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생목록
재생목록이 비어 있습니다.
-
-
0:00 0:00
화면 너비 (여백)
좁게
보통
넓게
최대
배경 테마
글꼴
바탕/명조
돋움/고딕
글자 크기
작게
100%
크게
줄 간격
좁게
보통
넓게

클래식의 사생활

유정아 지음 | 문학동네
유정아 지음

문학동네 / 2010년 7월 / 386쪽 / 18,000원



당신의 처음



누군가의 '첫'은 굉음이다


루트비히 판 베토벤(1770~1826)은 우리가 오늘날 알고 있는 작품번호를 매긴 최초의 작곡가라 할 수 있다. 그의 생애를 통해 베토벤의 현악 4중주 op.18(1800년 서른 살에 만든 곡), op.59(라주모프스키), op.74(세리오소) 등 작품번호가 상기시키는 의미를 짚어볼 수 있으며, 피아노 소나타 op.111은 번호로 마지막 피아노 소나타임을 확인할 수 있다. 베토벤 작품에서 작품번호는 그 곡의 기원과 성격을 암시하고 대변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작품에 붙은 번호로 작곡 시기를 추론하는 것은 여전히 금물이다. 베토벤의 작품번호 또한 다른 작곡가와 마찬가지로 꼭 연대순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도 작품번호 1번 이전에 적잖은 작품들을 작곡했고, 1번을 발표한 후에 뒤늦게 출판했다. op.39 피아노를 위한 전주곡, op.52의 가곡들, op.44 피아노를 위한 변주곡, op.103 8중주 등의 곡은 베토벤이 청년 시절 본에 머물면서 작곡한 것이다. 그러나 작곡가가 작품을 작곡한 정확한 시기를 후세에 알려야 할 의무를 가진 것도 아니고, 어차피 돈을 벌기 위한 악보 출판인데 의뢰받기 전에 작곡한 것을 내놓는다 한들, 출판업자에 대한 그 정도의 농락은 죄로 여기지도 않았을 것이다(자기 표절이 아닌 한, 실은 농락도 아니다).

신동 모차르트 같은 명성을 누리게 하고 싶어 아들의 나이를 두 살 어리게 속이기까지 했던 본의 궁정가수였던 아버지와 쳄발로 스승 네페의 극성에도 불구하고, 베토벤은 어린 시절부터 재능은 두드러졌지만 것신동 베토벤겄은 되지 못했다. 주변의 친지 음악가들로부터 음악을 배우고 궁정의 보조 반주자와 음악 선생으로 지내던 10대 시절 베토벤은 발트슈타인 백작을 알게 된다. 백작은 네페와 함께 선제후 막시밀리안 프란츠에게 베토벤이 모차르트에게 배울 수 있도록 후원해달라고 부탁하여 베토벤을 빈으로 보내는 데 성공한다. 1787년 열일곱 살의 베토벤은 빈에서 모차르트를 만나지만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전갈을 받고 다시 본으로 돌아온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베토벤은 일곱 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지만 그중 세 명이 일찍 죽어 장남 역할을 해야 했고, 것신동 베토벤 만들기겄 기획이 좌절된 후로 아버지는 술에 빠져 가정을 건사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베토벤은 다시 본의 궁정 악단과 교회, 아카데미의 일을 하며 작곡을 이어나간다.

1792년 이미 전 유럽에 명성이 자자했던 예순 살의 하이든은 본에 잠시 들렀을 때 스물두 살의 베토벤을 만나, 훗날 빈에 오면 작곡을 가르쳐주겠다는 약속을 한다. 베토벤은 그 해 바로 빈으로 가서 하이든의 가르침을 받았으나 만족하지 못해 내적으로 저항했고, 하이든도 베토벤을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 하이든이 런던을 방문하는 동안, 하이든으로 하여금 현악 4중주를 작곡하게 한 공작의 집에서 만난 인연으로 함께 일하고 있던 빈 궁정악단의 음악가 알브레히츠베르거가 소위 대타 선생으로 나섰고(베토벤은 그에게서 대위법을 배웠는데, 스승이 중시하는 엄격한 대위법의 규칙도 탐탁치 않아했다) 이때 만든 E플랫장조와 G장조, C단조 피아노 트리오 세 곡의 스케치를 작품번호 1로 묶어 1795년 출판업자에게 넘겼다. 이 곡들은 당시 빈에서 베토벤을 후원하던 리히노프스키 백작에게 헌정되었다.

