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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도둑

장회익 지음 | 생각의나무
공부도둑

장회익 지음

생각의 나무 / 2008년 4월 / 415쪽 / 12,000원

본 풀이



도시에 살다보니 이사를 자주 다니는 편인데, 그때마다 내게는 신경 쓰이는 물건이 몇 가지 있다. 그중 하나가 증조부 때 만들어놓은 우리 집 가첩(家牒)이다. 표면에 누렇게 기름을 매긴 한지 20여 장 분량의 필사본으로 그 크기가 어정쩡하여 도무지 둘 자리가 마땅하지 않다. 그래서 대개는 어디 깊숙한 서랍 밑바닥에 따로 놓았다가 이사 때가 되면 꺼낸다. 이제는 복사본도 넉넉히 만들었고, 우리말 번역본도 대략 하나 꾸며서 돌려보기에 한결 마음이 놓이지만, 그래도 원본이 제일 소중하지 않겠는가? 내용이라야 별 대단한 것이 아니다. 인동(仁同)장씨 족보에서 추린 우리 직계 조상들의 계보와 내 5대조의 행적을 중심으로 한 우리 집안 이야기가 좀 들어 있다. 그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아버지의 병세가 위독했다. 백약이 무효였다. 당시 13세이던 소년은 낮이면 약을 달여 드리고 밤이면 엎드려 하늘에 아버지의 회생을 빌었다. 이렇게 하기를 삼칠일(三七日)이 되던 날 밤 삼경에 홀연히 정신이 몽롱해지며 산곡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칼날 같은 바람이 살을 베는 듯했고 칠흑 같은 어둠에 지척을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앞에 커다란 물체 하나가 어른거렸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큰 호랑이였다. 잔뜩 경계하는데, 호랑이는 오히려 고개를 숙이고 꼬릴 흔들며 부르는 듯 멈칫 멈칫 앞서 걸어가는 것이 아닌가. 호랑이를 따라 어느 바위 아래 이르니 약 한 봉지가 놓여 있었다. 이를 아버지께 드려 복용케 했더니 그날로 병이 나으셨다.



이 무슨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이야기인가 하겠지만 사실은 그리 오래된 이야기가 아닌 내 증조할아버지(載相, 1882~1947)가 당신의 할아버지(錫兄, 1835~1895)에 대해 기록한 내용이다. 이 가첩은 1931년, 그러니까 태어나기 7년 전에 만들어졌다. 내 증조부는 족보와는 별도로 자신의 직계만을 중심으로 하는 가첩을 마련하여 내 5대조 이후 우리 집안의 내력을 좀더 소상히 알리려 한 것인데, 이 믿기 어려운 이야기를 거기에 써놓았다.



나의 할아버지는 12세, 할머니는 15세 때 결혼하셨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조혼 관습이 있기는 했으나 내 할아버지의 경우는 그것이 좀 심한 편이다. 이렇게 결혼하신 지 3년 만에, 그러니까 할아버지가 15세 되던 해에 장남인 내 아버지를 낳으셨다. 그러니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열다섯 살밖에 차이나지 않는다. 그만큼 조혼이 흔하던 시절이었는데도 나이 스물이 채 될까 말까 한 사람에게 대 여섯 살 되는 아이가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남 보기에도 좀 창피했던지 다른 사람 앞에서는 절대로 아버지라 부르지 말라는 엄명이 내려졌다고 한다. 나의 아버지(世善, 1918~1973)는 샌님에 가까운 성품이었다. 타고난 야생마인 할아버지와는 달리 무척 조용하며 수줍어하고 글읽기를 좋아했는데, 이것이 할아버지에게는 썩 탐탁한 것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집에 초빙되어 가르쳤던 이우영 선생의 중매로 경주 이 씨 집안에서 아끼는 규수와 혼인했다. 이 선생님의 말만 듣고 혼인을 결정했던 두 당사자는 당시 관례대로 혼례식 자리에 와서야 비로소 서로 처음 마주 보았다. 이듬해 범띠해인 무인년(戊寅年) 정월 스무엿새(양력 1938년 2월 25일) 새댁은 아들을 낳았다. 이렇게 내가 세상 빛을 보았다.

