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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일지

김구 지음 | 소담출판사
백범일지

김구 지음

소담출판사 / 2002년 7월 / 344쪽 / 5,500원



상권


머리말 - 인(仁), 신(信) 두 어린 아들에게

아비는 너희가 있는 고향에서 수륙(水陸) 5,000리나 떨어진 먼 나라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이 몸은 이미 원수 왜(倭)에게 선전포고를 내리고 지금 사선(死線)에 서 있으니, 내 목숨을 어찌 믿어 너희가 자라서 면대하여 말 할 수 있을 날을 기다리겠느냐. 이러하기 때문에 지금 이 글을 써두려는 것이다.

내가 내 경력을 기록하여 너희에게 남기는 것은 결코 너희더러 나를 본받으라는 뜻은 아니다. 내가 진심으로 바라는 바는 너희도 대한민국의 한 국민이니 동서와 고금의 허다한 위인 중에서 가장 숭배할 만한 이를 택하여 스승으로 섬기라는 것이다. 그리고 너희가 자라더라도 아비의 경력을 알 길이 없겠기로 내가 이 글을 쓰는 것이다. 다만 유감 되는 것은 이 책에 적은 것이 모두 오랜 일이므로 잊어버린 것이 많은 것은 사실이나, 하나도 보태거나 지어 넣은 것이 없는 것도 사실이니 믿어주기를 바란다. 대한민국 11년 5월 3일 중국 상해에서 아비

우리 집과 내 어릴 적

우리는 안동 김씨 경순왕의 자손이다. 경순왕의 8대 손이 충렬공, 그의 현손이 익원공인데 이 어른이 우리 파의 시조요, 나는 익원공의 21대 손이다. 병자년 7월 11일(이날은 조모님 기일이었다) 자시에 해주 백운방 텃골에 있는 웅덩이 큰댁이라고 해서 조부와 백부가 사시는 집에서 태어난 것이 나다. 내 일생이 기구할 예조였는지, 그것은 유례 없는 난산이었다. 겨우 열일곱 살 되시는 어머님은 내가 귀찮아서 어서 죽었으면 좋겠다고 짜증을 내셨다는데, 젖이 말라서 암죽을 먹이고 아버지가 나를 품속에 품고 다니시며 동네 아기 있는 어머니 젖을 얻어 먹이셨다. 먼 친척 족대모 핏개댁이 밤중이라도 싫은 빛 없이 내게 젖을 물리셨단 말을 듣고, 내가 열 살 갓 넘어 그 어른이 작고하신 뒤에는 그 산소 앞을 지날 때마다 경의를 표하였다.

내가 아홉 살 적에 조부님 상사가 났는데 장례 날에 삼촌이 상여 메는 사람들에게 야료를 하여서 결국은 그를 결박을 지어놓고야 장례를 모셨다. 그 때에 어머니는 내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너희 집에 허다한 풍파가 모두 술 때문이니 두고 보아서 네가 또 술을 먹는다면 나는 자살을 하여서 네 꼴을 안 보겠다." 나는 이 말을 깊이 새겨들었다.

이 때쯤에 나는 국문을 배워서 이야기책을 읽을 줄 알았고, 천자도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얻어 배워서 다 떼었다. 그러나 내가 글공부를 하리라고 결심한 데는 한 동기가 있었다. 진사나 대과나 다 글을 잘 공부하여 큰선비가 되어서 과거에 급제하면 일문을 세울 수 있다는 말을 어른들에게서 들었다. 이 말을 들은 뒤 나는 부쩍 공부할 마음이 생겨서 아버지께 글방에 보내달라고 졸랐다. 그때에 내 나이가 열두 살이었다. 나는 밥그릇 망태를 메고 고개를 넘어서 다녔다. 집에서 서당으로 서당에서 집으로 오기까지 내 입에서는 글소리가 끊어지는 일이 없었다.내 나이가 열일곱 살이 되매 선생이라는 이가 모두 고루해서 내 마음에 차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우리 가세로는 고명한 스승을 찾아갈 수가 없어서 아버지께서도 무척 걱정을 하시던 차에 우리 동네에서 10리 쯤 떨어진 학골에 정문재라는 이가 글을 가르치고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과문으로는 당시 굴지되는 큰선비여서 그 문하에는 각처에서 선비들이 모여들었다. 이 정 선생이 내 백모와 재종 간이므로 아버지께서 그에게 간청하여 훈료(수업료) 없이 통학하며 배우는 허락을 얻으셨다. 이에 나는 날마다 밥 망태를 메고 험한 산길을 10리나 걸어서 기숙하는 학생들이 일어나기도 전에 대어 가는 일이 많았다.

