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생목록
재생목록이 비어 있습니다.
-
-
0:00 0:00
화면 너비 (여백)
좁게
보통
넓게
최대
배경 테마
글꼴
바탕/명조
돋움/고딕
글자 크기
작게
100%
크게
줄 간격
좁게
보통
넓게

길 위에서 띄운 희망편지

김형오 지음 | 생각의나무
길 위에서 띄운 희망편지

김형오 지음

생각의나무 / 2009년 3월 / 383쪽 / 13,000원



1장 자연과의 만남



이유미 박사님에게 첫번째 편지_ 국립 수목원(경기 포천): 나무와 풀꽃에게 말을 거는 40대 소녀가 돌보는 숲
크리스토퍼 버드와 피터 톰킨스가 함께 지은 『식물의 신비 생활』이란 책에는 퍽 흥미로운 대목이 나옵니다. 식물도 우리 인간처럼 가슴과 머리를 가지고 있어 나름대로 느끼고 생각하고 기뻐하고 슬퍼한다는…. 예쁘다는 칭찬을 들은 난초는 더욱 아름답게 꽃 피고, 밉다는 핀잔을 들은 장미는 자학하며 시들어버린다는 것을 그들은 실험을 통해 입증해 보였습니다. 그뿐인가요. 풀과 나무들도 음악을 즐긴다고 그 책에는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린뮤직 시스템'을 도입한 과수원과 축산 농가가 국내에도 있다는 것을 언젠가 신문에서 읽은 기억이 납니다. 음악을 틀어줌으로써 동식물의 성장 호르몬 분비를 촉진하는 기법인데 실제로 그 시스템을 활용한 과수원의 과일들, 축산농가의 소나 닭들은 품질이 뛰어나 값을 더 받는다더군요.

안녕하십니까? 이유미 박사님. 제가 보고 온 수목원의 풀과 나무들도 잘 지내고 있겠지요? 이 박사님을 생각하면 광릉 숲 어느 한 편에서 나무나 풀꽃들을 상대로 다정스럽게 말을 건네는 소녀의 모습이 떠오르곤 합니다. 그 소녀는 나이가 마흔 살 언저리입니다. 출장이나 휴가로 며칠 동안 수목원을 비우게 되면 거기 두고 온 풀과 나무들이 보고 싶고 그리워진다고 했지요? 이 박사님을 비롯한 수목원 식구들의 그런 정성어린 마음과 보살핌이 나무들을 더 싱싱하게 자라게 하고 꽃들을 한결 생기발랄하게 만드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세 시간 남짓 광릉 숲길을 걸으며 우리는 참 많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날의 산책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나무들의 푸른 숨결과 꽃들의 향기로운 체취가 온몸으로 스며드는 것 같습니다. 발밑으로 바스락바스락 밟히던 낙엽의 느낌, 지저귀던 새들 소리, 길가를 배회하던 이름 모를 새의 깃털, 어깨 위로 툭 떨어져 내리던 도토리의 기억도 방금 전 일인 듯 생생합니다.

그날 이 박사님 일행과 함께 광릉 숲을 걷다가 잠시 멈추고 다시 걷기를 거듭하면서, 덕분에 저는 그전까지는 몰랐던 식물들의 신비로운 속성과 생태에 관해 새롭게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알면 알수록 참 매력이 넘치는 친구들이더군요.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 깊었던 건 식물이 동물보다 한 수 위라는 놀라운 설명이었습니다. 생물 스스로 생각하고 조절하고 행동하는 것은 모든 것에 관여한다는 DNA도 우리들 예상과는 달리 동물보다 식물이 더 많이 갖고 있다지요? 햇빛과 물과 산소로 자양분을 만들어 스스로 살아가게 하는 유전자, 한자리에 붙박인 채 환경변화에 적응하며 자손을 퍼뜨려야 하는 복잡한 메커니즘과 관련된 유전자, 동물에게 당하지 않고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유전자 등등.

