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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노 다케시의 생각 노트

기타노 다케시 지음 | 북스코프
기타노 다케시의 생각 노트

기타노 다케시 지음

북스코프 / 2009년 5월 / 224쪽 / 12,000원



생사문제 生死_ 살아가는 것과 죽는 것의 의미



죽는 게 무서워서 견딜 수 없었던 시절


고등학생 때부터 대학생 때까지는 매일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죽는 것을 겁내며 살았다. 죽음이라는 것을 맨 처음 현실로 경험한 것은 중학생 때였다. 야구부 동료가 덤프트럭에 치여 죽은 것이다. 친구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내 마음에 떠오른 것은 "아, 그 녀석 죽었구나"하는 정도의 감상뿐, 사람이 죽었는데도 세상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단지 그 녀석만 세상에서 사라진 채 어제와 같은 오늘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마치 지우개로 쓱 지워버린 칠판처럼 그림자도 형태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단지 그뿐이었다. 사람은 죽으면 그저 없어질 뿐이다. 천국도 지옥도 없다. 게다가 죽은 사람은 살아 있는 사람의 기억에서 너무나 간단히 지워진다. 아아, 죽었구나, 그걸로 끝인가? 그래서 죽는 것이 무서워졌다. 무서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나라고 죽지 않을 수 있을까? 지금 내가 죽으면 분명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기타노 다케시라는 인간이 살아있구나' 하는 사실은, 땅에 떨어지는 비 한 방울이 곧이어 떨어지는 빗방울에 간단히 지워져버리는 것처럼 이내 잊히게 마련이다. 잊히는 것이 무서운 게 아니라, 그렇게 쉽게 잊힐 만큼 내 인생이 텅 비었다는 것이 참을 수 없이 무서웠다. 그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 내가 선택한 길은 일종의 자살이었다. 그래서 그 시절에는 언제나 땅만 보며 걸었던 것 같다. 언제나 땅을 보며 죽음을 두려워했다. 문학이니 연극이니 하는 것들을 동경했지만 내가 그런 걸 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나는 대체 뭘 해야 좋을까?' '답도 찾지 못한 채 죽어버리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만 했다.

지금의 신주쿠 알타(대형 쇼핑몰) 자리에는 오늘날 슈퍼마켓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식료품점 니코가 있었다. 신주쿠 역 동쪽 출구에서 나와 니코 앞의 횡단보도를 건널 때도, 나는 분명 언제나처럼 등을 구부리고 땅만 내려다보며 걸었을 것이다. 다만 그날은 평소와는 다른 방향으로 생각이 달려갔다. 문득 엉뚱한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 대학을 그만두자.' 어째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번개가 치듯이 머릿속에서 번쩍하고 떠올랐다. 투신자살이라도 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기분이 붕 뜨더니 마치 뱀의 시선에 한순간 마비된 개구리처럼 그 감미로운 '자살'아이디어에 홀리고 말았다. 그것은 그때까지 나를 키워주신 어머니를 버리는 일이었다. 어머니는 내가 죽었다고 해도 그렇게 놀라진 않으실 것이다. 나로서도 내가 죽었다고 생각하지 않고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말장난이 아니라, 내게는 말 그대로 자살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당시로서는 그것이 유일하고 확실한 답이었다. 나는 그렇게 대학을 그만두기로 마음먹었다. 그날, 횡단보도를 건너면서 올려다본 신주쿠의 하늘은 그 전에도 그 뒤로도 본 적이 없을 만큼 파랗게 개어 있었다.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죽음에 대한 공포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 무렵에 그렇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더라면, 그런 결단을 내릴 수 없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언제까지나 둥지를 떠나지 못하고 어머니가 깔아놓은 레일 위를 걷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사춘기 소년에게 닥친 죽음의 공포는 독립을 위한 본능의 스위치였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내 경우는 그랬다.

