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궁의 성
시앙쓰 지음 | 미다스북스
황궁의 성
시앙쓰 지음
미다스북스 / 2009년 7월 / 565쪽 / 32,000원
후궁의 금지옥엽
눈에 보이지 않는 전쟁터, 후궁전: 중국은 하(夏)왕조가 세워진 이래로 1911년 동안 군주제도를 채택해왔다. 진(秦)나라에서 시작된 황제제도는 가장 완비된 군주제도였다. 전제군주 시대에는 줄곧 유가사상을 통치 이념으로 삼았다. 유가는 충효를 연구하는 학문으로, 효의 핵심이 대를 잇는 것이었기 때문에 자식을 낳지 못하는 것을 가장 큰 불효로 여겼다. 더욱이 대대로 같은 성을 가진 자가 나라를 통치해야 하는 황제 가문에서 대를 잇는 일은 더욱 절실하고 중요한 일이었다. 중국의 역대 제왕들은 대부분 자손 번성을 구실 삼아 마음껏 성적 쾌락을 즐기며 여색에 빠져 지냈다. 자신들의 이러한 생활이 곧 역사적인 중책이며 나라를 위한 것이라고 했다. 다시 말해 제왕들이 나라를 지키는 중요한 목적이 편안한 생활을 영위하거나 성욕을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니 여인들에게 둘러싸여 생활하는 황제들이 항상 여색을 탐하는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중국 대부분의 황제와 그들의 본처인 황후는 사랑이라는 감정적인 기반 없이 결혼했다. 가장 존귀한 존재들인 황제들은 다른 사람에 의해 간택된 황후를 진심으로 좋아하거나 흥미를 가질 리 만무했다. 황제와 황후는 예법으로 유지되는 사이였다. 황후는 우아하고 교양을 갖춘 국모로서 존경을 받았지만 동시에 보통 여인이 누려야 할 즐거움은 누리지 못했다. 즐거움과 활력이 넘치는 여자로서의 생활은 황제의 총애를 한 몸에 받는 후비들에게 빼앗겼다. 그래서 꽃향기 흩날리던 화려한 후궁전(황후가 통솔하던 곳)은 눈에 보이지 않는 전쟁터였다. 이 전쟁은 존귀한 황후와 아름다운 비빈, 궁녀들 사이에서 일어났다. 세상과 단절된 후궁전에서 무수히 많은 젊은 여인들이 한 명의 남편을 공유하며 그의 수많은 부인 중 한 사람이 되었으니 어떻게 그녀들이 편안하게 살 수 있었겠는가? 그녀들의 피 속에는 온통 근심 걱정과 질투, 원망이 뒤섞여 끓어넘치고 있었다.
역사서를 꼼꼼하게 읽다보면 시대별 황후들의 실제 생활상을 쉽게 알 수 있다. 황후는 스스로 예쁜 여성을 골라 황제에게 바쳐야 했는데, 이는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모든 욕망과 감정을 지닌 여성의 한 사람인 황후에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질투심을 불태우던 황후들 대부분은 이런 일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녀들은 극도로 예민해져 본능적으로 스스로에게 말하고 있었다. 다른 여자에게 황제의 성은을 입을 기회를 줄 수 없다고, 황제가 자신보다 더 예쁘고 매력적인 여성을 만나게 내버려 둘 수 없다고 말이다. 하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황제의 뜻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아무것도 없었으니 말이다. 따라서 질투심을 다스리는 법을 수양하지 않은 황후는 겸허한 마음을 가질 수 없었고 하루하루 바늘방석에 앉은 듯 불안한 나날을 보내야 했다. 질투심이 황후의 마음속에서 걷잡을 수 없이 요동치고 있을 때, 그녀들은 모든 것을 동원해 적과 맞서 싸우며 상대를 사지로 몰아넣고 승리를 맛보기도 했다. 하지만 싸움에서 져 총애를 잃은 황후들은 매일 밤 눈물을 삼키며 으슥한 곳에서 황제의 총애를 빼앗은 비를 저주하는 것밖에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녀의 이름이 적힌 작은 인형을 바늘로 찌르며 분노에 찬 목소리로 저주를 퍼부었다. 물론 세력이 강한 황후는 이렇게 할 필요가 없었다. 그녀들은 강력한 권력의 도움으로 상대에게 직접적인 해를 가해 서서히 고통스럽게 죽였다.
