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생목록
재생목록이 비어 있습니다.
-
-
0:00 0:00
화면 너비 (여백)
좁게
보통
넓게
최대
배경 테마
글꼴
바탕/명조
돋움/고딕
글자 크기
작게
100%
크게
줄 간격
좁게
보통
넓게

기적을 만드는 오페라 카수

배재철 지음 | 비전과리더십
기적을 만드는 오페라 카수

배재철 지음

비전과리더십 / 2009년 11월 / 252쪽 / 12,000원



1부 세계 정상에 선 한국인 오페라 가수



100년에 한 번 나오는 목소리


"브라보! 브라보! 브라보!" 극장을 가득 메운 객석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2005년, 독일 자르브뤼겐 극장, 베르디의 <돈 카를로> 초연이 성황리에 끝났다. 기대 이상으로 공연도 잘되고 관객들의 반응도 폭발적일 때 그 기쁨은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가 없다. 분장실에서 분장을 지우며 나는 생각에 잠겼다. '그래, 소리가 예전과 확실히 차이가 나. 확신에 찬 소리가 나오고 있는 것 같아. 아, 이런 게 바로 내가 추구하던 소리가 아닐까?' 수많은 오페라 무대에 올랐지만 이런 느낌은 처음이었다. 이것은 마치 산악인이 에베레스트나 히말라야를 등반한 것과 같았다.

2003년 영국 카디프 극장에서 했던 <라 보엠> 공연 당시 영국의 《더 타임즈》에서 내 목소리에 대해 극찬을 한 바 있다. "로돌포의 아리아에서 단 한 번의 실수도 하지 않고 '하이 씨 High-C' 고음을 완벽하게 소화한 테너이다. 100년에 한 번 나올까말까한 목소리다." 내 음악 인생 최고의 극찬이었다. 그러나 그동안 노래를 해오면서 나에겐 단 한순간의 만족도 없었다. 그런데 이번 공연에서 처음으로 내 소리가 마음에 들었다. 나는 바야흐로 날개를 달고 이탈리아, 독일, 스페인, 동유럽과 북유럽의 많은 나라에서 폭넓은 활동을 펴나갔다.

한국 무대는 예술의 전당에서 <토스카>의 카바라도시 역으로 데뷔한 이후 '떠오르는 신예'로 평가받으면서 해마다 한국에 들어와 공연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해가 거듭될수록 한국 무대에 서는 것은 유럽 무대와 달리 긴장감이 점점 커졌다. 한국에서의 마지막 공연은 암으로 쓰러지기 네 달 전인 2005년 5월 잠실올림픽 홀에서 열린 공연이었다. 오페라 아리아를 발레 공연과 함께 들려주는 독특한 공연이었다. 발레리나 강수진 씨와 함께 한 공연이라 독일에서 활동하던 내게는 남다른 감회를 느끼게 해주었다.

일본 무대, 와지마와의 만남

와지마 토타로. 내게 전화를 한 사람은 일본인이었다. "선생님은 제가 찾던 바로 그 목소리입니다. 저는 일본 도쿄에서 작품을 하기 위해 주역 테너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유창한 이탈리아어로 일본에서 꼭 한번 <일 트로바토레> 작품을 공연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했다. "저는 이번 공연에 메조소프라노 피오렌차 코소또 선생님을 모시려고 합니다. 선생님은 이미 출연을 허락하셨고 남자 주역을 찾아 수소문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재고의 여지없이 하겠다고 했다. 그가 말한 코소또 선생은 마리아 칼라스와 동시대에 활동한 세계적인 성악가로, 성악가들에게는 전설과도 같은 대가였다. 와지마라는 기획자가 어떤 사람이길래 코소또 선생을 무대에 세울 수 있는지 궁금했다.