빛나는 별은 뜨거워서 견딜 수 없다

아사쿠사에 가려고 생각한 것은 연극을 동경했기 때문이다. 사실 연극을 동경하면서도 그때까지 나는 연극과 아무관계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코미디라면 어린 시절부터 일가견이 있었으니까' 하는 생각으로, 순전히 제멋대로 비약적인 사고에서 내린 결정이었다. 게다가 자살이나 다름없는 결정을 내리는 마당에 아사쿠사의 공연장이 배경으로 아주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의 비호에서 벗어나 길에서 쓰러져 죽는 한이 있어도 아사쿠사의 연예인이 되기만 한다면 멋있을 것 같았다. 학생 시절에 느꼈던 그 공포감, 살아 있다는 쾌감도 맛보지 못한 채 이대로 죽으면 어쩌나 하는 공포감은 극복한 것일까? 이 시점에 이런 반문을 던지는 것은 뚜렷하게 확신이 서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아무리 대단한 일을 해도 살아 있다는 쾌감은 맛볼 수 없다고 말하고 싶은 건 아니다. 그 반대다. 그 문제에 관해서는 어느 쪽을 택했다 해도 결과가 같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즉 연예인을 목표로 하지 않고 평범하게 살다가 결혼하고 자식을 낳고, 담담하게 살다 담담하게 죽어가는 쪽이 조금 더 편하지 않았을까 하고. 왜인가 하면, 역시 지금의 인생은 상당히 고통스러운 면이 있기 때문이다. 연예인이면서 영화감독이고, 기타노 다케시이기도 한 지금의 인생은 정말로 지친다.

물체는 심하게 흔들리면 그만큼 마찰이 커진다. 인간도 심하게 움직이면 열이 난다. 옆에서 보면 분명 빛나고 있는 인간이 부러워 보일 것이다. 하지만 빛나고 있는 본인은 뜨거워서 견딜 수 없다. 이것은 정말로 고통스러운 일이다. 멋있는 척하는 게 아니다. 그간의 경험들에서 실감한 것이다. 그렇다고 죽는 소리를 하는 건 아니지만, '이렇게까지 하지 않았어도 인생의 쾌감을 얻을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든다. 성실하게 일하고, 가족을 지키며 자식을 키우는 삶.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인생을 잘 살았다는 만족감을 얻을 수 있다. 유명해지건 좋은 영화를 만들건 그 만족감에는 큰 차이가 없다는 걸 이 나이가 되어보니 알 것 같다. 그렇긴 하지만, 너는 어느 쪽 인생을 선택하겠느냐고 스무 살의 나에게 물었다면, 괴롭든 어떻든 뜨거운 인생을 선택하겠다고 대답했을 것 같다. 인생을 한 번 더 다시 산다 해도, 역시 나는 몇억 도의 고온으로 활활 타오르는 삶을 선택할 것이다.

알아차리는 순간 이미 늦었다는 것은 다들 알고 있지 않은가

지금까지 개인의 죽음에 대해 썼지만, 종(種)으로서 인류의 죽음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어느 나라에서는 폭염으로 수백 명이 죽었다거나, 관측 사상 유례없는 허리케인이 발생했다거나 하는 등 옛날 싸구려 공포영화의 한 장면 같은 뉴스를 요즘은 거의 계절마다 접하게 된다. 요즘에 들어서야 세계적으로 지구 온난화에 대해 떠들고 있지만, 사실 이 지구에는 훨씬 오래전부터 여러 가지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을 것이다. 소수의 기상학자밖에 모르는 미묘한 변화들이 쌓이고 쌓인 끝에, 이제는 누구라도 알 수 있을 만큼 이상한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손을 쓰기에는 이미 늦은 게 아닐까? 무엇이든 그렇지만,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는 벌써 늦은 법이다. 물론 미래라는 것은 대개 예상과 다르게 펼쳐지기 마련이다. 기상이변으로 지구가 어떻게 되기 전에 뜻밖에 엄청나게 큰 운석이 떨어질 수도 있다. 어느 날 갑자기 미지의 소행성이 발견되어 "사흘 뒤에 지구와 충돌합니다!"라는 긴급 뉴스가 발표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요리사 구마 씨가 내게 물었다. "무섭네요. 다케시 씨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나는 그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담담하게 남은 사흘을 살아가겠지요. 뭐, 술만 있으면 돼요. 어쨌든 인류 사상 최대의 구경거리잖아요. 지붕 같은 데 올라가서 술이라도 마시면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자, 오너라!' 하고 말하지 않을까요."