가장 잔인했던 황후로는 중국의 첫 번째 여황인 여후를 뽑을 수 있다. 여후는 총애를 앗아가고 황후의 자리까지 노리는 척부인(戚夫人)에게 깊은 원한을 품었지만 유방(劉邦)이 살아 있는 동안은 그녀를 어쩌지 못했다. 그러다 유방이 세상을 떠나자 황후의 자리를 지키고 있던 여후가 태후의 자리에 오르면서 보복이 시작되었다. 그녀는 우선 척부인을 관노로 전락시켜 죄수복을 입혀 아침부터 저녁까지 냉궁에서 쌀을 찧는 일을 시켰다. 곧이어 사람을 보내 척부인의 손발을 자르고 두 눈을 파고 귀를 멀게 했다. 뿐만 아니라 목소리를 내지 못하게 하는 약을 억지로 먹여 말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결국 변소에 던져져 인간 돼지라 불리던 척부인은 고통 속에서 서서히 죽어갔다.
남송(南宋) 광종(光宗)의 황후 이봉낭(李鳳娘)은 사납고 질투심이 많은 사람인 반면에 광종은 주관이 없고 매우 나약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한번은 광종이 손을 씻다 곁에서 시중을 드는 궁녀의 피부가 희고 보드라운 모습을 보고 그녀를 마음에 들어 하다가 문득 그녀가 가엽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마침 이황후가 이 광경을 보고 말았다. 며칠 후 이황후는 광종에게 정교하고 아름답게 만들어진 찬합 하나를 보냈다. 찬합을 열어본 광종은 너무 놀라 식은땀을 흘렸다. 찬합 안에 궁녀의 두 손이 들어있었던 것이다. 얼마 후 이황후는 광종이 제사를 지내기 위해 궁 밖으로 나갔을 때 그가 총애하던 황귀비(黃貴妃)를 죽여버렸다. 이 일로 격분한 광종은 그만 병으로 죽고 말았다. 이렇듯 후궁전의 권력과 피바람은 뗄 수 없는 관계였다. 옛사람들은 후궁전에서부터 조정에 이르는 비극까지 모두 여화(女禍)라 칭했다.
명대 비빈들의 운명: 명대(明代)는 약 3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열여섯 명의 황제를 배출했다. 모든 황제들은 황후와 수많은 비빈들을 거느렸다. 그렇다면 당대 구중궁궐에서 비빈들의 최후는 어떠했을까? 그 대답은 실로 놀랍다. 명영종(明英宗) 이전의 비빈들은 대부분 순장되었고 나머지는 죽은 뒤 황릉에 묻혔다. 명대 초기, 마흔한 살에 보위에 오른 명태조(明太祖) 주원장(朱元璋)의 경우는, 31년 동안 재위하면서 구름떼처럼 많은 미인들을 거느렸다. 홍무(洪武) 31년에 세상을 떠난 태조 주원장은 효릉(孝陵)에 묻혔는데 그와 함께 순장된 사람은 비빈 마흔여섯 명과 궁녀 십여 명에 달했다.