일본에서의 첫 공연은 남달랐다. 갈라 콘서트 형식으로, 오페라 의상을 입지 않고 각 장면들에 나오는 아리아를 처음부터 끝까지 부르는 스탠드 오페라였다. 색다른 무대였다. 코소또 선생과 한 무대에서 노래를 하면서 나는 계속 탄성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뜨거운 열정과 예순 여덟의 나이에도 호흡을 잃지 않을 정도로 꾸준한 연습의 흔적을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엄청난 실력가가 나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마치 델 모나코가 살아 돌아온 것 같다." '골든 트럼펫'이라 불리는 전설적인 테너에 내 목소리를 비유해 주신 것이다. 와지마도 첫 공연을 마친 나에게 극찬을 했다. "<일 토로바토레>의 주인공 만리코를 소화할 수 있는 테너는 극히 드뭅니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 이런 목소리를 직접 듣게 될 줄 몰랐습니다."

일본에서의 공연은 해외 어느 무대에서보다 뜨거운 반응을 얻었고 평론가들도 좋은 평가를 해 주었다. 사실 그토록 열광적인 반응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와지마의 탁월한 기획력 덕분이었다. 와지마는 전형적인 공연기회자들과는 다른 면이 있었다. 이번 공연도 무대를 떠난 코소또 선생에 대한 애정으로 기획했다고 한다. 와지마의 말을 들으면서 나는 노래와 오페라, 그리고 사람들과의 만남에 대해 한층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었다. 그의 음악에 대한 이해와 성악가에 대한 끝없는 존경과 신뢰는 내 안에 잠재되어 있던 밑바닥의 뜨거움까지 끄집어내게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노래 이면의 세계와 의미에 대해 눈을 뜨게 해주었다.

와지마에게 음악은 특별한 의미였다. 그에게 음악은 치료제였고 위로자였다. 그리고 행복을 느끼게 해준 매개체였다. 어린시절 아버지의 부재 속에서 와지마는 힘들거나 외로울 때 오페라 음반을 들으며 상처를 달랬다고 한다. 아버지가 준 상처를 아버지가 두고 간 전축과 음반으로 달랜 것이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그가 게이오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대학시절 아르바이트로 시작한 음악기획사 일을 본업으로 삼은 이유가 이해가 되었다. 자신이 음악에서 발견한 치유와 행복의 경험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주고 싶다는 열망이 그가 일을 하는 이유였다. 그리고 나를 아끼는 이유였다.

2003년의 첫 만남부터 2005년까지 단독 콘서트가 여러 차례 거듭되면서 일본에서 팬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주로 40대 이상이었다. 위로와 용기와 격려가 필요했던 사람들이 내 음악을 듣고 "아리가또, 아리가또" 하며 인사를 해 주었다. 그들의 따뜻한 눈길과 인사를 받을 때마다 나는 무언가를 느꼈다. 차가울 것만 같았던 일본, 그리고 일본인. 그들은 결코 차갑지 않았다. 내 마음을 적시고도 남을 만큼 사랑이 가득한 사람들이요, 사랑이 필요한 땅이었다.

2부 나를 키운 1만 시간의 연습 시간



<누가누가 잘하나>로 등극하다


나는 흑석동에서 자랐다. 우리 동네는 잘살지도 않았고, 교육열이 높지도 않아서 나와 내 친구들은 학교가 끝나면 학원이 아니라 교회에서 모였다. 늘 어울려 놀던 친구들도 노래를 좋아해 교회에서 어린이 중창단까지 만들었다. 어느 날 큰형과 같이 본 텔레비전 프로그램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외국 사람들이 근사한 무대에서 노래를 하고 있었다. 멋있는 옷을 입고 화려한 조명 밑에서 노래하는 그 모습은 나에게 그야말로 '신세계' 같아 보였다. 난생 처음 듣는 아름다운 멜로디와 텔레비전 속으로 빨려들게 하는 깊은 목소리가 내 온몸을 감쌌다. 나중에서야 그것이 이탈리아의 호세 카레라스의 콘서트였다는 것을 알았다.

