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코르 내 인생
조선일보 앙코르 내 인생 팀 지음 | 더숲
앙코르 내 인생
조선일보 앙코르 내 인생 팀 지음
더숲 / 2011년 12월 / 290쪽 / 13,500원
KT를 퇴직한 뒤 전북 부안에 체험농장을 열다_ 박완순(56) 씨경기도 안양에서 이곳 전북 부안으로 귀농한 지 1년, 나는 전북 부안군 진서면 진서리에 '팜스클럽'이라는 체험농장을 운영하고 있다. 우리 농장은 농사를 지어서 수익을 내기보다 고객들에게 농촌 경험을 선사하는 공간이다. 젓갈로 유명한 곰소항이 내려다보이는 야트막한 산비탈을 끼고 있는 1만 5000평(4만 9,500제곱미터) 농장에서는 토종오디·산수유·매실·감·오가피·목련·철쭉·어성초·돼지감자·수박·고추 등 30여 종의 꽃과 나무·작물이 자란다. 손님들이 직접 감나무에도 올라가고, 매실도 따고, 대나무밭에 들어가 죽순을 캐어간다. 얼마 전에는 외국인 영어 강사들이 찾아와 농장에서 매실을 따갔고, 인근 갯벌에서 조개도 캐다가 돌아갔다. 며칠 뒤에는 일가족 8명이 찾아오기도 했다. 도시에서 온 손님들에게 나는 오디 따는 법이나 죽순 캐는 법을 가르쳐 주고, 갯벌에도 조개를 캐러 함께 다닌다. 동네 사람들 물건을 사도록 손님들에게 주선도 해준다. 한편으로는 농장도 운영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지역 관광 가이드 역할도 한다. 요즘 나는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
나는 지난 2003년 10월 KT에서 퇴직했다. 대학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하고 옛 한국통신에 입사해 전화를 연결해주는 전자 교환실, 요금·전산을 관리하는 IT본부, 초고속인터넷을 개발 관리하는 초고속통신추진본부 등에서 27년간 근무했다. 명퇴 대상은 아니었지만, 조금 먼저 직장을 그만두고 일찌감치 노후 준비에 들어간 셈이다.
퇴직 직후 웹호스팅 및 홈페이지·쇼핑몰·웹프로그램 개발업체를 운영했다. 아직 IT붐의 여파가 남아 있을 때여서 장사가 꽤 됐다. 그래서 이듬해 바로 이곳 부안에 땅을 마련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사업체와 농장을 함께 운영하는 '이중 살림'을 시도했다. 하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막상 시작하니 돈도 시간도 부족했다. 몇 차례 계획을 수정하며 시행착오를 겪었다.
나는 당초 생각보다 좀 더 빨리 농촌에 정착하기로 마음먹었다. 자식들은 이미 장성해서 부담이 덜했다. 본격적으로 귀농하기 앞서, 전(前) 직장인 KT에서 운영하는 '시니어 창업스쿨'에서 귀농교육과 농산특산물 유통·마케팅 교육과정을 수료했다. 여기서 내가 낸 '팜스클럽' 사업계획서가 우수사례로 선정되자, 나는 한번 해볼 만하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요즘 나는 마을에서 '인터넷 박사'로 통한다. 이 지역 특산물인 오디(뽕나무 열매)를 판매하는 인터넷 쇼핑몰을 마을 사람들한테 개설해준 것이 소문나 이것저것 전화로 물어보는 분들이 많다. 우리 농장 홈페이지(www.famsclub.co.kr)에서도 마을 주민들이 생산한 제품을 판매한다. 또 우리 농장에서 관광 체험 MT를 하게 되면, 홈페이지를 통해 중계도 할 계획이다
내 계획은 우리 농장뿐 아니라 마을 전체를 '녹색체험 마을'로 만들어, 도시인과 귀농 준비자들이 찾아와 농촌을 경험하고, 농산물 직거래 장터도 운영하는 '도(都)·농(農) 교류'의 장으로 확대하는 것이다. 부안군에서도 내 계획에 큰 관심을 보이며 지난 2월 귀농창업자금을 지원해줬다. 인구가 점점 줄어드는 농촌 지역 지방자치단체에서는 도시와 농촌을 잇는 가교(駕轎) 역할을 해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래서 인근 펜션들과 연계해 농촌체험과 주변 관광, 숙박을 연계한 사업도 추진하고 있다. 또 농장 방문객들과 마을 사람들이 함께 즐길 수 있는 공연 시설도 만들 것이다. 나 역시 대학 시절 밴드에서 드러머로 활약했던 실력을 되살려 농촌에 내려온 뒤 드럼 연습에 매진하고 있다. 궁극적으로 내가 모델로 삼고 있는 것은 사회적 기업이다. 그 꿈을 향해서 조금씩 다가가고 있는 지금의 나의 모습이 좋다. 그리고 어성초에서는 생선냄새가 난다거나, 돼지감자 맛이 기가 막히다는 것, 지금까지 몰랐던 많은 것들을 알고 깨달아 가는 것은 덤이다.
