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생목록
재생목록이 비어 있습니다.
-
-
0:00 0:00
화면 너비 (여백)
좁게
보통
넓게
최대
배경 테마
글꼴
바탕/명조
돋움/고딕
글자 크기
작게
100%
크게
줄 간격
좁게
보통
넓게

그가 사랑한 베르사유

강문정 지음 | 샘터


그가 사랑한 베르사유

강문정 지음

샘터 / 2011년 5월 / 552쪽 / 16,000원



1부. 베르사유 시대 이전의 프랑스 왕조 이야기




갈리아 시기와 프랑스 왕조 변천사

베르사유, 그 여정의 시작: 베르사유(Versailles)라는 이름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것은 베르사유란 말 자체가 여러 어원을 지니고 있으며, 어원에 따라 서로 다른 이야기가 전해오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중세시대 이 지역에 거주하던 봉건영주 이름에서 연유했다는 이야기가 가장 신빙성 있어 보인다. 숲 일대에 영지를 소유했던 영주가 몰락한 후에도 사람들은 이 일대를 가리켜 베르사유라 불렀다. 기록에 따르면, 이 지역을 베르사유라 처음 지칭한 것은 1037년 때의 일이다. 샤르트르의 생 페르 수도원 문서에서 위고 드 베르사유라는 영주가 자신이 이 지대의 소유주라고 서명한 바 있다.

1591년에 베르사유는 샤를 9세 당시 재정담당관이었던 마르티알 로메니의 소유로 넘어갔다. 이어 알베르 공디가 이 땅을 매입했다. 알베르 공디는 앙리 2세와 정략결혼을 한 카트린 드 메디치 왕비가 이탈리아에서 시집올 때 피렌체에서 데려온 이탈리아 귀족이었다. 카트린의 후광에 힘입어 프랑스의 대원수가 된 알베르 공디는 그가 매입한 베르사유 지역에서 앙리 3세와 부르봉 왕조를 여는 앙리 4세를 영접했다. 기록에 의하면 1589년 8월, 앙리 3세가 자크 클레망에게 암살당한 후 앙리 4세가 새로운 국왕으로 등극하기 직전인 7월에도 그는 베르사유에 머물렀던 것으로 보인다.

갈리아인과 메로빙거 왕조: 베르사유 성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먼저 프랑스의 역사적 흐름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프랑스 국토는 유럽에서 단일면적으로 제일 넓고 대한민국의 약 5배가 훨씬 넘는 54만 5천 평방킬로미터에 달한다. 이 드넓은 땅에 여러 종족이 살고 있었으나, 현재의 프랑스인들이 자신들의 조상이라 여기는 갈리아(골루아)족이 단연 우세했다. 기원전 1100년에서 150년에 이르는 동안에는 켈트족이 갈리아 땅에 서서히 정착하기 시작해 켈트족은 갈리아족과 더불어 권력과 문화를 공유하며 살았고 기원전 125년에 이르러서는 갈리아 화폐가 유통되기도 했다.

기원전 52년경에 로마제국의 시저(카이사르) 황제는 갈리아인들의 영역까지 세력을 확장했다. 갈리아 사람들은 처음엔 로마군에 적대적이었지만, 차차 그들의 통치 아래 동화되어갔다. 워낙 문화가 앞서 있는데다 교량 및 수로 등을 건설하는 데 기술이 탁월했던 로마인들은 갈리아인들에게도 많은 것을 접목시켜나갔다. 400여 년의 길고 긴 로마인들의 식민통치는 쥘리앙이라 부르는 로마총독 때 막을 내렸다. 그는 기원후 360년에 이 지역을 자치독립국으로 선언하면서 마침내 로마제국의 간섭과 그늘에서 벗어나 독립된 나라로 거듭나게 했다.

