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성
김용택 지음 | 더숲
반성
김용택 외 지음
더숲 / 2010년 11월 / 255쪽 / 12,000원
예술가 아들의 삶 - 이순원어머니가 '예술가의 장한 어머니 상'이라는 이름이 좀 긴 상을 받았습니다. 취지는 한국의 많은 예술가의 어머니들 중에 장한 어머니를 가려 드리는 상일 텐데, 상이든 단체든 원래 이름이 좀 긴 것일수록 오히려 취지와 대상이 명확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름이야 어찌되었든 어머니가 아들을 훌륭한 예술가로 잘 키웠다고 이 상을 받으셨는데, 또 어머니가 그 상을 받으시고 속으로 참 많이도 기뻐하셨는데, 결과로만 본다면 어쩌다 저도 이렇게 한 번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릴 때가 있다는 것이지요.
책이 나와서 그게 신문에도 나고 텔레비전에도 나오고 하면 부모님께서 많이 기뻐하시지요. 이따금 아들이 이런저런 문학상을 받을 때도 그렇고, 또 이런 일처럼 어머니가 아들의 일로 칭송을 듣게 되었을 때 어머니 역시 표현을 안 하셔도 마음속으로 많이 기쁘시겠지요. 더구나 그 아들이 어릴 때부터 어디 보통 말썽쟁이여야 말이지요. 제가 10여 년쯤 전에 쓴 저와 어머니의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지금 국어 검정교과서에도 실린 내용인데, 여기에 한번 옮겨보겠습니다. 제목은 '어머니는 왜 산길에 이슬을 털었을까'입니다.
중학교 때 나는 학교를 다니는 것이 싫었다. 그래서 가끔 결석도 하고, 또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학교에 가지 않은 날도 많았다. 우선 집에서 학교가 너무 멀었다. 매일 20리가 넘는 길을 걸어다녀야 했다. 학교에 가도 재미가 없었다. 그날도 나는 학교에 가기 싫다고 했다. 재미가 없다고 했다. 어린 아들이 그러니 어머니로서도 한숨이 나왔을 것이다. "그래도 얼른 교복을 갈아입어라. 어미가 신작로까지 데려다줄 테니까." 그래서 마지못해 교복을 갈아입었다. 그러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어머니가 먼저 마당에 나와 나를 기다리기 때문이다. 나는 잠시 전 어머니가 싸주신 도시락까지 넣어 책가방을 쌌다. 가방을 들고 밖으로 나가자 어머니가 지게 작대기를 잡고 계셨다. "그건 뭘 하게?" 그 시절 나는 어머니에게 존댓말을 쓰지 않았다.
"글쎄, 너 학교 가는 데 필요할 것 같아서 그러지. 가방 이리 줘라." 하루 일곱 시간씩 공부하던 시절이었고, 무게가 만만찮은 가방이었다. 그렇게 어머니는 한 손엔 내 가방을 들고 또 한 손엔 지게 작대기를 들고 나보다 앞서 마당을 나섰다. 나는 말없이 뒤를 따랐다. 그러다 신작로로 가는 산길에 이르러 어머니가 다시 내게 가방을 내주었다. "자, 여기서부터는 네가 이 가방을 들고." 나는 어머니가, 내가 학교에 가기 싫어하니 중간에 학교로 가지 않고 다른 길로 샐까 봐 신작로까지 데려다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런 생각으로 함께 신작로로 가자고 한 것이 아니었다. "너는 뒤따라오너라."
거기에서 내게 가방을 넘겨준 다음 어머니는 두 발과 지게 작대기를 이용해 내가 가야 할 산길의 이슬을 털어내기 시작했다. 어머니의 몸빼 자락이 이내 아침 이슬에 흥건히 젖었다. 어머니는 발로 이슬을 털고, 작대기로 이슬을 털었다. 그렇다고 뒤따라가는 내 교복 바지가 안 젖는 것도 아니었다. 신작로까지 10분이면 넘을 산길을 20분도 더 걸려 넘었다. 어머니의 옷도 그 뒤를 따라간 내 옷도 흠뻑 젖었다. 거기서 어머니는 품속에 넣어온 새 신발을 내게 갈아 신겼다. "앞으로는 매일 털어주마. 그러니 이 길로 학교를 가. 다른 데로 가지 말고." 그 자리에서 울지는 않았지만 왠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아니, 내일부터 나오지 마. 나 혼자 갈 테니까."