하이든이 베토벤에게 이 곡들을 출판하지 말라고 권고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지만 입증된 사실이 아닐뿐더러 1794년 하이든은 자신에게 호의적이었던 런던을 재방문중이었기 때문에 연대상의 모순도 보인다. 그러나 이 젊은 작곡가 베토벤의 피아노 트리오 작품을 들어보면 하이든이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 것도 이해할 만하다. 베토벤은 이미 작품번호 1에서부터 하이든이나 모차르트를 따르지 않고 자신만의 길을 가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op.1-1의 2악장 아다지오 칸타빌레에서 그는 앞선 대가들은 생각할 수도 없었던 파열음의 폭발을 즐긴다. op.1-3 C단조 트리오의 피날레는 야만적으로 들릴 수도 있을 굉음으로 시작해 하찮은 전개로 이어진다. 기존의 예술관이나 양식과의 교감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알프레트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쓰고 있다. 겁하이든이 그걸 참는다는 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는 필경 깜짝 놀라 펄쩍 뛰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던 것이다.겂 별들이 돌며 내는 굉음은 너무 커서 인간의 구에 들리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하이든은 듣지 못했던 베토벤의 것첫겄은 그런 굉음이었고, 우리는 그 것첫겄으로 인해 오늘도 혁신의 예술을 꿈꿀 수 있으니 그것을 함께하지 못했다고 질투할 필요는 없다. 그의 것첫겄은 전혀 처연하거나 처량하거나 헛헛하지 않다. 우리 모두 그에게 첫 젖을 먹이진 않았지만, 그를 사랑하면서 그의 것첫겄을 함께할 수 있으니까.

평생 변치 않는, 처음의 그 모습

가장 어린 나이에 작품번호 1을 냈던 이는 예닐곱 살의 모차르트였다. 그리곤 슈베르트가 열여덟, 슈만이 스무 살이었는데, 이번에 소개할 프레데리크 쇼팽은 1825년 바르샤바 리세움, 그러니까 지금으로 치자면 중학교에 다니던 열다섯 살 때 C단조 론도 op.1을 작곡했다.

프랑스인 아버지와 폴란드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쇼팽은 네 살 때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해 여섯 살 무렵부터는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였던 지브니에게 피아노 레슨을 받기 시작했다. 배우지 않고도 뛰어난 연주를 하는 어린 제자를 보고 지브지는 자기 식대로 가르치지 않고 아이가 하는 대로 내버려두는 방법을 택했다. 걸출하면서도 정규의 주법에서는 벗어나 있는 쇼팽의 연주 스타일은 이 어린 시절 자유로운 레슨의 영향이라고 하겠다. 좀 크면서는 작곡도 시작했는데 작곡 역시 정통 작곡법을 따르지 않고 즉흥 연주에서 영감을 얻어 개성을 살렸다. 바르샤바 음악원 원장이자 교수였던 요제프 엘스너로부터 화성과 대위법을 배웠으나 엘스너 또한 제자의 독창성을 알아보고 이를 잘 발휘할 수 있도록 지도했다. 쇼팽은 참 선생 운도 좋았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지금도 낡은 교육방식에 의존해, 혹은 선생 식대로 가르쳐 자신만의 개성을 잃고 있을지 모를 이 땅의 수많은 청소년들이 떠올라 안타깝다.

