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놀기
강미영 지음 | 비아북
혼자놀기
강미영 지음
비아북 / 2008년 11월 / 246쪽 / 12,000원
혼자놀기 1. Surprise - 내 안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나에게
커피 브레이크퇴근하고 혼자 가는 카페가 있으세요? 다이어리 한 페이지를 끼적일 수 있는 조용한 카페도 좋고, 책을 읽는 북 카페도 좋고, 마음 좋은 주인장과 수다를 떨 수 있는 작은 카페도 좋고, 아무 생각 없이 창밖을 내다볼 수 있는 3층의 카페도 좋다. 가만히 밤이 오는 풍경을 보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나를 견뎌낼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카페면 어디든 좋다. 퇴근 후, 그대로 집에 가기 싫은 내 마음이 잠시 들를 수 있는 곳이면 된다. 퇴근 후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것은 중요하다. 일주일에 한 번, 아니 한 달에 한 번쯤은 내가 걸어가고 있는 길을 되짚어보아야 한다. 내가 원하지 않는 것들로 어지럽혀져 있지는 않은지, 사람들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내 길이 아닌 길로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남편과 가족도 중요하지만 정적 나 자신은 얼마나 아껴주고 있는지! 퇴근 후 카페에 들어가기만 하면 신기하게도 할 일이 생긴다. 책 읽기, 글 쓰기, 편지 쓰기, 노래 듣기, 일기 쓰기, 공상하기……. 하고 싶었던 일들이 생각나고 별로 생각 없던 일들도 하고 싶어진다.
되는 대로 살아가다 보면 어느새 나도 모를 곳에 도착해 있다. 돌아가기에도 너무 먼 곳까지 오고 나서야 내가 어딘가에 도착해 있음을 알아차리게 된다. 그러니 중간에 발을 멈추고 '너 맞게 가고 있니' 하고 물어줘야 한다. 일상이 진짜 일상으로만 느껴질 때, 내 삶이 고장 난 브레이크를 장착한 것처럼 멈춤 없이 흘러가기만 할 때, 그저 해가 뜨고 진다는 이유만으로 나의 하루가 끝나갈 때, 우리에게는 돌아볼 시간이 필요하다. 내 마음이 왜 이렇게 분주한지, 내가 올바른 방향을 향하고 있는지, 방향키를 돌려야 할 지점은 어디인지, 체크해야 한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혼자 조용히 정리해야 하는 나만의 세계가 있다. 퇴근길에 마음이 닿는 곳에 들어가 앉아 커피 한 잔 시키고 잠시 바쁜 숨을 골라보자. 카페에 들어서서 그냥 생각나는 일을 시작하면 된다. 커피 한잔과 책 한 권, 다이어리, 그리고 혼자만의 시간이 함께한다면 뭐든지 좋다. 혼자서. 조용히. 가만히. 열심히.
아가씨, 여관에 가다말짱한 아가씨가 토요일 오후에 혼자서 여관에 들어서는 보기 드문 장면은 '어쩔 수 없음'에서 출발했다. 언니와 형부, 그리고 나는 방 두 칸짜리 빌라에 산다. 우리 집에 손님이 찾아오던 날, "내 방에서 주무시라고 해. 난 여관이나 찜질방에서 자면 돼." 별 생각 없이 내뱉었던 말에, "미쳤어. 여자 혼자서 찜질방엔, 여관엔 왜 가냐?"라는 언니의 과도한 반응에 호기심이 발동했다. 어? 재밌겠는데!
