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당신 곁에는 누가 있나요?
박봉현 지음 | 생각의나무
지금 당신 곁에는 누가 있나요?
박봉현 지음
생각의나무 / 2011년 3월 / 279쪽 / 13,000원
제1장 우리를 새롭게 하는 우정 도미니카 출신 10대 소년과 90대 백인 할머니
90대 할머니와 10대 소년이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 얼핏 보면 '생뚱맞은 커플'이다. 하지만 힙합 음악과 게임에 빠져 있던 도미니카 출신의 소년 엘비스 치코와 오페라, 고전음악에 매료된 백인 할머니 마가렛 올리버의 우정은 아름다웠다. 산산조각 난 가정에서 사춘기를 맞은 치코와 단란한 가정에서 평온하게 살아온 올리버의 만남은 특별했다. 2003년 당시 91세 올리버와 18세 치코의 만남은 '숙명' 같았다.
올리버는 뉴욕시 맨해튼 북서부에 위치한 양로원에서 휠체어에 의지해 살았다. 올리버는 남편을 여의고 쌍둥이 딸과 손주들과 함께 살며 재봉사로 일했다. 한편 치코는 너무 가난했고, 삶에 아무런 희망도 없었다. 9세에 뉴욕으로 이민을 가 범죄와 마약소굴로 유명한 히스패닉 밀집지역인 맨해튼의 허름한 아파트에서 살았다. 그런데 15세가 되던 해에 어머니가 고향을 찾아 도미니카로 떠나버렸다. 어머니에게마저 버림받은 치코는 동네 불량배와 어울리며 외로움을 달랬다. 치코의 교육환경은 그야말로 '꽝'이었다. 교육은 고사하고 교도소에 갈 확률이 아주 높은 주거환경이었다.
어머니가 도미니카로 떠난 뒤 치코는 끼니 걱정까지 해야 했다. 여름에 아르바이트를 구하러 뉴욕시 노인센터에서 운영하는 세대간 화합 프로그램에 등록했다. 그리고 얼마 후 유대인 노인병원에서 일할 기회를 얻었다. 치코는 먹고살기 위해 열심히 일했다. 그러던 중 한 여성이 치코에게 다가왔다. 바로 올리버의 딸이다. 이 여성은 외롭고 병든 올리버의 벗이 되어줄 사람을 찾고 있었다. 치코는 시간당 10달러를 받는 조건으로 이 일을 하기로 했다. 돈이 필요했던 치코였지만 사실 올리버 할머니를 위해 봉사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치코가 올리버를 돌보기로 한 데는 각별한 이유가 있었다. 치코는 미국에 살면서 도미니카에 있는 자신의 할머니가 떠올라 마음의 안정을 찾기 어려웠다. 치코의 할머니는 아픈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한 채 쓸쓸한 말년을 보내고 있었다. 치코의 머릿속에서는 자신의 할머니와 올리버가 오버랩되었다. 병약해진 몸을 휠체어에 의지하고 하루하루를 외롭게 보내는 올리버를 보살피는 일이 치코에겐 도미니카에 있는 할머니를 돌보는 일로 여겨졌다. 자신의 할머니 곁에 있지는 못하지만 멀리서나마 올리버의 손발이 되고 말동무가 되어주는 일로 위안을 삼았다.
올리버의 딸은 치코에게 매주 세 번 할머니의 친구가 되어달라고 부탁했다. 치코가 양로원에 있는 올리버를 방문했다. 치코는 올리버에게 인사하고는 침대 옆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치코는 올리버에게 온 우편물을 전해주고 내용을 읽어주었다. 그리고 올리버의 안경을 닦아주고 옷매무새도 고쳐주었다. 올리버는 침울해 있다가도 치코를 보면 금세 화색이 돌았다. 둘은 시시콜콜한 잡담에서부터 인생문제까지 다양한 주제에 대해 이야기했다. 치코는 올리버의 사정을 끝까지 들어주고 위로해 주었다.
