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늘 고흐의 구두를 신는다
이명옥 지음 | 21세기북스
나는 오늘 고흐의 구두를 신는다
이명옥 지음
21세기북스 / 2009년 7월 / 352쪽 / 15,000원
고흐의 구두를 신다
희망, 절망이라는 토양에서 피어나는 꽃2008년의 끝자락, 영국 런던 테이트갤러리에 소장된 〈희망〉이라는 그림이 전 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으면서, 앞다퉈 지면에 소개되는 이변이 벌어졌다. 그림을 그린 화가의 이름은 조지 프레드릭 왓츠(George Frederick Watts). 그는 19세기 말 영국에서 활동했던 화가였다. 하지만 언론이 흥분하던 그 시점까지도 왓츠라는 이름과 그가 그린 〈희망〉에 대해 아는 사람은 극소수의 미술인과 미술애호가들뿐이었다. 〈희망〉이라는 그림이 하룻밤에 신데렐라로 깜짝 변신하게 된 사연은 과연 무엇일까? 바로 세상에서 가장 유명해진 남자가 자신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준 그림이라면서 찬사를 보냈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가장 유명해진 '이 남자'란 미국 제 44대 대통령에 당선된 버락 오바마를 가리킨다. 오바마는 대권의 꿈을 키우던 시절인 2004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희망〉이라는 그림을 보고 커다란 감동을 받았다고 처음으로 밝혔다.
희망을 연주하다 한 여자가 몸을 웅크린 자세로 커다란 공 위에 올라탔다. 여자의 모습이 예사롭지 않다. 그녀는 맨발인데다 두 눈을 천으로 질끈 동여매고 있다. 불편한 자세인데도 여자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악기를 연주한다. 악기는 리라, 즉 수금이다. 그런데 수금의 줄은 모두 끊긴 상태며, 단지 한 줄만이 간신히 남아 있다. 두 눈을 가린 채 공에 위태롭게 올라탄 자세로 달랑 한 줄 남은 현(絃)에 의지해 악기를 연주하는 여자! 대체 수수께끼 같은 이 그림의 의미는 무엇일까? 커다란 공은 바위덩이에 불과한 행성으로 전락한 지구를 상징한다. 눈먼 여자는 인류를, 악기의 끊어진 현은 인류가 절망적인 상태에 빠진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한 줄의 현은 희망을 뜻한다. 그림의 메시지는 다음과 같다. 인간은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결코 삶을 포기하지 않고 한 가닥 남은 희망에 의지해 살아가는 존재라는.
화가는 절망이라는 토양에서 피어나는 꽃이 희망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던가. 한 가닥 남은 리라의 현을 눈부신 황금색으로 표현했다. 저 찬란한 황금빛 줄에서 흘러나오는 희망의 노래가 지구 방방곡곡에 울려 퍼질 수 있도록. 이러한 희망의 메시지는 감상자에게 신비로우면서도 강렬한 암시를 주었고, 19세기 말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인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에 버금가는 인기를 누렸다. 그림의 명성이 높아지면서 복제화가 불티나게 팔렸다.
한 점의 그림이 던진 강렬한 메시지 왓츠의 〈희망〉은 미술이 정치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탁월한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증명하는 흥미로운 사례가 되었다. 자, 정치권에서는 왜 예술작품에 추파를 던질까? 미국의 역사학자인 피터 패럿은 미술품을 홍보수단으로 삼으면 얻게 되는 장점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문서는 읽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는데다가 자료가 보관된 기록보관소에 직접 찾아가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반면에 회화나 사진은 상대적으로 더 빨리 식별할 수 있고 복제물을 통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오바마가 미술을 이미지 구축에 활용한 점은 유별나지 않다. 다만 다문화 가정에서 자랐던 오바마가 이슬람 국가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았던 그림을 희망의 멘토로 삼았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혹 오바마는 미국이 테러국가로 낙인찍은 이슬람 국가들과 화해하겠다는 메시지를 그림을 통해 전달한 것은 아닐까? 미국 최초의 흑인대통령을 탄생시키는 데 공헌한 이 그림에는 흥미로운 일화가 꼬리표처럼 따라다닌다. 그림이 처음 공개되었을 당시 미술평론가들은 화가에게 '절망'이라는 제목이 더 잘 어울린다고 권유했지만, 왓츠는 희망이라는 제목을 고집했다고 전해진다.