친구 집에서 자고 온다고 말한 후 집을 나서 근처 여관으로 향했다. 친구 집에 간다고 나왔으니 챙긴 물건이라곤 달랑 칫솔과 책 한 권. 그저 친구 집에 가는 기분으로 하루를 살 수 있는 곳이라면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여관이란 그저 여행지에서 적당한 잠자리를 찾기 위해 기웃거리는 정도의 공간이라 생각했다. 이렇게 가까운 일상의 공간에서 여관을 찾게 되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3만원을 내고 세 평 남짓의 공간과 내일 정오까지의 자유를 구입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몰랐다. 아무런 소유가 존재하지 않는 시공간에서의 자유라는 게 이토록 짜릿하고 즐거운 일이라는 것을. 단절된 임시적인 공간이 주는 편안함은 기대 이상이다. 맘껏 놀다가 정리하지 않은 채 버려두고 가도 되는 임시적인 공간, 내 몫으로 챙겨야 할 물건이 없는 공간, 내가 지켜야 하는 의무도, 규칙도 없는 자유로운 공간. 아무리 어질러놓아도 내 것이 아니기에 모두 놓아둔 채 다시 떠날 수 있다. 여관에 있을 때도, 그곳을 떠나올 때도 나는 진짜 자유를 느낀다. 내 물건이 아니기에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순간. 여관에서 보내는 24시간이다.
몸에 안 좋은 자장면을 시켜 먹을 수 있고, 세수 안 하고 이불 속에 들어갈 수도 있고, 밤새 만화책을 볼 수 있고, m.net 채널을 틀어놓은 채 잠들 수 있고, 이불 속에서 떡볶이를 먹을 수 있고, 컨디션이 안 좋은 날에는 샤워기를 틀어놓은 채 떨어지는 물줄기 속에 서 있을 수도 있고, 문을 열어놓은 채 볼일을 볼 수 있고, '므흣'한 제목의 비디오를 볼 수 있고, 불을 끄지 않고 잠들어도 전기 요금에 대한 부담이 없고, 몸에 팬티 한 장만 걸친 채 침대에서부터 화장실까지 걸어갈 수 있다.
마음만 먹으면 우리의 일상이 얼마나 단순해질 수 있는지, 삶에서 지켜야 한다고 나를 옭아매던 규칙들이 얼마나 사소한 것인지 알 수 있다. 여행처럼 번잡한 준비 없이도, 주머니에 달랑 3만 원만 넣고 출발하면 된다. 준비가 너무 길고 장황해 곧 지쳐버리게 되는 여행에 대해 잠시 생각했다. 나를 위한다는 이유로 나를 힘들게 하지는 말아야겠다는 결심도 했다. 이렇게 호들갑스런 자유의 징표는 어이없게도 딸랑 여관방 열쇠 하나이다. 자유란 이렇게 쉽게 손에 쥘 수 있는 것이었다. 첫째 날 아줌마가 "쉬어 가실 건가요? 자고 가실 건가요?"라고 물을 땐 "자고 갈 겁니다!"라고 대답하면 되고, 둘째 날 여관에서 나올 때 눈부신 햇살에는 그냥 윙크 한번 해주면 된다. 이게 당신이 1박 2일 자유의 대가로 치러야 할 용기의 전부이다. 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아줌마, 여기 자유 3만 원어치 추가요!
다시 포기하기 위해 도전할 것제대로 방전되지 않은 건전지를 다시 충전하면 수명이 점점 짧아진다. 건전지는 소모된 에너지 이상으로 채워질 수 없기 때문이다. 방전됐던 것만큼만 충전될 수 있다. 끝까지 방전하지 않고 다시 충전한 배터리는 나중에는 아무리 충전해도 힘을 낼 수 없게 된다. 그 모양이 꼭 나의 20대를 보는 것 같다. 지쳐 나가떨어지기도 전에 지레 겁먹고 드러눕거나 다시 충전모드로 돌아가버렸다. 피곤할 것을 염려하다 보면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지쳐 있을 때도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항상 피곤하고 바빴다. 제대로 방전되지 않은 배터리를 다시 충전하느라 바빴다. 채 바빠지기도 전에 바쁘다는 핑계를 대느라 바빴고, 피곤하다는 이유로 쓰러져 자느라 더욱 피곤한 하루를 보냈다. 완전히 방전되기 전의 나를 자꾸 재충전 모드로 두었다. 쓰러지는 것이 두려워 에너지를 모두 쓰기 전에 드러누워 충전모드로 돌아서기를 반복했다. 결국 내 에너지의 바닥은 점점 높아져 이제는 충전도, 방전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사람이 되었다. 직장생활을 시작한 이후 나의 20대가 그러했다.