인삼과 산삼



사람이 시련을 겪어야 한다는 말은 흔히 듣는 말이다. 그런데 잘나가던 나에게 다른 것도 아닌 학업과 관련한 시련이 닥칠 줄은 꿈에도 몰랐다. 1950년 당시 학제 변경에 따라 6월에 학년이 바뀌었고, 나는 그때 막 6학년으로 올라갔다. 그러자 곧 6.25 전란이 시작되어 우리 가족은 오천 고향집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할아버지가 나를 학교에 아예 다니지 못하게 한 것이다. 학교에만 가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집안 일꾼들과 들에 나가 일하라고 하셨다.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다. 도무지 이유가 없었다. 이러한 조처는 교육에 대한 장기적 포석으로 우선 역경을 거치게 해 단련을 시키겠다는 계책으로 볼 수도 있다. 제대로 사람을 만들려면 온실에서만 길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내 할아버지가 정말 그러한 큰 뜻으로 그러셨느냐 하는데 의문이 많다. 그만큼 높은 교육적 식견을 가지고 사신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 이분의 의중에 무엇이 들어 있었느냐 하는 것을 지금 이 자리에서 어떤 방법으로 헤아리겠는가. 이러한 점에 관련하여 우리나라 옛 선비인 사숙재(私淑齊) 강희맹(姜希孟, 1424~1483) 선생이 쓴 「도자설(盜子說)」에 아주 적절한 이야기가 나온다.



도둑질을 업으로 삼는 아비와 아들이 있었다. 어느 날 밤 아비 도둑은 아들을 데리고 어느 부잣집에 들어갔다. 아들을 보물창고로 들어가게 하고는 아들이 보물을 챙기느라 정신이 없을 때쯤 밖에서 문을 닫고 자물쇠를 건 다음 주인이 들을 수 있게 자물통을 흔들어댔다. 주인이 달려와 쫓아가다 돌아보니 창고 자물쇠는 그대로 잠겨 있었다. 주인은 방으로 되돌아갔지만 아들 도둑은 창고에 갇힌 채 빠져나올 방도가 없었다. 그래서 손톱으로 박박 쥐가 문짝을 긁는 소리를 냈다. 주인이 소리를 듣고 "창고 속에 쥐가 들었나보군. 물건을 망치겠다. 쫓아버려야지" 하고는 등불을 들고 나와 자물쇠를 열고 살펴보려는 순간 아들 도둑이 쏜살같이 빠져나와 달아났다. 주인집 식구들이 쫓아오자 그는 연못가에 큰 돌을 빠뜨리고, 사람들이 "도둑이 물속으로 뛰어들었다"고 하며 그곳을 살피는 동안 그 집을 빠져나갔다. 집에 돌아온 아들은 아비에게 "새나 짐승도 제 새끼를 보호할 줄 아는데 제가 무슨 큰 잘못을 했다고 이렇게 욕을 보이십니까?" 하고 원망했다. 그러자 아비 도둑이 말했다. "남에게 배운 것은 한계가 있게 마련이지만 스스로 터득한 것은 그 응용이 무궁한 법이다. 더구나 곤궁하고 어려운 일은 사람의 심지를 굳게 하고 솜씨를 원숙하게 만드는 법이다. 네가 창고에 갇히고 다급하게 쫓기지 않았던들 어떻게 쥐가 긁는 시늉을 내고 못에 돌을 던지는 꾀를 냈겠느냐. 이제 지혜의 샘이 트였으니 다시는 큰 어려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제 천하의 독보적인 존재가 될 것이다." 후에 과연 아들은 천하제일의 도둑이 되었다.



