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만원으로 세계여행
정상근 지음 | 두리미디어
80만원으로 세계여행
정상근 지음
두리미디어 / 2008년 4월 / 12,000원 / 280쪽
80만 원 들고 길 위에 서다
무모한 여행, 너 미쳤니?국방부 시계는 멈추지 않았다.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군 생활은 어느덧 막바지에 이르렀고, 조금만 더 참고 견디면 전역을 한다는 간절한 염원(?)은 정말 현실이 되었다. 나도 예비역 아저씨란 타이틀을 달았다. 전역이 기뻤던 것은 군 생활이 끝나서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이제껏 꿈꾸어 왔던 여행에 대한 간절한 기다림 때문이었다. 이 순간만을 기다려 왔다. 이제는 내 결심을 실행할 때다! 떠나 보는 거다! 다른 세상으로 . 사실 삭막한 군 생활은 여행에 대한 생각 하나로 버텼다고 하면 내가 여행을 위해 많은 준비를 하고 충분한 여비를 마련했을 거라 예상하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또 내 또래 학생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나 역시 의욕이 앞서는 20대 청년일 뿐이었다. 여행을 위해 준비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오로지 낯선 세계를 온몸으로 맞부딪치고 싶은 열정뿐이었다. 그러면 그 열정을 모두 모두 분출시킬 수 있을 만한 자금력은 있었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나의 전 재산은 기껏해야 80만 원. 부모님께 받은 용돈과 군대에서 받은 월급을 차곡차곡 모은 것이었다. 처음 80만 원을 쥐고 세계 여행을 간다고 했을 때 친한 친구들은 모두 '미친놈'이라며 내 무딘 현실감각을 나무랐다.
그때 우연히 워킹홀리데이에 대해 접하게 되었다. 여행 경비 마련으로 속 끓이던 나에게 이보다 달콤한 유혹이 어디 있으랴. 마치 하늘이 내린 선물 같았다. "일하고 여행하라!" 전단지 홍보 문구부터가 내 마음을 끌어당긴다. 하지만 문제는 영어였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외국인과 제대로 의사소통을 해 본 적도 없는 나다. 낯선 이국땅에서 말이 통하지 않는다면 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여행경비, 그리고 영어 . 다시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하지만 더 이상 망설이지 않기로 했다. 나는 무작정 워킹홀리데이를 신청했다.
워킹홀리데이의 결단을 내린 것만으로도 무언가 이룬 것 같았다. 부모님께서도 흔쾌히 승낙해 주셨다. 내가 여행을 얼마나 간절히 바랐는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신 분들이다. 비행기 티켓은 끊어 주시겠다고 했다. 나머지는 가서 부딪치고 깨져봐라, 라는 뜻이다. 그때 부모님은 기껏해야 한두 달 버티고 돌아올 것이라고 예상했단다. 호주행 티켓을 끊었다. 아는 사람도, 가진 돈도 없었고 영어도 안됐다. 가진 게 있다면 자신감과 열정, 두 가지 뿐이었다. 수중에 80만 원이 전부였지만 이국땅에서 새로운 세상을 만난다는 기대감에 마음은 달나라라도 갈 것처럼 붕 떠올랐다. 젊은 날 불확실성 속에서 가능성을 찾아가는 과정은 힘들지만 분명 의미가 있으리라.
영어는 짧고 삽질은 길다
15년 영어 깡그리 무너지다2006년 7월 21일, 나는 호주행 비행기에 타고 있었다. '정신 똑바로 차려야 돼!' 막상 비행기에 몸을 실으니 조금 긴장이 된다. 오전 8시, 호주 시드니 공항에 도착했다. 혼자 덩그러니 공항 로비에 서있자니 그제야 실감이 난다. '일단 무사 착지는 했는데 이제 어쩐다? 뭘 해야 하지?' 머릿속이 멍했다. 아직 행선지나 숙소, 아무것도 결정된 것이 없었다. 공항에 있는 안내소에 들러 근처에 마땅한 숙소가 있는지 물어보았다. 안내원은 알아듣지도 못할 빠른 말로 열심히 설명해준다. 내가 당황한 표정을 짓자 천천히 다시 설명해 주며 손가락으로 전화 부스를 가리킨다. 부스에 숙소 소개가 나와 있으니 전화를 해 보라는 것이었다. 부스 앞에는 수십 개가 넘는 광고 전단과 무료 전화가 설치되어 있었다. 낯선 영어를 열심히 읽어 제끼다 가장 싼 숙소 발견! 3일 이상 묵으면 공항에서 숙소까지 픽업도 해 준다고 한다. 1초의 망설임 없이 당장 수화기를 들었다. "Hello, My name is Sanggen ." 그 순간 말문이 막혔다. 이름은 말했는데 다음엔 뭐라고 말해야 하지? 눈앞이 깜깜해진다.
