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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 출세했네

권영민 지음 | 현문미디어
자네 출세했네

권영민 지음

현문미디어 / 2008년 12월 / 288쪽 / 10,000원

제1장 새내기 외교관과 대한민국 외교 총수



콩자반과 꽁치구이


당시 나는 외무부 동남아과에 소속되어 있었는데, 나의 주 업무는 '아시아 · 태평양 이사회(ASPAC)'의장국인 우리나라의 사무국 역할을 하는 일이었다. '상임위원회 회의'를 준비하고, 회의 속기록 등을 만들었다. 당시 최규하 장관의 부인 홍기 여사는 수석장관인 외무부 장관 부인이었기 때문에 육영수 여사가 주도하던 '양지회'라는 조직의 총무를 맡고 있었다. 나는 사무국 일과는 별도로 '양지회'의 계획서 등을 작성하여 먼저 최 장관에게 보고하였으며, 최 장관의 허락이 떨어지면 서류를 들고 장관 공관으로 이동해 홍기 여사에게 그 내용을 설명했다. 나중에는 '양지회'의 일이 점점 많아지자 나는 외무부 장관 공관을 자주 드나들게 되었고 장관 부부와 가족처럼 친숙한 관계가 되었다.



1971년 3월, 어느 토요일이었다. 창고에 쌓여 있던 '양지회' 물품들을 정리하고 퇴근하는데, 사모님의 점심 식사 초대를 받았다. "미스터 권, 장관님께서 곧 들어오신다니까 같이 점심 들어요. 급한 약속이 있어요?" "아, 아닙니다. 오늘은 약속이 없습니다." "그래요, 그럼 식당으로 들어가세요." 사모님의 초대를 받고 공관 식당으로 들어간 나는 식탁에 앉아 천장이 유난히 높은 식당 안을 둘러보면서, 최 장관이 들어오시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후 식당으로 들어온 최 장관이 나를 보시고 밝게 웃으시며 자리에 앉았다. 나는 속으로 '드디어 장관 공관의 오찬을 맛보는구나!'라고 생각하며 잔뜩 기대를 하고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막상 식탁에 차려진 음식은 실망 자체였다. 검은 콩자반, 김치, 고추와 멸치 볶음, 구운 꽁치, 그리고 밥과 라면이 전부였던 것이다. 일반 가정집보다 못한 초라한 점심상이었다. 라면 그릇까지 말끔히 비운 최 장관이 "참 잘 먹었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엇인가 특별한 식사를 기대했던 나에게 이 의외의 식사 메뉴는 충격 자체였다.



이처럼 최규하 장관 부부는 나라를 이끌어가는 공인으로서, 또 한 나라의 국민으로서 너무나도 검소하고 인간적인 면을 직접 보여주었다. 그런데도 당시에는 너무 젊어서 세상물정을 몰랐던 탓에 어리석게도 그분들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던 것이다. 한편으로 돌이켜 생각하면 두 분이 살아계실 때 '내가 그날 생각하고 느꼈던 해프닝을 말씀드리고 한껏 웃었어야 했는데……' 하는 후회도 든다.

부인 조심, 비서 조심, 자녀 조심

1976년 1월, 조간신문을 펼쳐보니 머리기사로 최 총리에 관한 기사가 실려 있었다. 최 총리가 어제 회의석상에서 '부인 조심, 비서 조심, 자녀 조심'이라는 말로 공직자들에게 주의를 환기시켰다는 것이다. 날이 갈수록 공직사회가 혼탁해져가는 사실을 개탄했던 최 총리가 '부인 조심, 비서 조심, 자녀 조심'이라는 말로 공직자들에게 경각심을 심어 주었던 것이다. 최규하 국무총리는 인사 문제에 있어서는 어떤 정실도 배척했으며, 공직(公直)과 원칙을 일관시켰다. 자기를 보좌하는 비서실 직원들은 물론 자기 자식의 인사까지도 당사자에게 전해 듣고서야 알 정도였다. 인사 문제에 대한 최 총리의 강직한 태도를 보여주는 사건이 있었다.



