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거제도로 갔다
김주영 외 지음 | 지식파수꾼
우리는 거제도로 갔다
김주영 외 지음
지식파수꾼 / 2010년 10월 / 264쪽 / 13,000원
1부 먼 남쪽 바다 끝 작은 섬, 거제
김주영 - 거제의 노래사월의 마지막 아침은 맑고 투명하고 싱싱했다. 장승포의 햇살이 내 속내를 간파하듯이 잠자리에 스며들어 새벽잠을 깨웠다. 내가 거제도 장승포에 와 자는지 장승포가 내 속에 와 자는지 알 수도 없는 채 침대에서 일어났다. 술병들이 어지럽게 놓여 있었고 더욱 어지럽게 한 사내가 널브러져 있었다. 세면을 하는지, 세수를 하는지, 세심을 하는지도 모른 채 햇살 따라 포구로 나갔다. 포구는 아름다웠다. 빈 배는 송홧가루를 싣고 푸른 물결에 출렁이고, 괭이갈매기는 자맥질을 하고 있었다. 포구의 밑바닥에는 실 같은 혹은 어린아이의 손가락 같은 것들이 떼거지로 몰려들었다. 복어 새끼였다. 인간의 언어로 말하자면 괭이갈매기는 간밤의 숙취를 복어회로 해장을 하고 있었다.
문득 해장을 하고 싶어졌다. 그야말로 괭이갈매기처럼, 싱싱한 탐욕을 누가 볼 것인가. 나는 눈 밝은 갈매기처럼 장승포 포구의 밑바닥을 찾아 나섰다. 뒷짐을 지고, 눈을 크게 뜨고, 어찌알랴. 서울에서 길들여진 내 해장 버릇을 장승포의 해장국집들이. 나는 걸었다. 걷다 보니 사람들이 밀물처럼 밀려가는 집이 있었다. 돼지국밥집이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면서도 가장 조심해야 하는 음식이지만 나도 모르게 그 집에 들어갔다. 어쩌면 내가 간 것이 아니라 거제 장승포의 햇살과 바람이 물과 사람이 나를 데려간 것인지도 몰랐다.
그 집에 들어간 시간이 아침 일곱 시. 나는 깜짝 놀랐다. 그 집은 그야말로 자리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안심했다. 좁고 남루하지만 사람이 몰리는 것은 단 한 가지, 음식이 맛있다는 이유니까 턱 하니 마음을 놓았다. 자리에 앉고서야 주변을 살펴보니 테이블마다 소주병이 가득했다. 소주병보다 큰 목소리들이 더욱 테이블 위에 가득 찼다. 나는 손목시계를 다시 봤다. 분명 아침 7시였다. 어리둥절해서 나는 함께 간 후배 시인에게 물었다. "저 친구들 술 세네. 밤새 먹은 거 아냐." 후배 시인이 무엇을 알겠는가. 그나 나나 거제를 안다고 하지만 정작 모를 것이고, 아는 것도 층위가 다를 것인데, 큰 기대도 굳이 답변도 필요 없는 물음이었다. 후배 시인이 주인을 불렀다. "저분들은 누구요?" 주인은 씩 웃었다. 그리고는 별놈 다 본다는 듯이 지나가는 바람 같은 목소리를 던졌다. "퇴근한 사람들이요, 3교대 하고. 대우조선소 직원이요."
대우조선소! 어제 견학한 곳이었다. 어제는 거제 포로수용소와 대우조선소, 옥포 대첩공원을 갔었다. 지나간 역사와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가는 공간이었다. 거제 포로수용소는 우리의 감추고 싶은 수치와 상처의 공간이었고, 대우조선소는 이순신 장군이 처음으로 승전을 거둔 공간을 바탕으로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가는 우리의 자존심과 자긍심의 공간이었다. 그야말로 수치와 영광이 거제에 함께 공존하고 있었다. 스토리텔링의 보고였다.