아직 젊은데 에너지의 바닥은 이미 너무 높아져 있다. 쉬고 싶다는 일념이 주말을 팽팽하지 못하게 만든다. 주말은 무조건 충전의 시간이어야 하기에. 나에게 충전의 시간이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기에. 다음 주를 잘 보내기 위해서는 무조건 쉬어줘야 한다는 생각이 주말 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했다. 늘 늘어져 있는 주말은 만사가 귀찮은 날들의 연속이다. 이런 주말을 꽉 찬 스케줄로 보내는 것부터 시작해야겠다. 내가 힘들어할 만한 일들을 미리 포기하지 말고 한번쯤 시도해보고 어느 만큼의 힘을 쓸 수 있는지 확인해보아야 한다.
우리의 한계에 도전하는 이유는 내 포기 지점을 알기 위해서이다. 내 에너지가 완전히 바닥을 드러내 "여기까지! 이제 그만!"을 외치는 지점을 알기 위해서이다. 내게 충전된 에너지를 모두 쓰고 나서야 내 에너지의 크기를 알 수 있다. 내가 썼던 에너지 이상으로 충전될 수 없다. 조금 더 피곤하고 조금 더 쓰러져야 한다. 에너지의 바닥을 점점 더 아래로, 다시 발이 닿지 않는 곳까지 자꾸만 밀어넣어야 한다. 누구나 자신의 한계를 보는 일을 두려워한다. 하지만 그 바닥을 치지 않는 사람들은 에너지의 한계가 점점 높아질 수밖에 없다. 어느 지점에서 쓰러질지는 모르지만, 당분간은 내 에너지가 충만했다 다시 바닥을 드러내는 순간까지 나의 에너지를 방출해야겠다. 아직 젊으니 그렇게 살아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 내가 도전하는 이유는 성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의 한계를 정확히 알기 위해서이다.
혼자놀기 2. Energy - 낯선 공간이 나를 춤추게 한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시간에 챙기고 나설 것여행이란 낯선 공간으로의 이동이라고 생각해왔다. 적어도 몇 시간쯤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 내 시선이 닿지 않았던 낯선 장소에 나를 떨어뜨려 놓고서야 '아, 내가 여행을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모르는 사람들 틈에서 입에 맞지 않는 음식을 먹고, 기차를 놓치면 아무도 모르는 공간에 혼자 남겨질까 두려워 서두르게 되고, 불쾌한 잠자리에서 뒤척이는 것조차 내가 여행을 하고 있다는 안도감을 느끼게 하는 불편거리들이었다. 나의 여행은 언제나 새로운 공간을 필요로 했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 다른 생각을 갖게 됐다. 하나의 공간을 다른 시간에 여행하는 것은 또 다른 여행이 될 수 있다. 아침과 저녁의 모습이 다른 것처럼, 어제와 오늘의 모습이 다른 것처럼, 공간도 자란다. 그러니 같은 장소를 다른 시간에 여행하면 다른 것을 보고 새로운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내가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우리 동네도 새벽에 만나보니 다른 모습이었다. 아침 출근길에 버스 타러 가면서 만나는 우리 동네와 주말 오후 기분전환 삼아 나선 우리 동네는 아주 아주 달랐다. 익숙한 공간을 새로운 시간에 만나는 것은 새로운 공간을 만나는 여행만큼 신나는 일이다. 공간 이동 여행이 아니라 하나의 공간을 다른 시간에 있어보는 시간 이동 여행이다.