문 · 강 · 목 · 과 · 속 · 종, 하면서 뜻도 모르는 채 생물시간에 열심히 외웠던 식물분류법의 기본이 생식기인 꽃잎이라는 것도 신비롭더군요. 꽃잎으로 4촌간인지 8촌간인지를 구분한다지요? 제가 가구를 만드는 장미나무와 덩굴식물인 장미꽃이 같은 과냐고 물었더니 박사님은 그렇다고 했습니다. 장미 품종만도 2만 5천 종을 헤아리고, 장미꽃과에 속한 식물만도 4천 종이 넘는다면서요? 강낭콩과 완두콩은 물론 아카시아나무도 콩과 식물이고 또 장미목에 속한다는 사실 마냥 신기했습니다. 밭에서는 밭에 적응하기 좋게 자라고, 산에서는 나무처럼 자라고, 바닷가에는 해풍에 견디기 쉽게 자라고, 비탈진 곳에서는 덩굴처럼 자라는 식물의 놀라운 적응력…. 그래서 그들은 환경에 따라 풀도 되고 덩굴도 되고 나무로도 변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생식기만은 변할 수 없고 변해서도 안 되는 이유는 바로 모든 생명체가 그러하듯이 암수가 결합하려면 같은 종끼리 서로 알아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박사님 일행과 저는 생식 본연의 문제를 신비주의적으로 담론하며 광릉 숲을 걸었지요.

대추나무 시집보내는 이야기도 퍽 흥미로웠습니다. 어릴 적 고향사람들은 정원 대보름이나 5월 단오날이면 대추나무를 시집보냈지요. Y자로 갈라진 대추나무 줄기 틈새에 길쭉한 돌을 끼워넣는 행사였는데, 어른들 이야기로는 그래야 자식들인 대추열매가 굵고 풍성하게 달린다나요? 하지만 왜 그런지 이유는 모르고 있었는데, 대추나무 줄기 틈새에 돌을 끼우는 것은 양분의 이동을 통제하기 위해서라는 이 박사님의 설명을 듣고는 선조들의 지혜에 무릎을 탁 쳤습니다. 장가를 간 돌은 가지 사이에 박힌 채 잎에서 만들어진 당분이 아래로 내려가는 것을 막는 한편 그와 동시에 열매보다는 잎과 줄기의 생장에 더 크게 기여하는 질소가 뿌리에서 생성되어 위로 올라가는 걸 줄여 주는 역할을 한다는…. 놀랍게도 대추나무 시집보내기는 그런 과학적 근거를 지닌 전래풍속이었던 겁니다.

제가 사는 공관에도 유실수가 몇 그루 자라고 있습니다. 감나무와 모과나무에는 제법 열매가 많이 달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흐뭇했지요. 그런데 대추나무와 석류나무는 웬일인지 열매가 열리는 둥 마는 둥 하다 말더군요. 아마 내년에는 꼭 시집을 보내 달라고 자기 딴에는 짐짓 투정을 부리고 있었나 봅니다. 남쪽지방 잣나무엔 잣이 열리지 않고, 남산 위의 소나무엔 솔방울이 다닥다닥 달리는 이유도 되새겨볼 만한 교훈을 안겨주었습니다. 남쪽의 순하고 따뜻한 날씨는 잣나무의 번식본능을 약화시켜 열매인 잣 만들기를 소홀히 하게 하는 반면, 거꾸로 오염이 심한 남산은 소나무들에게 생존의 위협을 느끼게 해 죽기 전에 종족을 많이 퍼뜨리려는 노력을 하게 한다는 설명이었지요. 우리 인간도 그런 면에서는 식물과 마찬가지입니다. 시련과 고통 속에서 생활력이 강해지고 자식을 지키려는 본능이 절실해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풀이나 나무들만도 못한 일부 인간들…,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이유미 박사님에게 두 번째 편지_ 국립 수목원(경기 포천): 질경이, 그 모진 생명력이 경이롭습니다식물들은 참 절실한 생존본능을 가졌나 봅니다. 야생화 전문 사진작가들은 가끔 근접촬영으로 절벽 바위틈에 핀 꽃들을 찍는다는데, 이상하게도 평지에 핀 여느 꽃들보다 한결 향기가 짙고 예쁘다더군요. 그렇게 아름답게 피어 짙은 향기를 발산해야 멀리 있는 벌 나비들이 날아올 테니까요. 정말 간절한 몸짓 아닙니까?