치코는 사소한 일에도 좌절하고 자책하는 올리버의 기분을 '업'시키기 위해 애썼다. 하루는 올리버가 휴대폰을 잃어버리고는 크게 낙담하며, "이제 죽을 때가 되었다"라는 식으로 자책했다. 이때 치코는 올리버에게 별일 아니라며 힘을 북돋워주었다. 치코는 자신도 무수히 많은 실수를 범하고 산다고 했다. 그러면 올리버는 다시금 기분이 돌아오곤 했다.
그러나 올리버는 조만간 세상을 떠나게 될 것이라는 절박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인생이 무엇인가?", "왜 나는 지금 여기에 와 있는가?" 하는 원초적 질문을 치코에게 수시로 해댔다. 나이 어린 치코였지만 올리버의 철학적 질문에는 형이상학적으로 답변했다. "피곤했던 삶에서 잠깐 쉼을 갖는 것"이라고 말이다. 치코는 어린 나이에 90대 할머니를 돌보다 보니 인생의 깊은 맛을 알게 된 모양이다.
혈육 없이 미국에서 홀몸이 된 치코는 올리버와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고향에 있는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을 표현했다. 마음이 착하고 정이 많은 치코는 가족과 떨어져 있는 자신에 대한 자책감을 달랠 수 있었다. 치코는 올리버로 하여금 그녀가 여전히 세상의 한 부분임을 인식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 그것이 바로 자신이 올리버 곁에 있는 근본적인 목적이라고 생각했다. 치코는 만일 올리버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자신은 맨해튼 슬럼가에서 갱이 되어 마약이나 팔고 총기로 사고를 친 뒤 결국 교도소 철창신세를 면치 못했을 것이라 되뇌었다. 치코는 올리버가 쇠약한 할머니가 아니라 한 소년의 인생을 구해낸 '생명의 은인'이라며 고마워했다. 그리고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자신을 보호하는 일이라고 확신하고 이를 가슴에 새겼다.
이스라엘 여성과 팔레스타인 과격파
탈리 파히마는 평범한 이스라엘 여성이다. 즈카리아 주베이다는 팔레스타인 과격파다. 원수의 나라로 서로를 공격해야 할 것 같은 사이다. 하지만 둘은 2003년에 처음 서로를 알게 되었다. 당시 파히마는 28살이었다. 파히마는 대다수 이스라엘 젊은이들에게 부과된 병역의무를 다하기 위해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육군에 들어갔다. 파히마는 군복무를 마치고 변호사 사무실에서 비서로 일했다. 그저 평범한 이스라엘 여성이었다. 팔레스타인 투쟁이나 과격파들에 대해선 관심도 없었고 알지도 못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자살공격이 점증하고 이스라엘 시민들의 피해가 증가하면서 "도대체 왜 이런 끔찍한 테러가 계속되는가?" 하는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졌다.
주베이다는 파히마의 또래였다. 주베이다는 야사르 아라파트의 파타당에 연계된 알 아크사 순교자여단의 예닌 지역 리더였다. 주베이다는 이스라엘의 공격으로 어머니와 동생을 잃었다. 그리고 자신을 겨냥한 이스라엘의 공격을 다섯 차례나 구사일생으로 넘겼다. 그리고 이리저리 몸을 피하면서 자신의 계획을 결행하고 있었다. 그래서 주베이다는 이스라엘의 블랙리스트에 오른 과격파다. 이스라엘은 수년간 주베이다 검거에 총력을 기울였다. 그렇다고 주베이다가 늘 숨어 지내는 것은 아니었다. 자신을 찾아오는 기자들의 인터뷰에 응할 정도로 겁이 없었다. 주베이다는 말랐고, 얼굴은 폭발사고로 인한 화상으로 일그러졌다. 고향에선 주베이다를 모르는 이가 없었고, 그만큼 그는 인정받는 인물이었다. 주베이다는 아라파트의 충성스러운 부하였다.
