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지앵 다이어리
조수정 지음 | 지상사
파리지앵 다이어리
조수정 지음
지상사 / 2010년 2월 / 263쪽 / 12,000원
1부 파리지앵이 되다
한 달 월세가 100만 원소문대로 파리의 물가는 만만치 않았다. 교통비는 기간별 무제한 교통권이나 26세 미만 학생들을 위한 할인교통권으로 어떻게 아껴본다고 해도, 싸구려 샌드위치와 에스프레소만으로 때우는 식사도 10유로(약 17,000원)를 우습게 넘어가니 식비가 부담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나마 6~7유로(약 1만원) 정도로 해결할 수 있는 패스트푸드와 케밥, 중국 음식은 첫 두 달 내내 먹고 나니 보기만 해도 두드러기가 날 것 같았다. 동네 레스토랑에서 저녁식사라도 한번 하면 20~30유로(4~5만원)는 거뜬히 쓰게 되는 상황이니, 끼니는 집에서 해결하고 나서 친구들과는 에스프레소나 와인 한 잔을 시켜놓고 서너 시간 떠들다 깨끗하게 헤어지는 파리 젊은이들의 밤 문화가 너무나 당연하게 보였다.
원래 외국 사람들은 한국 사람처럼 폭음하지 않는다고 알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 마을에서는 음식 잔뜩 차려놓고 밤새도록 와인을 마셨는데, 조잔하게 이게 뭐냐?"며 파리의 물가를 개탄하는 지방 출신 프랑스 친구들을 만나며, '깔끔한' 술자리 문화는 서양의 몇몇 물가 비싼 도시에서 생겨난 것이 아닐까 하는 나름의 가설도 세워보았다.
파리 물가의 꽃은 뭐니 뭐니 해도 하늘 높은 줄 모르는 '집세'일 것이다. 정부에서 나오는 약간의 주택보조금을 제한다 해도, 사람들은 보통 네댓 평 남짓한 간이 스튜디오(한국의 원룸 개념)를 얻어 살며 한 달에 600유로(약 100만 원) 이상의 집세를 내고 있었다. 싼 동네에서 엘리베이터 없는 7층 다락방 정도를 잘 구해 400~500유로(70~80만 원)의 싼 집세를 내고 사는 이들도 간혹 있기는 했다. 집세를 내지 않는 세입자를 함부로 쫓아낼 수 없는 프랑스 법 때문에 집주인들이 요구하는 엄격한 보증 조건을 맞추는 것도 큰일이다. 파리에 보증인이 없는 유학생들은 보통 은행보증이 필요한데, 은행보증을 받으려면 1년 치 집세를 은행에 맡겨두어야 한다니, 한꺼번에 목돈을 마련하기 힘든 보통의 유학생들에게는 더욱 절망적인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부동산에서 정상적으로 방을 얻기가 힘든 상황이니, 많은 이들이 비교적 조건이 까다롭지 않고 월세가 저렴한 집을 찾기 위해 인터넷이나 파리 중심부에 위치한 미국 교회 게시판을 이용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런 곳들은 경쟁이 너무 치열해 전화를 하면 이미 방이 나간 경우가 대부분이다. 운이 좋아 집을 방문할 수 있게 되더라도 보통은 50여 명의 다른 경쟁자들과 함께 한 시간 넘게 줄을 서서 기다리다 시험관이라도 된 듯한 집주인의 까칠한 질문에 비굴하게 웃으며 최대한 나의 사람 좋음을 강조해야 하니, 그리 기분 좋은 경험은 아닐 경우가 많다. 그래서인가 내가 파리에서 알던 대부분의 유학생 친구들은 집을 구하다 꼭 한 번씩 길바닥에 주저앉아 울거나 소리를 지른 경험들이 있었다.
종교재단 같은 곳에서 운영하는 학생기숙사가 가장 싸고 시설도 좋은 편이었지만, 대부분 여학생 전용인데다 나이제한도 있었고, 기나긴 대기리스트에 이름을 겨우 올리더라도 언제 연락을 받을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는 경우가 많았다. 많은 친구들이 그쪽으로의 가능성은 배제하고 있었다. 그러나 하늘은 내 편이었는지, 나는 파리에 도착하자마자 독일 기숙사를 잡을 수 있었다.