이때에 임진경과를 해주에서 보인다는 공포가 났으니 이것이 우리 나라의 마지막 과거였다. 나는 과거에 응시하기로 하고 준비를 했다. 그러나 과거는 매우 실망스러웠고 그 말씀을 아버지에게 드렸더니 풍수 공부나 관상 공부를 해보라고 하셨다. 나는 이 말씀을 매우 유리하게 여겨서 아버지께 청하여 『마의상서』를 빌려다가 석 달 동안 독방에서 꼼짝 아니하고 공부하였다. 나는 "상호불여신호 신호불여심호(相好不如信好 信好不如心好 : 얼굴이 좋음이 몸 좋음만 못하고, 몸 좋음이 마음 좋음만 못하다)"라는 구절을 발견하고 마음 좋은 사람이 되기로 굳게 결심하였다.

우리 동네에서 20리 쯤 떨어진 갯골에 오응선과 최유현이 동학 선생에게서 도를 받아가지고 공부하고 있었다. 나는 이 동학이란 것에 호기심을 갖게 되어 이 사람들을 찾아보고 입도할 결심을 하였는데 아버지께서도 허락해 주셨다. 동학에 입도하여 공부를 열심히 하는 한편 포덕에도 힘을 쏟았다. 아버지께서도 입도하셨다.

이듬해인 계사년 가을에 해월(최시형) 대도주로부터 경통(공함)이 왔으므로 황해도 내에서 직접 대도주를 찾아갈 인망 높은 도유(道儒) 15명을 뽑을 때 나도 뽑혔다. 우리 일행 열다섯은 인도자를 따라 해월 선생의 처소에 이르러 선생 앞에 한꺼번에 절을 드리고 선생의 선풍도골을 뵈오려니와, 선생께 무슨 신통한 조화, 줌치나 받을까 함이었으나 그런 것은 없었다. 방 내외에는 여러 제자들이 옹위하고 있었다. 그 중에도 손응구는 장차 해월 선생의 후계자로 대도주가 될 의암 손병희로서 깨끗한 청년이었고 유식해 보였다.

우리 일행이 해월 선생 앞에 있을 때에 보고가 들어왔다. 전라도 고부에서 전봉준이가 벌써 군사를 일으켰다는 것이었다. 이에 선생이 동원령을 내리자 각지에 와서 대령하던 대접주(大接主)들이 살기를 띠고 물러가기 시작했다. 각각 제 지방에서 군사를 일으켜 싸우자는 것이었다.

우리 황해도에서 온 일행도 각각 접주라는 첩지를 받았다. 황해도 동학당들도 들먹들먹하고 있었다. 최고회의에서는 우선 황해도 수부인 해주성을 빼앗아 탐관오리와 왜놈을 다 잡아 죽이기로 하고 팔봉 접주 김창수를 선봉장으로 삼기로 결정하였다. 나는 쾌히 '선봉'이라고 쓴 사령기를 들고 말을 타고 선두에 서서 해주성을 향하여 전진하였다. 남문 밖에서 도유 서너 명이 총에 맞아 죽자 군사들이 퇴각하기 시작하였다.