사람들 앞에 나서는 편이 아니던 내가 동네에서 유명해진 사건이 생겼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노래만큼은 누구보다 잘한다는 자신감이 슬슬 생길 무렵이었다. 당시 텔레비전에서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누가누가 잘하나>라는 노래경연대회를 했는데 나도 꼭 그 무대에 서 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친구와 함께 방송국에 갔다가 본선까지 진출한 나는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무릎을 굽혔다 폈다 하면서 "흰 물결이 밀려오는 바닷가에서"로 시작하는 동요를 불렀다. 노래가 끝나자 심사위원 중 한 분이 "이 어린이는 소리가 좋아서 장래에 성악가가 되면 좋겠습니다"라고 심사평을 했다. 심사평도 기분이 좋았는데 월말대회와 기말대회에서 장려상까지 받은 것이다.

중·고등학교로 학년이 올라가면서 아이들은 공부를 잘하는 그룹과 공부보다는 예능 기질이 있는 그룹으로 나뉘었다. 공부를 잘하는 친구들을 보면 열등감이 생기긴 했지만, 노래만큼은 내가 잘하니까 당당했다. 하루하루 바쁘게 사셨던 부모님은 내게 레슨을 시켜주시지는 못했지만 성적 때문에 스트레스를 주지는 않으셨다. 돈이 없어도 언제나 열심히 살아가며 만족하는 모습을 보여주셨다. 학교보다는 교회를 활동무대로 해서였는지 공부 못한다는 소리보다는 노래 잘한다는 칭찬을 받으며 사춘기를 보냈다. 교회는 나 자신에 대한 믿음과 자존감 그리고 부족한 것보다는 이미 소유한 것에 대한 긍정적 사고를 선물해 주었다.

나를 키운 1만 시간의 연습

1988년에 나는 한양대학교 음악대학 학생이 되었다. 대학 문턱을 밟기 전까지 음악과 노래는 내게 꿈의 세계였다. 행복한 꿈을 꾸는 것처럼 기분 좋은 것이었다. 하지만 입학과 동시에 음악은 내게 처절한 현실이 되었다. 콩쿠르가 뭔지도 모르는 채 음대에 다니는 큰형 친구에게 달랑 두 곡 레슨을 받고 합격한 나와 달리 동기생들은 초등학교 시절부터 레슨을 받았고 고등학교 시절 이미 한두 번 콩쿠르에 출전한 경험들이 있었다. 나는 뒤늦게나마 선배들을 따라다니며 무슨 말인지도, 어떻게 하는 건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연습을 했다. 그리고 단 한 번도 레슨에 꾀를 부리거나 연습을 게을리하거나 빠진 적이 없었다.

빡빡한 연습을 하면서도 그 생활을 즐길 수 있었던 데는 임현수라는 친구의 도움이 컸다. 혼자 자취를 하던 현수에게는 LP 음반과 전축이 있었다. 그 전축으로 이탈리아 오페라와 독일 가곡을 들으며 현수와 밤을 세워 나눈 이야기들은 그 어떤 이론 수업보다 진지했다. 신세계가 따로 없었다. 우리는 방에서 휴대용 가스레인지로 라면을 끓여먹으며 음악평론가가 무색하리만큼 밤새 진지한 토론을 벌이곤 했다.

연습이 쌓일수록 내 목소리를 잘 분간할 수 있었다. 아침의 목소리, 오후에 땀 흘리며 나와 싸우는 목소리, 저녁나절 온종일 땀 흘리며 지켜 온 연습실을 울리는 충만한 목소리. 그 섬세한 차이를 내 귀가 듣고 있었다. 오로지 나만이 아는 미세한 차이였다. 지독한 연습벌레만이 알 수 있는 땀 냄새, 그 달고 기분 좋은 냄새가 지금도 아련하다.

2학년을 마치고 군 복무를 했는데 발령을 받은 곳이 우연히도 공군기지의 비행기 엔진 테스트를 하는 초소 옆이었다. 엔진소리가 머리가 멍할 정도로 대단했다. 소리를 크게 질러도 아무도 듣지 못한다는 사실을 발견한 나는 엔진 소리에 뒤질세라 발성연습을 했다. 2년의 기간이 낭비되는 시간인 것 같아 불안했는데 나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연습실을 독차지했던 셈이었다.