그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어머니가 늘 이슬을 털어주신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어떤 날 가끔 그렇게 내 학교 길의 이슬을 털어주셨다. 또 새벽처럼 일어나 먼저 이슬을 털어놓고 오실 때도 있었다. 지금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때 어머니가 이슬을 털어주신 길을 걸어 지금 내가 여기까지 왔다고. 올해 어머니는 일흔셋이시다. 돌아보면 꼭 그때가 아니더라도 어머니는 내 살아온 길 고비고비마다 이슬털이를 해주셨다. 아마 그렇게 털어내주신 이슬만 모아도 작은 강 하나를 이루지 않을까 싶다. 오래오래 사세요, 어머니. 아들은 어른이 된 뒤에야 그때 어머니가 털어주시던 그 이슬털이의 의미를 깨달았다.
이렇게 키운 아들이 나중에 소설가가 되고, 또 어머니는 나중에 아주 늙으셔서 '예술가의 장한 어머니상'을 받으신 것인데, 제가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리는 건 정말 어쩌다 한 번인 것 같습니다. 다른 이들에겐 하지 않는 걱정을 예술가 아들에게는 늘 달고 살지요. 아들이 글을 쓰는 일을 하고, 그것으로 먹고사는 일이 안정적이지 않다 보니 평소에도 이 아들네가 밥은 제대로 먹고사나, 아이들 교육비가 만만찮을 텐데 그건 별 걱정 없이 잘 펴나가나, 글은 또 늘 그렇게 쓸 거리가 준비되어 있나, 하나에서 열까지 별의별 것이 다 걱정이지요. 그건 글을 쓰는 아들의 나이가 서른일 때도 그랬고, 마흔일 때도 그랬고, 쉰이 넘어서 머리가 조금씩 희끗희끗해져도 그렇습니다.
아마 어머니가 제 삶을 가장 편하게 바라보았던 때는 제가 작가로서 아직 크게 이름을 내기 전 어느 금융기관에서 초보 작가생활을 하면서 10년간 직장생활을 하던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 집사람도 그 시절이 가장 마음 편했고, 삶도 안정적이었다고 합니다. 어머니 역시 그 시절의 저를 가장 편하게 바라보셨던 것 같습니다.
우리 집 오남매 형제 중에서 부모님에게 조금도 걱정을 안 끼치고, 자주 찾아뵙고, 볼 때마다 마음 든든하고, 부부 금실이 좋아 잘 살고, 그래서 같은 여러 자식 중에서도 바라보는 부모의 마음까지 편안하게 하는 형제는 제 바로 아래 여동생과 막내 동생입니다. 어머니가 저 상을 받으실 때 서울 장충동에 있는 국립극장에서 시상식을 했습니다. 그러면 그 다음 순서로 그날 모인 우리 집의 대가족 식사준비도 마땅히 제가 해야 하는데 막내 동생이 국립극장 바로 옆에 있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비싼 호텔에 스무 명도 넘는 대식구 식사를 맞춰놓았고, 그러자 제 바로 아래 여동생이 이번엔 자기가 한번 내고 싶다고 서로 그러니 그것도 어머니를 참 기쁘고 흐뭇하게 하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어머니에게 그런 상을 타게 하면서도 이렇게 형제들의 주머니를 축내게 하는 이런저런 일이나 벌이고 사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게 또 예술가 형제를 둔 형제들의 뒤치다꺼리이기도 합니다. 어쨌거나 어머니가 상을 받으셔서 동생들이 또 큰돈을 쓰게 되었던 것입니다.