교육 문제 敎育_ 노력하면 이루어지는 꿈도 있다



인간은 평등하지 않다? 노력해도 안되는 놈은 안 된다

나는 아버지와 제대로 대화를 한 기억이 거의 없다. 아버지는 전형적인 옛날 변두리 마을의 페인트공이셨다. 매일 아침 일어나 꼬박꼬박 일터로 나가셨지만, 저녁이면 항상 술에 절어 돌아오셨다. 일을 끝내고 귀가하는 기술자들이 변두리 선술집에서 혼자 술을 마시는 모습을 보고 멋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아버지가 떠오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삼각자로 선을 그은 것처럼 집과 일터와 선술집을 차례로 돌아가면서 다니셨다. 그래서 어머니가 "아버지 좀 찾아와라"하실 때는 그 코스만 반대로 돌면 간단히 찾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늘 가는 선술집에서 자작하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어느새 내 머릿속에 각인돼버린 것이다. 게다가 지금 나 자신이 그런 아버지를 꼭 닮았다.

나도 교육은 아내에게 전담시키고 자식들과 좀처럼 대화를 하지 않았다. 부자가 사이좋게 지내는 건 아무래도 어색하다고 할까, 나는 도저히 그러지 못하겠다. 아버지라는 존재는 가까이 하기 어렵고 두려운 정도가 딱 좋다. '마이홈 파파'(가정을 제일로 치는 사람)인지 뭔지, 아무튼 언제나 싱글벙글 웃으면서 자식의 마음도 잘 알고 이해심 많은 아버지가 이상적인 아버지상으로 자리 잡은 시절부터 교육이 뭔가 이상해졌다. '마이홈 파파'가 아니더라도 아이들 기분은 어른이라면 누구나 안다. 어른들도 누구나 옛날에는 아이였으니, 알고는 있지만,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라고 아버지가 가르쳐주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만 요즘은 그런 것은 가르쳐주지도 않고 뭐든 잘 이해해주는 아버지가 너무 많다. 아버지가 아이에게 아양을 떨어서 어쩌자는 건가. 결국은 자기한테만 귀여울 뿐이지 않은가. 아버지는 아이가 최초로 만나는 인생의 방해꾼이어도 좋다. 아이에게 미움받는 것을 두려워하는 아버지가 되어서는 안 된다.

대부분의 부모들은 자식들에게 참는 것을 가르치는 게 일종의 교육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 아이들이 어른이 되었을 때, 그들 앞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안되는 것은 안되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세상의 차디찬 바람 앞에서 참을성 없는 인간은 낙오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다가 급작스러운 경제성장이 있었고 그 덕분에 태반의 사람들이 옛날보다 조금은 편안한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아이가 장난감을 사달라고 조르면 어지간한 것은 사줄 수도 있게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착각을 하게 된 걸까? 노력하면 꿈은 뭐든 이루어진다고. 하지만 그것은 큰 오산이다. 예나 지금이나 사물의 본질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정확하게 말하면, '노력하면 이루어지는 꿈도 있다'이다. 하지만 세상은 아무리 노력해도 이루어지지 않는 꿈으로 넘쳐나고 있지 않은가?