복학을 하자 군대에서 터득한 호흡과 트인 목소리로 연습에 자신이 생기던 차에 기회가 왔다. '이대웅 콩쿠르'였다. 지금도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힐 만큼 인정받고 있는 대회로 '한국성악경연대회'라고도 불린다. 콩쿠르에서는 대개 교수들이 가르치는 4학년 제자들이 좋은 성적을 거두었으나, 나는 교수가 아닌 강사의 제자였고 3학년이었음에도 수상을 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93년에는 제33회 '동아 콩쿠르'에서 1등을 차지했다. 여기에서의 우승은 장래 보증수표를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얼마 전 한 분야에서 뛰어난 사람들은 1만 시간의 연습량을 채운 사람들이라는 내용의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었는데, 뒤돌아보니 정말로 1만 시간의 땀과 눈물을 쏟았던 것 같다.

나는 졸업과 함께 단돈 70만 원을 손에 들고 이탈리아로 유학을 떠났다. 학비를 받지 않는 베르디 음악원을 선택했는데, 나는 이곳에서 아내를 만났고 수석으로 졸업하는 영예를 누리기도 했다.

3부 정상에서 찾아온 암



공연 중에 목에 이상이 오다


동양인으로서 에이전트에게 에이스 대우를 받으며 계속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크나큰 행운이었다. 유럽 무대의 기대주로 인정받으며 승승장구하던 2004년, 우리 가족은 이탈리아 생활을 정리하고 독일의 자르브뤼켄으로 갔다. 이 도시는 규모에 비해 음악적 관심이 풍성하여 다양한 오페라들이 시립극장을 통해 공연되고 있었다. 세계적인 지휘자 정명훈이 자르브뤼켄 방송교향악단 상임 지휘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자르브뤼켄 극장으로 오면서 나는 어느 때보다 왕성한 활동을 펼쳐 나갔다. 극장에서 나의 위치는 독보적이어서 극장에서나 시민들에게나 특별한 관심과 사랑을 받으며 오페라 가수로서 더없이 좋은 환경을 누릴 수 있었다.

이듬해인 2005년, 극장은 베르디의 작품 <돈 카를로> 준비로 여념이 없었다. 극장에서 서정적인 목소리를 갖고 있는 테너는 나밖에 없어서, 소프라노는 2명이 캐스팅되어 서로 번갈아 할 수 있었지만 테너는 나 혼자 소화해야 했다. 연습도 혼자 다 감당해야 해서 육체적으로 힘들고 심적으로도 계속 긴장되었다. 오프닝 공연에 이어 두 번째 공연까지 무사히 마치고 세 번째 공연을 올리기 직전, 내 목에 이상이 왔다. 목이 아픈 것이 아니라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고음이 나오지 않고 베이스 음색이 나왔다. 너무 무리를 했나 싶었지만 내일이라도 병원에 가보면 알겠지 하고 가볍게 생각했다.

"혹이 있군요. 일단 초음파 검사부터 해야겠습니다." 상황이 이쯤 되자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직감했다. 나는 재촬영과 조직검사를 했고 결과는 바로 나왔다. 의사 앞에 앉아 있는데 마음이 가라앉지를 않았다. "갑상선암입니다." 설마 했는데 막상 듣고 나니 온 세상이 깜깜해졌다. "수술은 가능합니다. 단, 수술을 하게 되면 목소리가 상할 수도 있습니다." 의사는 목소리에 이상이 생길 수도 있지만 그것은 그야말로 최악의 경우라고 했다.