나는 이번의 실패에 분개하여서 잘 훈련된 군대를 만들기에 힘을 다하기로 작정하였다. 구월산으로 진을 옮길 준비를 하던 차에, 어느 날 밤 신천 안진사로부터 밀사가 왔다. 안진사의 맏아들 중근은 나중에 이등박문을 죽인 안중근이다. 나는 피차에 어려운 지경에 빠질 경우에는 서로 도울 것이라는 밀약을 성립했다. 이때는 내 나이가 열아홉, 갑오년 섣달이었다. 나는 홍역으로 자리에 눕게 되었는데 하루는 관군이 쳐들어온다는 급보가 날아들더니 뒤이어 어지러이 총소리가 들렸다. 순식간에 양 군의 육박전이 벌어졌다. 나의 군사들은 불의의 습격을 받아서 일패도지하고, 나의 본진은 적의 제압한 바 되고 말았다. 나의 군사들은 보기도 흉하게 흩어지는 모양이었다. 구월산의 내 군사가 소탕되니 황해도의 동학당은 전멸이 된 셈이었다. 몽금포에서 석 달을 숨어 지내다가 텃골 부모를 찾아뵙고 청계동 안 진사를 찾아 몸을 의탁하기로 하였다.

내가 고 산림을 처음 대한 것은 안 진사의 사랑에서였다. 고 산림의 이름은 능선인데 그는 해주 서문 밖 비동에 세거하던 사람으로서, 중암 조중교의 문인이요, 의암 유인석과 동문으로서, 해서에서는 행검으로 굴지되는 학자였다. 나는 매일 고 선생 사랑에 갔다. 선생은 내게 고금의 위인을 비평해주고 당신이 연구하여 깨달은 바를 가르쳐 주었다. 선생이 특히 역설하시는 바는 의리에 관해서 였다. 비록 뛰어나 재능이 있다고 해도 의리에서 벗어나면 그 재능이 도리어 화단이 된다고 하셨다.

망하는 우리 나라를 망하지 않도록 붙들 도리는 없는가 하는 내 물음에 대해서 선생은 청국과 서로 맺는 것이 좋다 하시고 그 나라 국정도 조사하고 그 나라 인물과도 교의를 맺어두었다가 후일에 기회가 오거든 서로 응할 준비를 하여두는 것이 필요하다고 가르치셨다. 나는 선생의 이 말씀에 감동하여 청국으로 갈 마음이 생겼다.

기구한 젊은 때

내가 청국을 향하여 방랑의 길을 떠나기로 작정한 바로 전날, 참빗장수 김형진이란 사람을 만나 뜻이 통하여 이튿날 그를 데리고 함께 떠났다. 만주로 돌아다니다가 집안의 광개토대왕비는 아직 몰랐던 때라 보지 못한 것이 유감이거니와 임경업 장군의 비각을 본 것이 기뻤다. '삼국충신임경업지비'라고 비면에 새겨져 있는데, 이 지방 중국 사람들은 병이 나면 이 비각에 제사를 드리는 풍속이 있다고 한다. 이 지방으로 방랑하는 동안에 김이언이란 사람이 청국의 도움을 받아서 일본에 반항할 의병을 꾸미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우리는 이 사람을 찾아보기로 작정하고 김형진을 먼저 떠나보내 그 인물됨을 알아보고자 했다.

하루는 압록강 근처 노중에서 젊은 청국 장교 한사람을 만났다. 나는 중국말을 몰랐으므로 내가 여행하는 취지를 적은 글을 품에 지니고 다녔는데, 이것을 그 장교에게 내어 보였다. 그는 다 읽기도 전에 소리내어서 울었다. 내가 놀라서 그가 우는 까닭을 물으니 그는 내 글에 "痛彼倭敵與我不共戴天之讐(통피왜적여아불공대천지수 : 왜적과는 더불어 평생을 같이 살 수 없는 철천지원수로다)"라는 구절을 가리키며 다시 나를 붙들고 울었다. 그는 작년 평양 싸움에서 전사한 청국 장수 서옥생의 아들이었다. 그는 내가 연하인 것을 알고 피차 형제의 의를 맺기를 청하고, 서로 같은 원수를 가졌으니 함께 살면서 시기를 기다리자며 그의 고향 금주로 가자고 청했다. 금주에는 아직 500의 군사가 남아 있으며 재산도 넉넉하다고 설명했다. 썩 좋은 기회였다. 김형진만 같이 있었다면 나는 이때 서를 따라갔을 것이다.