파히마가 주베이다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2003년 여름, 그에 관한 기사를 보고난 후부터였다. 파히마는 주베이다에 대한 스토리를 접하고는 자신의 마음속에 타오르는 호기심을 억누를 수 없었다. 글을 쓴 기자에게 전화를 걸어 주베이다의 연락처를 알아냈다. 그리고 얼마 후 서안지구의 예닌에 사는 주베이다를 만나러 혼자 예닌으로 향했다. 주베이다를 만나 그의 생각과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생각을 들으며 이해의 폭을 넓혔다. 주베이다는 자주 집을 비웠다. 그래서 주베이다가 집에 없을 때 파히마는 그의 아내와 두 자녀와 시간을 보내곤 했다. 이스라엘 정부가 자국 시민들의 팔레스타인 방문을 불허했는데도 파히마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파히마의 행적이 이스라엘 정보부에 포착되었고, 파히마는 적국의 과격분자와 내통하고 팔레스타인 과격파들의 무력공격을 도왔다는 혐의로 체포되었다. 이스라엘 언론은 파히마의 체포와, 그녀와 주베이다의 '관계'에 대한 스토리를 대서특필했다. 이스라엘 언론과 국민은 파히마를 매국노로 취급하는 듯한 시선을 보냈다. 일하던 변호사 사무실에서도 해고되었다. 파히마는 이스라엘 텔레비전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왜 자살공격을 하는지 궁금했다. 거기엔 분명히 무언가 곡절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그저 하루아침에 자살공격을 결심하고 이행하는 것은 아닐 것이라고 여겼다"라고 말했다.
수갑이 채워진 파히마는 법정에서 자신을 변호했다. "주베이다는 테러공격을 계획하지 않는다. 설령 그렇다고 해서 무엇이 문제인가? 그들은 이스라엘에 의해 점령당한 채 살고 있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여러분이 알기나 하는가?" 하며 법정에 모인 사람들에게 일갈했다. 그리고 파히마는 말을 이었다. "예닌에 있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나를 주베이다에게서 멀리 떼어놓으려고 했다. 이스라엘 사람인 내가 주베이다와 접촉하는 것을 그들도 꺼려했다. 나는 결코 주베이다를 밀고할 의사가 없다. 그는 자유를 위한 투사다."
하지만 파히마의 진술이 끝나고 이틀이 지난 후, 예루살렘 북부경계의 칼란디아 검문소 근처에서 폭탄테러가 있었다. 주베이다는 이 공격이 자신의 계획에 의한 것임을 공표했다. 폭탄공격으로 이스라엘 국경경찰들이 부상을 입긴 했지만 정작 큰 피해자는 팔레스타인 주민들이었다. 팔레스타인 주민 2명이 숨지고 10여 명이 부상을 당했다. 상황은 파히마에게 불리하게 돌아가는 듯했다. 그러나 파히마의 변호사는 파히마에 대한 혐의가 근거 없는 것이라고 반박했다. 파히마는 예닌에 친구들이 있을 뿐이고, 그곳에 있는 난민촌에 컴퓨터센터를 건립하는 일을 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일련의 폭력사태와 파히마 사이에는 아무런 연관성도 없다고 했다. 아무튼 파히마는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되었다.
주베이다를 만난 뒤 파히마는 한 인터뷰에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무력분쟁은 옳지 않으며 가능한 빨리 종식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스라엘에서는 자신을 손가락질하겠지만,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어려움을 이해하고 진정한 평화에 대해 생각하는 계기가 되어 주베이다에게 고마움을 느낀다고 말했다.
일본을 폭격한 미군 조종사와 피폭 지역의 주민
2차대전 말기 일본을 폭격한 미국인 조종사와 피폭 지역에 살던 일본인이 서로 마주보고 웃는 사이가 되었다. 전쟁 후 62년 만에 백발의 노인이 되어 만난 두 사람은 대형 일본 지도를 테이블 위에 펼쳐놓고 당시 폭격장소를 펜으로 가리키며 기억을 더듬었다. 하지만 둘 사이엔 전혀 냉기가 흐르지 않았다. 오히려 두 사람의 표정엔 온기가 넘쳤다.