2부 프랑스 사람, 사회, 문화를 만나다
5년 전 나는 아프리카에서 생애 최고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차를 타고 달리다보면 <동물의 세계>에서나 나올 법한 신비스런 새들이 바오밥 나무 저편으로 날아갔고, 한국 돈으로 100원도 안 하는 그곳 과일들은 혀에서 살살 녹았다. 더러운 옷을 입고 월급 3만 원을 받으면서도, 그곳 사람들은 하얀 이를 드러내며 해맑게 웃는 것을 좋아했다. 사하라 사막에 갔을 때, 나는 불어를 배우겠다는 결심을 했다. 내 낙타를 끌어주던 베르베르족 길잡이나 여행을 하면서 만났던 아프리카 사람들과 언젠가는 짧은 인사말 말고 더 많은 대화를 나누고 싶었기 때문이다.
파리에 와서 나는 확실히 변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들려오는 '어떤 한국사람이 흑인에게 소매치기를 당했다, 아랍인에게 폭행을 당했다'는 식의 이야기들과 이어지는 한국 사람들의 인종차별적 발언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서서히 변해가는 나의 모습까지, 모든 상황들이 다 속상했다. 무엇보다 더욱 싫었던 것은, 아프리카에서 그렇게 착하고 순진한 사람들이 이곳에서는 천덕꾸러기가 되어버린 현실이었다. 아프리카 현지 사람들보다 좋은 옷을 입고 있는 파리의 까만 이민자들에게서 내가 예전에 보았던 순수하고 해맑은 웃음은 찾을 수 없었던 것 같다.
한번은 어떤 코미디 프로그램을 틀었더니, 모로코 이민 2세 개그맨이 하는 '생 드니'에 관한 개그가 한창이었다. 생 드니는 파리 북쪽에 있는 위성도시다. 보통 동쪽과 북쪽에 있는 위성도시는 서쪽과 남쪽에 비해 범죄율이 높다고 하는데, 그 가운데 가장 위험하다고 소문난 곳이 바로 생 드니의 아파트단지다. 우리나라에서는 부의 상징으로 인식되는 고층 아파트가 파리에서는 혐오 대상이자, 빈민가로 인식되고 있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그곳은 2006년 폭동의 근원지이기도 했다.
같은 수업을 많이 들어 친해진 태우 오빠는 생 드니에 갔다 무사히 살아 돌아온 이야기를 영웅담처럼 자랑하곤 했었다. 건축설계 수업 사이트 방문을 위해 그곳에 간 태우 오빠는 어느 아파트단지에서 수동 카메라로 열심히 사진을 찍고 있었는데, 멀리서 그 모습을 본 흑인 아이들 몇 명이 갑자기 다가오더니 카메라를 뺏더란다. "너 지금 여기서 뭐하고 있는거야? 왜 사진을 찍어? 너, 우리 찍었지? 죽여 버리겠어!" 멱살까지 잡힌 오빠의 대답이 압권이었다. "왜들 이래? 친구들, 다들 잘 생겨가지고 이러면 너무 무섭지! 나 건축가라서 여기 아파트 사진 찍으러 온 거야. 친구, 내 카메라 좀 돌려주라. 그거 내 밥줄이거든, 나 처자식도 먹여 살려야 돼!" 넉살 좋게 웃으며 손까지 내미는 태우 오빠와 얼떨결에 악수까지 한 아이들은 결국 카메라를 돌려주었다. 그러고는 "안녕!" 하고 보내 주더란다. 그 이야기를 듣고 함께 있던 사람들 모두 박장대소를 했다.
한편으로 피부색이 하얗건 까맣건. 본래 나쁜 사람은 없다는 사실이 소수 도덕분자들의 이론만은 아니었음을 알았다. 낯선 나라에서 그동안 당했던 차별과 서러움이 공격적으로 발산되어 나쁜 행동을 하게 되었던 것이 분명하다. 척박한 환경 때문에 비뚤게 나가고, 그로 인해 나쁜 사람들이라 낙인찍히고, 사회적 편견 속에서 발붙일 자리를 잃게 되자 결국 착실한 사람들도 비뚤어지게 되고, 이런 악순환의 고리는 누군가 멈춰주어야 끊어질 수 있는 것이다.