어머니가 그 상을 받는 데는 저보다 제 고향 강릉시 공무원 한분이 참 많은 애를 쓰셨습니다. 저는 그런 일이 남세스럽다고 절대 추천사나 공적서 같은 거 올리지 말라고 했는데도 그 분이 저 모르게 뒤로 면사무소와 마을로 나와 어머니에 대해 한 가지 한 가지를 알아내 장문의 공적서도 만들고 추천서도 만드셨던 것 같습니다. 연락도 강릉시에서 먼저 받았습니다. 나중에야 그 분이 저에게 전화를 걸어 "선생님, 이건 정말 자랑스럽고 좋은 일이니까 선생님도 이제 그만 남세스러워하고 우리처럼 좋아하세요" 하고 말했습니다.사실 이런 일 한 가지도 저는 이 땅의 다른 작가들보다 더 많이 고향으로부터 많은 관심과 보살핌을 받고 사는 게 틀림없습니다. 우리나라 전국에 저보다 더 훌륭한 작가들도 많고, 또 우리 어머니보다 더 힘들고 장하게 예술가를 키워낸 어머니들도 많은데 다른 고장에서는 자기 고향에 그런 작가가 있어도, 실제 그런 일을 한번 추진하는 것이 얼마나 귀찮은지를 잘 알기에 알아도 그냥 넘어가듯 추천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강릉에서 공무원을 하시는 그 분은 그런 일을 조금도 귀찮아하지 않고 여러 가지 서류 준비의 수고와 실제 조사의 수고를 마다하지 않고 해주셔서 그 덕으로 저와 제 어머니의 이름이 올라간 게 아닌가 싶습니다.
밖에는 지금 꽃보다 잎이 더 어여쁜 시간들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올해 여든두 살이신 어머니는 앞으로 이런 아름다운 날을 또 몇 번이나 맞이하고 우리와 헤어지게 될까요? 이번 일로 제가 참 좋았던 것은 우리 형제들이 모두 어머니가 상을 받은 것을 좋아하고, 어머니의 손자 손녀들도 모두 좋아하고, 어머니의 친구들이며 동네 사람들 모두 아주 좋아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도 지금 막 덩달아 좋아하고 있답니다. 그런 제가 어린 시절, 어머니의 말씀을 죽도록 안 들은 것, 그래서 어머니가 새벽에 산길을 나가서 이슬을 털게 한 것, 뒤늦게, 그야말로 뒤늦게 반성합니다. 이다음 세상 다시 어머니의 아들이 되겠습니다. 그리고 그때는 어머니의 말을 잘 듣는 아들이 되겠습니다.
좋은 일 하기의 어려움 - 박완서해가 바뀐다든지 몸이 곤곤할 때면 머릿속으로 이것만은 지켜야지, 이것만은 하지 말아야지 심각하게 다짐을 하는 버릇이 있다. 방학하는 날 계획표 같은 걸 벽에다 써붙여 놓아야 안심하고 씩씩하게 나가 놀던 어릴 적 버릇인 듯싶다. 노년에 들어서면서 해마다 하게 되는 결심은 일기를 쓰자, 라는 건데 아직도 일 년을 꽉 채운 일기장이 없다. 그래도 한두 달에서 서너 달, 반 년을 넘긴 일기장으로 차차 쓴 기간이 길어져가는 걸 보면 대견하다기보다는 건망증에 대한 두려움을 반영한 것 같아 쓸쓸해지곤 한다. 건망증에 대한 두려움보다 더 서글픈 것은 이 세상에 태어나서 남을 위해 좋은 일 한 게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사회정의를 위해 일신의 안일을 희생한 적도, 불우한 이웃을 위해 큰돈을 쾌척한 적도 없다. 기껏해야 남에게 폐나 안 되게 살려고 전전긍긍 옹졸하게 살았다. 마음으로 할 수 있는 남의 슬픔조차 나누기보다는 나의 슬픔을 위로하는 데 써먹곤 했다. 죽음 저편에 심판이야 있건 없건 생과 사의 경계를 건너야 하는 일은 무섭고, 조금이라도 덜 무섭게, 조금 더 욕심을 부려 편안하게 건너고 싶다면 죽음 자체가 엄혹한 심판일 것이다. 비록 이 세상을 이롭게 하는 일은 못했을망정 해라도 덜 끼쳐야지 작심하게 된 것도 그런 마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같이 살던 아이들을 내보내고 홀로 생활하게 되면서 직접 하게 된 일 중 가장 어려운 게 쓰레기 처리였다. 