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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꿈을 이루다

(사)한국여성공학기술인협회 지음 | 생각의나무


여자, 꿈을 이루다

(사)한국여성공학기술인협회 지음

생각의나무 / 2011년 11월 / 316쪽 / 13,500원



1부 여성, 그 아름다운 이름




누군가의 기억을 생생하게 만들어주는 사람, 건축가_ 강미선

누군가를 처음 만나면 늘 듣는 질문이 "어떻게 건축을 하시게 되었나요? 여자가 하기 쉽지 않았을 텐데……."이다. 나의 건축가로서의 길은 어린 시절, 잠이 오지 않는 밤, 방 천장을 스케치북 삼아 내가 살고 싶은 집을 그렸다 지웠다 하는 것에서 출발한 것 같다.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최고의 히트가요는 바로 '님과 함께'였다.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우리 님과 한 백년 살고 싶어.' 모두가 가난했던 1970년대에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은 막막한 이미지였기에 그 시대의 아이돌이라 할 수 있는 남진이나 나훈아를 사랑하는 님으로 떠올리며 이런 집도 그려보고 저런 집도 그려보았다.



희귀한 공대 여학생: 1,000여 명의 공대생 중에서 스무 명 남짓 입학한 여학생 중 한 명으로 시작한 대학생활은 낯설고 힘들었지만 재미있었다. 건축학과 특성상 늘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느라 머리를 쥐어짜며 밤을 새워야 하는 상황에도 점차 익숙해졌다. 그러나 대학 3학년 때, 1년에 한 번 있는 건축전시회를 기획하랴, 내 작품도 완성하랴 며칠을 학교에서 밤을 새워야 하는데, 오프닝 전날 밤, 너무나 무거운 눈꺼풀 사이로 아직도 휑하니 비어 있는 내 작품패널을 보는 순간 그만 엉엉 울고 말았다. 게다가 남학생들은 아무 데나 누우면 잠자리가 되는데 여학생들은 잠시 등을 붙일 만한 곳이 어디에도 없었고, 그날 여자 동기와 서로 등을 맞대고 잠을 청하면서 처음으로 건축학과에 온 것을 후회하는 대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물론 4학년쯤 되니 여학생들도 아무 곳이나 '등만 대면 침대'가 되는 놀라운 적응력을 보여주었다. 내 작품패널의 비어 있던 곳은 건축전시회 당일 아침, 구세주처럼 나타나 쓱쓱 놀라운 스케치 솜씨로 투시도를 그려주신 교수님의 작품으로 채워져 완성되었다. 나는 그 패널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지금처럼 디지털 툴이 아닌 손으로 직접 그리면서 작품을 하던 시절에 학교를 다녔던 많은 졸업생에게 서울대 건축학과 김진균 교수님의 스케치는 전설로 각인되어 있다.



졸업과 함께 별 고민 없이 대학원에 진학하였는데 1980년대의 어수선한 시국상황을 핑계로 소홀히 했던 학부에서의 공부를 만회할 수 있었던 시기였다. 대학원 과정은 일방적인 교수님의 강의로 이루어지던 학부 때와는 다르게 스스로 문젯거리와 해결책을 찾아야 하는 과정이었고, 이를 통해 세상을, 또 건축을 보는 눈이 많이 단련되었던 것 같다. 자연스레 박사과정까지 진학하기는 했지만 꼭 교수가 꿈이었던 것은 아니다. 다양한 분야의 협업을 통해 완성되는 건축의 특성상 학교에서는 배우기 어려운 실무 관련 지식을 배우기 위해 박사과정 수료와 함께 설계사무소에 취업을 하였다. 막 시작한 시집살이와 회사생활을 동시에 하느라 모든 것이 힘들었던 시기였다. 오래 기다렸던 임신 소식과 함께 박사논문 준비를 위해 학교로 돌아가 조교생활을 하였다. 육아와 학위논문 준비를 병행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중간에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수백 번도 더 들었으며, 내가 가야 할 길이 이게 아니라며 수없이 스스로를 유혹하기도 했던 시간을 견뎌내며 드디어 박사학위를 받을 수 있었다.



집, 여자 그리고 마을: 여학생만으로 구성된 이화여대의 특성상 나는 자연스럽게 학생들의 멘토 역할을 하게 되었다. 내 삶 자체가 학생들에게는 고스란히 산교육으로 비쳐진 셈이었다. 두 아들을 키우는 엄마로서, 며느리로서, 아내로서 그리고 많은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로서 멀티플레이어 역할을 하느라 정말 힘든 30대를 보낸 것 같다. 물론 지금도 진행형이다. 졸업 후 10년 정도 제자들을 만나면 그들은 "그때 교수님이 얼마나 힘드셨을지 이제야 알 것 같다."라는 얘기를 종종 한다. 아이 하나를 키우는 데 마을 하나가 필요하다는데, 지금 우리의 주거 공간은 그 짐을 한 여성의 어깨에 모두 짊어지게 하는 상황이다. 이것은 건축가의 책임도 크다. 오로지 우리 집만 없는 것 없이 크고 화려하게 만들겠다는 욕심이 이웃과 단절된 닫힌 공간을 만들게 하였고 건축가는 이에 편승하여 이웃이 사라진 완벽한 내 집만을 만들어냈다. 결국 그 결과는 여성들에게, 특히 일하는 여성들에게 너무 많은 짐을 지게 했다. 그래서 나는 주거와 마을을 연구한다.