미국 솔 음악의 대부로 평가받는 레이 찰스의 일생을 담은 영화 〈레이〉에서 인상적인 장면은 주인공 레이가 훗날 아내가 되는 델라와 첫 데이트를 하던 도중에 창문 밖의 벌새에게 귀를 기울이라고 말하는 순간이다. 델라는 레이의 엉뚱한 제안에 의아해하면서도 두 눈을 감고 조용히 귀를 기울인다. 그러자 미세한 떨림 같은 벌새의 날갯짓소리가 우주에 가득 퍼지지 않은가. 델라는 그 순간 대자연의 신비와 생명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면서 레이에게 사랑을 느낀다. 신은 시각장애자인 레이에게 값진 보상을 해주었다. 그의 시력을 빼앗아간 대신 슈퍼 청각을 선물해 그가 전설적인 뮤지션이 될 수 있도록 했으니 말이다. 20세기 라틴 문학의 거장인 보르헤스도 시각장애인이었지만 육체적 형벌인 실명에 절망하지 않고 희망의 나날을 살아갔다. 그는 감은 눈 속에서 희망의 세계를 발견했다. "나는 그토록 사랑하던 눈에 보이는 세상을 잃어버렸어. 하지만 나는 또 다른 세상을 찾아냈지."레이와 보르헤스는 우리에게 절망의 또 다른 이름은 희망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인생, 자신만의 길을 걷다흔히 사람들은 인생을 길에 비유하곤 한다. 그래서 인생행로, 인생여정이라는 단어가 생겨났을 것이다. 시인 윤동주는 한국인의 애송시인 〈서시〉에서 삶에 대한 결연한 의지를 길에 은유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인생의 길을 그림으로 표현한 화가가 있다. 바로 길의 화가로 불리는 이영희다. 신선한 공기가 대지에 촉촉이 스며드는 신새벽. 사람의 발길로 다져진 흙길을 따라 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다. 친환경 새벽빛이 숲을 푸르게 물들였던가. 공기도, 흙도, 나무도 명상에 잠긴 듯 고요하고 청정하다. 세상만물이 평온을 누리는 화면에서 유독 눈길을 끄는 것은 수많은 발자국들이 만들어낸 흙길이다. 나무와 풀, 야생화와 눈빛을 맞추고, 새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느릿느릿 걸어가고 싶어지는 길, 나지막한 흙 언덕을 넘어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충동이 들게 하는 길, 저 땅에 발을 내딛으면 몸은 자연과 하나가 되고 스스로 아름다운 풍경이 될 것 같은 길. 화면에 스며든 푸른빛은 희망을 상징한다. 화가는 인간은 희망을 찾아 길을 떠나가는 존재라고 말하기 위해 새벽빛과 흙길을 한 쌍으로 짝지은 것이다.
신발에 묻는 흙을 두려워 말라 화가는 왜 숲 속의 길을 그림의 주제로 삼았을까? 아니, 수많은 길 중에서 하필 질박한 흙길을 선택했을까? 이영희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이 태어나 걷고, 세월이 흐르면서 길이 생겨났습니다. 그 길 위로 수많은 사람들이 오고갔고, 그 길을 따라 마음과 마음이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굽이굽이 돌아가는 길에는 삶의 애환이 서려 있습니다. 언덕길에는 고단한 인생사가 무수한 발자국처럼 박혀 있습니다. 길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삶의 역사가 오롯이 묻어 있습니다."화가는 북녘 야산의 오솔길을 걸으면서 한국적 토속미가 생생하게 살아 있는 흙길의 정취에 푹 빠졌다. 나무가 없는 헐벗은 북한의 산과 들은 1950~60년대 한국의 풍경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았다. 그곳에는 빌딩이 들어서고 대로가 만들어지기 이전의 한국의 자연풍경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었다. 이영희는 한국의 토종길과 만나기 위해 네 차례나 북한을 방문했다. 이영희의 풍경화를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저 흙길을 걸어가려면 신발에 흙이 묻는 것을 겁내지 말아야 한다고. 신발에 흙을 묻히지 않고, 인생의 고단함과 장애물을 극복하지 않고, 삶의 길을 끝까지 걸어갈 수는 없다고.