1979년 12월 6일, 최규하 국무총리가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될 무렵, 코트라(KOTRA,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의 해외 지사에 근무하던 큰 아들 최윤홍 씨가 귀국했다. 며칠 뒤, 점심식사를 마치고 집무실로 들어온 최 대통령이 화가 잔뜩 난 얼굴로 비서실에 지시했다. "코트라 사장에게 전화 연결해!" 전화가 연결되자 최 대통령은 코트라 사장에게 호통을 쳤다. 코트라 사장이 아들 최윤홍 씨와 골프를 쳤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 이후로 코트라 사장을 비롯한 직장 상사들이 최윤홍 씨를 골프장에 초대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부인 조심, 비서 조심, 자녀 조심'으로 대표되는 최 대통령의 완고한 원칙과 무서우리만큼 엄격했던 성품은 단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제2장 청와대 파견 근무



귀국 명령과 12. 12 사태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궁정동 안가에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게 시해되자 헌법에 따라 최규하 국무총리는 대통령 권한대행이 되었다. 뒤이어 12월 6일 '통일주체 국민회의'는 장충체육관에서 대회를 열고 그를 제10대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이때 나는 서독의 본에서 영사로 재임하고 있었다. 1980년 1월 중순, 어느 토요일 아침이었다. 서울에서 신두병 총무과장이 "청와대의 요청에 따라 나를 청와대로 파견할 예정이니 귀국하라"는 전문을 보내 왔다. 나는 이 전문을 받고 즉시 귀국하게 되었으며, 귀국 후에야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 · 노태우 등 '신군부' 세력이 군사반란을 일으켜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체포하고 나라 전체를 살벌한 긴장 속으로 몰아넣은 사실을 알았다. 그날 밤, 삼청동 공관에서는 정승화 계엄사령관의 체포 서명 문제와 관련하여 최규하 대통령과 전두환 보안사령관 등 '신군부' 세력 사이에 힘겨루기가 벌어지고 있었다. 박 대통령의 시해사건을 수사하던 전두환 합수부장은 최 대통령에게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수사해야 하니 재가를 해달라고 요구했다. 박 대통령이 시해되던 날, 정승화 계엄사령관이 범인 김재규의 초청을 받아 시해현장 가까운 곳에 있었기 때문에, 젊은 장교들의 의심을 샀던 것이다.



'신군부' 세력이 정승화의 체포 동의서에 서명을 해달라고 위협했으나 최 대통령은 "국방부 장관을 불러오라"는 말로 맞섰다. 최 대통령은 "육군참모총장은 헌법상 국무회의의 심의를 거쳐 대통령이 임명하고, 계엄사령관은 국방부 장관이 상신하는 중요 지위이다. 그러므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을 수사하려면, 국방부 장관의 의견을 듣고 처리하는 것이 중요하니 당장 장관을 찾아오라"고 '신군부'의 요구를 거부했다. 최규하 대통령이 원칙을 고수하자 '신군부'는 어쩔 수 없이 12월 13일 새벽 4시 45분에 노재현 국방부 장관을 삼청동 공관으로 오게 했다. 이 자리에서 노 장관은 자신이 이미 서명한 보고서를 내놓으며, 최 대통령에게 건의했다. "각하께서 재가해주시는 것만이 사태를 수습하는 길입니다." 그런데도 최 대통령은 즉시 서명하지 않았고, 그 자리에 배석한 신현확 국무총리와 이희성 중앙정보부장서리, 최광수 비서실장 등에게 동 건의 서류를 돌리고 자신은 일시를 적어 새벽 5시에 재가한 것이다.



나중에 김영삼 정부시절, 전두환 · 노태우 전직 대통령 등을 국가반란죄로 기소 · 재판할 때, 그 자리에 배석했던 비서실 요원들에 대한 '검찰 조사 내용'에 따르면 당시 최 대통령이 가장 우려하고 걱정했던 것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국가의 안위를 확고히 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최 대통령은 그런 신념 하에서 '신군부'의 위협에 대처했고, 군 내부의 대립과 충돌이 확산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장관, 총리 등과 논의했던 것이다.



현모양처 영부인과 충직한 두 비서관

청와대 공보비서실에서 연락이 왔다. 국민들이 영부인 홍기 여사의 동향에 대해 궁금해 하니, 홍기 여사에 관한 홍보계획을 세우자는 것이었다. 당시 신문기자 출신이자 소설가인 청와대 공보수석 서기원 씨가 수석회의의 석상에서 영부인의 동향을 알리기 위해 기자회견 개최를 제안하여 모두의 동의를 얻어냈으며, 이 결정에 따라 영부인 홍기 여사에 관한 기자회견이 열리게 되었다.