얼마 후 나에게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다. 유명한 건축가가 설계한 어떤 아파트를 촬영하러 갔는데, 껄렁껄렁한 흑인 청소년들 몇 명이 내 주변으로 몰려오는 것이었다. 순간 나도 모르게 카메라를 챙기고 움츠러들게 되었다. 한 아이가 내게 물었다. "왜 여기서 사진을 찍어요?" 태우 오빠의 경우처럼 '왜 우릴 찍느냐, 죽여 버리겠다!'고 하는 줄 알고 심장을 졸이고 있었는데, 그나마 좀 다행이었다. 그래도 약간 긴장이 되고 무서워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며 대답했다. "나는 건축을 공부하는 학생인데, 여기가 아주 유명한 건물이라 그래. 너희 여기 살아?" 아이들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야, 좋겠다. 이렇게 유명한 건물에 살고 있다니! 너희도 나중에 건축 공부하고 싶으면 이 건물을 많이 그려 봐." 별 표정 없던 눈빛들이 갑자기 똘망똘망해졌다. 한 녀석이 손가락으로 다른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누나, 저쪽으로 가면 전망이 훨씬 더 좋아요." "그래? 저쪽으로 가봐야겠다. 정말 고마워!" 흑인 아이들과 손을 흔들며 헤어질 때, 나는 5년 전 아프리카에서 보았던 그 해맑은 미소를 다시 보게 되었다. 어쩌면 '파리에는 없다'고 믿었던 그 표정이 사실은 항상 존재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동안 내 편견의 벽에 가려져 볼 수 없었던 그 예쁜 미소를 그제야 다시 발견하게 되었다.
파리를 대표하는 음식
'파리지앵이 가장 즐겨 먹는 음식은 무엇일까?' 잡지에 나온 앙케트 설문이 나의 호기심을 강하게 자극했다. 달팽이 요리, 개구리 뒷다리 요리, 푸아그라? 아마 아닐 거다. 내가 프랑스 친구들에게 한국에서는 그런 프랑스 음식들이 유명하다고 했을 때, 프랑스 사람 중에서 그런 음식을 먹는 사람은 극소수라며 기겁을 했기 때문이다. 패스트리, 케이크, 마카론? 아무리 눈물나도록 단 프랑스의 케이크들이 유명하다고는 하지만, 설마 디저트로 끼니를 해결하진 않겠지?
기숙사 부엌에서 프랑스 친구들은 어떠했던가? 음식 먹는 포즈 하나는 다들 끝내주었다. 학교에 늦는 한이 있어도 전식 - 본식 - 후식 세 단계는 절대 거르지 않고, 커다란 접시 양 옆에 포크 하나 나이프 하나를 예쁘게 놓아주는 그들만의 상차림은 반드시 지켜져야 했다. 나는 '어차피 집에서 혼자 먹는 건데…' 하는 생각에 쪼그리고 앉아 플라스틱 통 속에 남은 음식을 대충 긁어 먹었는데, 그러다가 문득 맞은편에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앉아 양 손으로 포크와 나이프를 우아하게 놀리는 프랑스 친구를 보고는 왠지 부끄러워진 적도 있었다.
그렇게 먹는 모습만 보면 다들 값비싼 일품요리라도 즐기고 있는 듯하지만, 정작 접시에는 하나같이 스파게티나 피자가 놓여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꼭 우리의 라면처럼 가장 싸고 손쉽게 살 수 있는 스파게티 면과 유리병에 든 소스로 10분이면 그럴싸한 스파게티 한 접시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마저 귀찮을 때는 블록마다 하나씩 있는 피자 가게에서 2유로를 내고 큼지막한 피자 한 조각을 사오면 된다. 하지만 직장인들까지 그렇게 '그저 죽지 않기 위한' 음식만을 섭취하고 살 것 같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파리의 단골 아침식사인 '크로아상과 브리오슈, 에스프레소 커피'가 파리를 대표하는 음식일 것 같았다. 야채를 잔뜩 넣어 만드는 파이인 '끼쉬'도 가능성이 있어 보였다.