포스코 '명장(名匠)'에서 진로지도 강사로 변신하다_ 정대교(62) 씨나는 지난 2005년 3월, 30년간 근무한 포스코에서 '스테인리스생산부' 총괄직 주임(과장급)으로 정년퇴직했다. 원래는 퇴직과 동시에 중국 절강성 장가항 시(市)에 포스코가 투자한 '장가항포항 스테인리스 제강공장'에 기술고문으로 파견될 예정이었지만, 진단이 나와 중국행을 접었다. 일에만 몰두하느라 피로가 누적됐고, 건강관리를 소홀히 한 잘못이었다.
중국으로 가서 '제철인'으로서의 인생을 좀 더 살지 못한 것은 별로 아쉽지 않다. 결과적으로는 전화위복이 되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건강을 회복할 수 있었고, 2007년 말부터 한국산업인력공단의 위촉을 받아 직업 진로지도 강사로도 활동하게 되었다. 아내가 매니저 역할을 하며 함께 곳곳으로 출장을 다니고 있다. 일도 하고 아내와 오붓한 시간도 즐길 수 있으니 일석이조다.
인생 후반기에 찾은 이 새 일자리는 내가 지난 1998년 정부로부터 제강 분야 '대한민국 명장(名匠)' 칭호를 얻은 것이 인연이 되었다. 나는 전국을 다니며 초·중·고등학교와 전문대, 교도소, 직장인을 대상으로 강의를 해왔다. 요즘은 중학교에 자주 출강해 어떻게 인생을 설계하고 어떤 진로를 택해야 할지 들려준다. 내 직장생활 경험을 바탕으로 자기계발 요령, 아이디어 도출 방법, 미래지향적 직업 선택의 기준 등에 대해 소개한다. 특히 공업계 고등학교에서는 기능인으로서 자긍심을 가질 것과 굳이 대학을 나오지 않아도 노력 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성공하고 존경받을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려고 노력한다.
사실 나도 강원도 영월공고를 졸업하고, 대한석탄공사에서 6년을 근무한 뒤 1976년 당시 포항종합제철주식회사(현 포스코)에 입사했다. 젊은 시절 나는 패기가 넘쳤다. 그때만 해도 잘나가던 석탄공사를 때려치우고 낯선 제철 분야에 도전하면서, '내가 맡은 일에서 최고 일인자가 되어보리라' 다짐했다. 입사 후에는 "가장 어렵고 중요한 부서로 보내달라"고 회사에 인사면담을 요청했고, 배치된 곳은 제강쇳물을 이용해 중간소재를 만드는 '연속주조공정'이었다.