3~4시간 예정이던 수술은 무려 8시간이나 걸렸다. 처음 초음파를 찍었을 때는 혹의 크기를 3~4cm로 추정했는데 수술할 때 열어보니 7cm여서 의사들도 놀랐다고 한다. 암이 림프까지 전이되어 림프를 다 걷어내야 했고, 그 과정에서 오른쪽 성대의 신경과 오른쪽 횡경막의 신경을 절단했다. 수술실 밖에서 3시간이면 끝날 줄 알고 기다리던 아내는 시간이 지났는데도 수술이 끝나지 않자 불안했다고 한다. 수술실 문이 열리면서 의사가 아내를 찾았다. "당신 남편의 생명이 중요합니까, 목소리가 중요합니까?" 아내의 대답은 당연히 나의 생명이었다. 수술대 위에 누워 아무것도 모른 채 마취되어 있던 내게 엄청난 결과가 기다리고 있었다.

다시 노래를 할 수 있다고?

소리를 잃은 오페라 가수의 하루하루는 그야말로 고역이었다. 왜 이런 일이 생겼는지 생각하는 것도,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곰곰이 돌아보는 것도 하루 이틀이었다. 문제는, 노래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것이었다. 더 정확히, 노래 말고는 그 어떤 것도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 문제였다. 한 자락 희망이라도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이비인후과 치료와 음성재활 치료를 받았다. 그러나 치료라고는 하지만 상태가 어느 정도인지, 회복이 되고 있는지를 점검받는 정도가 전부였다. 그러던 중 담당 의사로부터 뜻밖의 이야기를 들었다. 무너진 성대를 세울 수 있는 수술이 있다는 이야기였다.

성대 수술에 관한 자료를 찾던 중 한국인이 쓴 논문에서 '이싯키 타입 1, 2, 3'이라는 용어를 보게 되었다. 아마도 그 수술의 이름을 말하는 것 같았다. 이싯키라는 이름으로 보아 일본인이 개발한 수술법인가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돌연 마음이 바빠졌다. 하루하루가 꿈인지 현실인지 모를 정도로 낙담 속에서 지내던 것은 어느새 잊어버리고 실낱같은 희망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 수술법을 만든 일본인 의사에게 수술을 받으면 성공률이 더 높지 않을까?' 내 머릿속에선 이미 일본인 의사와 면담을 하고 있는 내 모습이 떠오르고 있었다. 설령 성공률이 낮더라도 그 창시자에게 가서 수술을 받고 싶었다.

와지마, 독일로 날아오다

평소 누구보다 나를 잘 이해하고 격려해 주던 와지마였기에 목소리를 잃어버린 것도 알려줘야 할 것 같아 그에게 화상으로 전화를 걸었다. "와지마! 나야." 인사를 하고 싶었지만 성대가 도와주지 않았다. 띄엄띄엄 말을 이어가는 내 목소리를 듣던 와지마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충격이 꽤 컸던 모양이었다. 와지마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재철, 기다려. 내가 갈게." 나는 와지마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뭐? 이리로 오겠다고?" "조금만 기다려. 내가 갈 테니 가서 얘기하자." 더 이상 대화가 힘들다는 것을 알았는지, 와지마는 그 말만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나는 전화기를 내려놓고 한동안 정신이 없었다. 와지마가 온다고 한다. 독일로.

'그래, 와지마라면, 와지마라면 뭔가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거야.' 알 수 없는 강력한 기대감이 밀려왔다. 짧은 통화였지만 그 동안 와지마가 내게 보여주었던 여러 모습들이 지나갔다. 와지마는 늘 나를 특별한 존재로 생각해 주었다. 내게 와지마 같은 음악적 친구가 있다는 것이 더없이 든든했다. 독일로 오겠다는 그의 한마디는 와지마가 독일까지 와야 하는 이유를 나 스스로 묻고 또 묻게 만들었다. 와지마가 늘 하는 말이 있다. 세상 모든 일에 이유가 있다면, 세상 모든 만남에도 이유가 있다고. 일본인인 그와 한국인인 나. 그와 나를 일본인과 한국인으로 대입시켜 보기도 처음이었다.

전문 열람 제한

미가입 상태이므로 요약본의 일부만 제공됩니다.
더 깊이 있는 내일의 통찰력과 지식 에너지를
프리미엄 무제한 이용권으로 충전해 보세요!

멤버십 가입 / 결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