쇼팽은 열다섯 살이던 1825년 C단조 <론도> 작품번호 1을 작곡해, 아버지의 친구이자 동료였던 교장 사뮤엘 폰 린데 박사의 부인 마담 폰 린데에게 헌정했다. 이 작품에 대해 선 슈만의 의견이 남아 있다. 자신도 작품번호 1의 피아노곡을 내고 작곡을 시작한 슈만은 1832년 6월 스승인 비크 교수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스물두 살 동갑내기 폴란드인 청년 음악가의 곡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다. 겁쇼팽의 첫 작품이 지금 제 수중에 있습니다. 전 사실 이것이 그가 10대 때 작곡한 작품이라 확신합니다. 아주 근사하고 구석구석 아름다워 숙녀분들은 이 작품이 모셸레스의 것 같다고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선생님께서 이 곡을 클라라에게 연습시키고 싶어하시리라 생각합니다. 에스프리로 가득 차 있는데다 그다지 어렵지도 않으니까요. 저는 이 작품 작품번호 2번 사이에 적어도 2년이란 세월과 20곡의 작품이 가로놓여 있음이 틀림없다는 말씀을 감히 드립니다.겂

이러한 슈만의 평은 참으로 정확했다. 쇼팽은 이 곡을 작곡하고 바르샤바에서 출판해 바로 그해 모셸레스의 협주곡 한 곡을 골라 1악장을 대중 앞에서 연주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슈만이 짐작했듯이, 쇼팽은 이 작품번호 1번 전후에 작곡했으나 출판되지 않은 왈츠, 마주르카, 변주곡, 폴로네즈 등을 가지고 있었다.

쇼팽의 작품번호 1 <론도>는 이미 쇼팽의 천재성을 보여주고 있었다. 엄혹한 기율과 즉흥적이고 자유로운 기운의 어우러짐, 광범한 영역에 걸친 눈부신 음조, 이탈리아적 장식, 폴란드 특유의 영웅적 요소들, 무엇보다 쇼팽다운 화려한 피아니즘. 중학생이던 쇼팽의 첫 작품에서 쇼팽의 전부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사람은 성장하고 성숙할 뿐 많이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수줍게, 그러나 열과 성을 다해 만들어낸 작곡가의 첫 작품은 그의 전 작품을 읽을 수 있게 하는 단서이자 그의 음악의 축소판인 것이다. 쇼팽은 첫 작품에서부터 그만의 고유함을 보여주고 있다.

저마다의 봄



슈베르트가 꾼 봄꿈


슈베르트가 존경했던 베토벤의 친구이자 낭만주의 문학가였던 그릴파르처는 슈베르트의 묘비에 이렇게 썼다. 겁그는 시가 소리를 내도록, 그리고 음악이 말을 하도록 만들었다. 시와 음악은 귀부인과 하녀의 관계가 아닌 자매로서 슈베르트의 무덤 위에서 포옹한다.겂 슈베르트는 여러 분야에서 천재성을 과시했지만 그중에서도 시에서 받은 영감을 음악으로 승화하는 독일 리트를 창시한 작곡가로서 가장 빛을 발한다.

슈베르트는 서른세 살에 요절한 동시대의 독일 시인 뮐러(1794~1827)의 시에 곡을 붙여 1824년에 <아름다움 물방앗간의 아가씨> op.25를 작곡했다. 전작에는 소박한 서정과 감성이 담겨 있다면 <겨울나그네> 전 24곡은 어둡고 절망적인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실연의 쓰라림을 안고 한 젊은이가 한겨울 이른 새벽 연인의 집 앞에서 이별을 고하고, 사랑을 잊기 위해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방랑의 길을 떠난다. 스산한 겨울 들판을 헤매는 그의 마음은 절망에서 차츰 방심 상태로 변하며 삶과 죽음에 대한 상념이 교차한다. 그리하여 동구 밖에서 구걸을 하는 늙은 떠돌이 악사와 함께 겨울 나그넷길을 떠나려 하는데서 이 곡은 끝난다.