우리나라 제철 공업의 태동기였던 당시만 해도 제철소에서는 공정마다 시행착오가 많았다. 나는 이것을 빠트리지 않고 메모해두었다가 개선 아이디어를 만들어 제출했다. 현장에서 작업하거나 순찰을 돌면서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착상도 계속 메모해 나갔다. 그 습관은 평생 이어져 30년 포스코 재직 기간 동안 신기술 특허와 실용신안만 26건을 낼 수 있었다. 크고 작은 제안·발명까지 다 합치면 모두 100건 이상의 개선 아이디어를 냈다. 내가 4년제 대학을 졸업한 엔지니어들보다 적지 않은 월급을 받고 회사를 다녔던 비결이다.
내 강의의 핵심은 '창의력'이다. 내가 하는 분야에서는 이론적으로나 기능적으로 남한테 뒤지지 않고, 없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강한 의식이 있었다. 특히 포스코에 처음 입사해, '자원은 유한, 창의는 무한'하다는 구호를 보면서 정신이 번쩍 드는 것 같았다는 이야기도 자주 한다.
되돌아보면, 결국 옛날이나 지금이나 항상 메모하고 연구하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점에서 내가 살아가는 방법은 그다지 바뀌지 않은 것 같다. 그때는 어떻게 하면 생산성을 높이고 좋은 품질의 제품을 생산할 수 있을까를, 지금은 어떻게 하면 좀 더 유익한 강의를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점만 다를 뿐이다. 대학에 가지 못하면 스스로를 낙오자처럼 생각하며 다른 꿈을 키우지 못하는 요즘 아이들을 보면서 딱한 생각이 들 때가 많다. 공조에서조차 대학에 진학하려는 학생이 더 많다. 그런 학생에게 내 강의가 작은 변화의 계기라도 될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국민은행 지점장에서 커플 매니저가 되다_ 유선재(57) 씨나는 올 초까지 37년 간 은행원으로 살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은행에 들어와 젊은 날을 온통 바쳤다. 올 초 명예퇴직해서 은행 문을 나섰지만 내 마음은 여전히 고객을 향한다. 이제 그 고객은 자금을 맡기러 오는 이들이 아니라 혼기를 맞은 젊은 남녀들이다. 내 새로운 직업은 결혼정보회사의 커플 매니저다. 얼마 전까지 나의 온 관심사는 고객이 금전적으로 행복할 수 있게 재테크를 도와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떻게 하면 고객이 배필을 만나 행복하게 가정을 꾸릴 수 있게 도와줄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내가 이제껏 팔았던 그 어떤 금융 상품과도 비교되지 않는 인생의 가장 중요한 결정을 조언하는 것이다. 은행에서 일하며 사람들의 통장을 살찌우는 일도 보람됐지만 인륜지대사(人倫之大事)라는 혼인을 일궈내는 일은 그것과는 차원이 다른 보람임을 매일같이 느낀다.
나의 '깜짝 변신'에 적잖은 사람이 놀란다. 갓 스무 살에 은행에 들어와 50대 후반까지 한우물을 판 나더러 친구들은 '뼛속까지 은행에 물들었을 것'이라고 농반진반 말하곤 했다. 나 역시 내가 은행을 벗어나 이렇게 제2의 인생을 살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내가 몸담고 있던 은행은 그나마 사정이 나았다고 하지만 남자들과 경쟁에서 밀려나 승진이 한참 밀렸고 그때마다 아무리 심지 굳은 나였지만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도 포기를 모르는 성격 덕에 위기가 있을 때마다 견뎌낼 수 있었다. 그저 열심히 해서 좋은 성과를 올리는 것만이 살아남는 길이었다. 한때 동료들 사이에서 내 별명은 '업신'이었다. '업무 평가의 신'이라는 뜻이다. 함께 들어온 동기 여직원 69명 중 가장 마지막까지 버텨냈으니, 나 스스로도 장하다는 생각이 든다.