하지만 갈리아인들은 로마로부터 독립하는 기쁨을 누리기도 전에 게르만족의 침입을 받는다. 그들은 기후가 온화할 뿐 아니라 비옥하고 풍요로운 갈리아 땅을 호시탐탐 엿보다가 갈리아인들이 로마로부터 독립하자마자 게르만의 여러 종족 중 하나인 프랑크족이 갈리아 땅을 장악한 것이다. 갈리아 사람들과 동화된 프랑크족은 프랑스 역사에 처음으로 자리매김하는 메로빙거 왕조를 열었다. 그 후로도 카롤링거, 카페, 발루아 왕조들을 거치면서 부르봉 왕조로 이어진다.

앙리 4세와 부르봉 왕조의 개막

새로운 부르봉 왕조의 탄생: 앙리 3세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앙리 4세는 '여왕 마고'라 불리는 마르그리트 공주와 1572년에 정략결혼을 하고, 1589년에 새로운 부르봉 왕조를 연 인물이다. 앙리 4세와 마르그리트의 결혼은 사실상 1585년 왕비가 스스로 왕실을 떠남으로써 줄곧 헤어져 있던 상태였기 때문에 1599년, 27년 만에 공식적으로 무효화되고, 이듬해 당시 47세였던 앙리 4세는 이탈리아 토스카나 대공 프란체스카의 딸 마리 드 메디치와 재혼하기에 이르렀다. 마리 드 메디치는 앙리 4세와 결혼한 이듬해인 1601년, 프랑스 왕실의 정통성을 잇는 왕세자 루이 13세를 낳았고 왕자 둘과 공주 셋을 더 두었다.

앙리 4세는 프랑스에서는 '성왕'으로 일컬어질 만큼 실리적인 정책을 폈다. 종교의 자유와 평화를 유지하면서 국내외 여러 조약을 체결하고 1608년에 샹플랭이 캐나다로 이주해 퀘벡을 건설하는 일을 지원하기도 했다. 1607년에는 현재 파리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인 퐁네프를 완성했는데, 이전에는 다리 위에 집을 짓고 사람이 사는 것이 허용되었지만, 앙리 4세는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다리는 온전히 사람이나 마차만이 다닐 수 있는 다리로서의 기능을 해야 한다." 이러한 취지로 앙리 4세는 다리 위에 아무 것도 지을 수 없게 했다.

루이 13세의 '카드로 지은 성'

아버지의 추억으로 성을 짓다: 앙리 4세가 죽은 후, 루이 13세는 마리 드 메디치의 섭정으로 의기소침했지만 1623년, 중대한 결정을 내린다. 바로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했던 베르사유 숲에 성을 만들기로 한 것이다. 사냥을 하다가 잠시 쉴 수 있을 정도의 자그마하고 아늑한 쉼터를 꿈꾼 내성적인 왕의 의도는 곧바로 실현되었다. 건축가 필리베르 르르와가 왕의 명령을 곧 실행에 옮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베르사유 지역에는 붉은 벽돌과 흰 돌 그리고 짙은 잿빛이 감도는 푸르스름한 석반석의 지붕을 얹은 작은 성이 완성되었다. 사람들은 이 성을 가리켜 '카드로 만든 성'이라 불렀다.

루이 13세, 간절한 서원을 풀다: 욕심 많은 마리 드 메디치의 세력을 완전히 물리치고 난 후에 그와 동갑인 안 도트리슈와 결혼했지만, 22년이 넘도록 자녀가 없었다. 루이 13세는 여러 날을 무릎 꿇고 서원했다. 1638년 9월, 드디어 프랑스 왕실에 건강한 왕세자가 탄생했다. 루이 14세의 출생을 두고서도 뒷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지어냈는데, 그렇게 기다리던 왕세자가 왕의 아들이 아니라는 것, 왕비의 침실에 연인이 자주 드나들었다는 등의 내용들이었다. 그러나 그건 확인되지 않은 소문들일 뿐이었고, 국왕의 정통성에 도전하는 중범죄에 해당하는 일이었으므로 뜬소문은 이내 잠잠해졌다.

