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김병후 지음 | 나무생각
너
김병후 지음
나무생각 / 2012년 1월 / 336쪽 / 13,000원
너의 탄생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서로 관계를 맺고 산다. 관계는 나 이외의 다른 '나'가 존재해야만 가능하다. 사랑은 그런 인간과 인간을 연결시켜 관계를 맺는 기능을 한다. 연인 간의 사랑은 친밀한 애착관계에서 이뤄지고, 사회적 사랑은 인간 집단을 형성해 준다. 서로를 연결시켜주는 기능이 진화할수록 인간 집단인 사회는 그 규모가 커지는 것이다. 같은 도시에 살고 있으면서 평생 한 번도 만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같은 시민으로 규정된다. 만나지 않으면 친밀도는 형성되지 않지만 만나면 의지와 상관없이 직접적 관계가 형성될 수 있다. 일단 관계가 형성이 되면 모든 상황은 그에 따른 관계의 규칙을 따르게 된다. 그러나 그때마다 새로운 규칙이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삶에는, 과거 그와 유사한 수많은 관계가 이미 존재하였기에, 셀 수 없을 만큼의 다양한 규칙이 늘 선행한다. 새로 관계를 맺는 두 사람의 마음속에서는, 서로 다른 무의식적 규칙이, 만나는 순간 작동되기 시작한다. 이 모든 관계는 '나' 아닌 '너'로 인해 시작, 혹은 작동된다.
'너'는 누구인가?
개인의 능력을 극대화해야 하는 것은 이 사회를 살아가기 위한 '나'의 가장 중요한 과제다. 나를 강화하는 것이 개인의 과제임에 틀림없지만, 그렇다고 남이 없는 나는 존재할 수 없다. 나의 성공은 역설적이지만 남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그 결과가 드러난다. 남보다 조금이라도 빨리 하거나 더 낫게 해내면 성공하는 것이다. 그러니 매일매일의 삶은 나를 갈고닦으면서 너와 관계를 맺고 사는 것이다. '너'는 나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세상의 모든 존재다. 그 많은 존재 중에서 어느 시점에 너는 나의 '너'가 된다. 가깝게는 사랑하는 연인으로 너를 만날 수도 있고, 회사 구성원으로서의 너도 만날 수 있다. 그렇게 나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너와 그에 맞는 관계를 가지게 된다. 모든 관계에는 '너'라는 관계가 선행한다. 그 관계 가운데는 친구인 '너'도 있고, 일시적인 만남의 '너'도 많을 것이다. 때론 나에게 적대적인 '너' 때문에 고통을 겪기도 하고, 평생을 같이 할 것 같던 '너'와 헤어지기도 한다. 그렇게 '나'는 수많은 '너'와 관계를 맺고 아파하고 갈등하고 행복해하며 살아간다.
'나'에게 '너'가 없는 인생은 없다. 수많은 '너'가 존재하고 그런 '너'에 의해 내가 규정된다. 그렇게 소중한 '너'를 지금까지 '나'만큼 생각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이 오히려 놀랍기도 하다. '너'없는 '나'는 존재할 수 없다. 모든 '너'와의 관계가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나'는 느끼지만 '너'는 아직 뚜렷하지 않다. 우리가 실생활에서 울고 웃는 이유는 모두 '너'와의 관계 때문이다. 나에게 가장 소중한 '너'는 누구인지, 그 '너'와의 관계 때문에 외롭지는 않은지, 아니면 아직 만나지도 못한 미지의 너를 그리워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과거에 한없이 친했다가 지금은 더 이상 만나지 않는 사람도 '너'에 해당하는 것인지…. 너는 오직 하나만 있는 것일까? 도대체 너는 누구인가?
'너'의 마음읽기
나에게 행복과 불행의 감정을 가져다주는 너의 마음을 어떻게 읽을 수 있을까? 사실 내가 나를 아는 것도 쉽지는 않다. 하지만 나를 아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은 '너'를 아는 것이다. 너를 잘 모르는 것은 너에 대한 정보가 충분하지 않아서 그럴 수도 있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너'가 정말 '너'인지 확신할 수 없어서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너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는 것은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너'를 안다고 생각하고 살았기 때문에 수많은 관계에서 문제가 생겨왔다. 그러나 내가 아는 것이 '너'가 아닌 '나의 생각'이라는 것을 인지한다면 우리의 모든 관계는 달라질 것이다. '너'라고 판단되는 '너'의 실체는 '너'라기보다는 너처럼 행동할 때의 '나의 심정'이다. 너에 대한 판단은 너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너에 대한 나의 감정'이 출발점이 된다.