앞만 보며 달려왔지만 쉰 중반에 이르자 슬슬 떠나야 할 때를 준비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만 55세가 돼 임금피크 대상이 되자 심리적 압박이 더 심해졌다. 무엇보다 아직 일에 대한 열정과 무한한 에너지가 남아 있다는 사실이 새로운 일을 하게끔 자꾸 나를 충동질했다. 고민하던 어느 날 우연히 신문을 보다가 기사 하나가 눈에 띄었다. '나이가 들수록 빛나는 전문직, 커플 매니저'라는 제목의 기사였다. 내 고민을 해결해줄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기대감에 한 자도 놓치지 않고 꼼꼼히 읽어내려갔다. 고객의 요구 파악이라는 가장 중요한 요건은 은행에서 갈고 닦아온, 내가 잘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상대를 설득할 때 필요한 정확한 어휘 구사는 직장 생활을 하며 야간으로 대학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하고 중등 국어교사 자격증까지 따놓은 터라 자신이 있었다. 딱 나를 위한 '맞춤형 직업'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용히 자기소개서를 준비했다. 내 삶을 돌아보는 계기도 되었다. 그리고 지난해 사내에 명예퇴직 공고가 났을 때 이 소개서를 들고 결혼정보회사를 찾았다. 나는 이 새로운 일이 내 인생의 '덤'이라고 생각한다. 퇴직금도 있어 금전적으로 굳이 일할 필요는 없었다. 그럼에도 내가 커플 매니저에 도전하게 된 이유 중 하나는 우리의 결혼 문화를 제대로 바꾸고 싶어서다. 부모들과 상담을 하다 보면 가끔 한숨이 절로 나온다. 학원에 보내 아이들 교육하는 데 길든 일부 '강남 엄마' 중에는 결혼을 무슨 좋은 학원에 보내는 것처럼 여기는 사람도 있다. 조건을 너무 따지다 보니 상대의 인성을 보는 것은 뒷전일 때도 있다.
나는 결혼을 위한 결혼을 하려는 이들에게는 '정말 결혼을 원하는 것인지'부터 묻는다. 단순히 돈을 벌자고 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인생의 선배로서 결혼을 하려는 이들을 대하고, 자식을 가진 같은 부모의 입장에서 상담을 의뢰한 부모들을 대하려고 한다. 아마 내가 20~30대에 이 일을 했다면 무조건 성과를 높이려 발버둥 쳤을지도 모른다. 악바리 기질이 발동해 그 어떤 커플 매니저들보다도 많은 커플을 맺어주려고 했을 게 뻔하다. 하지만 지금 나는 인생의 멘토라는 심정으로 고객을 대하려고 한다. 1막의 연륜과 전문성이 2막의 진정성을 높인 것이다.
가정주부에서 웰다잉 전문가가 되다_ 이정옥(73) 씨나는 죽음이라면 이력이 난 사람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이 둘을 예고도 없이 저 세상으로 먼저 떠나보냈다. 그들의 죽음으로 내 젊음은 절름발이가 됐다. 하지만 나는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났다. 그리고 지금, 죽음이 지긋지긋한 내가 역설적이게도 죽음을 준비하는 법을 알리는 일을 한다. 그 누구보다 심하게 앓았기 때문에 그 누구보다 절실히 죽음의 중요성을 가르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슬픔을 희망으로 승화시킨 나의 스토리는 이렇다.
"ㅇㅇ이 엄마, 빨리 유치원으로 가봐. 빨리빨리! 큰일 났어."
이웃에 사는 아들 친구 엄마가 숨이 턱에 차오른 채 나를 불러댔다. 자초지종을 물을 겨를도 없이 그녀의 손에 이끌려 아이가 다니는 유치원으로 달려갔다. 몇 분 뒤 눈앞에서 믿을 수 없는 일이 펼쳐졌다. 유치원 마당 여기저기에 낭자한 선혈이 두 눈 가득 들어왔다. 일곱 살배기 내 소중한 아이의 작은 몸에서 나온 피였다. 하늘이 노래졌다. 누군가가 옆에서 말했다. 유치원에 위태하게 서 있던 미끄럼틀이 쓰러지면서 우리 아들을 덮치고 말았다고. 피투성이 아들을 보자마자 나는 의식을 잃었다. 다시 깨어났을 때 아이는 이미 손을 쓸 수 없는 상태였다. 그렇게 첫아이와 이별해야 했다. 아직도 쏟을 사랑이 너무나 많은데, 아이는 그렇게 별안간 나의 곁을 떠났다. 그로부터 어느덧 40여 년이 흘렀지만 그때의 충격은 아직도 나의 오른쪽 눈에 남아 있다. 눈물에 짓물러 시신경이 손상되는 바람에 시력을 많이 잃었다.