법아래 평등을 착각해서는 안 된다

'어린이는 훌륭하다', '어린이에게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 요즘 어른들은 그런 한심한 소리를 한다. 어린이들이 모두 훌륭한 건 아니지 않은가. 잔혹한 표현이지만, 멍청이는 멍청이다. 발이 느린 놈은 느린 거고, 야구를 아무리 좋아해도 못하는 놈은 연습을 해도 못한다. 그런 걸 다 알면서, 노력만 하면 누구나 일류가 될 수 있다느니 어쩌니 하는 말을 예사로 한다. 진실은 그와 다르다. 재능이 있는 사람이 남보다 더 열심히 노력을 해야 겨우 일류가 될 수 있을까 말까 한 게 현실이다. 연습을 한다고 모두 이치로 선수처럼 될 수 있는 게 아니다. 민주주의니 뭐니 하는 이야기들이 나오면서 인간은 모두 평등하게 되었다. 그 평등은 어디까지나 법 앞에서의 평등을 의미한다. 부자도 가난뱅이도 같은 법의 지배를 받으며, 같은 인권을 부여받은 것뿐이다. 실제로는 그 평등 역시 상당히 수상쩍은 면은 있지만, 일단 겉으로는 그렇다. 그래서 착각한다. 인간은 모두 평등하다고. 법 앞에서는 평등할지언정 인간 그 자체가 평등한 건 아니다.

누구에게나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는 전제는 결국 모든 실패는 노력이 부족한 탓이라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노력하면 뭐든 이루어진다고 자식을 위하는 척하면서 부모의 체면을 차리는 말을 하지 말고, 어린 시절부터 제대로 가르쳐야 한다. 인간은 평등하지 않다. 재능이 없는 아이에게는 그런 재능이 없다고, 아무리 노력해도 안되는 것은 안된다고 부모가 가르쳐주어야 한다. 그런 말을 하면 아이가 위축되지 않느냐고? 위축되지만 않으면 운동신경 둔한 녀석이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딸 수 있나? 아이의 마음이 상처 입는 걸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상처 입고 힘들어하다 포기하면 되는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원하는 것을 손에 넣으려면 노력해야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안되는 거라면 포기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현실이라는 것을 아이의 골수에 새겨주도록 하라. 그것이 아버지의 역할이다.

관계문제 關係_ 우정이란 상대에 대한 자신의 마음이다



남의 성공을 기뻐할 줄 아는 사람은 행복하다

사람이 음식을 먹고 '맛있다' '맛없다'라는 말을 하게 된 것은 언제부터일까. 다른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오로지 살기 위해서만 먹던 시절에는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음식 맛에 대해 이러니저러니 말하기 시작한 시기는 대체 언제쯤일까? 인간이 다른 동물에게 잡아먹힐 위험이 사라진 때부터가 아닐까 하는 것이 구마 씨의 설이다. 누군가에게 잡아먹힐지도 모르는 상황에서는 음식의 맛 같은 것은 느끼지 못했을 거라는 이야기다. 과연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 이야기는 나 자신에게도 들어맞는다. 내가 타인의 성공을 기뻐할 수 있게 된 것도 다른 연예인에게 먹힐 염려가 없어진 다음부터다.

아야노코지 기미마로(코미디언, 다케시의 친구)가 떴을 때, 나는 정말로 기뻤다. 나와 같은 세대 중에 요즘 세상에도 코미디로 인기를 끌 수 있는 연예인이 나온 것이다. 그는 어떤 행운으로 우연히 뜬 게 아니다. 소재도 재미있고 재주도 있으니 인기가 높을 만도 하다. 젊은 사람들이 거의 모든 무대를 접수한 상황에서 나와 같은 세대의 연예인이 대활약하고 있다. 나는 그 사실이 몹시 기뻤다. 노골적으로 표현하자면, 남의 성공을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만약 내가 전혀 팔리지 않는 연예인인데도 아야노코지의 성공을 기뻐할 수 있다면 정말 훌륭한 사람일지 모른다. 하지만 만약 내가 뜨지 않았다면 만나서 입으로는 "잘됐다" 정도의 말은 하겠지만, 내심 '웃기고 있네. 어째서 나는 못 뜨고 네가 뜨는 거야' 하고 생각했을 게 뻔하다. 우리는 같은 시기에 이 세계에 들어와서 같이 고생을 했다. 하지만 나는 25년 전에 이미 잘 팔리는 사람이 됐다는 여유가 내 머릿속 어딘가에 있기 때문에 기뻐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다지 멋있는 이야기가 아니다. 떠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타인의 성공을 순수하게 기뻐할 수 있는 것. 그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이 나이가 되어서야 알 것 같다.