내로라하는 소설가와 화가들도 내 마음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토리텔링의 보고를 소설가는 쓰고, 화가는 그린다면 그야말로 거제는 1인당 소득 4만 달러의 잘사는 도시뿐만 아니라 문화적 명품도시가 될 것이다. 그것을 안 김형석 거제문화예술회관 관장의 안목과 열정이 나를 이곳에 오게 했다. "선생님, 거제도 아름다운 풍광 속에 새로 조성될 창작촌에서 노벨문학상이 집필되는 게 제 꿈입니다. 도와주십시오." 김형석 관장은 서울 출장길마다 들러 부탁을 했다. 조선산업 세계1등인 거제시를 경제적 위상에 걸맞은 문화적 명품도시를 만들어야 한다며 창의적 아이디어들과 생각들을 자주 피력했다. 르네상스가 부흥했던 이탈리아의 도시들을 보면 미래가 보인다. 유럽과 아시아의 중계무역을 통해 벌어들인 엄청난 부를 개인의 향락에 쓰지 않고 지역의 예술, 건축 등에 투자해 세계적인 문화관광도시가 된 것이다. 좋은 선조를 만난 이탈리아 도시의 후손들이 부럽다.
김 관장과 나는 '그림으로 만나는 세계 7대 문명 전시회'를 위한 첫 번째 기회기 앙코르와트 미술 기행에서 알게 된 후, 초청 강연이든 개인적인 부탁이든 가능한 한 수락했다. 거제시는 조선산업 쇠퇴 이후를 대비해 해양문화관광도시를 지향하며 차곡차곡 하나하나 문화적 볼거리를 만든다고 했다. 그의 창조적 열정에 이번에도 흔쾌히 동행을 승낙했다. 거제도에다 폐교를 활용해서 문학, 미술, 국악 등 복합창작 스튜디오를 만들고 싶은데, 유명 소설가와 화가들이 함께 방문해서 의견을 달라는 것이 주최측의 의도였다. 경제적 토대를 바탕으로 문화명품도시를 만들겠다는 그의 생각에 나는 적극 동참해 후배 작가를 어렵게 섭외했다. 다 그렇지만 문화의 핵심은 사람이다. 애정과 관심을 가진 사람이 문화를 창조하고 계승하고 발전시킨다. 이 일이 성공하여 한국의 롤모델이 되었으면 한다. 많은 예술가들이 이 섬을 방문하여 역사적으로 문화적으로 철학적으로 조명하여 작품을 남길 때, 거제도는 세계 속의 명품도시로 우뚝 설 것이다. 그 날을 위해 우리 모두 거제를 노래하자.
하성란 - 아버지 바다의 은빛 고기떼경남 거제군 일운면 구조라리 68번지. 어릴 때부터 달달 외웠던 본적지 주소이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자 아버지는 이 주소를 한문으로도 익히게 했다. 자신의 본적지를 아는 것은 곧 자신의 뿌리를 아는 일이라고 말했던 듯하다. 아버지 말이라면 늘 삐딱한 어머니가 곁에서 살짝 눈을 흘겼을는지도 모른다. "뿌리는 무슨……." 뿌리까지는 몰라도 내 혀는 완전 그곳 사람이다. 태어나 지금까지 통틀어 열 번이나 갔을까. 그런데도 어릴 때부터 비린것만 찾아 아버지에게는 귀여움을 어머니에게는 눈총을 샀다. 크면 섬사람에게 시집보내겠다는 어머니의 말이 엄포로 들리지 않았던 걸 보면 정말 비린 것을 좋아했던 모양이다.
완만한 호를 그리며 펼쳐지는 백사장과 마을의 낮은 돌담에 걸쳐진 그물들보다도 먼저 떠오르는 건 마당 구석에 있던 독들이다. 젓갈을 담는 독은 일반 독과는 다르게 생겼다. 배 부분이 둥글게 부풀어 있지 않고 굽부터 배와 입구까지 비슷한 크기로 올라간다. 그 속에서 몇 년을 묵었는지 알 길 없는 젓갈이 곰삭고 있다. 독 가장자리를 따라 소금버캐가 잔뜩 앉았다. 흐물흐물 형체를 알아보지 못할 만큼 삭은 젓갈 위로 말갛게 기름층이 떴다. 그 짜고 비린 것을 어린애가 싫다고 하지 않고 낼름낼름 잘 받아먹더라고 어머니는 아직도 고개를 내젓는다.
