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클래식
이종구 지음 | 생각의나무
내 인생의 클래식
이종구 지음
생각의나무 / 2010년 10월 / 471쪽 / 28,000원고전주의와 낭만주의 시대의 거장들
천재적 신동 모차르트의 여행과 죽음의 미스터리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탄생 250주년이 되는 2006년을 기점으로 전 세계적으로 모차르트의 인생과 음악에 대한 관심이 더욱 더 높아져가고 있다. 모차르트는 역사상 가장 천재적이며 인기 있는 작곡가였다. 많은 사람들은 베토벤을 가장 위대한 작곡가로 꼽지만 그의 음악을 하루 종일 즐겨 들을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모차르트의 음악은 언제 어디서 들어도 우리를 즐겁고 상쾌하게 해준다. 그의 음반이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클래식' 음반이라는 사실이 이를 입증해주고 있다. 그의 부친 레오폴트는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음악 교사로 잘츠부르크 궁전의 부지휘자로 활동했다. 그의 딸 마리아 안나 모차르트의 회고록에 의하면 모차르트는 세 살 때부터 피아노를 치며 놀기를 좋아했고 다섯 살이 채 되기도 전에 스케르초와 미뉴에트 곡들을 단 30분에 습득했으며 여섯 살 때는 최초의 〈미뉴에트〉를 작곡하는가 하면 아홉 살 때는 심포니를 처음으로 작곡하였고 열두 살에는 최초의 오페라를 작곡하였다고 한다. 일찍이 아들의 천재성을 깨달은 아버지는 잘츠부르크를 넘어 전 유럽에 모차르트를 알릴 목적으로 1762년 9월에 다뉴브 강을 통해 비엔나로 가는 도중 린츠에서 딸과 아들을 데리고 첫 공연을 했다. 이 공연을 본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재무장관은 황제 요셉2세에게 천재적인 두 아이들의 소식을 전한다. 비엔나 부두에 도착한 후 통관절차가 지연되자 여섯 살의 모차르트는 바이올린을 꺼내 즉흥적으로 〈미뉴에트〉를 연주하였고 이것에 감탄한 세관 직원이 즉시 통관절차를 끝냈다는 기록이 있다. 그해 10월 모차르트 남매는 궁전에서 공연을 하고 공연이 끝난 후 모차르트는 황후의 무릎 위에 올라앉아 황후의 목을 껴안고 키스를 해주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이후 모차르트 남매는 비엔나의 천재로 떠올랐고 귀족들로부터 콘서트를 해달라는 요청이 끊이지 않았으며 하루에도 두 번씩 연주회를 가졌다. 물론 아버지는 상당한 수입을 올릴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이때 모차르트는 열과 반점을 동반하는 성홍열 혹은 결절성 홍반에 걸리는데, 이 병이 약 30여 년 후 모차르트를 죽음으로 몰고 간 병의 시작이었다고 전해진다. 같은 해 12월 31일 모차르트 일가는 그동안 번 돈으로 새 마차를 구입하고 5일 후에 잘츠부르크로 돌아왔다. 하지만 이때 모차르트는 다시 류마티스 열에 걸려 관절에 통증을 느끼기 시작해 1주일간 누워 있기도 했다. 한번은 모차르트가 비엔나 궁전을 방문했는데 이때 프랑스 대사로부터 베르사유 궁전을 방문해달라는 초청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리하여 모차르트 일가는 1763년 6월 9일 파리를 향해 긴 여정을 떠나고 드디어 11월 18일 파리에 도착하였다. 이 여행 중 모차르트는 뮌헨과 만하임 등 여러 도시의 궁전에서 공연을 하였으나 많은 음악인들을 만날 수 있었다. 파리의 신문은 열한 살의 누나와 일곱 살이 채 안된 모차르트의 연주를 보고 둘을 신동이라 극찬하였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자 모차르트 일가는 베르사유 궁전에서 2주 동안 보냈으며 루이15세와 황후는 모차르트를 신년 만찬에 초대했다. 그해 2월에 모차르트는 편도선염에 걸리게 되는데 여기에 류마티스 열까지 걸리고 말았다. 이를 딛고 일어선 이후 모차르트는 〈하프시코드와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를 작곡하여 루이15세의 딸에게 증정하였는데 이것이 최초로 출판된 모차르트의 작품이다. 1764년 4월 10일 레오폴트는 그 당시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많고 부자 도시이자 음악적인 교류가 활발했던 런던으로 출발한다. 