동네 여행은 아주 가까운 곳으로 떠나는 시간 이동 여행이다. 가까운 곳으로 떠나는 여행이니 준비도 필요 없다. 가벼운 운동화 하나만 챙겨 신으면 언제든지 출발할 수 있다. 동네 여행은 아무런 목적 없이 출발하지만 항상 기대 이상의 것을 얻게 된다. 누군가에게 이야기할 재료를 얻기도 하고, 동네에서 낯선 모습을 발견해 기분전환이 되기도 하고, 가슴 뭉클한 깨달음이 꿀렁꿀렁 올라오기도 한다. 해가 질 때까지 돌아오기만 하면 걸어간 만큼 모두 내 땅이 되는 톨스토이의 동화처럼, 집으로 돌아오기만 하면 마음먹고 걸아간 만큼 우리 동네가 된다.
마음 닿는 대로 걸어갔다가 돌아오면 된다. 꼭 동네에 어떤 좋은 공간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릴없이 거닐기 위해 집을 나서는 것이다. 가보지 않은 길로 걸어보기 위해, 목적지가 있는 사람처럼 빠르게 걷거나 할 일 없는 사람처럼 느릿느릿 걸어보기 위해 동네 여행을 한다. 매일 만나는 우리 동네를 새로운 시간에 만나기 위해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나를 충전하거나 위로하거나 새로운 친구를 사귀거나 자극이 필요할 때 떠나는 게 여행이라면, 나는 매일매일 여행을 할 수 있다. 우리 동네는 매일 아침저녁으로 드나드는 장소니까.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새로운 것들을 발견할 수 있으니까. 특정 시간을 선택하거나 따로 집을 꾸리지 않아도 된다. 몇 박 며칠 계획을 세우고, 혹시나 필요할지도 모르는 것까지 꽁꽁 챙겨 넣으며 허파에 바람만 잔뜩 들여놓았던 공간 이동 여행은 일 년에 한 번으로 족하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떠날 수 있는 동네 여행으로 콧구멍에 바람 좀 넣으며 살자!
일상에서 탈출하다우리는 늘 도망을 꿈꾼다. 대한민국에서 한 달에 한 번씩 월급이라는 마약을 받아먹고 사는 직장인의 꿈은 딱 두 가지이다. 가까운 꿈 하나. 내일이 휴일이면 좋겠다. 좀 크고 뚱뚱한 꿈 하나. 어느날 갑자기 보란 듯이 사표를 내던지고 캠핑카를 사서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 우리에게는 도망 본능이 있다. 나를 묶어두고 있는 회사로부터, 집으로부터, 친구로부터 벗어나고 싶어한다. 일상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으니 반복이라는 단어는 찾아볼 수 없는 곳으로 탈출을 꿈꾼다. 이런 일탈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짜릿하고 기분이 좋아진다. 하지만 보통의 운을 가진 평범한 사람이 잘살다가 일상을 벗어던지고 어디론가 훌쩍떠날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다. 그래서 이런 생각들은 그저 작은 가슴에 고이 접어 모셔두기만 하는 꿈같은 이야기로 남아 있다.