2부. 루이 14세, 찬란한 빛의 시대를 펼치다



예술과 문화의 중심 베르사유

태양왕 루이 14세의 탄생과 성장: 1638년 9월 5일, 생제르맹앙레 성에서 프랑스 역사에 찬란히 빛나는 루이 14세가 탄생했다. 그리고 루이 14세는 두 살 터울의 동생 필리프와 함께 어머니 안 도트리슈의 절대적인 사랑과 보호를 받으며 건실하게 자랐다. 비록 5살에 아버지가 죽고 그들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프롱드의 난을 두 차례나 겪었지만, 결국 고등법원과 의회, 대다수 사람들은 정통성 있는 루이 14세에게 복종할 것을 맹세했다. 그의 청소년기는 비교적 순탄했으며, 섭정 상태의 왕이었기 때문에 정치보다는 예술에 더 관심을 두는 듯 했어도, 그는 마음 깊이 다짐하고 있었다. "내가 친정을 하는 순간 나는 절대왕권을 이루리라. 나는 태양왕이고 내가 곧 국가이니라."

어느 왕보다도 힘과 열정이 넘치고 예술에 탁월한 관심을 보인 미혼의 루이 14세, 그에게 마음을 여는 젊은 여인들은 수없이 많았다. 마침내 청년 루이 14세는 1659년, 피레네 조약이 체결된 직후인 1660년, 스물두 살의 나이에 스페인의 필리프 4세의 딸이며 외사촌인 마리 테레즈 공주와 성대하게 결혼식을 치름으로써 양국 간의 우호를 증진시켰다. 1661년, 삼촌이었던 마자랭이 세상을 뜨자 루이 14세는 직접 정치를 하게 되었으며, 콜베르와 니콜라 푸케 등을 기용하는 동시에 재능 있는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함으로써 국왕으로서의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1661년, 루이 14세는 마음에 품고 있던 자신의 뜻을 천명했다. "짐이 국가요, 국가가 곧 짐이다!" 바야흐로 절대왕권이 확립되기에 이른 것이다. 아울러 그는 친정을 선포하고 스스로를 우주행성의 중심인 태양이라 일컬었기에 백성들은 그를 태양왕이라 불렀다. 이런 루이 14세의 정책으로 지방 영주들이나 귀족들은 왕권의 그늘 아래 고개를 숙이고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왕권을 중심으로 한 프랑스는 점점 더 강력한 힘을 갖추게 되었고 이를 대외에 과시할 수 있게 되었다.

태양왕의 열정이 깃든 베르사유 성: 루이 14세는 유럽에서, 아니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우며 독창적인 성을 베르사유 지역에 지을 계획이라고 선포하고, 설계와 건축은 건축가 루이 르보에게 전적으로 맡기면서도, 아버지 루이 13세 시절 르르와가 설계하고 건축했던 성의 본체는 그대로 유지할 수 있도록 당부했다. 루이 13세가 하늘에 서원을 하고 일념으로 기도해서 낳은 아들답게 아버지에 대한 효심과 그리움은 루이 14세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었다. 르보에 이어 르망사르가 성을 주관해 지을 때도 기본원칙은 고수되었다. 특히 피레네산맥의 대리석으로 장식된 성 중앙과 내부는 '카드로 지은 성'이란 예전의 이름을 잊게 할 만큼 화려하면서도 은은한 빛을 발했다.

1663년, 몰리에르와 연극단원들이 베르사유에서 대공연을 시작하면서 베르사유는 문학과 예술이 어우러지는 곳, 희곡과 음악과 무대장치의 진수를 만끽하고 수준 높은 작품들이 공연되는 '예술의 장'으로 거듭났다. 루이 14세는 절대왕권을 확립한 후, 본격적으로 베르사유 성과 그 일대에 관심을 갖고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했기에 베르사유 지역은 이전까지 존재하던 곳들과는 완전히 차별화된 베르사유만의 독특함과 화려함을 갖출 수 있었다. 프랑스만의 독창성이 깃든 새로운 형태의 궁전이면서 동시에 기하학적인 아름다움까지 지닌 정원으로서의 명성은 이러한 루이 14세의 열정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프랑스 공식 왕궁이 된 베르사유 궁전