아이를 떠나보낸 슬픔을 삼키며 나는 아내로서, 엄마로서의 자리로 돌아와야 했다. 자상한 남편의 위로 속에 남은 딸과 새로 태어난 네 아이를 뒷바라지하며 마음의 상처를 애써 덮었다. 가전제품 대리점을 운영하던 남편은 근면하고 따뜻한 사람이었다. 늘 나의 아픔을 보듬으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하늘은 참 매정도 했다. 1991년 남편이 당뇨를 앓던 내 약을 사러 경기도 포천으로 내려가던 길에 중앙선을 넘어온 트럭을 피하려다 그만 교통사고를 당하고 말았다. 남편은 혼수상태로 온몸에 붕대를 친친 감고 병실에 누워 있었다. 남편의 몸에서 생(生)의 불씨가 점점 사그라져가고 있음을 직감할 수 있었지만 병원에서는 그 몸에 대고 계속 수술을 하려고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의사에게 말했다. "이제 그냥 편히 가게 해주는 게 어떨까요." 그랬더니 의사는 "정말 부인이 맞으세요?" 하고 되물었다. 마음이 아파도 더 아프고, 되살리고 싶은 마음이 많아도 더 많은 게 나였다. 그런 내가 그렇게 말한 건 점점 파래져 가는 남편의 손톱을 보고서였다. "여보, 제발 나 그만하고 저세상으로 가고 싶어. 너무 고통스러워." 손톱이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결국 죽음 곁에도 가기 싫었던 내가 또다시 죽음을 마주하고 말았다.
아이와의 이별과는 또 다른 차원의 이별이었다. 내가 절룩거릴 때 부축해주던 든든한 버팀목이 예고도 없이 저 하늘로 가버렸을 때의 상실감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의지할 데라곤 종교밖에 없었다. 50대의 늦은 나이에 신학을 배우고 전도사가 됐다. 하지만 교회에서 전도사 생활을 하다 보니 불가피하게 여러 사람의 죽음을 봐야 했다. 사연 없지 않은 죽음들을 보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죽음을 미리 준비할 수는 없을까. 그러면 떠나는 이도, 남은 이도 마음의 짐을 덜 수 있을 텐데….'
그러다 우연히 한 복지재단에서 하는 호스피스 프로그램 안내문을 보게 됐다. 죽음이라면 이력이 난 내가 죽음 맞는 법을 가르쳐준다니 아이로니컬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처럼 깊은 상처를 가진 사람이야말로 죽음을 맞은 이들의 마음을 더 절실히 공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1990년대 중반 '죽음학'이 정식 학문으로 인정되고 복지재단에 '웰다잉 전문 강사' 코스가 생겼다. 내친김에 제대로 전문성을 갖춰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강사증까지 취득했다.
이후 나는 웰다잉 전문강사로 노인대학과 양로원 등을 돌며 '당하는 죽음'이 아니라 '맞이하는 죽음'을 강의하고 있다. 생전 유서를 써서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됐을 때를 대비하게 하고 연명치료에 대한 의견을 사전에 남길 필요성을 가르친다. 웰다잉의 중요성을 알리기 위해 연극도 한다. 처음에는 남의 얘기처럼 귀담아듣지 않던 노인들도 유언 한마디 없이 떠난 남편의 이야기, 펴보지도 못한 채 사그라진 내 아이의 이야기를 하면 귀를 쫑긋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