슈베르트는 친구 집에 들렀다가 친구가 없어 그의 책상에 놓인 뮐러의 시를 읽다가 자신도 모르게 시집을 들고 집에 돌아와 두문불출한 채 탐독하고는 작곡을 시작했다고 한다. 단순한 실연의 아픔이라 하기엔 너무나 어둡고 무거운 비애가 전곡에 흐른다. 일관되게 흐르는 절망의 정서는 청년기에 있을 수 있는 흔한 실연의 상처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인생 자체의 본질, 인생의 덧없음에 대한 깊은 깨달음에 의한 것으로 느껴진다.

슈베르트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겁우리 중 누구도 타인의 비애를 알지 못한다. 또 그 누구도 타인의 기쁨을 이해하지 못한다. 사람들은 서로에게 가 닿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스쳐 지나갈 뿐이다.겂 굉음을 내며 돌고 있다는 우주의 별들처럼 크게 소리 질러 자신을 드러내며 자전하지만 결국 다른 별이 내는 소리를 듣지 못하고 서로 어깨를 스치며 공전중일 뿐인 우리, 저마다 슬픈 별들.

그러나 이 가곡집의 배경이 되는 눈 덮인 황량한 겨울 들판과 매섭게 불어오는 북풍, 얼어붙은 시냇물, 잎을 다 떨군채 서 있는 나무들 사이로 11곡의 봄꿈이 흐른다. 원초적 고독과 절망 속에 나타나는 잠시의 헛된 희망처럼 짧디짧은 곡이다. 헛된 희망일 뿐이라는 자각일 것이다. 꿈결처럼 새봄이 올 것이라는 기대는 해마다 맞지만 또 해마다 틀리다. 봄은 오지만 또 틀림없이, 변함없이 가는 것이니까.

낭만주의 시대에 고통으로 가득 찬 삶을 살았으나 후세에 길이 남을 아름다운 선율을 꿈꾸었던 슈베르트. 그 아름다움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이었을까. 그것은 우리가 영원한 존재가 아니라는 깊고 슬픈 이해에서, 그러나 어찌할 도리 없이 또다시 봄꿈을 꾸는, 유한한 존재 안에서 솟구쳐올라오는 힘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을까.

나 밝은 꽃들 꿈을 꾸었네

5월에 활짝 피는

나 푸른 초원 꿈을 꾸었네

새들이 노래하는



수탉이 울 때에

내 눈은 떠지고

춥고 어두웠지

지붕 위에서 갈가마귀 깍깍대네



그러나 창문 위로

누가 잎들을 그려놓았나

너는 겨울에 꽃을 보는 꿈꾸는 자

비웃을지 모르지



나 사랑을 위한 사랑을 꿈꾸었네

아름다운 소녀의

마음과 입맞춤의

희열과 절정의



수탉이 울 때에

내 마음 열리고

이제 나 홀로 여기 앉아

내 꿈에 잠기네



나 다시 눈을 감네

내 마음 여전히 따뜻하게 요동치네

너 창밖의 잎들이여 언제 푸르러지겠느냐

나 언제 내 사랑을 품에 안겠느냐



슈베르트의 전 작품은 998곡. 그중 가곡이 630곡으로 3분의 2를 차지한다. 1815년 열여덟 살의 나이에 <마왕>을 시작으로 <들장미>, <끊임없는 사랑> 등의 명작을 포함한 145곡으로 시작된 슈베르트의 가곡 작곡은 이듬해인 1816년엔 더욱 박차를 가해 <죽음과 소녀>, <음악에>, <가니메드> 등을 탄생시켰다. 스물한 살 되던 1818년 그의 재능을 깊이 알아주고 후원해준 후텐브레너와 교제하면서 슈베르트는 이후 안정적인 상태에서 가곡을 작곡했고, 그해 7월에는 에스테르하치 가의 음악 가정교사로 채용되기도 했다. 1819년에는 로시니의 오페라에 사로잡혀 오페라 작곡열에 들떠 마이어호퍼의 가사에 곡을 붙이기 시작했으나 결국 미완성으로 남았다. 그해 슈베르트는 명작 가곡 <프로메테우스>를 작곡했다.