돈이 없으면 '하류'로 여기는 천박함을 아무도 느끼지 못하고 있다

우리 집이 특별했는지도 모르지만, 돈에 관해서는 어린 시절부터 엄격하게 교육을 받았다. 돈 가지고 어머니에게 이러니저러니 말했다가는 죽도록 혼났다. 누구든 돈을 갖고 싶어 하지만 그런 것에 휘둘리면 인간은 천박해진다는 것이 어머니의 지론이었다. 가난뱅이의 괜한 자존심이라고 하면 그뿐이지만, 나는 그런 자존심이 싫지 않았다. 인간이란 아무리 폼을 잡아도 한 꺼풀 벗기면 욕망의 덩어리일 뿐이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그 한 꺼풀의 자존심을 소중히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이 '문화'라는 것이다. 부자 행세를 하고 싶은 일념으로 명품 가방을 할인 판매하는 날이면 눈빛이 달라지는 천박함을 왜 이제 아무도 비웃지 않게 되어버린 건가. 우리 집은 가난했지만, 어머니는 절대 덤핑하듯 파는 가게에 가서 줄을 서지 않으셨다. 아무리 먼 가게여도 1엔짜리를 사는 손님도 소중하게 대하는 가게에 다니셨다. "가져가, 도둑놈." 그런 말을 들으면서 물건을 사는 건 참을 수 없으셨던 것이다.

우정은 돈으로 살 수 없다고 하는 말도 마찬가지다. 돈으로 사려고 하는 근성이 잘못됐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애초에 우정의 의미를 모르는 것이 문제다. 우정을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왜냐하면 그런 것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없는 것을 사려고 해서는 안 된다. "네게 곤란한 일이 생기면 내가 꼭 도와줄게. 내가 곤란할 때는 네가 도와줘. 우리는 친구잖아." 이런 건 우정이 아니다. "네가 곤란하면 나는 언제든지 도와줄 수 있다. 하지만 내가 곤란할 때 나는 절대로 네 앞에 나타나지 않을 거다." 이런 자세가 옳다. 서로에게 그렇게 생각할 때 비로소 우정이 성립한다. '옛날에 나는 너를 도와주었는데 너는 지금 왜 날 도와주지 않는 거야' 하고 생각한다면, 그런 건 처음부터 우정이 아니다. 자신이 정말로 곤란할 때 친구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 진짜 우정이다. 요컨대 우정은 내가 저쪽에다 일방적으로 주는 것이지, 저쪽에서 얻을 수 있는 뭔가가 아니다. 우정이란 상대에 대한 자신의 마음이다. 애초에 우정에서 뭔가를 얻으려고 생각하는 것이 잘못이다. 손익으로 따지자면 우정은 손해만 볼뿐인 것. '그래도 그 녀석이 좋다. 곤란한 걸 알면 도와주고 싶다.' 그런 내 마음을 사느니 못 사느니 운운하는 것 자체가 웃기는 이야기다. 문득 주위를 둘러보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친구가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행복할 것이다. 나를 위해 죽어줄 사람이 몇 명 있는 것보다 그 녀석을 위해서라면 내가 목숨 바칠 수 있는 친구가 한 명이라도 있는 게 인간으로서 행복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우정이 중요하다는 것은, 사실은 그런 의미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내게는 친구가 몇 명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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