대학에 다닐 때 교수님이 주거를 연구하라고 했을 때 '내가 여자라서 주거에 한정하는구나'라고 생각해 애써 외면했던 분야였다. 그러나 우리가 모든 건물을 집이라 통칭하듯 주거는 우리 삶의 근원이고 그래서 건축에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라 할 수 있다. 내 삶에서 우러나온 문제를 내가 조금이라도 해결하겠다는 생각에서 내 연구주제는 '돌봄이 살아 있는 집과 마을 만들기'이다. 사람은 누구나 돌봄을 필요로 한다. 혼자 사는 사람에게도 집은 돌봄의 장소이고 치유의 공간이다. 이 돌봄의 책임을 한 개인, 한 여성이 아닌 가족, 이웃, 마을, 지역사회, 국가가 모두 공유할 수 있도록 그 기반이 되는 물리적인 구조, 즉 도시, 동네, 집을 재구성하는 것이 내 연구주제이다. 나는 이 연구의 실천을 나이가 들어서도 젊은 건축학자나 건축가들과 꾸준히 진행하고 싶다.



진로를 고민하는 여학생들에게 나는 보수적이고 라이프사이클이 긴 전공을 선택하라고 조언한다. 로마 시대에도 지금처럼 콘크리트를 사용했고 '인슐라'라는 9층짜리 공동주택을 짓기도 했다. 최근 100년간 철과 유리를 쓰면서 겉으로는 많이 달라진 것 같으나 근본적으로 건축의 변화 속도는 아주 느릴 수밖에 없다. 그러니 출산과 육아 등으로 공백이 생겨도 얼마든지 다시 일을 시작할 수 있고 건축일을 직접적으로 하지 않는 시간도 간접적으로 건축에 대한 식견을 쌓고 있는 셈이다.



내가 기획에서 준공까지 5년간 건축실무를 총괄했던 이화여대 지하캠퍼스인 ECC는 이러한 예를 잘 보여준다. 학교에 머무를 곳이 없어 전공수업만 듣고 자꾸 외부로 빠져나가는 학생들을 학교에 머무르게 하기 위해 기획된 ECC는 성공리에 완공되어 국내외 명소가 되었으며, 무엇보다도 학생들의 생활 양상을 많이 바꾸어놓았다. 교육공간이 주를 이루던 캠퍼스는 학생과 교직원들의 다양한 삶을 담는 생활공간이 되었으며 이대 식구들뿐만 아니라 지역주민들에게도 개방되는 열린 공간이다. 또한 우리가 이제까지 체험하지 못했던 다양한 건축적 경험을 제공하는 풍요로운 공간이기도 하다. 가스통 바슐라르는 『공간의 시학』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공간이 전부이다. 왜냐하면 이제 와서 기억을 생생하게 하는 것은 시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만드는 건축이, 여러분이 꿈꾸는 건축이 누군가의 기억을 생생하게 하는 바로 그 곳이 될 수 있다는 것, 멋지지 않은가?



2부 창의의 시대에 중심이 되라




여자라서 행복하다_ 문수정

고집스런 전공 선택: 지금도 약대나 의대는 인기가 있지만 그 당시에도 졸업 후 여성이 안정된 직업을 가지고 가사와 병행할 수 있다는 면에서 약대가 인기 있었다. 부모님께서도 약대에 진학하기를 원하셨지만 나는 그리 주목 받지 못하는 곳에서 나의 역할을 하고 싶었다. 그러던 즈음 우리나라의 섬유산업과 염색가공 기술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나라는 실크의 품질이 매우 좋고 섬유산업이 발달되어 있지만 염색가공 기술이 부족하여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그래, 이런 쪽을 해보면 좋겠다.'라고 생각하던 차에 신문에서 경북대학교에 염색공학과가 생긴다는 기사를 보았다. 나를 위해 학과가 만들어지는 기분이었다. 그 후 항상 염색공학과를 가겠다고 생각했지만 대입시험을 앞두고 나의 선택이 잘못된 건 아닌지 직접 학교를 찾아가서 상담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등학교 3학년 2학기 중간고사를 마치고 무작정 경북대학교로 전화를 걸어 염색공학과 교수님을 연결해 달라고 했다.