고흐는 왜 구두를 그렸는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인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도 이영희와 비슷한 생각을 가졌던가. 삶의 여정을 흙이 묻은 구두에 비유한 그림을 남겼다. 낡고 헤진 검은 구두에 진흙이 잔뜩 묻었다. 누가 방금 신발을 벗었던가. 구두끈은 느슨하게 풀려 있는 상태다. 노란색 배경에 지저분한 검정가죽구두 한 켤레가 화면 한가운데 놓여 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그림은 사람의 마음을 강하게 끌어당긴다. 헌 구두를 표현했을 뿐인데도, 신발 주인이 겪었을 삶의 쓸쓸함과 고단함의 무게에 가슴이 아려온다. 고흐는 굽이 닳고 가죽이 헤진 헌 구두를 벼룩시장에서 구입해서 몇 번이나 그렸다고 전해진다. 화가는 왜 낡은 구두를 그림으로 그려야만 했을까? 비록 구두가 생명체는 아니지만, 그 어떤 사람보다 인간에 대해, 삶의 고달픔에 대해 더 많은 얘기를 해준다고 생각했었을까? 그림 속 구두는 감상자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고흐가 그린 신발의 주인은 과연 누구일까? 신발주인은 구두를 벗어놓고 어디로 갔을까? 혹 삶의 길을 헤매느라 지쳐서 신발을 벗고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을까? 지저분하지만 신성하게 보이는 고흐의 구두는 세계적인 철학자와 미술사학자들의 관심을 끌었고, 숱한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고흐는 평소 화가인 자신을 대지에 씨를 뿌리고, 키우고, 수확하는 농부에 비유하곤 했다. 그렇다면 이런 추측이 가능해진다. 고흐는 예술작업이 얼마나 힘든 노동인지, 예술가의 길이 얼마나 험난한지 알리기 위해 혹은 예술가의 식량이 그림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흙 묻은 헌 구두를 그림에 표현했던 것은 아닐까? 마치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화가는 이런 글을 남기지 않았던가. - 나는 삶의 길에서 부닥치는 고난과 역경은 우리를 힘들게 하지만, 그런 한편 도움이 된다는 믿음을 갖고 살아갑니다. 오늘 우리를 병들게 하고 절망에 빠뜨리는 불행도 병에서 회복되는 내일이면 삶을 새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에너지가 되니까요.-
인간은 마음속에 새로운 세상을 답사하고 싶은 갈망을 품고 산다. 그리고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해 땅과 바다, 하늘, 심지어 마음에도 길을 낸다. 사람들은 꿈을 배낭인양 등에 짊어지고 인생의 길을 걸어간다. 가끔은 길을 잃고 헤매는 수많은 발자국이 땅에 흠집을 내고, 그 상처의 흉터가 모여 길을 만들기도 한다. 만일 그대들이 인생이란 무엇인지, 진실되고 참다운 인생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면, 고흐의 구두를 신고 이영희의 그림 속으로 들어가 흙길을 걸어보라. 그 길을 밟으면서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나왔던 대사를 음미해보라. 교사 존 키팅이 학생들에게 로버트 프루스트의 시 〈가지 않은 길〉을 낭송하면서 인생의 길을 걷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듯이 말이다.