순장하는 명단에 오른 수많은 비빈들은 아직 인생을 피워보지도 못한 꽃다운 나이였다. 순장하는 광경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매우 참혹했다. 여인들은 순장되는 그날, 진수성찬이 차려진 사행안(辭行晏)이라는 연회에 다 함께 참석해 배불리 먹었다. 연회가 끝난 뒤, 여인들은 대전으로 향했다. 어두운 불빛이 비치는 대전 앞에는 밧줄이 걸린 굵직한 대들보가 놓여 있었고 그 밧줄 끝에는 올가미가 묶여 있었다. 그리고 각 올가미 아래에는 나무로 만든 작은 상자가 놓여 있었다. 여인들이 억지로 나무상자 위로 올라서면 그녀들 목에 올가미가 씌워졌다. 명에 따라 환관(황제와 태자를 가까이서 시중드는 사람)들이 일제히 나무 상자를 치우면 여인들은 동시에 무참히 생을 마감했다. 머리를 풀어헤친 그녀들은 고통과 절망감, 억울함이 뒤섞인 표정을 지으며 고통스럽게 몸을 떨다가 불공평한 이 세상을 떠났다. 황실의 선정적인 생활
명나라 황실의 춘약: 춘약(春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정력을 만들어내 황제의 욕망을 끓어오르게 만들었다. 이러한 이유로 춘약이 황제의 호감을 사면서 역대 궁에서는 이 약이 성행하게 되었다. 한대 황제가 즐겨 먹던 춘약은 신휼교(愼恤膠)이고 당대 성행하던 것은 조정향(助精香)이다. 여색에 빠진 명대 황제들도 춘약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당시 궁에서는 매우 다양한 종류의 춘약들이 있었다. 명세종 주후총(朱厚憁)은 번왕(藩王, 황제가 아닌 주변 신하국의 왕인 제후)의 신분으로 황제가 되었다. 겨우 열다섯 살에 황제가 되어 45년간 재위하다가 예순에 세상을 떠나 영릉(永陵)에 묻혔다. 그는 장수(長壽)에 집착한 황제였다.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불로장생의 약을 구하는 데 쏟았다. 장수와 향락은 상부상조하는 관계다. 술사(術士)들은 어린 여자와 자주 성관계를 가지면서 음기를 마시면 남자들이 건강하고 힘이 세진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이유로 세종은 수많은 소녀들과 관계를 가졌는데, 열 살 전후되는 100여 명의 소녀들을 높은 담으로 둘러싸인 깊은 궁에다 두고 언제든지 원할 때마다 즐겼다. 이때 춘약은 건강과 쾌락에 관심이 많았던 세종의 생활 속에서 신비한 효과를 발휘했다.
이렇게 되자 명 가정(嘉靖) 연간에는 황제에게 춘약(春藥)을 바치는 대신들과 술사들이 끊이지 않았다. 술사 도중문은 춘약으로 출세한 사람이었다. 도중문은 단번에 세종의 신임을 얻어 궁에서 황제와 호형호제하면서 격 없이 지냈다. 조정의 수많은 대신들은 앞다투어 그를 방문하거나 자신들의 집에 초대해 성대한 연회를 베풀어 주면서 방중술 비법을 배우길 간청했다. 특히 이 비법에 심취했던 병부상서(兵部尙書) 담륜(譚綸)은 도중문에게서 얻은 춘약을 먹고 크게 효과를 보고 미친듯이 이 약에 빠졌다. 이렇듯 세종과 그의 대신들은 도중문의 춘약에 빠져 지냈는데, 이는 역사상 매우 드문 일이었다. 20년 동안 이 비법을 행한 담륜은 항상 얼굴에 혈색이 돌았고 신체 건강했으며 쾌활했다. 하지만 어느 날 어린 여자와의 잠자리에서 실패하면서 다시는 관계를 하지 못했고 이때부터 병으로 몸져누워 일어나지 못했다. 임종 직전에 담륜은 그 비법을 신중히 써야 한다는 충고를 남겼다. 그렇다면 춘약은 과연 어떤 보배였을까? 춘약은 인체를 자극하는 최음제의 일종이다. 그 반응이 매우 강렬해 춘약을 복용한 명세종은 줄곧 흥분상태를 유지했다. 그는 방 안에만 틀어박혀 정력을 키우고 양기를 북돋우는 일에만 몰두했다. 그 결과 20년간 정무를 돌보지 않은 채 여색에만 빠져 지냈다.