책장을 넘겼는데, 땡! 다 틀렸다. 정답은 커다란 접시에 스테이크 한 덩어리와 감자튀김이 잔뜩 쌓여 나오는 '스테이크 프리트'였다! 나처럼 충격받았을 독자의 반응을 예상이라도 한 듯, 잡지에는 줄줄이 보충설명이 늘어져 있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프랑스 요리들은 모두 다른 지방의 특산물이며, 파리 요리 중에는 특별히 유명한 것이 없단다. 그리고 미국의 영향으로 처음 소개된 '스테이크 프리트'가 폭발적인 인기를 얻으며 파리지앵들이 가장 자주 찾는 음식이 되었다는 설명이다. 그러고 보니 점심시간에 노천카페 동그란 1인용 테이블에 혼자 앉아 스테이크를 썰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익숙하게 떠올랐다. 그래도 그렇지, 파리를 대표하는 음식이 '스테이크 프리트'라니!
그래도 바게트 빵이 프랑스를 대표한다는 말은 절대 부정할 수 없을 듯하다. 이른 아침 빵집 앞에 길게 줄 서 있는 것도 바게트 빵을 사기 위함이며, 점심시간 단체 급식이라도 받은 듯 너도나도 들고 있는 것도 기다란 바게트 빵 샌드위치고, 퇴근시간 하나같이 서류봉투처럼 옆구리에 끼고 지나가는 것도 바게트 빵이다. 파리에서는 바게트 빵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또 하루를 마치는 것 같다. 자그마한 바게트 빵 한 조각에 치즈를 끼워 먹는 프랑스 친구들의 모습은 기숙사 부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한 번은 어떤 아이에게 "그게 오늘 점심이냐?" 하고 물어본 적이 있다. 그랬더니 음식이 조리되기를 기다리며 먹는 '에피타이저'란다. 그런데 30여 분 후 내가 다시 부엌에 왔을 때도 그 아이는 여전히 바게트 빵과 치즈 조각을 먹고 있는 것이 아닌가. "뭐야, 아직도 요리하는 중이야?" "아냐, 점심은 이미 다 먹었고, 이건 '디저트'야!"
나도 동네 치즈 가게에 가득 쌓여 있는 수십 가지의 치즈에 가슴 두근거리던 때가 있었다. 서로 다른 치즈들을 맛보며 비교하는 것이 그렇게 흥미진진할 수 없었다. 또 이른 아침에 빵집 앞에서 줄을 서서는 화덕에서 갓 구운 빵을 건네받자마자 한 입 베어 물어 그 바삭바삭한 빵 껍질과 부드러운 빵 속의 오묘한 조화를 느끼며, 역시 프랑스 빵이 세계 최고라고 외치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학교에서 로마로 여행을 갔을 때, 호스텔에서 아침으로 주는 미국식 샌드위치 빵이 불만스러워 기어코 밖에 나가 바게트 빵을 사 들고 오는 프랑스 친구들은 절대 따라갈 수 없을 것 같다. 학교나 기숙사에서 파티를 할 때마다 음식이라고는 서로 다른 종류의 치즈 수십 접시와 바게트 조각들뿐이고, 치즈 퐁뒤를 해준다며 펄펄 끓는 치즈 한 솥과 거기 찍어 먹을 바게트 빵 조각을 산더미처럼 쌓아 내오는데도, 여전히 바게트 빵과 치즈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은 전 세계에 오로지 프랑스인들밖에 없을 것이다.