기자회견장에 참석한 언론매체는 《여원》, 《레이디 경향》 등 여성 잡지사가 주류를 이루었다. 영부인의 인터뷰는 대성공이었다. 여성잡지의 기사를 읽은 국민들이 순박하고 서민적인 대통령 부인에게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던 것이다. 영부인이 직접 손자를 돌본다는 이야기에서부터 김치 30포기를 담갔다는 이야기까지 일반 가정주부와 다를 바 없는 대통령 영부인의 평범하고 소박한 모습이었지만, 장안은 온통 영부인의 이야기로 들끓었다. 영부인의 꾸밈없는 생활상이 감동을 주었기 때문이다. 한번은 최 대통령의 총무비서관을 지낸 강대완 비서관(추후 주 스위스 대사 역임)이 서교동 사저를 방문했을 때였다. 영부인이 연탄 화덕에다 내의를 삶고 있는 것을 보고 강 비서관이 세탁기를 구입하라며 권유했다. 그러자 영부인이 "남편의 속옷을 어떻게 세탁기에서 빨 수 있느냐!"며 도리어 강 비서관을 나무라셨다고 한다.



선비와 같은 기개와 명경지수와 같은 정직성, 오직 국가의 안위와 국민의 행복을 위해 사심 없이 정진하신 최규하 대통령과 이상적인 현모양처의 위상을 고고히 간직하며 대통령을 묵묵히 헌신했던 홍기 여사를 바로 곁에서 충성스럽게 보좌했던 인물들이 있었다. 정동열 의전수석과 신두순 의전비서관이 장본인들이었다.



1980년 8월, 정동열 수석은 최 대통령이 하야하자 곧바로 공직을 떠났다. 한창 일할 40대 후반의 나이에 모아놓은 재산도 없이 최 대통령의 뒤를 따른 것이다. 전두환 대통령은 정수석이 의리 있고 청렴결백하다는 정보를 전해 듣고, 그에게 대사 자리와 국영기업체 사장 자리를 제의했지만 정 수석은 '최규하 대통령을 모신 것만으로도 커다란 영광'이라는 말로 전 대통령의 제의를 정중히 거절했다.

정동열 수석과 더불어 최 대통령을 끝까지 보좌한 신두순 비서관은 과거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김구 주석의 판공실장을 역임한 신현상 실장의 차남이기도 했는데, 최 대통령으로부터 "저 사람은 학처럼 청아하다"는 칭찬을 들었다. 신 비서관은 최 대통령이 하야한 후에 국정자문회의 의장으로 활동할 때도 비서실장을 맡아 수행했고, 임종하는 순간까지 최 대통령의 곁을 지킨 의리의 인물이었다.

영어의 달인

내가 오랫동안 가까이에서 지켜본 최 대통령은 '영어의 달인'이셨다. 최 대통령이 국내외 외교가에서 알아주는 영어 실력자가 된 것은 도쿄대학보다도 입학하기 힘들다는 도쿄고등사범학교 영문학과에 다니면서 갖춰졌다고 한다. 최 대통령의 탁월한 영어 실력을 잘 말해주는 일화가 있다. 최 대통령이 국무총리 시절에 호주 총리의 초청으로 호주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이때 호주 의회에서 영어로 연설을 하게 되었는데, 연설이 끝나자 최 대통령의 유창한 영어 실력에 감탄한 호주 의원들이 "영어를 쓰는 우리보다 고급 영어를 구사하니 놀라울 따름이다"라며 경탄해마지 않았다고 한다.



최 대통령은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때는 농림부 양정과장을 맡았다. 당시 변영태 외무부 장관이 영어 구사 능력이 뛰어난 사람을 찾다가 '최 과장'을 외무부로 스카우트했다. 싱가포르에서 열린 국제식량기구(FAO) 아주지역 미곡위원회 회의에 한국 대표로 참가했을 때 변 장관의 눈에 띄었던 것이다. 그 후 최 대통령은 승진을 거듭하여 1967년에 외무부 장관으로 발탁되었다. 이후로 4년 동안 외무부 장관으로 재임하면서 유창한 영어 실력을 바탕으로 대한민국 외교사에 뛰어난 업적을 많이 남겼다. 그중에 괄목할 만한 업적을 소개한다면 푸에블로호 납북사건 때 미국과의 회담에서 얻어낸 1억 달러 규모의 군사원조 성사 사건일 것이다. 당시 이 납북사건으로 보복 전쟁을 준비한 한국을 진정시키기 위해 미국 벤스 특사가 파견되었는데, 최 대통령은 서울 타워호텔에서 20여 잔의 커피를 마시고, 여섯 차례 재떨이를 교체하면서 뚝심과 끈기로 회담을 이끌었다. 그 뒤 벤스 특사 일행이 귀국하면서 "최 장관의 애국심과 쇠고집, 인내력 그리고 그가 계속 뿜어대는 담배연기에 손을 들었다"는 말로 최 대통령을 칭찬했다고 한다. 한국은 이때 받은 군사원조로 한국군의 장비를 현대화했고, 예비군도 무장할 수 있게 되었다.