방문상담을 흔쾌히 수락하셨던 교수님은 막상 찾아가니 나의 방문에 대해 그리 기뻐하지는 않는 눈치였다. 알고 보니 학과 이름이 염색공학과여서 엄연한 공대인데도 불구하고 여학생이 많이 들어오는 것이 마뜩치 않았던 것이다. 교수님 입장에선 새로 만들어진 과였던 만큼 졸업하는 선배들이 사회에 많이 진출하여 과를 키워야 하는데, 졸업 후 취업할 수 있는 곳은 주로 제조업으로, 여학생들에게 맞지 않는 데다 그때는 어느 과든 전공을 살려 여학생들이 취업을 하기엔 녹록치 않은 사회였으므로 공대의 여학생은 별로 반가운 존재가 아니었던 것이다. 나는 오기가 생겼다. 제조업이든, 공장이든 나도 남자랑 똑같이 할 수 있고, 여자도 잘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어야겠다는 사명감까지 생길 정도였다.



사회생활 시작. 그렇지만 내 일은 어디에?: 입사 후 경산공장 염색가공연구소에서 근무를 하게 되었을 때는 월례조회마다 거수경례를 할 정도로 군대 문화가 남아 있다는 사실이 생경했다. 사람들은 강했고 활기찼으며 한 반장님은 점심식사 후 담배를 피면서 "담배 못 피우는 건 여자와 동물 아이가?"라고 말할 정도로 당시 공장 내에는 여자가 뭘 하겠냐는 생각도 박혀 있었다. 그때 입사한 여자 후배 하나와 나는 남자랑 똑같이 원단이 가득 실린 운반차를 밀고, 몇십 킬로그램이나 나가는 원단 롤을 어깨에 메고 다니고 회식 자리가 있으면 끝까지 함께 갔다. 그러자 모든 사람들이 든든한 협력자가 되어 주었다. 여자와 동물을 동일시했던 그 반장님과도 무척이나 친해져서 시험 물량도 먼저 진행해줄 정도였다.



내가 소속된 사업이 공중분해되어 나는 구미 공장의 생산기술센터로 가게 되었다. 당시 차별화 소재 개발을 위해서 직물을 아는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에 나에게 기회가 온 것이었다. 원사와 직물은 같은 섬유산업이지만 사고와 용어의 차이가 컸다. 직물은 좀 더 감성적이며 업스트림의 기술자들이 듣기에는 애매모호한 단어를 쓴다. 예를 들면 원단이 미끈거리지 않고 가슬가슬해서 좋다, 좀 더 부드러우면서 힘이 있었으면 좋겠다, 색상이 좀 더 선명하게 올라오면 좋겠다는 등의 용어들이 혼동을 초래할 수 있었다. 이러한 애매한 단어들을 모아 기술적으로 해석하며 원사를 개발해야 한다. 구미에서 원사 개발업무는 무척 신나고 재미있었다. 원사 개발 방향을 정하고 개발된 원사가 정말 생각한 대로의 효과가 나오는지 테스트하고 직접 고객사와 만나서 평가를 진행했다. 많은 기술적 지식과 경험을 얻으면서 발로 뛰어 여러 사람을 만나고 결과를 얻어내는 활기차고 역동적인 일이었다.



개발에서 마케팅, 영업으로: 원사 사업은 B2B사업이다. 제품기획, 효과적인 제품 소개 및 판촉과 함께 기술적 서비스 측면에서 중요하다. 실을 실로, 기술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이 원사의 사용방법에 따라 얻을 수 있는 효과를 느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2000년부터 서울에 올라와 6년간 마케팅 업무를 했다. 좀 더 영업과 시장에 가까운 일이었다. 화섬업계 전체 흐름을 볼 수 있었고 당시 사업부에서 추진하던 차별화 원사의 수출을 위한 판촉에도 깊이 관여하여 수출 시장에 대한 이해도도 높일 수 있었다. 그러던 중 서울, 경기 지역 국내와 수출을 함께 맡아 원사사업의 전체를 챙겨야 하는 영업팀장이 되었다. 나도 놀랐고 업계도 놀랐다. 왜냐하면 여자가 영업담당자면 해당 고객사 사장님이 무시당한다고 생각할 정도로 화섬업계는 상대적으로 보수적이었고 채권 관리 등 험악한 일들과 저녁 시간도 내 것이 아닌 그런 업무이기 때문이었다. 회사 내에서도 이 인사를 앞두고 많은 논란이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초기에는 만성 적자로 힘들었지만 함께 하는 팀원들의 좋은 실력과 팀워크 그리고 시장에 뿌려뒀던 개발제품들이 시장 진입에 성공하면서 흑자로 돌아서고 수출 시장 확대 등 좋은 성과를 만들 수 있었으며, 웅진그룹으로 회사 체제가 전환되면서 새로운 조직 개편과 함께 첫 여성 본부장이 되었다.