모차르트는 곧 조지3세와 여왕 샤롯 앞에서 연주를 하고 그들과 친해졌다. 이때는 병환에 시달리게 되어 일시적으로 연주 활동이 중단되자 모차르트는 첫 심포니를 작곡했다. 또한 그때 런던에서 요한 세바스티안 바하를 만나게 되어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아버지는 모차르트의 나이를 1년 낮추어서 홍보하고 입장료도 대폭 줄였지만 관객들이 계속 감소하자 모차르트 일가는 1765년 7월 네덜란드로 출발하여 9월 10일 헤이그에 도착했다. 어린 모차르트 남매는 왕자와 공주 앞에서 연주를 하기로 되어 있었지만 누나가 장티푸스에 걸려 모차르트 혼자서 공연을 하고 곧 모차르트도 같은 병으로 사경을 헤매다 회복했다. 유럽 여행을 떠난 지 3년 뒤인 1766년 1월 26일, 모차르트 일가는 암스테르담에 도착하고 그 후 그들은 다시 파리로 떠났다. 그리고 취리히와 뮌헨을 거쳐 잘츠부르크로 돌아온다. 이 긴 여행은 3년 반이 걸렸으나 1767년 다시 비엔나로 갔으며 이 여행 중 모차르트는 천연두에 걸려 체코로 피신하게 되고 이곳에서 열한 살이라는 나이에 〈심포니 6번〉을 작곡하였다. 다시 잘츠부르크로 돌아온 그들은 이태리로 세 번째 여행을 가고 그의 오페라 3편이 모두 밀란에서 공연되었다. 이 여행 도중 바티칸의 시스틴 채플에서 단 한 번 들은 〈미제레레〉 전곡을 거의 똑같이 악보에 옮겨 썼다는 전설적인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한다. 이때 모차르트의 어머니는 아들과 남편을 따라 여행하기를 원했지만 잦은 출산 때문에 함께하지 못했다. 그러나 1778년 모차르트의 어머니는 아들과 둘이서 파리로 떠났고 그곳에서 모차르트가 직장을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동안 프랑스 어를 못하는 어머니는 외롭게 혼자 지내다가 병에 걸려 객지에서 사망하였다. 1733년부터 모차르트는 잘츠부르크 궁전 오케스트라의 악장직을 맡고 있었으나 그의 돌발적인 언행이 문제가 되어 그를 고용했던 왕자와 대주교는 모차르트의 음악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1781년 모차르트를 해고했다. 그 후 그는 10년간 비엔나에서 고용인이 아닌 독립적 작곡가로 활동하였다. 1782년 모차르트는 그에게 스승이자 최고의 매니저였던 아버지의 뜻을 거역하고 콘스탄체와 결혼하면서 아버지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각자의 길을 가게 되었다. 그리고 1791년 모차르트는 서른다섯이라는 젊은 나이에 이 세상을 떠났다. 모차르트는 천재임에는 틀림없지만 레오폴트 같은 유능하고 헌신적이면서도 철통같이 엄한 아버지가 없었다면 아마도 우리가 알고 있는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는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프랑스 음악의 천재들
프랑스 인상주의 음악의 창시자 클로드 드뷔시
드뷔시는 벨르리오즈와 비제와 함께 프랑스의 가장 유명한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일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20세기 초의 가장 중요한 음악가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인 교향시〈바다〉는 바그너와 차이코프스키 같은 19세기 말의 신낭만주의 음악을 탈퇴한 무음조음악으로 20세기 현대음악의 선구자 중 한 사람으로 볼 수 있다. 그의 또 다른 대표곡은 1984년에 작곡한 〈목신의 오후〉이다. 베토벤이 〈교향곡 3번〉을 작곡하면서 고전주의 시대의 음악을 넘어서 낭만주의 음악에 동을 트게 한 것처럼 드뷔시는 20세기 '현대음악의 시작'을 알리는 종을 울린 사람이다. 그는 1903년 프랑스 나폴레옹이 제정한 최고의 훈장을 수상했으며 문화의 강국 프랑스의 음악적 자존심을 살린 사람이다. 드뷔시의 아버지는 상인이었으며 어머니는 재봉사였지만 일곱 살 때부터 피아노를 공부했는데 그의 뛰어난 재능이 인정되어 열 살 때 파리 음악원의 예비학교에 입학하여 그곳에서 11년간 음악을 공부하였다. 