후에 금주로 따라갈 것을 결연히 말하고 서와 작별하였다. 나는 참빗장수 행세로, 김이언의 일을 물어가며 서와 작별한지 5, 6일 만에 김이언의 근거지 삼도구에 다다랐다. 그러나 김형진과 나는 그에게 실망만 안고 그들과 헤어져 수일 만에 신천으로 되돌아 왔다. 이때는 단발령이 내려져 팔도에서 백성들이 상소를 올리고 원성이 자자하던 시기였다. 나는 고 선생을 찾아가 안 진사와 상의하여 의병을 일으킬 것을 진언하였다. 이를테면 단발 반대의 의병이었고 단발 반대를 곧 일본 배척으로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안 진사의 반대로 계획이 무산되자 다시 해주를 등지고 금주 서씨의 집으로 가기 위해 방랑의 길을 계속했다.

평양을 거쳐 안주 병영에 도착하니 게시판에 단발을 정지하라는 영이 붙어 있었다. 임금은 개혁파가 싫어서 러시아를 배경으로 김홍집을 처단하고 개혁의 수레바퀴를 뒤로 돌려놓은 것이었다. 이로부터 친아파와 친일파의 갈등이 벌어지게 되었다. 나는 한성 정국의 변동으로 심기가 일전하였다. 구태여 외국으로 갈 것이 무엇이냐, 삼남에서는 곳곳에 의병이 일어난다고 하니 본국에 머물러 시세를 관망하여 새로 거취를 정하기로 하고 길을 돌렸다.

나는 치하포의 객주에서 단발한 사람 하나를 발견했다. 그는 장연에 산다고 했으나 서울말을 쓰고 있었다. 조선말에 능숙했지만 내 눈에는 분명 왜놈이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그의 흰 두루마기 밑으로 군도집이 보였다. 나는 저놈 한 놈을 죽여서라도 하나의 수치를 씻어보리라고 결심하였다. 그러자 망설임과 울렁거림이 가슴에 넘쳤다. 그때에 문득 고 선생의 교훈이 떠올랐다. '득수반지부족기 현애철수장부아(得樹攀枝不足奇 懸崖撤手丈夫兒 : 가지를 잡은 손을 탁 놓아라! 그것이 대장부다)' 나는 가슴속에 한 줄기 광명이 비침을 깨달았다.

나는 "이놈!" 소리를 치면서 발길로 왜놈의 복장을 걷어차니 한 길이나 거진 되는 계하에 나가 떨어졌다. 나는 듯이 쫓아 내려가 그놈의 모가지를 밟았다. 그러자 왜놈이 칼을 빼어 번쩍거리며 내게 덤벼들었다. 나는 그의 칼날을 피하면서 그의 옆구리를 차서 거꾸러뜨리고 손목을 힘껏 밟은 즉 칼이 떨어져 굴렀다. 나는 그 칼을 들어 왜놈의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점점이 난도를 쳤다. 2월 추운 새벽이라 빙판이 진 땅 위에 피가 샘솟듯 흘렀다. 나는 손으로 그 피를 움켜 마셨다.

소지품을 조사한즉 그 왜는 육군 중위 토전양량(土田讓亮)이란 자요, 엽전 600냥이 짐에 들어 있었다. 나는 그 돈을 동네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라고 분부하였다. 식후에 주인 이화보를 불러 지필을 대령하라고 이르고 '국모의 원수를 갚으려고 이 왜를 죽였노라'하는 뜻의 포고문을 한 장 쓰고 그 끝에 '해주 백운방 기동 김창수'라고 서명까지 하여 큰 길가 벽상에 붙이게 하고 이 사실을 안악 군수에게 알리라고 명한 후에 유유히 그곳을 떠났다.