전화를 받은 직원이 이런 저런 설명을 한다. 정말이지 원어민의 말은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가방을 맨 채 수화기를 들고 서서 "Sorry, I don't understand"라는 대답만 몇 번을 했는지. 답답함을 넘어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 직원도 지쳤는지 "surname?"이란 말만 반복한다. 아! 내 성? "My name is Jung" 하고 대답하니 "Ok! wait!" 그러고는 끝이다. 아무것도 모른 채 전화부스 앞에서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10분쯤 지났을까? 인상 좋은 아저씨가 'Jung'이라고 쓴 팻말을 들고 나를 찾는다. 이제야 마음이 놓인다. 앙증맞은 미니버스에 탄 지 30여 분이 지나 작은 호스텔 앞에 도착했다. 어찌되었건 첫 관문은 넘겼다. 나는 무사히 공. 짜. 로 호주 시내에 도착했다. 이제 머물 숙소 하나를 구했을 뿐인데 온몸에 힘이 쭉 빠진다. 그래도 한국에 있을 때 입심이라면 뒤지지 않았던 나인데, 이름 하나 똑바로 말하지 못해 그렇게 당황하다니 . 한국을 떠나 현지에서 느낀 영어의 벽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높고 단단했다.
아르바이트를 찾아 삼만리
노숙자라니요!2006년 7월 22일, 호주에 도착한 이튿날. 지금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머릿속에 오로지 한 가지 생각만 맴돈다. 바로 일자리 구하기! 하루라도 빨리 일자리를 찾아야 한다. 뭐 하나를 하려고 해도 다 돈. 돈. 돈이었다. 이제 믿을 것은 내 몸뚱이 하나. 온전히 내 힘으로 생활해야 한다.
일자리를 구하기로 마음먹고 찾아간 곳은 '시드니 시티'라고 부르는 시드니 중심부다. 시드니 시티는 호주의 경제력 중심지이자 가장 많은 외국인이 머무르는 곳이기도 하다. '항상 사람들로 붐비니까 일자리를 구할 기회도 다른 도시보다 많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감에 대책 없이 찾은 곳이다. 며칠 동안 거리를 돌며 들른 상가와 레스토랑에서 정말로 아르바이트를 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배인들은 모두 내게 이력서를 요구했다. 아차! 이력서! 왜 이력서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못했을까? 진작에 필요했던 깨달음이 그제야 뒤통수를 때렸다. '이력서 한 장 없이 일자리를 찾다니 .' 당시 그들 눈엔 내가 참 어리숙해 보였을 것이다.
달콤한 첫 월급
호주에 왔으니 서구 문화를 접해 봐야겠다는 생각에 현지 레스토랑에서 일할 기회만을 노렸다. 하지만 내 넘치는 자신감이 문제! 짧은 기간이었지만 계속되는 취업 낙방에 숨죽은 배추처럼 기가 팍 죽었다. 그제야 현재 내 능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주제 파악을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달라진 관점으로 시드니 거리를 누비니,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다른 일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시드니에는 의외로 한국 상점과 한국 레스토랑이 많다. 야호! 난 쾌재를 불렀다. 한국 상점과 한국인 인터넷 사이트의 구인 공고를 통해 2006년 7월 26일, 드디어 취직을 했다. 시간당 8달러, 우리 돈으로 6천 원. 주 5일, 저녁 6시부터 새벽 2시까지 홀에서 주문을 받으며 영업 후 뒷마무리를 하는 것이 내 일이었다. 한 달 후 내 임금은 시간당 9달러로 올랐고 하루 8시간을 일하며 5만 원이 넘는 돈을 벌었다. 한국 식당이었기에 내 짧은 영어 실력에 대한 부담감도 적은 편이었고 무엇보다 매일 저녁 식사 한 끼가 해결됐으니까 만족스럽고 감사했다. 일주일이 1년처럼 길게 느껴지고 온몸은 천근만근 무거웠지만 가진 것 없이 혼자 날아온 타국에서 나는 낭만과 여유보다 더 값진 보석을 얻었다. 바로 열심히 흘린 땀에 대한 대가. 왠지 한 달 사이에 훌쩍 커 버린 느낌이다.