반면 춘약을 거부한 황제도 있었다. 명신종 주익균(朱翊均)은 열 살에 황제로 즉위하면서 황실의 엄격한 교육을 받았다. 그는 친정을 펼친 이후에도 춘약을 거부했다. 그러니 대신들과 도사들도 감히 제멋대로 춘약을 사용할 수 없었다. 신종은 48년 동안 재위하면서 명대 가장 오래 재위한 황제가 되었다.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주유검(朱由檢) 또한 춘약을 거부한 황제이다. 명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우고자 하는 마음뿐이었던 그는 여색의 유혹을 단호히 거절했다. 『명이북략 明李北略』에는 다음 내용이 기록돼 있다. 하루는 숭정제(崇禎帝) 주유검이 어편전(御便殿)에서 상주문을 읽고 있다가 특이한 향기를 맡고 가슴이 두근거리자 곁에 있던 신하에게 어디서 오는 향인지 물었다. 신하가 궁중의 오래된 처방이라고 하자 숭정제는 "그 향을 즉시 없애라"는 명을 내렸고 궁에서 다시는 이러한 것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했다. 숭정제는 한탄하며 "황부와 황형들이 모두 이것 때문에 목숨을 잃었구나!"라고 말했다.
무측천의 사랑과 증오
무미의 담력과 식견: 똑똑하고 담력이 컸던 무미(武媚)는 계략에 뛰어난 여인이었다. 입궁한 이후 무미의 심계와 담력은 세 가지 물건으로 사나운 말을 다룬 사건에서 그 빛을 발하게 된다. 이 일에 관해서는 역사서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그해 태종(당나라 2대 황제 이세민)은 사나운 말 한 필을 가지고 있었는데 힘이 세고 사나워 누구도 이를 다룰 수 있는 자가 없었다. 이때 무미가 "세 가지 물건만 있으면 제가 그 말을 다룰 수 있습니다. 그것은 채찍과 철퇴, 비수입니다. 말이 말을 듣지 않으면 채찍으로 치고 그래도 말을 듣지 않으면 철퇴로 머리를 치고 그래도 난동을 피우면 비수로 목을 따버리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처럼 무미는 비범한 담력으로 태종의 관심을 끌어 성은을 입게 되었고 결국 재인(후궁전에서 품계가 가장 낮은 지위)에 봉해졌다. 그러나 태종은 무미를 재인으로 봉한 이후에도 몇 년 동안 그녀를 거들떠보지 않았다. 태종은 문무를 겸비한 뛰어난 사람이었기 때문에 자신과 같은 부류의 용감한 사람을 좋아할 리 없었다. 그는 우아하면서도 부드럽고 요염한 여성스러운 여인들을 좋아했다. 하지만 무미는 사나운 말을 다스리는 발언을 한 이후 새로운 사람에게 관심을 받게 되었는데, 그가 바로 심신이 약했던 태자 이치(李治)였다. 그는 약한 자신과 대조적인 모습을 가진 비슷한 나이의 무미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아버지의 여인에게 빠진 이치: 정관(貞觀) 23년 5월, 태종 이세민이 쉰한 살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태자 이치가 즉위하여 당나라 3대 황제인 당고종이 되었다. 궁중의 관례에 따라 새로 즉위한 황제는 후궁전에 있는 부황의 부인 네 명과 빈 아홉 명 이외에도 그 아래에 스물일곱의 세부와 여든한 명의 하녀들을 모두 감업사(感業寺)의 비구니로 보내야 했다. 그녀들이 향한 곳은 한 가닥 희망조차 없는 산 무덤이나 다름없는 곳이었기에 그녀들은 자신들의 비참한 운명에 애통해했다. 무미 역시 이 검은 상복을 입은 대열 속에 있었다. 당시 그녀의 나이는 불과 스물한 살, 한창 때였다.