원숭이들에게 있어서 너의 행동은, 나도 하는 행동이어서 '어떤 의도'를 가진 것인지 명확하게 알 수 있다. 하지만 너에 대한 인식이 진화한 유인원인 침팬지는 너와 나에 대한 인식을 구분하기 시작한다. 인간의 아기들도 '너'의 행동이 나의 그것과 나누어진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아는 것은 인간 사회에서 필수적인 장치다. 원숭이를 비롯해, 인간 외에도 집단생활을 하는 동물들은 얼굴에 정서를 드러냄으로써 다른 구성원인 '너'가 나의 마음을 읽을 수 있게끔 한다. 너와 내가 같은 편이어서 교류를 촉진시켜야 할 경우에는 이렇게 나를 읽기 편하게 해주는 것이 유익하다. 하지만 적대적인 관계의 '너'라면 얼굴에 표정이 나타나는 것을 숨기거나 위장을 한다. 같은 집단 내에서도 경쟁을 하거나, 마음이 읽히는 게 싫다면 우리는 내 표정을 네가 읽을 수 없도록 위장한다.
나의 탄생
나만 모르는 나의 모습
사람들은 나도 잘 알고 너도 잘 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는 진정 '나'와 '너'를 잘 알고 있는 것일까? 거울 속에 비춰진 내 모습조차 100% 내가 아니라고 한다. 그것은 내 본 모습이 아닌, 내 뇌에 그려진 내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나'를 얼마나 알까? 내 뇌가 느끼는 감각과 경험, 기억을 통해 나를 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과연 정확한 나일까? 나를 인식하는 것은 사실 쉬운 일이 아니다. 주관적인 느낌과 경험으로서의 나는 알고 있지만, 객관적인 나 그리고 내가 의식하지 못하는 나는 거의 알지 못할지도 모른다.
탁구를 칠 때 강한 스매싱을 하고 난 후 '독특한 다리 떨기' 행위를 하고 있다는 점을 미처 의식하지 못했다. 그런데 어느 날 동생과 함께 탁구를 치는데, 동생 후배가 우리 형제의 '다리 떨기'가 똑같다는 말을 했다. 그 얘기를 듣고 자그마한 전율을 느꼈다. 어렴풋이 나에게 그런 버릇이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동생까지 같은 행위를 한다는 사실에 놀랐던 기억이 난다. 정말로 동생은 힘껏 공을 때리고 난 후 나와 똑같이 '다리 떨기'를 하는 것이다. 이처럼 나는 모르지만 다른 사람들이 아는 나의 행위가 있다. 이런 행위들은 대부분 무의식적으로 행해지는 반복적 행위들로, 실상 우리 행동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우리 삶은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지는 행위와 생각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의식을 집중하여 행하는 행위와 사고는 상대적으로 아주 적은 부분만을 차지하고 있다. 대부분의 행위와 사고가 의식되지 못한 채 이뤄지고 있음에도, 우리는 '나'를 잘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나의 뇌가 나를 지배한다: 인간은 다른 사람의 의도를 알기 위해 다른 사람의 행위를 내 뇌에 그대로 복제하고는 마치 내가 그 행위를 하는 것처럼 내 뇌의 동일 부위를 활성화시켜서 상대의 의도를 유추한다. 그러니 지금껏 내가 안다고 생각했던 '너'는, 그럴 거라 유추한 '나'의 생각이었던 것이다. 동일한 나의 뇌가 반응을 하는 것이라면, 내가 하는 행위와 다른 사람이 하는 행위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생긴다. 상대의 행위를 복제하는 것은 거울신경세포라는 전두엽에 있는 특정 세포가 담당한다. 이 거울신경세포의 주요 작용은 다른 사람의 행위를 마치 내가 하는 것처럼 나의 뇌에 그대로 복제하고, 그 행위가 어떤 목적에서 비롯된 행위인지를 인식해, 상대의 의도를 해석하는 것이다. 그런데 내 자신의 행동을 하는 경우에는 우측의 거울신경세포가 활성화되고 반대로 다른 사람의 행위를 복제할 때는 좌측 거울신경세포만 활성화되는 것이다. 그래서 상대의 의도를 알기 위해 그 사람의 행위를 복제한 것이 나의 행위인지 다른 사람의 행위인지가 구분되는 것이다. 즉, 너와 나의 행동은 거울신경세포의 활성화 부위가 다름으로 구분된다.