비비안 로크와 겐지로 아라이. 로크는 2차대전 막바지에 미군 조종사였다. 둘의 우정은 수십 년 전 묘한 상황으로 인연을 맺었다. 종전선언 불과 몇 시간 전 로크는 폭격기를 몰고 일본 쿠마가야 상공을 비행하고 있었다. 로크는 쿠마가야 공습임무를 띠고 4,500미터 상공에서 구름 아래로 목표물을 겨냥하고 있었다. 한편 아라이는 쿠마가야에 살고 있었다. 로크가 폭탄을 퍼붓자 도시는 불바다로 변했다. 당시 11살인 아라이는 걸음아 날 살려라 하며 뛰었다. 한 사람은 폭탄을 쏟아 붓고 다른 사람은 살기 위해 처절한 몸부림을 쳤다. 결코 우정이 움틀 수 있는 관계가 아니었다.
공습으로 아라이의 집에 불이 붙었다. 아라이 가족은 뒷마당의 방공호로 대피했다. 공습이 멈추자 아라이의 아버지는 아내와 어린 세 아들을 안전한 곳으로 보냈다. 거리는 온통 불바다였다. 그리고 아라이 아버지와 아라이의 형만 그 집에 남았다. 집은 완전 폐허가 되었다. 아라이의 아버지는 폐허더미에서 1949년 집을 재건했다. 그리고 아라이는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이 집에서 살았다. 집은 말끔하게 고쳐졌지만 미군의 폭격으로 집이 폭삭 무너진 것은 아라이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전쟁이 끝나고 수십 년이 흘렀다. 로크는 자신의 폭탄투하로 구름 아래 쿠마가야 도시가 어떻게 되었는지 간혹 궁금해 했다. 한편 아라이는 캐나다로 이주해 엔지니어가 되었다. 전시였지만 한 사람은 가해자로서 다른 한 사람은 피해자로서 자신들이 거쳐야 했던 시절을 이따금 되새김질했다. 아니, 그냥 묻어둘 것이 아니라 좀 더 밝게 드러내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 했다.
그러다 계기가 마련되었다. 2004년, 로크의 전투편대에 대한 기록을 정리한 웹사이트를 통해 둘은 온라인 교제를 시작했다. 서로의 존재를 모른 채 폭격하고 폭격당한 두 사람의 관계는 59년 만에 구체화되었다. 로크와 아라이는 이메일로 상대에게 자신을 알렸다. 처음에 둘은 공손하게 접근했다. 그러다 자신들이 품었던 궁금증과 상대에 대한 호기심이 발동했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도식적 관계가 서로에 대한 이해와 연민의 관계로 변하면서 훈훈함이 풍겨 나왔다.
두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잡지 《리더스 다이제스트》에 전해졌다. 로크와 아라이의 관계에 대해 취재를 맡은 《리더스 다이제스트》 기자 크리스 티노브가 두 사람의 만남을 주선했다. 이메일을 통해 조금씩 쌓인 둘의 우정이 자칫 직접대면으로 인해 순식간에 사라지거나 둘 사이에 악감정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있었다. 폭탄 투하가 생생하게 언급되고 피해상황이 소상히 드러나면서 둘의 대화가 껄끄러워지고 급기야 불편한 분위기로 돌변하지 않을까 하는 노파심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티노브 기자는 두 사람을 대면시키기로 마음을 굳혔다.