Dream house에서의 동고동락
이제 일도 구했고 따뜻한 보금자리만 구하면 호주 생활도 안정기에 접어들 것 같아 본격적으로 집을 알아보기로 했다. 집 선택에 있어 내가 가장 고려했던 점은 영어를 모국어로 쓰는 외국인과 함께 지낼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학원 코스를 밟을 형편이 안 됐던 나로서는 외국인과 동고동락하며 생활 속에서 부족한 영어 실력을 쌓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가장 훌륭한 영어 학습법이기도 했고. 거리의 전봇대나 게시판, 상점 앞에 붙어 있는 전단지를 통해 집주인과 통화도 하고 방문해 직접 집을 둘러보기도 했다. 그렇게 집을 보러 가고 다시 나오기를 수차례. 수십 통의 전화와 방문 끝에 나의 호주 생활 전체를 바꾸어 놓은, 비타민 같은 친구를 만났다. 그의 이름은 '안드레스', 콜롬비아 인이다. 이제 막 렌트를 시작하여 함께 지낼 사람을 모으고 있던 참에 전단지를 붙이자마자 나한테 전화가 걸려왔다는 것이다. 찬스다! 나는 곧장 집을 보러 갔다. 그동안 봐 온 집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멋들어진 외관.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좋았다. 섬세함이 묻어나는 인테리어와 가구들. '이거 사기 아니야?'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름다운 집이었다. 나는 외국인 친구에게 다른 말을 전혀 하지 않고 딱 하나만 강조했다. 이 집의 유일한 한국인이 되고 싶다고. 그 역시 흔쾌히 받아들였다. 입주를 기다리는 일주일 동안 어느 나라 친구들과 함께 살게 될지 정말 기대됐다. 이사 당일 아파트에 도착해 벨을 누르자 안드레스가 반갑게 맞는다. 인상 좋은 자매 트레이시와 리, 190센티가 넘는 훤칠한 키의 핀란드 친구 티무, 그리고 안드레스. 우리의 다국적 동거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120일 만에 1만2천 달러 벌기
영어에 말문이 트다외국인과 한 집에서 산다고 능사는 아니다. 몇 주 만에 영어실력이 쑥쑥 자라는 것도 아니고 독한 마음먹고 부딪치지 않으면 제자리걸음을 면치 못한다. 함께 살던 친구들은 모두 호주에서 대학원과 대학에 재학 중인 만큼 영어에 능통했고 말도 참 빨랐다. 문제는 나였다. 그들이 영어로 말할 때마다 나는 고개만 끄덕이고 애매한 웃음만 지어댔다. 상상해 보라, 그 모습이 얼마나 바보스러웠을지. 만나자마자 영어를 가르쳐 달라고 할 수도 없고, 반가워도 표현할 수 없고, 궁금한 것이 있어도 묻다 묻다 지쳐 진땀 빼고. 하지만 한 가지 내가 몸으로 느끼는 교훈은 힘들더라도 한 마디 한 마디 말문을 열수록 영어에 대한 공포심이 점점 사라져 간다는 점이다. 확실히 외국인 앞에만 서면 알던 영어도 사라지는 내 지우개 현상은 나아져 가고 있었다.
1만2천 달러, 난 부자다!호주에서의 통장 변천사를 말해 보자면 한국에서 가져 온 80만 원은 당시 환율로 1천 달러 정도. 통장은 만들자마자 500달러를 저금했다. 한동안 변화가 없던 통장은 한 달이 될 무렵 1천800달러를 돌파하더니 두 달째에는 폭발적으로 불어났다. 그리고 호주 생활 5개월, 가지고 온 돈의 14배에 해당하는 돈을 벌었다. 그렇게 여행을 위한 목표액은 약 4개월 만에 채워졌다. 1만 2천 달러! 나는 부자였다. 혹사당한 몸에게 휴식과 흥분을 안겨 줄 날도 멀지 않았다. '이제 온전히 나만을 위한 시간을 가질 거야.'
여행, 공부하고 떠나자돈! 즉 여행 경비를 마련하고 나서 해야 할 일은 본격적인 루트를 확정 짓는 것이다. 여행 루트를 짜려면 책도 읽고, 정보도 수집해야 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제대로 공부하고 떠나면 그만큼 시야가 넓어져 얻고 돌아오는 게 많다. 나는 한 달간 도서관에 가서 책과 인터넷을 뒤지며 여행에 필요한 정보와 개요를 다시 잡았다. 마음속에는 벌써 세계지도가 그려져 있었다. 세속과는 거리가 멀 것 같은 인도, 세계의 지붕 안나푸르나, 유구한 역사를 도시 곳곳에 간직한 유럽, 원시의 생명력이 느껴지는 아프리카, 그리고 중동 . 새로운 것을 접한다는 것, 공부한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내 첫 여행지는 인도로 최종 낙점되었다. 우선 인도로 떠날 디데이를 결정했다. 하지만 항공권을 구하는 것도 가고 싶은 곳이 많다보니 쉽지 않았다. 상황에 따라 일정이 바뀔 수도 있는 나는 세계일주 티켓 대신 몇 차례 시도 끝에 호주-인도- 영국-인도-싱가포르-호주를 왕복하는 티켓을 구할 수 있었다.