무엇이 생명체를 움직이게 하는가
움직임은 식물과 동물을 나누는 가장 기본적인 기준이 된다. 움직임은 동물에게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동물에게는 움직임을 특화하는 근육세포가 있다. 그리고 이 근육세포에게 움직이라는 명령을 내리는 것이 바로 '뇌'다. 뇌는 근육세포들이 움직이도록 신경 신호를 보낸다. 즉, 뇌는 움직이기 위해 존재한다. 그렇다면 뇌는 아무 때나 움직이라는 신경 신호를 보낼까? 몸 상태가 움직일 수 없는 상태에서도 뇌는 달리라고 명령할 수 있는 것일까? 도대체 무엇이 뇌를 작동하도록 하는 것일까? 뇌가 생존에 필요한 것을 감지하고, 그 내용에 따라 몸을 움직이게 하는 기전이 무엇일까? 그것이 원시 '나', 바로 '마음'이다.
일정하게 반복하는 행위의 입력: 물고기의 경우 뇌에서 운동을 담당하는 전두엽이 지느러미가 움직이도록 신경 신호를 보내고, 먹이를 냄새로 포착하면 쫓아가게 한다. 물고기의 뇌는 끊임없이 주변을 관찰하면서 계속 움직이게 한다. 할 일이 너무 많다. 이 모든 행위를 하면서, 계속해서 지느러미를 움직이도록 뇌가 신호를 보내는 것은 비효율적이다. 처음 하는 행동이나 불규칙적인 행동을 하기 위해서는 뇌가 하나 하나 집중하여 신호를 보내 움직이게 해야 하지만 그 행동이 일정하게 반복된다면 그럴 필요가 없다. 그래서 그런 반복행위를 뇌의 '기저핵'에 등록해 저장시킨다. 기저핵에 등록된 단순 반복행위는 이후 특별한 명령 없이 자동으로 시행되면서 뇌의 부담을 줄이는 것이다.
어류 가운데 땅으로 올라와 진화한 동물들은 지느러미를 움직이는 것보다 더 복잡한 운동능력이 필요했다. 그래서 물고기의 '헤엄치기' 다음으로 저장된 행위가 양서류의 '기어가기'다. 기어가기는 다시 포유류의 '네 발 걷기'로 조정되고, 인간에 이르러 '두 발 걷기'로 다시 재조정되었다. 이처럼 복잡하게 조정된 고정 반복행위는, 원형의 행위에 새로움이 추가되어 조금씩 더 정교한 행위가 되는 것이다. 네 발로 걷기를 가능하게 한 포유류의 전두엽은 더 정교해졌고, 여기에 영장류는 손의 움직임을 더 정교하게 진화시켰다. 운동과 감각을 담당하는 대뇌 전두엽과 두정엽의 용적은 점점 커져간다. 두 발로 걷는 인간은 더 발달된 신경기능을 필요로 하고, 자유로운 손의 사용은 대뇌의 발달을 촉진시켰다. 인간의 경우 일반 운동능력보다는 손의 움직임, 얼굴 표정 짓기 그리고 언어 사용을 위한 영역이 뇌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된다.
나를 만드는 반복행위들: 우리 일상생활의 다양한 행위는 대부분 일정 행위의 반복이다. 걷고, 운동하고, 음식을 만들고, 자동차를 운전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행위를 하면서 공상을 하기도 하고 누군가와 전화를 하기도 한다. 반복되는 행위에 의식을 집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치약을 가운데부터 짜고, 양말을 벗어 소파 밑으로 던지고, 밥을 먹을 때 쩝쩝 소리를 내는 것 역시 의식하지 않는 일상생활인 것이다.
새로운 행위를 습득하는 경우는 다른 사람을 따라할 때가 많다. 공장에 새로 들어 간 사람은 선배로부터 일을 배워야 한다. 정신을 차리고 의식을 집중해 일의 순서를 배워 나간다. 동일한 작업을 수없이 반복하며 시간이 지나면 어느새 자동으로 일을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이처럼 행위의 습득은 수많은 반복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렇게 습득된 행위는 의식의 통제 없이 행해진다.
아무리 중요한 것도 한 번 듣는다고 습득이 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무작정 반복을 계속한다고 입력되는 것도 아니다. 그 행위가 필요하다는 '내 마음'이 있어야만 한다. 신입사원이 하루라도 빨리 일을 습득하려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 일이 습관적인 고정행위가 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마음에도 없는 것을 상대가 억지로 시킨다고 습득되지는 않는다. 정말로 나에게 그 행위가 필요하다는 마음이 있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이런 습관적 행위들이 모여서 '나'가 되기 때문이다.
