌로 두 번씩 쓸어냅니다.
같은 공간을 매일 쓸 때는 주어진 시간을 적절히 나누어야 합니다.
너무 서두르다 보면 중간에 지치고 너무 천천히 쓸다 보면 재미가 없어 의욕이 사라집니다.
청소는 즐겁게 하는 것. 그 역사의 미화원 아저씨는 늘 즐거워 보입니다.
더러운 곳이 있어 내가 깨끗하게 청소할 일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매일매일 청소를 하다 보면 지루할 때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가끔씩 뒷걸음질하며 쓸기도 합니다.
또 어떤 때는 탁탁 끊어 가며 쓸기도 합니다.
그리고 가끔 콧노래를 부릅니다.
아침 라디오에서 들었던 유행가를 따라 부르며 어깨까지 들썩입니다.
열차가 도착하면 많은 사람들이 우르르 내립니다. 무거운 짐을 든 사람도 있고 아이와 같이 내리는 엄마도 보입니다. 모두들 무언가에 쫓기듯 허겁지겁 열차를 빠져나와 가야 할 곳으로 종종걸음을 칩니다. 시골에서 올라온 할아버지가 길을 묻지만 사람들은 바쁜 몸짓으로 지나쳐 버립니다. 그러자 미화원 아저씨가 재빨리 다가가서 자세히 알려 드립니다. 할아버지는 연신 고맙다는 말을 하시고는 엉뚱하게도 반대 방향으로 향합니다. 아저씨가 달려가서 다시 한 번 알려 드립니다. 그리고는 빠른 걸음으로 청소하던 곳에 돌아옵니다.
한 청년이 아저씨의 옆을 지나가면서 다 마신 음료수 캔을 별일 아니라는 듯 바닥에 버립니다. 미화원 아저씨는 말없이 그것을 쓸어 휴지통에 담습니다. 청소를 마무리하고 나면 어느새 또 어스름한 저녁입니다.
노을이 지는 역사에서……
할 일을 마친 아저씨는 창밖의 노을을 바라봅니다.
그의 얼굴에 엷은 미소가 보입니다.
아마도 스스로에 건네는, 수고했다는 인사일 겁니다.
그의 어깨 밑으로 땀에 흥건히 젖은 셔츠가 보입니다.
오늘도 그의 하루가 역사 안에서 노을과 함께 저물어 갑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 『웃음』 중에서
사람의 몸이 창조되었을 때, 모든 부위가 저마다 대장이 되려고 했다. 뇌가 말하길, 내가 모든 신경계를 관장하고 있으니 대장 자리는 당연히 내 차지다. 발들이 말하길, 우리가 있기에 몸이 서 있을 수 있으니 우리가 대장이 되어야 한다. (…) 마지막으로 똥구멍이 자기가 대장이 되겠다고 나섰다. 다른 신체 부위들은 코웃음을 쳤다. 한낱 똥구멍 주제에 우리를 다스리겠다고? 그러자 똥구멍이 성깔을 부렸다. 잔뜩 오므린 채로 제구실을 안 하기로 한 것이다. 이내 뇌는 열에 들뜨고, 눈은 흐릿해지고, 발은 걷기가 힘들 만큼 약해지고, 손은 힘없이 축 늘어지고, 심장과 허파는 생존하기 위해 버둥거렸다. 결국 모두가 뇌에게 간청했다. 대장 자리를 똥구멍에게 양보하라고. 그렇게 해서 똥구멍이 대장 자리에 올랐다. 신체 부위들은 비로소 각자의 활동을 재개할 수 있었다.
세탁소
새로 이사 간 동네에는 유난히 세탁소가 많다.
이삿짐을 정리하고 옷가지를 챙겨 어느 세탁소로 갈까 고민하던 중, ‘믿음세탁소’ 안에서 불빛 너머로 홀로 앉아 짜장면을 드시는 할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빈 접시를 들고 나오던 할아버지와 눈이 마주쳤다. “세탁하시게?”
“아, 저……”
“그럼 들어오세요.”
얼떨결에 대답하고는 세탁소 문을 여는 순간, 괜히 따라 들어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래된 세탁소에서 풍기는 퀴퀴한 냄새와 깨끗하지 않은 시설이 믿음이 가지 않았다. 하지만 옷을 잔뜩 싸들고 들어선 참이라 다시 나가기도 뭣하고, 주인 할아버지의 살가운 인사 때문에 그냥 옷을 맡기기로 했다. 며칠이 지난 뒤 할아버지는 내가 맡긴 여덟 벌 중 다섯 벌을 가져다 주셨고, 나머지는 며칠 뒤에 가져다주겠다고 하셨다.
나는 세탁이 잘 되었나 보려고 가장 아끼는 옷부터 꺼내 보았다. 그런데 블라우스의 옷깃 테두리가 하얗게 변한 게 아닌가! ‘뭐야, 때를 벗긴 거야, 옷을 벗긴 거야……’ 혼자 씩씩대며 다시는 그 집에 맡기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며칠 뒤 저녁, 누군가 벨을 눌러 문을 열자 경비 아저씨가 세탁소에서 맡기고 간 나머지 옷을 주셨다. 그중 한 셔츠에 쪽지가 붙어 있었다. ‘주머니에 5만원짜리가 있었음니다.’
얼른 주머니를 보자 꼬깃해진 5만 원권 지폐가 그대로 들어 있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경비 아저씨가 흐뭇하게 웃으며 말씀하셨다. “세탁소 영감이 가면서 이 말을 전하라던데요. 돈은 예쁘게 간수해야 그 돈이 다른 돈을 불러온다고요.”
우리 동네 믿음세탁소
다음 날 퇴근길에 음료수를 사들고 세탁소에 들렀다. “할아버지, 주머니에 돈 고맙습니다.” 그러자 할아버지는 당연한 일인데 뭘 이런 걸 사왔느냐며 오히려 민망해하셨다. 처음 선입견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 믿음세탁소. 어느 일에나 겉모습만 보고 쉽게 판단하는 나의 어리석음을 깨우쳐주었다. 할아버지는 내게 가게든, 인간관계든, 세상살이든 오래가는 비결은 가까이 있음을 가르쳐주었다. 물건에 앞서 신뢰를 파는 가게, 물질적 이익이 아니라 마음을 나누는 인간관계, 그때그때 요령을 부리며 살기보다는 자기만의 신념대로 소신껏 사는 것의 소중함…….
행복이나 성공의 원칙은 의외로 단순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마저도 잘 지키지 못한다. 세상의 모든 불행은 그래서 생기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