그는 음악원의 보수적이며 전통적인 음악 교육을 싫어하였으며 불협화음을 좋아했으며 교수들에게 순종하지 않았다. 그는 조르주 비제처럼 뛰어난 피아니스트였는데 베토벤, 슈만, 쇼팽의 음악을 훌륭히 연주하기도 해 피아니스트로서도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을 정도였다. 드뷔시는 1880년부터 1882년까지 모스크바에서 차이코프스키를 후원한 나데츠다 폰 메크 부인의 자녀들의 음악교사로 일을 했지만 차이코프스키와의 교류는 없었다. 1884년에 그는 〈방탕한 아들〉을 작곡하여 로마 대상을 수상하고 4년간 로마에 살면서 세계를 오가며 작곡을 했지만 프랑스 아카데미가 원하는 전통적 음악을 떠나 자유로운 자신만의 음악세계를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칸타타〉, 〈쥘레이마〉, 〈봄〉과 〈피아노〉는 아카데미로부터 '괴상'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1888~1889년경 드뷔시는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 참가하면서 바그너의 영향을 받았지만 바그너 같은 방대한 음악 대신 소규모의 음악을 작곡했는데 1890년에는 그의 가장 유명한 곡 가운데 하나인 〈베르가마스크 모음곡 - 달빛〉의 일부를 발표하였으며 1902년에는 10년의 노력 끝에 그의 유일한 오페라 〈부수음악과 조곡〉이 초연되었는데 대인기작이 되었으며 모리스 라벨과 다른 프랑스의 작곡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1903~1905년에는 교양시 〈바다〉를 발표했는데 이 음악이 바로 인상주의 음악의 대표작이 되었다. 그러나 드뷔시는 "나는 단지 새로운 음악을 창조하고 싶을 뿐이다." "인상주의 운운은 바보 같은 짓이다"라고 하면서 이 명칭을 반대했다. 미술세계 인상주의는 그 윤곽이 뚜렷하지만 음악에서는 그렇지 않다. 그러나 인상주의 음악은 낭만주의 음악처럼 강한 감성을 나타내거나 프로그램 음악처럼 이야기를 줄거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암시를 주거나 분위기를 연상시키는 음악으로 볼 수 있다. "교양시 〈바다〉를 들으면서 바다를 볼 수 없다"라고 한 음악평론가들도 있지만 드뷔시는 음악은 영상이 아니라 "마법의 예술이다"라고 답변하였다. 드뷔시는 종종 지휘도 하고 음악평론가로서도 활동하면서 생활비를 충당했으며 후기에는 〈피아노곡〉, 〈피아노 소나타〉, 〈바이올린 소나타〉와 발레 음악 〈놀이〉도 작곡하였다. 그는 바그너 외에도 차이코프스키와 러시아 발라키레프, 림스키-고르사코프, 보로딘, 무소르그스키 등 러시아 작곡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특히 무소르그스키의 〈보리스 고두노프〉는 드뷔시의 〈페리아스와 멜리장드〉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는 음악 세계 외에도 1885년 프랑스 상징주의파의 예술에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들은 시와 시각예술 그리고 극장예술에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자신만의 음악세계를 만드는 데 활용하였다.
그는 열여덟 살때부터 유부녀였던 바니에 부인을 8년간 사랑했으며 로마로 떠난 후 그녀와 헤어지고 로마에서 돌아온 후 가브리엘 듀퐁과 9년간의 평탄치 않은 동거생활을 한 후 릴리라고도 불리는 그녀의 친구 로잘리 텍시에와 결혼했다. 이후 제자의 어머니인 엠마 바르닥 부인과 바람을 피우다 집을 나가자 텍시에가 파리의 가장 유명한 콩코르드 광장에서 권총으로 자살을 시도하다 실패하는 스캔들이 났다. 그리하여 바르닥 부인과 드뷔시는 런던으로 피신했으며 그곳에서 유명한 〈바다〉를 완성시켰다. 이처럼 파란만장한 결혼 생활에도 불구하고 드뷔시는 그곳에서 생애 가장 아름다운 걸작인 〈바다〉를 완성한 것이다. 이러한 굴곡 많은 삶을 뒤로하고 드뷔시는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으로 파리가 전쟁터로 위협에 빠졌을 때 직장암으로 사망하여 파리의 파씨 공동묘지에 안치되었다.