질경이의 모진 생명력도 참으로 눈물겨웠습니다. 박사님이 들려준 이야기를 요점만 간추려 지면에 옮겨볼까요? "질경이는 주로 길섶이나 공터 주변에서 쉽게 만나는 여러해살이 풀이에요. 흔히들 잡초라고 하죠. 그런데 질경이는 왜 안락한 숲을 마다하고 길가에 나앉아 자라는 걸까요? 그건 질경이 나름대로 선택과 적응을 해온 결과랍니다. 숲은 숱한 경쟁자들과 볕을 가리는 큰 나무들로 가득 차 있어 작고 연약한 질경이로서는 그들과 맞서 싸우기에 불리한 환경이므로 과감히 숲을 탈출해 길로 나온 거죠. 그러고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려고 무진 애를 씁니다. 예컨대 질기면서도 유연해 오고가는 자동차 바퀴와 행인들 발길에 쉽사리 꺾이지 않는 질경이의 잎과 줄기 역시 그런 피나는 노력의 산물이죠. 열매는 또 어떻고요. 하나하나가 마치 캡슐처럼 되어 있어 누군가가 밟으면 팍 하고 뚜껑이 열리면서 수많은 씨앗이 쏟아져 나옵니다. 그 씨앗들은 타이어나 신발 바닥에 붙어 멀리멀리 퍼져 나가고요. 그야말로 위기를 기회로 삼아 강인하고 지혜롭게 살아가는 식물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죠.

박사님으로부터 그 말을 듣는 순간 질경이가 새롭게 느껴지더군요. 이름부터가 남다른 풀. 중국에서는 우마차길 앞에 깔려 있다 해서 '차전자(車前子)'라고 부른다는데, 우리나라에서도 얼마나 끈질긴 생명체였으면 질경이라고 했겠습니까? 요즘엔 이 풀이 이런저런 병에 약효가 있다고 소문이 나 찾는 이들이 부쩍 많아졌다지요? 관절염이나 신경통에 잘 듣고, 방광이나 신장 쪽 기능강화에 좋을뿐더러, 변비약이나 다이어트 식품으로도 개발되고 있다니, 그 다양한 쓰임새가 그저 경이로울 따름입니다. 질경이를 포함한 모든 식물들은 그와 같이 우리 인간에게 없어서는 안 될 고마운 존재들이지요.

지금쯤은 계수나무들이 노란 옷을 말끔히 바람에 날려보냈는지요? 우리가 어릴 때 즐겨 부르던 동요 <반달>에 토끼와 함께 등장하는 나무. 자태도 미려했지만 샛노랗게 물든 이파리들에게 맡아지던 그윽하고 달콤한 향내는 두고두고 잊혀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잎모양이 심장, 그러니까 하트를 닮았지요? 그 하트모양 잎을 코끝에 대고 향기에 취해 있는 저에게 박사님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의장님, 혹시 라일락 향기도 좋아하세요? 라일락은 일명 '서양 수수꽃다리'라고 하는데, 잎이 계수나무처럼 하트모양이죠. 꽃향기는 좋지만 나뭇잎은 씹어 보면 굉장히 씁쓸해요." 그 말에 제가 "사랑의 향기는 달콤하지만 사랑의 맛은 쓰다는 의미인가요?"라고 화답해 다 함께 한바탕 웃은 기억이 납니다.

날씬한 허리를 꼿꼿이 편 채 무리지어 서 있던 자작나무들의 수려한 자태도 자꾸만 눈에 밟힙니다. 종이가 귀하던 시절에는 마른 자작나무 껍질에 글씨도 쓰고 그림도 그렸었지요. 거기에다가 러브레터를 써 보내면 사랑이 변치 않는다는 이야기도 들은 기억이 납니다. 잠시 멈추어 서서, 뜯어낸 벽지 같은 자작나무 껍질에 펜으로 글씨를 써 보았습니다. 얼마나 매끄럽게 잘 써지던지요. 라이터 불을 갖다 대자 삽시간에 불타올라 하마터면 손을 데일 뻔했답니다. 자작자작, 소리 내며 타오른대서 자작나무인가? 그런 농담을 하면서 우리는 또 한 차례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이유미 박사는 아마도 가을이면 세상에서 가장 많은 편지를 받는 사람이 아닐까요? 하늘하늘 지는 꽃잎, 너울너울 날리는 나뭇잎들은 모두 수목원의 풀과 나무들의 바람 편에 박사님한테 띄워 보내는 엽서와 편지들에 다름 아닐 테니까요. 이렇게 써 놓고 보니 40대 소녀 앞에서 갑자기 60대 소년이 된 기분입니다. 굳이 변명하자면, 이런 식의 감성도 수목원의 가을이 제게 남긴 선물 아닐까요? 공관 정원에 놀러 온 바람 편에 이 편지를 박사님에게 띄웁니다. 원장님을 비롯한 수목원의 다른 식구들, 풀과 나무들에게도 안부 전해주기 바랍니다.