현 주소지를 적는 칸 아래나 위에 꼭 본적지를 적던 시절이 있었다. 그 요식적인 행위가 그곳을 잊지 않도록 했는데 십오륙년 전 이 본적지는 원적지로 물러났다. 행정상 너무도 먼 거리가 불편하기도 했고 그 당시 그곳에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원적지가 되어 그 주소를 더는 기억하고 쓸 일이 없어졌는데도 나는 아직도 그 주소를 외운다. 지금도 가깝지 않은 길이지만 삼십여 년 전 그곳은 정말 작심하고 나서야 하는 길이었다. 작심삼일이란 말은 딱 그래서 나왔다고 생각했다. 고향에 가겠다는 아버지의 말은 늘 말로 그칠때가 많았다. 그만큼 젊은 아버지가 식솔을 거느리고 자주 찾을 거리가 아니었다. 아버지가 그곳을 찾는다는 것은 어머니 제사나 할아버지에게 아쉬운 소리를 할 게 있다는 뜻이었다. 초등학교 사회책에서 전국이 일일생활권에 들었다는 부분을 공부한지가 한참 되었지만 그곳은 여전히 일일생활권 밖에 놓인 곳이었다.
일단 부산까지 기차로 움직인다. 부산역에 내리면 이미 고만고만한 세 아이와 엄마는 지쳐 있다. 아이들을 재우쳐 부산항까지 이동한다. 배를 타고도 세 시간 남짓 들어간다. 뱃길 세 시간은 또 달랐다. 멀미가 나서 바람이라도 쐴까 갑판에 올라가면 넓은 갑판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어질어질 술 취한 사람처럼 갑판 위를 갈지자로 걸었다. 두텁게 칠한 페인트칠이 부식되기 시작한 기계실에서 들려오던 굉음과 질 낮은 벙커시유 냄새가 진동하던 낡은 배는 생각만으로도 진력이 난다. 그러다 오랜만의 귀향길에 잘 차려입은 아버지의 양복에 꼭 먹은 걸 게워내곤 했다. 그때 아버지는 지금의 나보다도 훨씬 젊었다.
배를 타고도 입매 단정하게 앉아 있던 아버지도 기억하는 날이 있다. 태풍이 몰려오던 때였다. 뜨네, 안 뜨네, 말들이 많다가 기어이 출항을 한 배는 얼마 나가지 않아 일엽편주처럼 파도에 흔들리기 시작했다. 어찌나 요동을 치는지 객실에 누가 먹고 버린 멀미 약병들이 객실 이쪽에서 저쪽으로 요란스럽게 굴러다녔다. 굴러다니는 건 약병만이 아니었다. 웬만한 어른들도 다 뱃멀미를 했다. 파도는 들이치고 객실에 깔아 놓은 비닐 장판은 눅눅한데 더 게워낼 것도 없어 축 늘어진 우리들은 노란 천장만 보고 있었다. 어떻게 부산항에 도착했는지 기억이 거기서 끊겨있다.
"거기 막바로 가나?" 아버지 말투는 '거제도'라는 소리만으로도 그곳 사투리로 바뀌었다. 십대 후반 그곳을 떠나와 놓고도 거제도란 말만 스쳐도 귀가 번쩍 뜨이는 모양이다. 장승포에 사는 먼 사촌의 전화번호를 불러주고 전화 한 번 넣으라는 당부도 잊지 않는다. 터미널로 나가면 통영까지 가는 고속버스가 있는데도 아버지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곳까지 직행으로 간 적이 없다. 평생 그랬듯이 부산에 들러 누이들 집을 들여다보고 하루 쉬었다가 고향으로 들어간다. 어머니 산소를 벌초하고 나올 때도 마찬가지이다. 부산에 들러 그곳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기차나 비행기를 탄다.