혼자서 이렇게 많은 쓰레기를 배출하게 되니 이 많은 인구가 배출하는 쓰레기는 다 어디로 갈까, 국토가 지구가 신음하는 게 몸으로 느껴져 진저리가 쳐지면서 내 쓰레기라도 줄이자, 작심을 했다. 뭐든지 작심을 하고 실행에 옮긴다는 건 그만큼 고생길에 들어서는 일이다. 분리수거를 하기 위해 상품을 포장했던 상자에 부착한 스카치테이프나 끈을 떼어내고 속포장을 한 스티로폼을 따로 하고 남은 상자를 판판하게 부피를 줄이려면 요새 상자는 왜 그렇게 튼튼한지 힘에 여간 부치는 게 아니다. 접착력이 강한 넓은 스카치테이프로 봉투 뒤에 또 하나의 봉투를 입힌 것 같은 우편물도 적지 않다. 사실 이런 과잉포장은 내 뜻대로 안 되는 우편물이나 선물로 들고 오는 것들이다. 쓰레기에 신경을 너무 쓰다 보면 딸기를 한 상자 들고 와도 딸기를 먹을 생각보다는 딸기 몇 배의 포장을 처리하는 일이 버겁게만 느껴진다. 선물이 선물로 보이지 않고 쓰레기로 보인다. 가장 부담이 안 되는 꽃 몇 송이도 요즈음은 10리터 쓰레기봉투가 모자랄 정도로 겹겹으로 부풀린 망사치마를 두르고 있다. 분리해놓으면 산더미만 해질 것을 생각하면 과대포장 안 하기 운동을 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만약 그 운동이 성공하면 포장업체는 다 망하고 말 테니 안 되겠구나. 망사치마 두른 꽃다발 안 받기 운동을 한다면 망사 만드는 업계도 그렇고 그런 솜씨를 가진 꽃집 아가씨도 실직을 할 테니 그것도 안 되고, 이런 식으로 체념을 해가는 것도 내 나름으로 습득한 자본주의 공부인지도 모르겠다.
지어먹은 마음이 아니라 저절로 오랫동안 지켜온 절약정신이 하나 있는데 그건 음식물을 버려서는 안 된다는 거였다. 어려서부터 농사짓기의 어려움과, 곡식으로 된 것은 쉰밥도 버리지 못하고 씻어먹는 걸 보아온 데서 비롯된 원초적인 죄의식 때문일 터이다. 내 몫은 남의 집에서도 남기지 않고 다 먹어치우고, 손님을 치르고 남은 음식도 걷어두었다가 몇 날 며칠을 그것만 먹다가 다 먹은 후에야 새 음식을 만드는 버릇 때문에 자식들한테 구박도 많이 받았다. 엄마 몸이 쓰레기통인 줄 아느냐는 혹독한 소리까지 들었다. 자식들이 그러건 말건 그 버릇만은 좋은 버릇인줄 알았는데 이참에 고쳐야 할 것 같다. 화면이 그 끔찍함을 극대화시켜서 보여준 탓도 있겠지만 만두 속 만드는 과정을 보고 욕지기가 치밀면서 저런 사람 중 대표적인 한 명 정도는 극형에 처해야 한다는 살의에 가까운 혐오감을 느꼈다. 그리고 먹는 거라면 절대로 버려서는 안 된다는 신념을 가진 이 늙은이를 자식들이나 손자들이 창피스러운 나머지 죽는 날이나 기다릴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은 음식은 지딱지딱 버리고 새로 사먹는 게 젊은 사람 마음에 드는 일도 되고 농사짓는 사람을 이롭게 하는 일도 된다는 걸 이제야 알았으니 내 자본주의 공부는 끝도 없어라.
아이 - 구효서
장편소설 『오남리 이야기』를 쓸 때 일입니다. 어느 날 작업실 가는 길에 저는 한 아이를 쥐어박고 말았습니다. 여섯 살쯤 돼 보이는 아이였습니다. 그 아이는 차가 지나가는데도 비키질 않았지요. 차를 천천히 몰았습니다. 그런데도 아이는 비키지 않았습니다. 경적을 울렸지요. 아이는 운전자인 나를 힐끔 바라볼 뿐이었습니다. 눈이 마주쳤는데도 아이는 비키지 않았지요. 아파트 단지 안에서였습니다. 저는 그곳 남양주 오남리 진주아파트에 작업실을 두고 있었습니다. 조용하고 공기 좋은 곳이라서 글쓰기에는 안성맞춤이라고 생각했지요. 16평짜리 아파트를 작업실로 삼았던 것입니다. 5층짜리 아파트가 단지를 이루고 있는 곳이지요. 아파트의 동과 동 사이는 신도시의 고층 아파트 단지에 비해 다소 좁은 편입니다.