2장 문화와의 만남



전승창, 이정진님에게_ 삼성미술관 리움(서울시 용산구): 그림이 그리운 날, 다시 찾고 싶은 리움
드라마 <바람의 화원>에서 "그린다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 김홍도에게 신윤복은 이런 명답을 내놓습니다. "그린다는 것은 그리움을 말하는 것이 아닐는지요. 그리움이 그림이 되기도 하고, 혹은 그림이 그리움을 낳기도 하지 않는지요. 그리운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이 자꾸 떠올라 그리게 되니 그리움은 그림이 되고, 또한 그 사람 그림을 보고 있으면 잊고 지내다가도 그 사람이 다시 그리워지니 이는 그림이 그리움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림에 대한 신윤복의 철학이 돋보이는 장면입니다.

안녕하세요? 전승창 그리고 이정진 님. 제가 리움에 갔던 날, 가이드 역할을 해준 두 분을 비롯해 그날 함께했던 다른 분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전합니다. 의장 공관의 인테리어까지 맡아준 장경숙 팀장님에게도 특별히 감사드립니다.

리움의 영문 표기는 Leeum. 그 앞에 정관사 The를 붙이면 'The Reeum'이 됩니다. 우리말로 옮기면 그 리움, 붙여 쓰면 '그리움'이 되나요? 참 멋진 이름 같습니다. 물론 리움(Leeum)이 설립자의 성씨 (Lee)와 미술관을 의미하는 단어(Museum)의 어미(um)를 조합해 만든 합성어란 사실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떠나서 리움은 묘하게도 그리움이란 낱말을 떠올리게 합니다.

2004년 10월, 한강이 바라보이는 서울 남산 자락에 문을 연 삼성미술관 리움은 고미술과 현대미술, 한국미술과 세계미술, 그리고 미래를 향한 실험예술까지 여러 장르가 함께 어우러져 숨을 쉬는 열린 문화예술공간입니다. 미술관을 구성하는 세 동의 건축물은 세계적인 건축가 마리오 보타, 장 누베리, 렘 쿨하스가 각각 설계를 맡았습니다. 하나의 대지 안에 세 작가의 개성이 조화롭게 드러나는, 그 자체가 예술작품인 미술관입니다. "도시와 건축과 자연이 어우러진 공간에서 예술과 인간과 문화가 서로 만나 대화하며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넘나드는 삼성미술관 Leeum"이라는 설명문구가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미학적 평가는 시대에 따라, 보는 이의 관점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집니다. 미와 추의 경계선도 그와 맞물려 매우 유동적으로 변하고요. 왜, 미인의 척도도 시대조류와 가치기준에 따라 달라진다지 않습니까? 미술작품이나 건축물은 더욱 그럴 수밖에 없지요. 파리의 상징물, 랜드마크로 잘 알려진 에펠탑을 예로 들어볼까요? 프랑스대혁명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에펠탑은 당시 정부가 건축계획을 발표했을 때 기라성 같은 문화계 인사들의 심한 반대에 부딪쳤습니다. 높다랗게 치솟은 철탑이 파리의 미관을 해치는 '나사못' 같은 흉물로 남을 거라는 게 그들의 우려였습니다. 그들은 에펠탑을 가리켜 비운의 가로등, 망루의 해골, 끔찍스런 새장, 속이 빈 촛대 등으로 격하하는 발언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춘희』의 작가 알렉산드르 뒤마, 성가곡 <아베마리아>의 작곡가 구노, 『여자의 일생』을 쓴 모파상 등이 그 대표적인 인물들이었지요. 하지만 그 뒤 에펠탑은 어떻게 되었나요? 후일담이지만, 탑을 세우는 일에 가장 앞장서 반대했던 소설가 모파상은 정작 에펠탑이 완공되자 그 탑 1층에 있던 레스토랑에서 즐겨 식사를 했다고 합니다. 그는 변명 삼아 이렇게 말했다나요? "난들 어쩌겠나. 파리에서 에펠탑이 안 보이는 유일한 곳은 여기뿐인 걸…."