사실 강희맹 선생이 '도둑' 이야기를 했지만 나 또한 도둑이기는 마찬가지다. 나는 단지 남의 창고에 들어가 물건을 훔쳐내는 도둑이 아니라 학문의 창고에 들어가 앎을 훔쳐내는 도둑일 뿐이다. 그런 점에서 나를 규정하는 가장 적절한 표현이 있다면 앎 도둑, 조금 좋게 말해 '공부꾼'이라 할 수 있다. 그 무렵에도 벌써 내가 작은 공부꾼 자질을 보였지만 그로부터 반세기가 훨씬 더 지나간 지금도 여전히 공부꾼 이외에 달리 내 자신을 드러낼 적절한 표현이 없다. 하지만 그 무렵 초등학교를 중퇴시킨 할아버지의 처사는 내 학습의욕을 단련시키려는 더 큰 의미의 교육과정이 아니라 아예 학습의욕을 버리고 교육을 접으라는 단호한 명령이었으므로 나로서는 이에 맞서 싸워 이기든지 아니면 공부의 길에서 완전히 탈락해 영구히 초등학교 중퇴의 삶을 살아가든지 해야 하는 절체절명의 투쟁이었다. 그러나 단호한 할아버지 때문에 결국 나는 1년 동안 학업을 중단하고 산으로 들로 일하러 다녔다. 또래 아이들이 모두 학교로 가는데 나 혼자 나무 지게를 메고 산에 올라가 그 아래 학교를 내려다보며 나무해야 하는 심정은 당해보지 않고는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세상이 다 앞서 나가는데 나 혼자만 뒤로 물러서 처진 것 같은 암담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저 내게 주어진 제한된 여건 아래 내가 할 수 있는 그러면서도 되도록 하고 싶은 것을 골라 하면서 사는 길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렇게 긴 1년이 지나고 내 학년 또래 다른 아이들은 모두 학교를 졸업했다. 그러나 초등학교를 졸업하지 않은 나는 중학교에 보내줄 사람도 없었지만 누가 보내주고 싶더라도 우선 국가시험에 응시할 자격부터 없었다. 그런데도 아직 한 가지 남은 길이 있었다. 다시 고등공민학교 진학을 시도하는 일이었다. 이때 60여 명이 입학했는데, 입학시험에서 나는 수석으로 합격했다. 그러나 전쟁 때문에 학교교육은 말이 아니었다. 그렇게 1년이 지나고 2학년이 되던 해 아버지는 다시 '도망치듯이' 집을 떠나셨다. 얼마 후 충북 음성군 감곡면에 있는 수리시설 공사현장에서 일하게 되셨다는 연락은 왔으나 공식적으로 우리에게 오라는 이야기는 없었다. 어머니는 이제 떠나야 할 강력한 구실을 찾았다. 내 교육문제였다. 이렇게 두면 죽도 밥도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이번에도 가벼운 제동이 걸렸으나 어머니는 강경하셨다. 그래서 1952년 6월, 나와 어머니 그리고 남녀 동생 한 명씩 이렇게 네 식구가 느닷없이 감곡 아버지 계신 곳으로 들이닥쳤다. 이로써 나는 짧고도 긴 2년 동안의 고향 거주를 마치고 다시 불확실한 미래를 향해 새로운 항해에 들어섰다.



사실 후다닥 떠나기는 했으나 막상 내 교육을 어떻게 이어갈지 막막했다. 내가 들고 가서 내밀 수 있는 서류라고는 호명고등공민학교 1학년 말 성적통지서와 2학년에 몇 달 다녔다는 재학증명서가 고작이었다. 당시 감곡에는 정규 중학교로 감곡중학교가 있었다. 문제는 이 학교에서 나를 받아줄까 하는 것이었다. 내가 지닌 하나의 강점은 고등공민학교 1학년 성적표에 60여 명 가운데 석차가 1위로 기재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그런데 다행히도 이 학교는 유연성이 좀 있었다. 당시 피난민이 많아 특히 서울 지역과 전출입이 많았다. 결국 나는 학교에서 요구하는 시험을 치고, 운 좋게도 2년 전에 놓쳐버린 버스를 되찾아 올라탈 수 있었다. 이것으로 내 2년간의 '야외생존훈련'은 일단 끝났다. 도둑의 상황에서 보면 이제 갇혔던 창고에서는 용케 벗어나 일단 큰길로 들어선 셈이었다. 그 후 나는 청주공업고등학교 기계과에 진학했는데, 일찍부터 이런 쪽으로 가서 빨리 좀더 깊이 공부해보겠다는 생각이 많았고, 아버지가 늘 수학과 과학에 관심을 가지고 계셔서 그 속에 어떤 신비한 내용이 담기지 않았나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벌써 기계과·전기과 등 '학과' 구분이 있어서 한층 '어른스러워' 보였다. 하지만 어머니는 반대했다. 기름때 묻은 옷 입고 다니는 게 별로 반갑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일단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해야 한다"는 자세였다.



넷째 마당 _ 교실 안과 밖



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 말이 있듯이 지금 되돌아볼 때 가령 내가 세칭 일류 고등학교로 진학했을 경우와 비교해보더라도 청주공고에서의 내 교육은 그다지 나쁜 것이 아니었다. 특별히 내 경우에는 담임선생님의 특별 배려로 수학과 영어를 남달리 깊이 학습할 수 있었고, 학교수업 부담이 상대적으로 가벼워 내 나름의 활동을 많이 할 수 있었던 것이 장점으로 꼽힌다. 하지만 입학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학교를 잘못 선택했구나 하는 생각을 많이 했다. 그 이유는 입학 전에 내가 기대했던 것과 너무 많이 달랐기 때문이다. 그 하나의 사례가 과학 관련 수업이다. 나는 사실 당시 공업고등학교를 요즘의 과학고등학교 정도로 여기고 지원했지만, 공교롭게도 우리가 물리 수업을 겨우 한두 주 받았을 무렵 물리 담당 교사가 다른 곳으로 전직하여 물리 수업을 거의 듣지 못했다. 뒤늦게 거의 졸업할 무렵 어느 분이 맡기는 했으나 그때는 이미 내 교육과는 실질적으로 무관한 상황이었다.