러시아의 위대한 작곡가들
음악에 혁신을 일으킨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이고르 스트라빈스키는 1882년에 러시아에서 태어난 작곡자이자 피아니스트, 지휘자였으며 1971년에 미국에서 사망하였다. 그가 유명해진 가장 큰 이유는 새로운 형태의 음악을 창조한 혁명가였기 때문이다. 1913년 파리에서 그의 발레 음악인 〈봄의 제전〉이 초연되던 저녁, 관객이 "이것도 음악이야?"라며 야유를 날리자 위협을 느낀 스트라빈스키는 자신의 지정 좌석을 떠나 안무가인 미하엘 포킨과 같이 무대 뒤에 숨어서 발레를 지켜보았다고 한다. 심지어 관객들의 아우성이 너무나 커서 음악이 제대로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그 당시 관객들은 슈만, 쇼팽, 리스트, 베를리오즈 등의 낭만주의 음악을 좋아했다. 낭만적인 음색이나 차이코프스키의 〈백조의 호수〉 같은 아름다운 음악을 기대했던 파리의 세련된 음악 애호가들이 공연을 보러 왔지만 스트라빈스키의 이교도적이며 거의 원시적인 리듬과 낯선 음색에 경악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스트라빈스키는 모차르트와 하이든의 고전적 음악에 이어 등장한 낭만주의 음악에 과감히 도전장을 던짐으로써 20세기 현대 음악의 시작을 알리는 종을 울렸다. 현대 음악의 싹을 트게 한 스트라빈스키의 가족은 러시아 정교회 신자들이었다.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성장했으며 그의 아버지는 마린스키 극장의 베이스 오페라 가수였으나 그는 아들이 법률가가 되기를 원해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에 입학시켰다. 그러나 음악을 좋아했던 스트라빈스키는 그의 아버지가 사망하자마자 음악에 집중해 1905년에는 러시아 음악의 개척자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제자가 되었고 림스키-코르사코프는 그의 제2의 아버지가 되었다. 그리고 어렸을 때부터 친하게 지내던 사촌과 결혼했다. 러시아 정교회는 사촌과의 결혼을 반대하였지만 그 당시 라흐마니노프가 그랬듯이 사촌간의 결혼은 종종 있었던 일이었다.
1909년에 그에게 작곡가로서의 행운이 찾아왔다. 그의 작품 〈불꽃놀이〉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연주되었는데 이때 파리에서 발레 루스의 창립자인 디아길레프가 이 공연을 보고 좋은 인상을 받았으며 그에게 새로운 발레를 위촉한 것이다. 1910년 그는 파리에서 〈불새〉를 초연하고, 이후 〈페트루슈가〉, 〈봄의 제전〉을 연이어 작곡하였다. 그는 가족과 함께 스위스에 살 때 〈풀치넬라〉등을 작곡하였으며, 향후 50년을 유럽과 미국에서 살게 되었다. 1920년 그는 유럽으로 이사를 하였다. 1908년부터 1919년까지 '러시아 음악시대'로, 1920년부터 1954년을 '신고전주의'로 분류하는데 스트라빈스키는 러시아의 프로코피에프와 더불어 신낭만주의 음악의 개척자로 인정받고 있다. 그리고 1954~1968년을 '연속시대'라 하는데 이때 아놀드 쇤베르크의 12계음법을 사용하였다. 그는 〈오이디푸스 왕〉, 〈아폴로〉와 3편의 교향곡 〈찬송의 교향곡〉, 〈교향곡C〉, 〈3막의 교향곡〉 등 다양한 음악을 작곡하였다. 그 외에도 최후의 합창과 그리스 신화를 주제로 한 고전음악 등을 남겼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그의 가족은 미국으로 이사를 하여 로스앤젤레스에 정착하였는데 여기서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을 지휘하기도 하였다. 그는 많은 지식인과 유명인사와 가깝게 지냈는데 피카소나 장 콕토, 조지 발란신 같은 다른 분야 예술의 거장들과 공동으로 작품을 만들어냈다.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에 대한 음악학자들의 평은 다양하다. 그러나 그는 음악의 여러 분야에서 가장 다양한 변화를 추구한 혁신가의 한 사람이자 현대 음악의 탄생에 크게 기여했다는 데 모두 동의할 것이다.