아침 일찍 출발하기는 했지만 점심 식사를 거제도에서 하게 되리라곤 기대하지 못했다. 이곳이 정말 이렇게 가까웠나? 버스에서 내린 뒤에도 어리둥절했다. 점심 식사를 한 포로수용소 근처는 서울 시내처럼 번화했다. 여기가 정말 그 거제인가? 좀 당황스러웠다. 내게 거제도는 좀 더 먼 거리에 있었으니까. 멍게 비빔밥은 달고 쌉싸래했다. 바다 향이 고스란히 담겼다. 비린 것을 좋아하는 식성은 변하지 않았다. 서울에서 바다가 그리워지면 이렇게 멍게를 한 접시 먹곤 했다. 짭조름한 물에서 바닷바람이 생각난다. 냄새는 꼭 항구 근처 냄새다. 언제부터 멍게 비빔밥이 거제의 명물이 된 것일까. 어릴 적엔 없었던 것 같다. 어머니는 거제에 올 때마다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 고생하곤 했다. 부침개는 물론 심지어 물에서까지 비린내가 난다고 오만상을 찌푸렸다.
서울에서는 맛보기 힘든 맛이다. 비빔밥과 함께 먹는 생선맑은탕도 개운하고 담백하다. 싱싱한 해산물을 싼값에 공수할 수 있기에 가능한 요리이다. 고춧가루를 풀지 않은 건 어쩌면 섬의 특성상 고춧가루 재배가 활성화되지 않은 탓도 있을 것이다. 해산물이 싱싱하면 양념을 많이 쓸 필요가 없다. 여기에 딱 황석어 젓갈만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서울에서 전화가 왔다. "도착했나?" 아버지다. 왜 전화했는지 알 것 같다. "밥 먹구 전화할라구요." 사촌에게 전화해 봤냐는 말이다. "아부지, 여긴 너무 바뀌었어요"라고 말하려는데 뚝 전화가 끊긴다. 자신이 할 말만 하고 끊어버리는 게 아버지의 오랜 버릇이다. "아부지, 여긴 거기 같지가 않아요." 해마다 꼭 한 번은 오는 아버지는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구조라리의 구는 옛 구(舊) 자를 쓴다. '옛날 조라 마을'이라는 뜻인데 조라를 찾아보았지만 정보가 뜨지 않는다. 구조라의 옛 지명은 항리(項里)이다. <항리어촌계고문서>. '소설보다 더 생생한 평민들의 생활사, 투쟁사, 민속사'라는 부제가 달린 문서를 찾아 읽었다. 1863년 항리에는 모두 74호, 남자 141명, 여자 106명이 살았다. 평화로울 것 같은 어촌이지만 그들은 160종이 넘는 각종 명목의 진상과 공물로 지쳐 있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왜선들이 표박해 왔다. 이들을 밥 먹이고 배를 끌어주고 일일이 옥포나 통영에 보고해야 하고 앞바다를 수시로 수색하고 조사해야 하는 고초가 극심했다. 오죽하면 순라를 돌다 죽겠다는 기록도 보인다. 화재도 있었고 태풍에 큰 변고를 당하기도 했다.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도 어부로 살았는지는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할아버지가 어떻게 거제에 오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어떻게 어부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태어났을 때부터 할아버지는 어부였다. 담벼락엔 폐그물 직전의 낡은 그물이 널려 있었고 그곳에선 코를 도려내는 악취가 났다. 난 그것이 바닷물이 썩으며 나는 냄새라고 생각했다. 그물 올올이 스며들어 있던 바닷물은 뭍으로 오는 순간 썩기 시작한다. 고등어나 갈치처럼.
한때는 큰 배를 세 척이나 가진 적이 있었다지만 내가 태어났을 때는 작은 배 한 척이 전부였다. 그 작은 배로 먼바다에는 나가볼 수도 없었을 것이다. 할아버지가 잡아오는 것은 큰돈도 받지 못하는 잡어들이었을 것이다. 할아버지의 손바닥에는 굳은살이 앉아 제대로 펴지지도 오므려지지도 않았다. 딱 닻을 올리고 돛을 올리는 밧줄 굵기만 했다. 뱃사람과 술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인지 작은 부엌 아궁이 앞에는 사홉들이 소주병이 돌무덤처럼 쌓여 있었다.