추억, 오늘은 내일의 추억이다독일의 소설가 헤르만 헤세는 현대인들이 느끼는 불안과 그리움의 정체는 고향이라고 노래했다. - 당신이 삶에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당신의 길이 어머니와 고향에서 자꾸만 멀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루하루 당신이 떼어놓은 발걸음은 실은 당신을 어머니에게로 데려가는 것이다. 고향은 다른 어디에도 없다. 바로 당신 마음속에 있기에.-
여기, 어릴 적 그리운 시절로 되돌아가게 하는 그림이 있다. 19세기 프랑스 최고의 풍경화가이며, 근대 풍경화의 아버지로 불리는 카미유 코로(Camille Corot)의 〈모르트풍텐의 추억〉이다. 그림의 배경은 진주빛 물안개가 자욱한 봄날 아침의 숲 속. 화면 오른편에 커다란 나무는 무성한 이파리를 펼치면서 병풍처럼 허공을 감싸고, 화면 왼편에는 물오르는 어린나무가 싱그러운 아침 공기를 가르면서 하늘로 가지를 뻗치고 있다. 작은 나무에서 피어나는 고운 꽃송이가 동심을 유혹한 것일까? 한 아이가 두 팔을 벌리면서 언니에게 꽃을 따달라고 조르고, 또 다른 아이는 발치에 핀 꽃에 넋을 빼앗긴 채 철퍼덕 무릎을 꿇었다. 까치발을 하고 꽃을 따는 봄 처녀와 꽃을 따고 싶어 조바심을 내는 아이들의 천진스런 모습은 하루하루가 축복이며 희망이던 어린 시절의 그리운 초상이기도 하다. 이곳은 모르트풍텐이다. 모르트풍텐은 18세기 프랑스 상리스 근처에 조성된 광대한 공원을 가리킨다.
모든 추억은 아름다워라 코로에게 추억이란 이 그림에서처럼 부드럽고 따뜻하며 편안한 것이었다. 그는 추억의 느낌을 표현하기 위해 화면 한쪽은 닫고 다른 한쪽은 열어두는 독특한 구도를 선택했다. 화면 오른쪽에는 잎이 무성한 나뭇가지가 사람들의 시선을 자연스럽게 차단하고, 화면 왼쪽은 하늘과 물을 향해 아득하게 열려 있다. 삶에 지친 사람들의 눈과 마음을 삼림욕시켜주는 이 그림은 코로가 예순다섯 살 때 어릴 적 추억을 회상하면서 그린 것이다. 인생의 종착역에 선 노(老)화가는 늘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고 싶어했다. 코로의 그림은 사람들에게 자신이 무엇을 상실했는지, 무엇을 그리워하는지, 추억의 의미가 무엇인지 깨닫게 해준다. 추억이란 아침이며 숲이며 나무이며 풀이며 호수이며 꽃이며 처녀이며 아이며 물안개라고 얘기해준다. 코로는 그리움의 정체를 본능적으로 간파하고 어릴 적 추억을 그림에 담아 사람들에게 선물했다.
추억의 커튼을 열다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Ren Magritte)에게 추억이란 고통의 치유다. 여자 석고 두상의 오른쪽 눈 주변에 붉은 피가 묻어 있다. 조각상은 마치 사람인양 두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겨 있다. 피 흘리는 조각상, 상념에 잠긴 조각상은 현실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낯선 모습이다. 그러나 이런 생경함이 감상자의 호기심과 감성을 자극한다. 수수께끼 같은 그림의 의미를 찾기 위해 제목을 살펴보았다. 그림의 제목은 〈기억〉이다. 상상력이 발동하면서 해답의 실마리가 조금씩 풀린다. 여자는 지금 힘들고 고통스런 상황에 처했다. 그녀는 상처뿐인 현실을 잊기 위해 두 눈을 감는다. 여자가 시간의 커튼을 열어젖히고 기억 속에 아름답고 행복했던 시절을 떠올린다. 추억 속에서 하얀 구름이 떠다니는 푸른 하늘과 드넓은 바다가 나타난다. 시간의 렌즈를 통해 바라본 아름다운 추억이 여자를 위로한다. 여자에게 추억은 고통을 치유하고 상처를 아물게 하는 명약이다. 그리운 추억이 있기에 그녀는 불행한 오늘을 견딜 수 있는 것이다. 추억이란 아름다운 시절을 채굴하는 일이다. 추억 속의 보물을 캐기 위해서는 먼저 소중한 기억들을 갈무리해둘 저장고가 필요하다. 우리가 고통을 겪을 때, 두려울 때, 슬플 때, 위안을 얻고 싶을 때, 비축해둔 추억을 하나씩 꺼내 쓸 수 있도록 말이다. 오늘은 내일의 추억이 된다. 지금 이 순간을 영원처럼 살아간다면 먼 훗날 풍요로운 추억을 추수할 수 있으리라.