부황 태종이 죽은 지 1년째 되던 날이었다. 이날 태종의 별묘에서 향을 올린 뒤 감업사로 향한 고종 이치는 태종의 재인 무미와 눈물로 재회했다. 이 감동적인 장면은 삽시간에 수도 전체로 퍼져 나갔다. 허나 이 소식을 더 빠르고 자세하게 들은 사람이 있으니 고종의 황후인 왕황후였다. 왕황후는 슬픔과 괴로움으로 가득찼지만 한편으로 좋은 묘책이 떠올랐다. 무미를 끌어들여 황제의 총애를 독차지하고 있던 소숙비와 경쟁시키고 자신은 가만히 앉아 결과를 지켜보고자 한 것이다. 고종과 서로 끌어안고 눈물로 재회한 뒤 열 달을 더 보낸 무미는 왕황후의 부름으로 다시 궁에 들어왔다. 이 소식을 들은 이치는 매우 기뻐하며 왕황후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고 즉시 부황의 재인이었던 무미를 차지했다. 그날 이후 이치는 요염한 무미에게 빠져 밤낮으로 그녀 곁에 머무르며 오직 무미만을 총애했다. 이로 인해 소숙비는 크게 상심하여 밤마다 눈물로 지새웠다. 그러나 왕황후는 자신이 늑대를 피하려다 호랑이를 불러들인 셈이 됐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결국 왕황후는 호랑이를 불러들인 대가를 혹독히 치르게 되었다.
피비린내 나는 황후의 길: 무미가 소의에 봉해졌을 때는 이미 두 아들을 낳은 뒤였다. 하지만 두려운 사실은 이미 총애를 받는 몸이라도 도처에 위기가 도사리고 있다는 점이었다. 작은 변고라도 생기는 날에는 목숨까지 위태로울 수 있었다. 어떻게 하면 확실하게 자리를 지키고 황제의 총애를 유지할 수 있을까? 유일한 방법은 자신이 황후의 자리에 오르고 아들을 태자로 만드는 것뿐이었다. 무미는 고종이 자신에게 푹 빠져 지내도록 노력했다. 동시에 은밀히 궁 안의 여러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왕황후와 소숙비의 행동을 몰래 관찰했다. 그러면서 분노에 차 자신을 매도하는 두 사람의 행동을 고종에게 사사건건 일러바쳤고, 그 결과 고종은 점차 왕황후에게 불만을 품었다.
이때 조정 안팎에서는 왕황후의 폐위가 머지않았음을 눈치채고 있었다. 왕황후를 폐위시키고 무미를 황후의 자리에 올리는 문제로 마찰이 끊이지 않았다. 조정은 두 파로 갈라졌다. 한 파는 조정의 원로들로 구성되어 왕황후의 폐위와 무미의 황후 책봉을 반대했다. 또 한 파는 이렇다 할 배경은 없지만 재능이 뛰어난 신흥 세력들로 계급에 엄격한 문벌귀족에 반감을 품으며 무미의 황후 책봉을 지지했다. 서로 첨예하게 대립하던 두 파가 한 치의 양보도 하지 않자 고종은 난처했다.
무미는 최후의 수단으로 살인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썼다. 무미는 바로 자신의 딸을 죽여 그 죄를 왕황후에게 뒤집어씌우는 것이었다. 무미가 직접 딸을 죽인 사건은 역사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소의가 된 무미가 딸을 낳자 왕황후가 잠시 들러 그 딸을 보고 갔다고 한다. 이때 무미가 몰래 딸을 죽이고 다시 이불 위에 눕혀 놓았다. 황제가 왔을 때 무미는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으로 고종과 웃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다 이불을 들쳐본 무미는 죽은 딸을 발견하고 깜짝 놀라며 황급히 시녀를 불렀다. "방금 누가 다녀갔느냐?" 시녀는 왕황후라고 대답했다. 무미는 대성통곡했다. 진실을 알지 못했던 황제는 대노하여 말했다. "황후가 내 딸을 죽였단 말인가! 그렇게 무소의를 괴롭히더니 결국 이런 일이!" 그날 이후 무미에 대한 황제의 총애는 나날이 깊어졌다. 반면 황제는 왕황후를 폐위시키고 싶어 했다. 그러다 무미가 무고(巫蠱, 주술로 남을 해치는 것으로 황실의 금기사항이었음)를 행했다며 왕황후와 왕황후의 어머니를 모함하자 황제가 왕황후를 폐위하기에 이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