마음을 비우는 짐 꾸리기여행 경비도 마련했고 정보도 쌓았고 티켓도 구했다. 그러나 아직 한 가지, 중요한 것이 남았다. 바로 '짐 꾸리기'다. 짐 꾸리기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최고의 미덕은 필요한 것만 요령껏 가볍게 꾸리는 것이다. 욕심을 부리며 이것저것 가져갔던 짐이 몸과 마음의 짐이 된 기억이 있다. 그래서 무조건 5킬로그램! 상한선을 정했다. 하루 24시간을 함께 할 배낭이 무거우면 낭패다. 여행은 빈손으로 떠나도 돌아올 때는 항상 큰 보물을 얻어 온다. 몸의 짐이 가벼울수록 마음은 더 풍요로운 자유로 넘쳐 나리라. 이제 떠나는 일만 남았다. 1월 30일. 나는 인도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이름만으로 설레는 땅, 인도에 가다
나마스테 인디아!
더러운 강에서 뭐 하시나요?인도의 시작이 타지마할이었다면 인도의 마지막은 바라나시의 갠지스 강이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수많은 관광객들이 '힌두리즘'에 흠뻑 빠져 짧게는 며칠, 길게는 몇 달을 인도에서 지낸다. 나 또한 바라나시로 향하며 힌두리즘의 세례를 받고 인도의 매력에 풍덩 빠져 볼 참이었다. 그런데 웬걸. 갠지스 강에 도착하니 나를 반기는 건 누런 '똥물'이었다. 사람들은 그 똥물가에서 발가벗고 나무 태운 재를 온몸에 바른 채 사색하듯 한 곳에 앉아 있었다. 처음에는 당혹스러웠다. '뭐야. 이 사람들. 강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지저분한 물에 몸을 담그다니, 깨끗함과 불결함을 분별하지 못하는 게 아닐까?'
하지만 얼마 후 나는 그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게 되었다. '내가 생각하는 깨끗함과 더러움의 경계는 무엇일까?' 인도인들에게 갠지스 강은 영혼을 정화시키는 곳이다. 그렇기 때문에 온갖 더러운 것들이 떠다니는 그곳을, 죽은 사람의 시체를 버리고도 신성한 마음으로 목욕할 수 있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표면적 사실만이 강력한 진실이 되고 마는 현대 문명권 사람들에게 갠지스 강은 타지마할처럼 심미안을 만족시켜 주진 않는다. 신에게 도달하고 싶은 인도인들의 간절한 염원을 헤아리지 않고선 갠지스 강은 말 그대로 똥물에 지나지 않으니까 말이다. 여행에 있어 눈을 여는 것보다 마음을 여는 것이 중요한 건 이 때문이다. 강가에 앉아 사람들의 진풍경을 보고 있자니 점점 미궁에 빠지는 느낌이었다. 앞으로도 인도 여행이 물음표인 여행이 되지 않기 위해 최대한 마음의 고삐를 늦춰야겠다.
가보는 자만이 안다
깊이를 알 수 없기에 더욱 매력적인 땅사람들이 인도는 어떤 곳이었냐고 물을 때마다 딱 부러진 대답을 할 수 없어 말끝을 흐릴 때가 많다. 인도, 인도를 떠올리면 무슨 말부터 해야 할까? 매우 조심스럽다. 여행을 준비하며 막연히 상상하던 인도의 모습과 현지에서 먹고 자며 온몸으로 부딪친 인도, 그리고 떠나온 후 느낀 인도의 인상이 제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직접 다녀왔지만 아직도 그들의 삶과 문화, 종교 그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삶에 대한 저 소박한 긍정은 어떻게 가능할까? 극심한 가난 속에서 저런 여유는 어떻게 나오는 거지? 법적으로는 폐지됐다지만 뿌리 깊이 남아 있는 카스트 제도. 대물림 되는 그 계급 차별 속에서 어떤 희망을 안고 살아가는 걸까? 매 순간 인도를 떠올릴 때마다 머릿속에는 물음표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짧은 시간에 한 나라의 깊이를 이해한다는 것은 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