전쟁으로 인한 아라이와 로크의 인연 이후 62년이 흐른 2007년 7월 티노브 기자는 캐나다 밴쿠버에서 아라이를 데리고 로크가 사는 시카고로 향했다. 로크와는 인근 호텔로비에서 만나기로 했다. 티노브와 아라이는 호텔 앞에서 내렸다. 아라이는 73세의 노구에도 로비로 향하는 계단을 가볍게 걸어 올라갔다. 아라이는 브라질에서 보스니아까지 안 가본 데가 없을 정도로 지구촌을 누비는 사업가가 되었지만 이 순간만큼은 면접 보러 가는 사람마냥 긴장된 얼굴이었다. 예측할 수 없는 미래에 대한 설렘과 호기심으로 상기되었다고 하는 게 더 잘 어울리겠다.
로비에서 미리 기다리고 있던 로크는 티노브와 아라이의 모습을 보고 금세 알아보았다. 생면부지였지만 걸어오는 분위기에서 자신이 만나려는 사람들이란 것을 직감했다. 로크는 아라이와 손을 잡았다. 로크의 손이 살짝 떨렸다. 이내 로크는 아라이의 어깨를 어루만졌다. 마치 전쟁 통에 헤어졌던 동생과 우여곡절 끝에 재회하는 것처럼 애틋했다. 로크가 아라이에게 한 첫 마디는 "당신이 살아 있어서 기쁘오"였다. 불특정다수를 향한 폭탄세례에서 아라이가 억울하게 희생되지 않은 것에 진심으로 감사했다. 이 만남에 대한 걱정은 기우로 판명되었다. 이메일로 이어져온 둘의 '얼굴 없는 우정'은 이날의 만남으로 그 단계를 하나 더 높였다.
호텔에서 여장을 푼 로크와 아라이는 이틀 동안 유람선 여행을 즐기고 담소를 나눴다. 특히 아라이는 전쟁 중 적이던 일본인에 대해 로크가 보여준 따스함에 감복하였다. 아라이의 눈에 비친 로크는 단순히 연민과 동정에 가득 찬 미국인이 아니었다. 아라이는 로크가 용기 있는 사람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감격의 상봉을 끝내고 두 사람은 아쉬움 속에 작별했다. 그리고 캐나다 밴쿠버로 돌아간 아라이가 3주 후 로크에게 이메일을 띄웠다. "우리의 만남은 언제나 나를 행복하게 합니다." 아라이와 로크는 적이었다. 죽고 죽이는 구도 속에서 정반대쪽에 있었다. 그러나 아라이와 로크의 우정은 전쟁으로 인해 이들의 마음에 입힌 상흔을 말끔히 닦아냈다.
제2장 나눔의 공동체를 만드는 우정 컬럼비아 대학교 교수와 시카고의 갱 두목
1989년, 수디르 벤카테시와 J.T.는 시카고 대학원 사회학과 1년생이고, J.T.는 시카고 갱 '블랙킹즈'의 두목이었다. 인디언 출신 벤카테시는 당시 윌리엄 윌슨 교수의 지도 아래 빈곤층에 대한 선다형 설문조사를 맡았다. J.T.는 시카고에서 막강한, 가장 악명 높은 '밤의 황제'였지만 조용한 카리스마를 뿜어낸 인물이었다. 벤카테시와 J.T.의 만남은 벤카테시가 설문조사를 위해 시카고 남쪽 주택건설 프로젝트인 로버트 테일러 홈즈에 들어가면서 이루어졌다.
벤카테시는 흑인 갱들의 본부로 사용되는 폐건물에 처음 발을 들여놓았다. 겁 없이 자신들의 텃밭에 들어온 벤카테시를 갱들이 가만둘 리 없었다. '레지'라고 불리는 갱이 벤카테시를 위협했다. 벤카테시는 돌아가라는 협박에 굴하지 않고 버텼다. 주변에 몇 명이 더 다가왔다. 벤카테시는 완전히 포위되었다. 벤카테시를 수상히 여긴 갱들은 그를 인질로 잡았다. 벤카테시는 자칫 개죽음을 당할 처지에 놓였다. 갱들은 벤카테시를 멕시코 갱으로 오인했다. 한 명은 벤카테시의 머리에 총을 들이댔고 다른 갱은 6인치짜리 칼로 찌를 기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