슈만의 산골짜기에서 봄이 피어오른다

슈만은 찬란하면서도 우울했던 전 생애에 걸쳐 총 여섯곡의 교향곡을 작곡했다. 그중 네 곡은 1번부터 4번까지 일련번호가 매겨졌고 그 외에 작은 교향곡으로 명명한 op.52와 3악장 스케치까지 마친 미완성의 G단조 교향곡이 있다.

그중 교향곡 1번 B플랫장조 op.38에는 <봄의 교향곡>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슈만은 자신의 스승 비크 교수의 딸이었던 클라라와의 열애 끝에 우여곡절을 겪고 결혼에 성공한다. 그것이 그의 나이 서른, 클라라의 나이 스물하나였던 1840년의 일이다. 열여덟 살의 나이에 비크 교수의 집에 머물며 피아노를 배운 슈만은 당시 피아노 신동으로 괴테 앞에서까지 연주를 했던 아홉 살의 클라라를 처음 보았고, 둘은 곧 연인관계로 발전한다. 클라라의 아버지 비크 교수의 반대로 법정까지 가게 되었지만 아무튼 1840년 결혼에 성공한 슈만은 클라라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수많은 가곡에 녹여낸다.

이듬해인 1841년 이제는 교향곡을 한번 써봐야겠다 마음먹은 슈만은 마치 다음 가곡을 써내듯 1월 23일부터 26일까지 단 나흘 만에 교향곡 1번 스케치를 마치고 2월 20일엔 관현악 편성을 완성했다. 슈만 자신도 이러한 대작을 단기간에 완성하게 된 것을 하느님께 감사드린다고 고백할 정도였다. 한 달 안에 완성된 슈만의 첫 번째 교향곡을 들은 멘델스존은 자신이 이끌던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에서 그 작품을 연주하기로 결정하고 자신의 지휘로 3월 31일 초연했다. 공연은 성공적이었고, 작센 주의 영주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2세에게 헌정되었다.

이 곡의 창작과정에 영향을 준 것은 뵈트거의 <봄의 시>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슈만은 뵈트거 시의 마지막 구절인 겁산골짜기에서 봄이 피어오른다!겂를 이 곡의 모토로 삼았으며, 곡의 시작 부분에서 이를 트럼펫과 호른의 연주로 표현하고 있다. 이 모토는 여러 차례 반복되는 시퀀스의 형태로 출현한다. 슈만은 총 4악장으로 구성된 이 곡의 각 악장에서 것봄의 시작-저녁-즐거운 놀이-봄의 만개겄라는 소제목을 달았다. 그리고 이 작품을 <봄의 교향곡>이라고 명명했다. 슈만은 마치 봄에 피어나는 꽃과 나뭇잎의 봉오리처럼 자연스럽게 그의 내부로부터 싹터오르는 새로운 봄에 대한 느낌을 표현하고자 했던 것이다. 바야흐로 그 시절은 사랑하는 클라라와 결혼하고 사랑의 노래를 작곡하던 때이며 1844년 우울증으로 요양에 들어가기 직전 슈만의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계절이었던 것이다.

슈만은 1842년 11월 23일에 당대의 저명한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작곡가 슈포어에게 보낸 편지에 다음과 같이 썼다. 겁나는 모든 사람에게 매해 새롭게 다가오는 봄에 대한 기대와 열정을 표현하기 위해 이 교향곡을 작곡했습니다. 하지만 나는 봄을 묘사하거나 그리려고 한 것은 아닙니다.겂 작곡가의 주장대로 이 곡은 결코 자연을 묘사하는 표제 음악이 아니다. 하지만 이 곡의 창작과정에 영감을 준 봄에

전문 열람 제한

미가입 상태이므로 요약본의 일부만 제공됩니다.
더 깊이 있는 내일의 통찰력과 지식 에너지를
프리미엄 무제한 이용권으로 충전해 보세요!

멤버십 가입 / 결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