프랑스판 선비정신
면접을 본다고 정장을 싹 차려 입고 갔는데, 학교에 도착하니 옷차림만 보아서는 내가 교수 같고 교수들이 학생 같은 상황이 벌어졌다. 차례가 되어 들어간 교실에서는 하나같이 청바지에 스웨터 등 캐주얼 차림의 면접관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편한 자세로 앉아 자기네들끼리 이야기도 하고 가끔 농담도 섞어가며 면접을 편한 분위기로 이끌어 주었다. 그 후 학교를 다니며 보니, 구멍 난 스웨터를 입거나 보라색 단화를 신고 오는 교수는 있어도 정장을 입고 오는 교수는 거의 없었다. 가끔 학교 카페테리아에서 교수님과 수위 아저씨가 함께 껄껄거리며 맥주라도 한 잔 하고 있는 광경을 볼 때면, 누가 교수고 누가 수위인지 구분할 수도 없었다. 그저 다들 비슷비슷한 편한 옷차림의 아저씨들일 뿐이었다. 교수들은 물론이고 세계적으로 알려진 스타 건축가들까지도 보통 그런 차림으로 다니니, 언젠가 미국 건축가의 초청강연회가 있었을 때 "역시 미국 사람이라 그런지 패션에 신경을 많이 썼네" 하고 수군거리던 프랑스 학생들이 이해가 갔다.
예전에는 패션의 도시로 유명한 파리에 오면 사람들이 다들 패션모델 같은 옷차림을 하고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매일 퇴근길 지하철에서 마주치는 직장인들을 보면 다들 옷차림에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은 듯한 자연스러운 모습들이다. 가만히 보면, 프랑스에서 대접받고 존경 받는 사람은 외모나 옷차림이 출중한 사람보다는 말을 잘하는 사람이었다. 초라한 겉모습을 하고 있더라도, 말할 때 논리와 주장이 분명하고 지혜가 엿보이는 사람은 어디에서나 인기가 많았다. "돈? 없으면 없는 거고, 키? 뭐 작아도 상관없고, 얼굴이나 스타일 다 별 상관없는데, 난 무엇보다 대화할 때 지성미가 느껴지는 사람이 좋더라!" 프랑스 친구들에게 이상형이 어떻게 되냐고 물었을 때, 100% 돌아왔던 대답이다. 몇몇 친구들의 대답으로 하는 성급한 일반화인지도 모르겠으나. '지성'과 이를 뒷받침하는 언변은 프랑스에서 사람을 판단하는 가장 큰 잣대인 것 같다. 이런 풍조는 아마도 프랑스식 '카페 문화'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것이 아닐까 싶다.
프랑스 문화에 관한 수업을 들을 때 가장 먼저 배웠던 것은, 17세기부터 시작된 파리의 '카페 문화'였다. 프랑스어 교재에서도, 프랑스인 선생님도 루브르 같은 화려한 궁전이나 매일 같이 패션쇼가 끊이지 않은 중심가의 백화점들보다는, 소르본느대학 근처의 유서 깊은 카페들이 파리를 대표하는 장소라고 소개했다. '카페'는 불어로 커피를 지칭하는 단어인데, 프랑스에 커피가 갓 수입되고 인기를 얻으며 곳곳에 생겨난 '커피 파는 집'들에게도 같은 이름이 붙어졌다. TV도 인터넷도 없던 그 시절, 커피를 마신다는 핑계로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들었던 카페는 최신 정보가 흘러나오는 첫 출구였다. 다양한 주제의 대화가 오고가는 카페는 주제만큼이나 다양한 의견이 활발하게 교류되는 장이기도 했다.
처음 '카페 문화'를 배울 당시, 이를 자랑스럽게 가르치는 프랑스인 선생님의 말에 그리 공감을 하지는 못했다. 효율적인 시간 관리를 중시하던 나에게는 '할 일 없는 백수들의 시간 때우기'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새파랗게 젊은 사람들이 일은 안 하고, 옷을 돌려 입을 정도로 가난했다면서 백주 대낮 길거리 테이블에 앉아 노닥거리다니! 그들이 서울에 살았더라면 한심한 놈들이라고 손가락질을 많이 받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 백수들의 수다가 프랑스를 움직이고, 또 전 세계로 그 영향력을 미쳤다는 것은 참으로 흥미로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 이들의 카페 문화는 현재까지도 이어진다. 노천카페에 앉아 설전을 벌이는 사람들, 담배 한 개비 손에 끼워 들고 에스프레소 한 잔을 기울이며 생각에 잠겨 책을 읽거나 뭔가를 부지런히 쓰는 사람들의 모습은 파리 어디에서나 마주칠 수 있는 일상의 한 조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