나의 생존을 위한 일차정서
우리 몸은 늘 자동적으로 항상성을 유지하고자 한다. 항상성이란 '건강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자동적이고 선천적인 생명 장치'다. 그래서 몸이 잘 기능하기 위해서는 에너지원을 흡수하여 사용하는 대사 작용, 외부의 변화와 자극에 대한 기본 반사, 신체 내부를 보호하는 면역 반응에 의해 몸이 항상성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항상성이 유지되는지, 유지되고 있지 않은지 신체를 모니터링하여 감각의 바탕 상태를 형성하는 것이 배경정서다. 따라서 배경정서는 내 몸의 상태가 그 시점에서 어느 정도 기능을 발휘할 수 있을지 알려주는 지표다.
'항상성'을 유지하려는 배경정서를 기반으로 외부 상황에 따라 일어나는 6가지 감정이 일차적 정서다. 기쁨, 슬픔, 혐오, 분노, 두려움 그리고 놀람이 그것이다. 주인을 본 강아지는 기뻐서 꼬리를 흔들고, 깜짝 놀란 고양이는 눈을 크게 뜬다. 화가 난 호랑이는 으르렁거리고, 상한 음식을 보면 얼굴을 찡그리며 피한다. 이처럼 일차적 정서는 '나'의 생존을 위한 개인적 정서로 '나'가 세상에 생존하기 위해 출현한다. 정서를 보이는 것은 어떤 상황이나 현상에 따른 결과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특정 행위를 하기 위한 동인의 기능을 한다. 예를 들어 상한 음식을 보면 혐오의 감정이 나온다. 그러한 감정이 나오는 것은 그 음식을 먹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결과적으로 몸을 보호하는 기능을 하는 것이다.
위험한 상황이 닥쳤을 때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그 자체의 감정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위험한 상황을 피하는 행위를 하도록 유도하기 위해 존재한다. 그래야 생명을 보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일차적 정서는 '나'와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나'를 보호하기 위해 출현한다. 수없이 다가오는 많은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상황 속에서, 집중해야 풀 수 있는 작업에 투여되는 '의식'의 개입 없이, 순간적으로 상황을 파악해 생존하기 위한 행위를 하게 하는 기능이다. 걸음을 걷다가 순간 헛디뎌 넘어질 때면 사람은 누구나 손을 앞으로 짚어 얼굴을 보호하려 한다. 이런 행위가 고정된 행위다. 그래서 모든 사람의 뇌는 넘어지려고 할 때 같은 행동을 한다. 그런데 예외가 있다. 아기를 안고 있는 엄마의 행동은 다르다. 손을 뻗어 자기 얼굴을 보호하는 대신, 자신은 다치더라도 아기를 먼저 보호한다. 자동적으로 정해진 행위 대신, 특수 상황임을 판단하는 '의식'을 사용해 아이를 보호하는 것이다.
특수 행위에만 집중하기 위해 만들어진 '의식': 이처럼 고정된 반복행위로는 해결할 수 없는 삶의 영역을 위해 출현한 것이 바로 '의식'이다. 하등동물은 의식이 필요 없는 반복행위들만으로도 삶을 유지할 수 있다. 하지만 인간과 같은 고등동물은 행동이 너무 복잡하고 다양해 자동화된 행위만으로는 모든 상황을 대처할 수 없다. 다양한 행위들 가운데 전에는 해본 적이 없는 행위들이 많기 때문이다. 이런 특수 상황에 집중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의식'이다. 결국 인간의 삶이란 여러 고정 반복행위들에 약간의 의식이 가미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것을 편의상 '사랑'이라 부른다
너와 나를 연결하는 호르몬
먹고 먹히는 관계가 난무하는 야생의 세계에서 몸을 맞대고 자는 것은 서로 간에 깊은 신뢰가 있어야만 가능하다. '너'가 만들어진 세상에서는 흔하게 볼 수 있는 현상이지만, 너 없이 '나'만 있는 세상에서는 기적 같은 일이다. 그러니 누군가를 믿고 살 수 있다는 것은 그 조건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다. 이런 유대감과 애착은 어떻게 만들어질까? 그 비밀은 바로 옥시토신과 바소프레신이라는 애착 호르몬에 있다. 옥시토신과 바소프레신은 포유류만 갖고 있다. 옥시토신은 새끼를 몸 안에서 기르는 포유류가 새끼를 낳을 때 자궁을 수축시키는 작용을 한다. 포유류가 공룡과의 경쟁에서 얻은 전리품인 태반과 자궁은 옥시토신이라는 호르몬 체계도 함께 들여왔고, 그것이 애착의 행동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어미와 새끼 사이에서 분비되던 옥시토신은 다른 관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새끼들끼리 연합을 하고, 수컷이 암컷과 함께 새끼를 기르는 등 개체들 간의 유대감이 만들어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