1968년 6월 28일, '핵확산금지조약(NPT)' 가입 문제를 놓고 한국 측 대표인 최규하 외무부 장관과 미국 측 대표인 월리엄 포터(William J. Porter) 주한 미국대사가 만났다. 포터 대사는 국제적으로 '백사'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노련한 외교관이었다. 마찬가지로 최 장관도 유창한 영어로 포터 대사와의 외교전에서 일진일퇴를 거듭할 정도로 호각지세를 이루며 '구렁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먼저 포터 대사가 한국을 무시하는 태도로 말했다. "한국 정부가 '핵확산금지조약' 가입을 질질 끌다가 '불쾌한 그룹'에 끼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러자 최규하 장관이 당당하게 맞받아쳤다. "미국 정부의 대표로 나선 귀하가 가장 가까운 맹방인 한국도 설득시키지 못하면서 무슨 대한 외교를 잘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 말 한마디에 포터 대사는 얼굴이 시뻘개져서 더 이상 반박하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최규하 장관의 승리였다. 당시 최규하 장관을 기자로서 수행했던 이재원 전 차관은 당시 회담장의 모습을 이렇게 설명했다. "두 사람이 협상 테이블에 앉으면 현기증이 날 정도였다. 그것은 마치 두 마리의 뱀이 상대방의 꼬리를 물기 위해 계속 두뇌회전을 해서 생긴 어지럼증과 같았다." 이 회담 결과로 한국은 '한 · 미 연례안보협의회(SCM)'의 기초가 된 '한 · 미 국방각료연례회의'를 성사시켰다.

하야 성명과 미국행

1980년 7월 31일 최규하 대통령 부부는 비서실과 경호실 직원 몇 사람만 데리고 동해안 쪽으로 여행을 다녀온 후, 13일 후인 1980년 8월 16일, 최 대통령은 청와대 영빈관에서 하야 성명을 발표했다. 이날 하야 성명의 골자는 이러했다. "불행했던 우리 헌정사에 평화적인 정권이양의 선례를 남기기 위해 물러난다."



그동안 최대통령은 결단력과 지도력이 부족하다는 등 많은 비판을 받아왔다. 하지만 내가 가까이에서 지켜본 최 대통령은 대통령으로서 뛰어난 자질을 지닌 분이셨다. 나는 최 대통령의 근면성, 애국심 그리고 청렴결백한 자세, 선공후사(先公後私)의 마음가짐은 두고두고 평가받아야 된다고 생각한다.

정동열 수석은 아무도 감히 할 수 없는 말을 최대통령 부부에게 곧잘 직언했던 사람으로 유명했는데, 그는 최 대통령에게 이렇게 말했다. "각하, 오늘 대통령에 취임하신 것도 중요하지만, 이곳을 어떻게 떠나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지난 역사를 돌아볼 때 초대 이승만 박사를 비롯하여, 세 분 대통령께서 한 분도 스스로 걸어서 이곳을 나가신 분이 없습니다. 각하는 그런 모습을 국민에게 보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 말을 듣고 최 대통령은 아무런 대꾸 없이 계속해서 담배만 피웠다고 한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보면, 최 대통령의 하야는 정 수석의 충언대로 청와대에서 스스로 걸어 나온 최초의 대통령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최 대통령은 하야 후에 발생할 부정적인 변동에 대처하기 위해 자신의 후임인 전두환 대통령과 특사파견 문제를 상의한 후 최광수 비서실장을 비밀히 미국으로 파견했다. 미국 주요 인사들에게 한국의 실정을 설명하고, 자신이 일찍 그만두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대한 이해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최 실장의 파견은 대통령 자신은 비록 물러나더라도 미국에 의존하는 국가의 안보와 국민의 복리 등은 아무런 변동이 없어야 한다는 국정 책임자로서의 용의주도한 조치였던 것이다.



제3장 알려지지 않은 선행



소아마비 시계수리공과 '사랑의 집'


최규하 대통령과 홍기 여사는 사회에서 소외된 불우한 사람들이나 사회의 모범이 되는 사람들을 소리 소문 없이 적극 지원했다. 두 분은 선행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비밀에 부치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그 영향 때문인지 혹자들은 나에게 "최 대통령은 재임 기간 중에 좋은 일을 한 적이 있느냐?"고 묻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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