20년 전쯤, 역시 프랑스에서 있었던 루브르 박물관의 유리 피라미드를 둘러싼 논란도 에펠탑의 사례와 비슷합니다. 루브르 궁 뜰 안에 20억 프랑이라는 거금을 들여 유리로 된 피라미드를 설치하는 프로젝트였는데, 처음에는 딴죽 거는 이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고색창연한 중세건물에 차갑고 투명한 유리 피라미드가 과연 어울리겠느냐고 의문을 제기한 겁니다. 그러나 완공 이후에는 어땠나요? 순수 기하학적 측면에서 접근한 중세와 현대의 절묘한 조화, 음과 양의 환상적인 하모니라는 찬사를 받았습니다. 아무튼 중국계 미국 건축가 아이오밍 페이가 디자인한 모던 감각의 유리 피라미드 입구는 완공과 함께 모든 논란을 깨끗이 잠재우고 지금은 루브르의 과거와 현재를 잇는 상징적 연결고리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사족이 길었나요? 제가 두 가지 에피소드를 예로 든 건 현대미술 감상자로서의 제 태도를 반성하기 위한 뜻도 없지 않습니다. 솔직히 저도 리움에서 만난 일부 현대미술 작품들 앞에서는 속으로 '저게 세계적인 걸작이란 말이야?' 하는 마음이었거든요. 그러나 또한 몇몇 작품들은 신선한 충격과 감동을 안겨주었습니다.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 <나의 파우스트: 자서전>도 그중 하나였습니다. 특히 설치된 작품 왼쪽에 걸어 둔, 작가가 생전에 실제로 입었던 작업복은 묘한 느낌을 주더군요. 백남준 선생이 작업 도중 잠시 외투를 벗어 걸고 어디선가 쉬면서, 자신의 작품을 보는 저를 지켜보고 있을 것 같은, 그런 느낌….

뉴욕을 무대로 활동 중인 작가 강익중의 <영어를 배우자>도 감명 깊었습니다. 영어단어가 새겨진 목판으로 가득 찬 작은 공간에서 영어와 우리말이 섞인 오디오 사운드가 흘러나오는…. 그 작품은 작가가 당뇨 합병증으로 시력을 잃은 아버지를 위해 제작했다는데, 그 말을 듣고 보니 작품이 더 큰 울림을 갖고 다가왔습니다. 그런가 하면 데미안 허스트의 설치미술 작품 <죽음의 춤>은 그야말로 섬뜩한 충격이었습니다. 스테인리스 스틸과 유리로 된 캐비닛 안에 진열해 놓은 석고와 금속, 합성수지로 만든 2만3천여 개의 알약 모형들…. 삶에 대한 인간의 무서운 집착과 피할 수 없는 죽음의 그림자를 이야기하려고 한 걸까요? 큐레이터들이 처음 이 작품을 들여와 리움에 걸 때, 인덱스를 보면서 그 수많은 알약들을 원래 놓여 있던 자리에 재배치하느라 일주일 동안 애를 먹었다는 에피소드가 재미있었습니다.

해프닝도 있었습니다. 한 작품 앞에서 제가 "이건 꼭 사진 같다"고 했더니, "사진입니다"라는 대답이 돌아온…. 저는 으레 그림이려니 생각하고 본 작품이 사실은 사진이었던 겁니다. 사진작가 배병우의 '소나무 시리즈' 중 경주 남산을 배경으로 찍은 작품이었지요. 그러니 얼마나 우스운 일입니까? 사진을 보면서는 '사진 같다'고 느끼니 말입니다. 사진 같은 그림과, 그림 같은 사진. 그것도 현대미술의 한 특징일까요?

전문 열람 제한

미가입 상태이므로 요약본의 일부만 제공됩니다.
더 깊이 있는 내일의 통찰력과 지식 에너지를
프리미엄 무제한 이용권으로 충전해 보세요!

멤버십 가입 / 결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