입학 당시 이러한 기대뿐 아니라 좀더 절실한 현실적 과제는 이것이 내 대학입시와 맞물려 있다는 점이었다. 당시 나는 공과대학으로 진학하려고 생각했는데, 여기에는 물리학 과목이 필수여서 어떻게는 물리학 공부를 해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래서 우리 학교 교재였던 『물리Ⅰ,Ⅱ』권을 혼자 읽어나가기 시작했는데 이게 어찌된 일인지 이 두 권이 아주 쉽고 재미있게 읽히지 않는가? 어쨌든 이것으로 나는 다시 물리학에 대한 흥미와 자신감을 얻게 되었다. 이는 학교 상황이 그렇게 만들어준 측면도 있지만 더 중요한 이유는 과거 '야생 경험'을 통해 익힌 독자적 학습능력이 주효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아주 어려서 익힌 독자적 학습능력은 다시 독자적 학습경험을 낳게 하고 이것이 다시 독자적 학습능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상승작용을 일으킨 것이다. 그러나 내가 만일 일류 학교에 가서 주로 수동적 교육을 받았더라면 이러한 독자적 학습능력이 오히려 감퇴되고 득점 위주의 평범한 학습 습관에 매몰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결국 나는 다행스럽게도 제도권 교육에 들어섰으면서도 자의반 타의반으로 여전히 야생의 상황과 비슷한 여건에 놓이게 되었고, 이것이 다시 내 야생성을 더 강화하는 쪽으로 치닫게 했던 것이다.



드디어 대학을 선정해야 할 때가 왔다. 학교는 일단 서울대학교로 정했는데 문제는 무슨 학과에 지원할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처음에는 내가 공고 기계과 학생이었던 만치 3학년이 거의 끝나갈 무렵까지도 공과대학 기계공학과로 가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막판에 생각이 바뀌었다. 아무래도 학문의 성격으로 보아 물리학이 가장 깊이 있는 학문으로 보인 반면, 기계공학은 내가 처음 생각했던 것만큼 그렇게 썩 내 적성에 맞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주변에서는 심지어 아버지까지도 만류하고 나섰다. 당시 담임선생님 논평은 딱 한마디, "너, 거기 가면 춥고 배고파"였다. 이분 말씀을 흘려들을 수 없는 것이, 이분 자신이 한때 물리를 진지하게 공부해보고 싶어 애썼던 분이어서 물리에 대한 식견이 무척 넓었다. 나도 좀 막막하다는 생각은 들었다. 제 먹을 것은 제 손으로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는 철학을 확고하게 가지고 있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물리학을 해서 먹을거리가 나올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러나 되도록이면 응용물리학에 관심을 기울여보겠다는 것으로 아버지를 설득하여 동의를 얻었다. 어머니는 사실 물리학이 무엇인지 전혀 감이 없으셨기에 그저 기름때 묻은 옷은 안 입지 않을까 하여 안도하시는 모습이었다.

다섯째 마당 _ 방황과 모색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물리학과'라는 것은 내게 꿈 그 자체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모인 친구들 또한 하나하나가 만만치 않은 존재들이었다. 입학만 해도 대단하다고 여기는 전국 명문 고등학교에서 수석을 차지했다는 자들 또한 수두룩하게 모여 있었다. 그밖에도 내색을 안 해 그렇지 각자 나름대로 '신화' 하나씩은 품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니까 나는 여기서 "어? 공고 출신도 하나 있어?" 하는 정도의 시선밖에 끌 것이 없었다. 실제 수업이 진행되면서 나는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한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되었다.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거나,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을 척척 해내는 모습이 보였던 것이다. "아, 나를 앞서는 친구들이 있구나…" 생각해보면 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내가 왜 남보다 늘 앞서야 하는가? 그런데도 이것은 내게 새로운 경험이었고, 그런 만큼 새로운 자극을 주었다.



배움의 되새김질



졸업과 함께 내게 불어 닥친 현실적 문제는 병역을 어떻게 치를까 하는 것이었다. 나는 이미 예비 신체검사에서 갑종합격을 받아놓은 터였다. 가만히 있으면 육군사병으로 가서 3년간 복무하게 되어 있었다. 혹 운이 좋아 외국 유학 수속을 끝내면 2년 만에도 제대하고 나오는 수가 있으나 그러한 것을 기대하기는 매우 어려운 실정이었다. 가장 무난한 길이 공군장교가 되어 서울에 있던 공군사관학교에서 물리학 교관으로 3년간 물리학을 가르치다가 제대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막상 공군장교 지원서를 제출할 무렵 직접 공군사관학교를 방문해 상황을 알아본 결과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것을 알았다. 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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