샤갈의 무중력 속을 날다눈물, 메마른 감정의 대지를 촉촉하게 적시는 비
세계적인 사상가이자 철학자인 쇼펜하우어는 "세상은 슬픔으로 가득 찬 감옥"이라고 말했다. 그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인간은 살아가면서 종종 눈물을 흘리곤 한다. 슬퍼서, 허탈해서, 후회해서, 불행해서, 고통스러워, 억울해서, 분해서 운다. 그런 한편 행복할 때도, 감동에 젖을 때도, 기쁠 때도 역시 눈물을 흘린다. 눈물은 가장 은밀하면서도 강렬한 감정표현이다. 벨기에 출신의 세계적인 연출가이며 안무가인 얀 파브르가 "눈물에는 영혼이 담겨 있다"라고 말한 것도 눈물이 한 인간의 내면의 감정을 가장 솔직하게 드러내는 언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눈물은 경이롭고 불가해한 액체이기도 하다.
고통을 예술의 도구로 삼다 현대미술의 거장으로 불리는 파블로 피카소(Pablo Ruiz Picasso)는 통곡하는 여자를 그림에 묘사했다. 피카소는 눈물을 흘리는 여자의 모습을 그의 특허인 입체주의 방식으로 표현했다. 여자의 눈동자는 정면인데, 입술과 이는 측면이다. 피카소는 서로 다른 두 지점에서 바라본 여자의 모습을 한 화면에 동시에 표현했다. 여자의 얼굴 형태는 일그러지고 해체된 반면, 여자의 패션은 세련미가 넘치고 화려하기 그지없다. 여자는 꽃으로 장식한 붉은색 모자를 썼고, 머리카락도 단정하게 뒤로 빗어 넘겼다. 여자가 화려하게 치장한 모습에서 누군가에게 잘 보이려고 했고, 행복한 순간을 기대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누군가, 그리고 어떤 불행한 사건이 여자의 행복한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 산산조각 냈다. 여자가 잔뜩 멋을 부렸기에, 빨강, 초록, 노랑, 파랑 등 원색으로 배경을 대담하게 색칠했기에, 그녀의 슬픔은 더욱 강렬하게 느껴진다.
그림 속 모델은 피카소의 연인 도라 마르이다. 쉰다섯 살 피카소와 스물아홉 살 사진작가의 연애에 불이 붙으면서 도라는 피카소의 다섯 번째 연인이 되었다. 그러나 사랑이 깊으면 고통 또한 깊은 법. 도라는 피카소를 사랑한 여자들에게 숙명과도 같은 형벌을 받게 된다. 도라의 강한 개성과 지성미는 피카소의 욕망을 자극했고, 그는 그녀에게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들었다. 그러나 도라에 대한 피카소의 사랑이란 다른 여자를 배척하는 단 하나의 사랑이 아닌 다른 여자와 공존하는 사랑을 의미했다. 이런 소모적인 사각관계에 자존심이 극도로 상한 도라는 자신의 비참한 처지를 한탄하면서 눈물로 하루를 보내곤 했다. 그녀가 고통으로 눈물을 흘리면 피카소는 잔인하게도 도라의 우는 모습을 스케치했다. 그녀는 울고 또 울었다. 그녀가 얼마나 자주 울었으면 피카소가 "나는 울지 않은 도라의 모습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라고 농담처럼 말할 정도였을까? 비통한 심정에 눈물을 흘리면서도 도라는 피카소 곁을 떠나지 못했다. 그녀는 진심으로 피카소의 남성적 매력과 천재성을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