평소에는 무뚝뚝하고 조용하던 할아버지가 담벼락의 개구멍으로 드나들었던 건 술이 취했을 때뿐이었다. 바다까지 돌아가는 불편함을 없애려 할아버지는 바다와 면한 담장에 개구멍을 냈다. 어쩌면 서울에서 가끔 오는 손녀들을 위해 뚫어 놓은 것일 수도 있다. 덩치가 큰 할아버지가 빠져나가기에 조금 작은듯했다. 게다가 구멍을 빠져나가려면 어쩔 수 없이 납작 엎드려야 했는데 맨정신일 때 할아버지는 절대 그 구멍으로 나가지 않았다. 할아버지의 자존심은 대단했다. 아버지도 만만치 않았다. 그 둘은 끝까지 불화했다. 하루에도 수십 번 나는 그 개구멍을 들락거렸다. 개구멍 밖은 바로 백사장으로 연결되었다. 백사장 앞으로 따뜻한 수온의 바다가 펼쳐져 있고 그 중간쯤에 수평선을 막으며 섬 하나가 떠있다. 작은 섬이다. "윤들섬, 윤들섬" 불렀는데 정확히는 윤돌섬이다. 이번 거제 여행에서 처음 알았다.
구조라해수욕장이라는 이정표가 보이고 버스가 언덕 위로 올라섰다. 구조라해수욕장이 저 아래 펼쳐졌다. 둥근 호를 그리며 펼쳐진 백사장, 모래알들이 잘아 한 번에 바다까지 뛰어갈 수 있었다. 바닷가 맨 앞줄 바람막이처럼 서 있던 집들 가운데 어디쯤 할아버지의 집이 있었다. 어린 시절 백사장에 서면 저쪽 끝이 아득하게 보이곤 했다. 하지만 이렇게 작은 마을이었다. 버스는 순식간에 그곳을 지나쳤다. 오랫동안 그곳을 그리워했다는 걸 나는 몰랐다. 담벼락에 개구멍이 있고 방 둘, 부엌 하나이던 옛집. 그 옛집은 진작 헐렸다. 스물셋, 내가 마지막으로 구조라를 찾았을 때 그 자리엔 여관이 들어서 있었다.
백사장과 윤돌섬의 거리도 얼마 되지 않는 듯 보인다. 그 옛날, 젊은 아버지는 윤돌섬까지 헤엄쳐 들어갔다. 내가 대여섯 살 무렵이었다. 고무 튜브에 앉은 나는 점점 바닷물이 차지는데도 무섭지 않았다. 내 뒤엔 든든한 아버지가 있었다. 아버지는 튜브를 밀며 조금씩 백사장에서 멀어졌다. 젊은 아버지는 입으로 스며드는 바닷물을 요령껏 내뱉으면서 윤돌섬 가까이까지 갔다. 바닷가에 앉아 있던 어머니 말에 의하면 내 머리통이 까지 머리통만큼 작아졌다고 했다. 괜히 불안해져서 어서 오라고 빨리 오라고 손짓을 했다고 한다.
파도가 잠잠하던 그 바닷가도 8월 중순이 지나면 파도가 점점 거칠어지기 시작한다. 어린 시절 그 파도가 내가 입고 있던 팬티를 가져갔다. 순식간에 파도에 휩쓸렸고 허우적대며 나왔을 때 수영 팬티 대신 걸치고 있던 팬티가 없어졌다. 파도가 높아진다는 건 개학일이 다가왔다는 뜻이고 곧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여름 한 철 사귄 아이들과도 이별이다. 점점 커지는 파도를 향해 아이들이 손에 손을 잡고 일렬로 늘어섰다. 파도가 덮치려는 순간 일제히 아이들이 높이 뛰어오른다. 한 발 늦은 아이는 고스란히 파도를 뒤집어쓰고 물을 먹는다. 아이들이 켁켁대고 웃고 떠든다. 검둥이들이 뛰어놀던 백사장은 텅 비어 있다. 그 아이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구조라해수욕장을 검색해 보면 구조라리 500-1번지로 나와 있다. 해수욕장에도 주소지가 있다는 게 신기하고 재미있다. 구조라리에서 가장 큰 평수를 가진 곳일 것이다. 그 넓은 백사장 한쪽에서 멸치들이 말라가고 있었다. 멸치는 한 번 삶아낸 뒤에 볕에 널어 말린다. 바닷바람과 태양에 비척비척 말라갈 때가 제맛이다. 물놀이를 하다 나온 아이들은 그 멸치를 먹는다. 뼈만 남고 살만 달랑 떨어진다. 고소하고 배리착지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