도망은 난데없이 이루어져야 한다. 도망의 매력은 아무도 모르는 곳에 아무도 모르게 간다는 것이다. "나, 북한산으로 도망가요!"라고 광고하면서 출발하면 그건 도망이 아니다. 또, 내가 도망이랍시고 갔는데, 아무도 찾지 않는다면 그것도 도망이 아니다. 내가 없어졌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되, 어디로 언제쯤 떠났는지, 언제쯤 돌아올지 아무도 모르게 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도망이라는 이름으로 작정하고 아무 때고 계획 없이 떠나는 일은 난데없이 이루어져야 한다. 출발일자도 도착지도 갑자기 정해져야 한다. 금요일 저녁에 급작스럽게 떠나는 정동진 여행도 좋고, 주말 오전에 자리를 털고 일어나 검색창에 당일치기로 검색되어 나오는 곳 아무 데나 골라잡아 떠나도 좋다. 도착지는 없이 무조건 출발할 수도 있다. 내 마음이 원하기만 하면 언제고 출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도망은 의외로 쉽다. 가고 싶을 때, 가고 싶은 곳으로 떠나면 된다는데, 내 마음대로 하면 된다는데, 이보다 쉬운 이리 어디 있겠는가. 아무 때나 모든 걸 놓아둔 채 떠나는 일만큼 쉬운 것은 없다. 여름과 겨울에 딱딱 시간 맞춰 계획하고 떠나는 것보다 훨씬 쉽다. 그동안 우리가 지고 떠나는 배낭이 무거웠던 이유는 한꺼번에 모든 걸 뒤집어엎으려 했기 때문이다. 사표를 써야만, 몇 박 며칠 휴가를 받아야만, 가족들과 시간을 맞춰야만 벗어날 수 있다고 규정해두었기 때문에 아무것도 해보지 못하고 일상 안에 갇혀 있었던 것이다. 어쩌다 한번 찾아오는 기회이니 제대로 즐기고 싶은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보니 떠나는 마음도 준비도 무거웠다. 우리는 도망의 주기를 더 짧게 가져야 한다. 쌓아두고 쌓아두었다가 휴가 때 한꺼번에 몽땅 풀어낼 게 아니라 도망을 일상화해야 한다. 아무 때고 떠날 수 있는 자유로움이 있으면 한 달, 한 주, 하루 동안 반복되는 일들에서 조금은 숨통이 트인다. 단단히 굳어버린 듯한 나의 일상이 얼마나 손쉽게 바뀔 수 있는지 알게 된다. 그냥 떠나는 거다. 배낭 하나 메고. 훌쩍.
혼자놀기 3. Like - 내 속에 꼭꼭 숨겨둔 미음상자 열기
다 나를 위해서 그러는 거라고? 거짓말!뜨거운 것을 만지지 마라. 밤에는 일찍일찍 다녀라. 이건 이번 시험에 나올 내용이니까 꼭 외워라. 대학 가기 전에는 술 마시면 안 된다. 나를 위한다는 이유로 부모님과 선생님은 나에게 충고했다. 세상의 정답 같은 충고들을 절대 불변의 진리라 믿으며 살아왔다. 이 이야기들은 내가 해야 할 일들과 가야 할 길들을 콕콕 짚어주었고 나는 그 길을 따라 열심히 걸어오기만 하면 됐다. 이제와 되돌아보니 부모님이나 선생님의 말씀이 다 맞았다. 덕분에 나는 괴로워하면서도 인내를 배웠고, 상처 없이 잘 자랐고, 억지로라도 조금씩 유식해졌으며 방황하지 않고 자리를 잡아갈 수 있었다. 그러니까 그들의 말이 맞았다.
하지만 나는 요즘 다른 생각을 한다. 나를 위한다며 시작되었던 그 말들이 없더라도 그리 나쁘지는 않았을 거라고. 하고 싶은 일을 끝까지 하고, 하기 싫을 일을 끝까지 하지 않았다 해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거라고. 한번쯤은 숙제를 하지 않고 친구들과 어울려 놀았더라도, 시험 문제 하나쯤은 틀렸더라도 괜찮았을 것 같다. 가출까지는 아니더라도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청소년기의 방황을 조금 해봤어도 지금의 나와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조금 더디고 시간이 걸렸을 모르지만 나는 이내 내 자리를 찾아 돌아왔을 것이다.
되돌아 생각해보면, 실패 없이 빠르게 올바른 길을 걷길 바라는 어른들에 이끌려 여기까지 온 것 같다. 여러 가지 선택 앞에서 옳고 그름을 판단할 새도 없이 한 길로만 걸어왔다. 그리고 어른들이 이야기를 착실히 들으며 바른길로 들어선 지금의 내가 받은 보상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모르겠다'는 방황이다. 항상 누군가 선택해주었고 올바른 길을 알려주었기에,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다른 사람들의 충고 없이는 알지 못한다. 그속에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정확히 알아내는 방법을 모른다. 모든 선택 앞에서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