20세기 영국의 세계적으로 뛰어난 음악인들
영국 애국심의 상징이 된 에드워드 엘가
19세기 초 독일, 이태리, 프랑스 음악이 한참 꽃 피울 때 영국의 음악은 약세를 면치 못했다. 하지만 엘가, 본 윌리엄스, 구스타브 홀스트의 등장으로 영국도 음악의 강국으로 발 디디게 되었다. 영국의 시골 출신인 엘가는 〈수수께끼 변주곡〉, 〈위풍당당 행진곡〉, 〈첼로 협주곡〉 등으로 단연 영국이 가장 자랑하는 작곡가가 되었다. 특히 1960년대에 영국 역사상 가장 뛰어난 첼리스트라는 평가를 받는 미녀 첼리스트 자클린 뒤 프레가 엘가의 〈첼로 협주곡〉을 연주해 선풍적인 인기를 얻게 되었으며 엘가와 그의 첼로 협주곡은 일약 유명해졌다. 엘가는 영국 중부의 시골 마을 우스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교회의 오르가니스트이자 악기와 악보를 파는 상인이었으며 엘가는 악보로 음악 공부를 시작했으며 여덟 살에 피아노 레슨을 받기 시작하였다. 열다섯 살이 되면서부터는 우스터 오케스트라의 바이올리니스트 단원이 되었는데 드보르작이 그곳에서 자신의 음악을 지휘할 때 단원으로 참가한 것이다. 엘가가 작곡한 〈첼로 협주곡〉은 드보르작의 〈첼로 협주곡〉과 함께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첼로 협주곡이 되었는데 이때부터 그들의 인연이 시작된 것 같다.
엘가는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가르치며 생계를 유지하면서 젊은 시절을 보냈는데 1882년 음악의 도시 파리와 라이프치히를 방문하면서 당시 큰 인기를 끌었던 바그너의 음악을 접하게 되었다. 주로 엘가는 성악곡을 작곡하였지만 세상의 주목을 받지 못하다가 1899년에 〈수수께끼의 변주곡〉이 런던에서 초연되면서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이 음악은 완전히 새로운 형태로 14명의 친구들의 초상화를 음악적으로 묘사한 것인데 아름다운 선율과 오케스트레이션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독일과 오스트리아 그리고 러시아에서도 연주되었는데 림스키-코르사코프 같은 러시아 음악가들도 높이 평가했으며 1910년에는 뉴욕에서 말러의 지휘로 공연되었다. 특히 영국인들의 사랑을 많이 받은 음악은 1901년부터 1930년에 작곡된 〈위풍당당 행진곡〉이다. 이 행진곡의 가사와 음악은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의 애국정신을 상징하는 대명사가 되었다. 엘가의 전성기는 1904~1911년으로, 이 시절 최고의 인기를 얻었는데 미국에서도 자신의 음악을 지휘하면서 높은 수익을 얻었으며 버밍햄대학에서 강의하기도 했다. 1908년 그의 〈심포니1번〉은 첫해에 100번이나 연주되었으며 1910년에는 세계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 프리츠 크라이슬러가 바이올린 협주곡을 위촉해 함께 공연을 했는데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듬해에 〈심포니2번〉을 완성하고 엘가는 시골을 떠나 런던으로 향했다. 제1차 세계대전은 영국에게 크나큰 상처를 남겼으며 이러한 사회적 변화로 엘가의 인기도 하락하였다. 사랑하는 부인마저 세상을 뜨자 우울증에 빠진 엘가는 1914년부터 작곡을 거의 하지 않다가 1919년부터는 다시 용기를 얻어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피아노 4중주〉, 〈현악 4중주〉 등을 작곡하였다. 그리고 예전처럼 시골집에서 살면서 4~5시에 일어나 건강한 생활을 하면서 엘가 작품 가운데 가장 유명한 〈첼로 콘체르토〉를 작곡하기 시작했다. 이 음악은 '가을의 매혹적인 슬픔'이라는 평을 받았지만 한 평론가는 이 엘레지는 '절망의 슬픔'이 아니라 '동정심 가득한 슬픔'이라고 평가했다. 엘가는 그가 평생 사랑했던 아내도 죽고 음악가로서의 명성 그리고 자신의 일생도 끝나간다는 사실을 절감하면서 이 음악을 만들었을 것이다. 엘가는 자신의 음악을 많이 녹음하기도 했는데, 1919년 그가 지휘를 하면서 〈첼로 협주곡〉을 녹음했을 때 열아홉 살의 존 바비롤리가 단원으로 첼로를 연주했다. 그 인연은 66년 후로 이어진다. 열아홉 살이었던 존 바비롤 리가 백발의 노인이 되어 지휘하고 자클린 뒤 프레가 엘가의 〈첼로 협주곡〉을 연주해 반세기 후에 녹음하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