집에 돌아와 부모님께 지난 일을 낱낱이 아뢰었더니, 부모님은 날더러 어디로 피하라고 하셨으나 나는 나라를 위하여 정정당당한 일을 한 것이니 비겁하게 피하기를 원치 않을뿐더러, 만일 내가 잡혀가서 목이 떨어진다고 해도 만민에게 교훈을 준다면 죽어도 영광이라 하여 태연히 집에서 잡으러 오기를 기다렸다. 그로부터 석 달 후 나는 해주 옥에 갇혔다.

감사 민영철에게 첫 심문을 받는 도중 대답을 안 함으로 주리에 틀려서 내 정강이의 살이 터져지고 허옇게 뼈가 드러났다. 나는 서울에 가기 전에는 내가 그 왜놈을 죽인 동기를 말하지 아니하리라고 작정한 것이었다. 나의 요구대로 두 달이 지난 후 인천으로 이수가 되었다. 내가 인천옥에 이수가 된 것은, 갑오경장 이후에 외국 사람과 관련된 사건을 심리하는 특별재판소를 인천에 둔 까닭이었다.

옥 속은 더할 수 없이 불결하고 아직도 여름이라 참으로 견딜 수가 없었다. 게다가 나는 장질부사가 들어서 고통이 극도에 달하였다. 그런 때에 나를 심문한다는 기별이 왔다. 나는 서울에 가서 대관들에게 한번 크게 말하려 함이었지만은, 이제는 불행히 병으로 언제 죽을 지도 모르는 상황이니 부득불 이곳에서라도 왜를 죽인 취지를 다 말하리라고 생각했다.

나는 옥사정의 등에 업혀 경무청으로 들어갔다. 나는 경무관 김윤정을 향하여 국모 폐하의 원수를 갚으려고 왜구를 때려죽였다고 소리쳤다. 그러자 청상에 늘어앉은 경무관, 총순, 권임 등이 서로 맥맥히 돌아볼 뿐이요, 정내는 고요했다. 나는 옆 의자에 걸터앉은 일본 순사를 향하여 다시 소리쳤다. "소위 만국공법 어느 조문에 통상, 화친하는 조약을 맺고서 그 나라 임금이나 황후를 죽이라고 하였더냐. 이 개 같은 왜놈아. 너희는 어찌하여 감히 우리 국모 폐하를 살해하였느냐. 내가 살아서는 이 몸을 가지고, 죽으면 귀신이 되어서 맹세코 너희 임금을 죽이고 너희 왜놈들을 씨도 없이 다 없이 해서 우리 나라의 치욕을 씻고야 말 것이다."하고 소리를 높여서 꾸짖었더니 와다나베 순사는 그것이 무서웠던지 "칙쇼", "칙쇼"하면서 대청 뒤로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칙쇼'는 짐승이란 뜻으로 일본말의 욕이란 것을 나중에 알았다. 정내의 공기는 더욱 긴장으로 가득찼다.

그들은 다음에 심리를 속개하기로 하고 나를 옥으로 되돌려 보냈다. 구름처럼 사람들이 모여서 나를 구경하고 있었다. 나를 업고 가는 옥사정이 군중들 틈에 섞인 어머니 앞을 지나가며, "어쩌면 이런 호랑이 같은 아들을 두셨소?"하던 것을 나는 기억한다. 얼마 아니하여 어머니가 면회를 오셨다. 어머니 말씀이, 내가 심문을 받고 나온 뒤에 김 경무관이 돈 150냥을 보내면서 내게 보약을 사 먹이라 하였다고 전하셨다.

둘째 심문 날 김윤정이 슬쩍 내 곁으로 지나가며, 오늘도 왜놈이 왔으니 기운껏 호령하라고 한다. 나는 와다나베를 향하여 또 일본을 꾸짖는 말을 마음껏 퍼부었다. 그러자 와다나베가 다가와서 내가 그렇게 충의가 있는 데 왜 벼슬을 못하였느냐고 빈정댔다. 나는 벼슬을 못 할 상놈이니까 조그마한 왜놈이나 죽였을 뿐 벼슬을 하는 양반들은 너의 황제의 모가지를 베어서 원수를 갚을 것이라고 대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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