프랑스 황금시대를 열다: 베르사유 성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을 때에도 태양왕을 비롯한 왕실 사람들과 귀족들은 이곳에 머무르는 시간이 많았다. 마침내 베르사유 성 내부와 정원의 기하학적 조경이 계획했던 대로 완전한 형태를 갖추자 태양왕 루이 14세는 1682년 5월 6일, 베르사유 궁전을 공식적인 왕궁으로 천명했다. 국가의 중요한 문서들과 왕실의 모든 것을 이곳으로 옮기도록 했고, 왕족이나 귀족들도 속속 베르사유로 몰려들었다.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있었다.

357개의 거울 판을 조합해서 안쪽으로 거대한 17개의 '거울 문'을 만들고 같은 크기의 17개의 바깥유리창문이 대칭을 이룬 '거울의 방'은 궁정수석화가 르브룅이 주도해 그린 천장화와 화려한 내부 장식으로 모든 이의 감탄을 자아냈다. '전쟁의 방'과 '평화의 방' 그리고 국왕 침실로 이어지도록 설계된 거울의 방은 외국 사신의 알현이 공식적으로 이루어지는 곳이기도 했으며, 국왕이 주재하는 왕실무도회가 열리거나 간혹 문학이나 음악발표회가 열리는 장소이기도 했다.

국왕의 침실은 '황소의 눈'이라 불리는 대기실을 통과해야만 하는데, 루이 14세가 베르사유 왕궁에 머물 때는 침실, 다시 말해 공식적인 국왕의 방에서 기상시간에 단 한 번도 신하들의 알현을 받지 않은 날이 없었다고 기록되어 있을 만큼 그는 정확하게 시간을 재는 왕이었다. 전날 밤 늦도록 축제가 있었든, 국왕 침실이 아닌 다른 방에서 사랑을 나누었든 간에 어떤 경우에라도 공식알현만큼은 국왕의 방에서 오전 8시 15분부터 정확하게 이루어졌다.

궁정 에티켓 '오네트 옴므': 17세기 프랑스 궁정문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 가운데 하나가 '오네트 옴므'다. 루이 14세는 이를 높이 평가하고 국왕 자신은 물론 백성 모두가 그렇게 살아가기를 원했다. '오네트 옴므'란 정직하고 청렴한 사람을 일컫는 말로서, 남을 배려하는 사람 혹은 교양을 갖춘 사람이란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루이 14세는 적어도 베르사유 왕궁에 모이는 사람들만큼이라도 궁정 에티켓을 지킬 것을 공식화했다.

루이 14세는 사람이 지닐 수 있는 가장 의로운 정신과 남을 배려하는 고운 마음,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격조 높고 우아한 행동과 예법을 강조했다. 대화를 나눌 때도 사람이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물론, 글을 쓸 때도 보다 더 다듬어지고 고급스러운 문체로 쓰도록 했다. 언어와 예술, 무엇보다 '오네트 옴므'의 고귀한 정신을 강조했던 루이 14세, 그의 시대는 사라졌지만 그의 사상은 지금까지도 면면히 이어져 따뜻한 세상을 살아가는 데 지켜야할 덕목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3부. 루이 15세, 위기의 시대를 초래하다



섭정공 필리프 도를레앙의 오만과 방종

루이 15세와 필리프 도를레앙: 1715년 9월 1일, 태양왕 루이 14세가 서거했다. 프랑스 전역의 백성과 왕실은 깊은 슬픔에 잠겼고, 장례식 후에는 태양왕의 자리를 이어야 하는 어린 왕세자에게 이목이 집중되었다. 루이 15세는 스스로 정치를 할 수 있는 나이가 아니었고 부모도 세상을 뜬 상태였기 때문에 왕의 섭정으로서 득세한 사람은 바로 루이 14세의 동생 필리프의 아들인 필리프 도를레앙이었다. 41세 나이에 프랑스 권력을 거머쥔 그는 초기에는 루이 14세의 유언에 따라 섭정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했으나, 점차 함부로 권력을 휘두른 결과 오욕으로 점철된 나날을 보냈다. 그는 국가에 불이익을 끼친 것은 물론, 권력을 남용해 온갖 방탕한 생활을 하기에 이르렀다.