여성이기 때문에 받은 혜택: 처음은 어렵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 같이 어울리고 동질감을 느끼고 조금만 더 열심히 잘하면 남자들 속에 하나 있는 여자라 주목받아 소소한 것 하나만 잘해도 눈에 확 띈다. 단, 대접 받으려 하지 말고 내가 그 속에 들어가 남성들의 사회를 이해하고 함께 간다고 생각할 필요가 있다. 여성들은 군대도 가지 않고 중고등학교 시절, 대학 시절을 거쳐도 선후배 관계를 어떻게 해야 한다거나 상사, 후배와 어떻게 지내야 하는지 경험하거나 배울 기회가 없다. 어떤 때는 내가 여자라는 이유로 챙겨 받기를 원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부분들이 사회생활을 힘들게 한다. 남성과 여성은 사고방식도 다르고 표현 방법, 공감대 형성 방식도 다르다. 무조건 나에게 맞추라거나 나도 좀 생각해 달라고 불평하기보다는 내가 먼저 이해하고 그 속에 같이 녹아줄 필요도 있을 것이다.



섬유산업은 사양산업인가?: 내가 몸담고 있는 섬유산업, 화섬산업이 한때는 사양산업이라는 말을 들었다. 일반적으로 국민소득이 3,000! 만 불이 되면 섬유 소비는 급격한 증가를 보인다. 그러나 천연섬유의 경우 면, 양모 등을 위한 경작지, 목초지 확대가 어렵고, 기후 등의 외부 여건에 많은 영향을 받으므로 꾸준한 성장을 하기는 어려우므로 증가 물량을 대부분은 화섬이 차지할 것으로 보인다. 대부분 사람들은 천연섬유가 친환경적 또는 생태학적으로 좋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세계 섬유 수요를 천연섬유로 충족하자면 지구 1/3의 면적을 필요로 한다. 또한 경작에 필요한 농약 살포의 문제라든가 용수의 문제-1톤의 면 생산을 위해 2만 5,000리터의 물이 필요하다- 등을 생각하면 오히려 화섬이 생태학적으로 유리하다. 뿐만 아니라 화섬은 운송 분야에서 무거운 금속을 대체하거나 단열소재로 사용되어 에너지 절감을 한다든지 천연섬유가 할 수 없는 기능적 분야에서 그리고 리사이클 섬유 등을 통해 지구 환경 보호에 일조하고 있다.



약 14만년 최초의 의류가 사용된 이후 지금의 섬유산업은 화섬의 발달로 의류뿐 아니라 운송용, 건축용, 산업용, 의료용까지 그 범위를 넓혀가고 있고 지금도 확대되고 있어 공학도가 진출할 분야는 무궁무진하다. 한국에서 섬유산업이 갖는 위치를 살펴보면 국내 제조업 중에서 고용의 7%를 담당하고 있으며 부가가치의 4%, 수출의 3%를 차지하고 있다. 국제적으로는 세계7위의 섬유 수출국이며, 2010년 기준 40억불 이상의 무역수지 흑자를 달성하고 있다. 앞으로는 창의성과 기술력을 바탕으로 세계 섬유 시장을 한국이 리드해나가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3부 여성이여, 가슴 뛰는 삶을 살아라




멋진 삶, 의미 있는 삶_ 안혜연

나에게 삶의 의미와 보람을 주는 '일': 나는 단순히 공부를 많이 한다는 이유에서 의대를 고집했고, 아버지는 너무 힘들다는 것이 반대의 이유였다. 아버지의 반대 끝에 좋아했던 수학으로 과를 정했지만, 그곳에서 우연히도 나는 컴퓨터라는 새로운 분야를 알게 되었다. 이후 새로운 학문 그리고 공부를 더 하고 싶다는 생각에 대학원까지 가게 되었고 그대로 특별한 일이 없었다면 유학을 준비하고, 공부를 했을 것이다. 하지만 대학원에 다닐 즈음 집안이 경제적으로 어려워진 것이 계기가 되어 취직을 결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데이콤에 입사했다.



데이콤은 내게 정말 큰 변화와 다른 세상을 알려준 곳이었다. 학교보다 훨씬 많이 앞서 있는 새로운 기술들, 거기에 진짜 투자가 일어나고 결과를 만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흥미롭고, 보람이 있었는지 모른다. 그렇지만 그렇게 5년을 보내면서, 역동성이 타성에 젖어 약해지기도 하고, 뭔가 더 내가 만들어가고 싶다는 욕심도 생기면서 공부를 더 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좋은 직장에 안정적인 위치를 버리고 다시 도전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회사를 나와 박사학위에 도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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