그곳도 다른 곳처럼 차가 많았습니다. 오래전에 세워진 아파트라 지하주차장이 없었지요. 건물 앞뒤로 차들이 빽빽이 주차되어 있었습니다. 좁은 통로가 더욱 좁을 수밖에요. 단지 안에서 차를 몰기가 여간 조심스러운 게 아니었습니다. 아이들이 뛰어노는 한낮에는 더욱 그랬고요. 그곳 아이들이 놀 수 있는 놀이터란 아파트 동과 동 사이의 공간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낮에 차를 끌고 드나들려면 아이들 때문에 여간 진땀이 나는 게 아니었습니다. 이해하고 참으면 될 것을, 저는 그날 참지를 못하고 차에서 내려 아이의 머리통을 쥐어박았던 것입니다.
아이는 청색 멜빵바지에 노란 티셔츠를 입고 있었지요. 아이의 곁에는 세 살쯤 되었을까, 계집아이가 하나 있었습니다. 정수리의 머리카락을 고무줄로 묶은 귀여운 여자아이였지요. 저는 두어 번 더 경적을 울렸습니다. 그 남자아이는 범퍼 앞에서 짓궂게 버텼습니다. 차창을 내리고 소리를 질렀지요. "이눔 짜식! 비키지 못하겠니?" 그러나 아이는 비키지 않았습니다. 차에서 내려 아이를 멀찌감치 쫓아내고 지나치면 될 것은, 저는 그만 종주먹으로 그 아이의 머리통을 쥐어박았지 뭡니까.
저도 신경질이 나 있었던 겁니다. 그곳 아이들은 이상하게도 차를 무서워하지 않았습니다. 아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차를 경계하지 않았습니다. 차가 지나가면 서둘러 피해야 하는데도 아이들은 혀를 내밀기 일쑤였지요. 차가 오면 후딱 놀라며 자기 아이를 챙겨야 할 엄마들마저 태평한 겁니다. 그럴 때마다 거참, 거참, 하며 참 이상한 동네라는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운전을 하는 사람들은 다 알 겁니다. 위험한 상황에 닥쳐 혼겁을 하고 나면 곧장 '왕짜증'이 난다는 것을. 차라리 사고가 나거나 다치면 걱정이 태산처럼 밀려오겠지만, 사고가 날 뻔하거나 다칠 뻔한 상황이 벌어지면 한숨을 한 차례 내쉬고는 대뜸 화를 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심리가 작용했던 것일까요. 적당히 타이르면 될 것을, 저는 어쨌든 폭력을 사용하고 만 것이었습니다. 차에 치이느니 꿀밤 한 대가 차라리 너한테는 큰 보약이다, 그렇게 여겼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그건 꿀밤이 아니었지요. 아파트 단지를 오가는 동안 쌓였던, 애들과 그곳 어른들에 대한 못마땅한 감정이 내 종주먹에 실려 있었던 것입니다.
의외의 일격을 당한 아이가 금방 울음을 쏟아내지 못하고 저를 쳐다보았습니다. 순간 저는 아차 싶었지요. 주먹이 너무 셌던 겁니다. 예상했던 것보다 주먹이 터무니없이 컸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은 아이도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울기 시작했습니다. 아이가 얼굴을 일그러뜨릴 때 저는 이미 제 잘못을 깨닫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때려놓고서 금방 사과할 수 없었던지 저는 서둘러 운전석으로 돌아왔지요. 아이를 때린 것이 미안하고 부끄러워 가슴이 할랑거리고 얼굴이 화끈거렸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저는 그때까지 식식거리고 있었습니다. 룸미러로 뒤를 살폈지요. 여전히 아이는 울고 있었고, 곁에 있던 여자아이가 아장아장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