루이 15세 시대의 종말

태양왕의 찬란한 빛은 사라지고: 루이 15세로서는 할아버지가 강력하게 심어놓은 절대왕권의 힘과 곳곳에 가득 차 있는 재물을 보물찾기처럼 찾아 육신의 영화를 누리기만 하면 됐다. 겉으로 드러난 그의 통치기간은 무척 평화로워 보였으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절망과 고통의 기운이 서서히 스며들어 왕실과 프랑스 전체를 위태롭게 흔들리게 했고, 머지않아 폭발해버릴 백성의 원성과 분노가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그렇기에 프랑스에 혼란과 위기의 시대가 오게 만든 장본인은 사실 루이 16세가 아니라 루이 15세라 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4부. 비운의 부부,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



왕세자 루이 16세와 공주 마리 앙투아네트

루이 16세의 신체기형: 아버지 루이 15세를 그토록 경멸하고 증오하던 왕세자 루이 드 프랑스가 1765년 36세의 나이에 죽었을 때 그의 장남, 훗날 루이 16세가 될 왕자는 열한 살이었다. 그는 별로 말이 없었고 특출하게 총명하지는 않았으나 꾸준히 독서를 한 덕분에 풍부한 지식과 상식을 갖추고 있었다. 사실 루이 16세가 그렇게 매사에 자신이 없고 여자에 관심을 보이지 않은 것은 선천적으로 성기가 약간 기형인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그렇다 하더라도 결혼하기 전까지 루이 16세의 성적 문제는 아무도 알 수 없었고, 결혼 후에도 이는 7년간이나 불문율에 부쳐졌다.

역사적으로 볼 때, 루이 16세만큼 소박하고 우직했던 왕도 없었을 것이다. 그는 역대 왕들이 공식칭호를 내리고 왕궁에 연인을 살게 했던 일을 하지 않은 유일한 왕임에 틀림없다. 여자는 아내이자 왕비인 마리 앙투아네트 한 사람만으로 만족해했고, 또한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하지만 루이 16세는 표현력이 결여되어 있었으며, 매사에 자신이 없고 우유부단했다. 지나친 식욕으로 불어가는 몸과 맑지 못한 눈을 가진데다 결혼 초기에는 성적불능 상태였다. 그런 연유로 아내에게 다정하게 대하지 않았던 남편을 마리 앙투아네트 역시 사랑할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한 일일 수도 있다.

부르봉가와 합스부르크가의 정혼: 언제나 그랬듯이 왕실결혼이란 국가 간의 정략적 이해관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즈음 프랑스에서는 루이 15세의 외무대신 수아죌과 오스트리아 제국의 마리아 테레지아의 정치적 고문역할을 하던 카우니츠가 새로운 방법을 모색했다. 그들은 누구도 넘보지 못할 프랑스의 부르봉가와 헝가리를 포함해 대제국이었던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가가 동맹을 맺고 정략적으로 혼인을 성사시키자는 안건을 결의했다. 두 대국이 힘을 합치면 유럽은 두 나라에 의해 좌우될 것이라는 발상에서였다. 그러다보니 결혼이 가능한 사람이 바로 부르봉가의 왕세자인 루이 16세였고, 그의 반려자로 물망에 오른 공주는 합스부르크가의 마리 앙투아네트였는데, 이제 겨우 열 살 남짓 된 이들의 결혼은 거의 결정이 된 상태였다.

전문 열람 제한

미가입 상태이므로 요약본의 일부만 제공됩니다.
더 깊이 있는 내일의 통찰력과 지식 에너지를
프리미엄 무제한 이용권으로 충전해 보세요!

멤버십 가입 / 결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