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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이 있는 아내는 늙지 않는다

김미경 지음 | 명진출판
김미경 지음

명진출판사 / 2007년 9월 / 310쪽 / 10,000원

DREAMS 꿈을 버리지 않은 사람은 언젠가 자신을 놀라게 한다



1. 죽어가는 당신의 꿈을 구출하라


내 강의를 들은 사람들은 "어떻게 그렇게 강의를 잘 하세요? 어떻게 그렇게 잘 아세요?"라고 묻는다. 글쎄, "많이 보고, 듣고, 공부하고, 준비한다"라는 말 외에 달리 답변할 말이 없다. 나는 지난 16년 동안 강의하면서 사람들이 언제 웃고 언제 우는지를 알게 되었다. 사실 알고 보면, 그들이 울고 웃는 것은 내가 울리고 웃겨서가 아니다. 내가 의도한 것과 관계없이 스스로 울고 웃는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골든타임이라는 것이 있다. 골든타임은 마음에 품고 있던 꿈이나 계획이 현실과 기가 막히게 맞아떨어지는 시점을 말한다. 가끔 역량의 크기가 얼마 되지 않는데도 세상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다면서 일을 찔끔하다가 그만두는 여성들을 만난다. 대표적인 예가 보험사에서 근무하는 설계사들이다. 보험설계사들 가운데 60%가 1년 안에 회사를 그만두고 떨어져 나간다고 한다. 보험설계사라는 직업은 무척 유망한 직업이다. 자신의 노력 여하에 따라 1인 기업으로 성장할 가능성도 다른 어떤 직업에 비해 크다. 특히 여성에게 매우 적절한 직업이다. 발전 가능성이 많고, 더 다양한 분야로 성장할 수도 있는데 왜 설계사들 가운데 절반이 넘는 사람이 중도에 포기할까. 바로 자신에게 올 골든타임까지 기다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A라는 보험설계사가 고객에게 명함을 주고 6개월 동안 세 번 찾아갔다. A가 고객을 처음 찾아갔을 때 고객은 보험에 관심이 없었고, 두 번째 찾아갔을 때 고객은 보험을 들 상황이 아니었다. 세 번째 찾아갔을 때는 볼일 때문에 정신이 없는 상태였다. 그러나 그 고객에게 보험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는 일이 생겼다. 친구 남편이 사고로 한창 공부해야 할 아이 셋과 전업맘으로 살아온 아내를 남겨두고 일찍 죽은 것이다. 당사자에게는 물론 주변에서 보기에도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다.



그런데 불행 중 다행히도 친구는 남편이 죽기 전에 종신보험에 가입해놓았다. 친구는 보험금을 타서 애들 교육 계획을 세우고 남은 돈으로 학교 앞에 작은 분식집을 차릴 수 있었다. 그런 상황을 지켜본 고객은 '보험이 이렇게 중요하구나!' 생각하며 보험에 들기로 결심했다. 그러곤 자신을 찾아왔던 보험설계사 A의 명함을 찾아 연락했다. 하지만 연락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마침 지나가던 보험설계사 B가 초인종을 눌렀고, 고객은 B에게 보험을 들었다. 먼저 찾아왔던 보험설계사 A는 운이 나빴고 나중에 찾아온 보험설계사 B는 운이 좋은 것처럼 보이지만, B는 때마침 찾아온 골든타임을 맞이한 것이고, A는 골든타임까지 기다리지 못한 것이다.



나는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연세대학교에 들어가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서울대가 아니고 연세대를 목표로 한 이유는 분식집에서 본 텔레비전의 한 장면 때문이었다. 친구들과 어울려 매운 쫄면을 하하거리며 먹던 토요일 오후, 식당 텔레비전에서는 '연고전'을 중계하고 있었다. 청주에 있는 대학생만 봐도 마음이 설렜는데 연대생들과 연대 응원단인 '아카라카'의 에너지 넘치는 모습은 나를 단번에 사로잡았다. 그날 이후 연대생이 되겠다는 것이 내 첫 번째 목표였고, 두 번째 목표는 아카라카에 가입하는 것이었다.



드디어 1983년 3월, 꿈에도 그리던 연세대학교 작곡과에 입학했다. 그렇지만 입학 첫날에는 그다지 유쾌하지 않았다. 입학식장에 들어서자마자 세련되고 예쁘게 차려입은 서울 애들에게 주눅이 들었다. 그날 나는 빨간 체크무늬 치마에 밤색 재킷을 입고 거기에 맞춰 빨간 구두를 신었다. 양장점을 하시던 엄마가 대학생이 된 기념으로 '서울 애들한테 기죽지 말라'고 지어주신 옷이었다. 나름대로 멋을 부린 건데 서울 애들과 있으니 촌스럽기 그지없었고 오히려 아줌마 같아 보였다. 작곡과 수석 입학이기도 했지만 시골에서는 부모가 자식 입학식에 으레 참석하는 것이려니 해서 아버지는 휴가를 내시고, 엄마는 양장점을 단골손님한테 맡겨두고 서울로 올라오셨다. 그런데 서울에서는 그렇지 않은 모양인지 입학식에 참석한 부모가 드물었다. 나는 부모님이 입학식에 오셨다는 것이 촌스럽게 느껴졌다.

입학식이 시작되자 아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나를 가리키면서 "쟤가 우리 과에 수석으로 입학한 애래"라며 수군거렸다. 세련된 옷차림을 한 애들 가운데 한 친구가 나한테 와서는 "네가 증평에서 온 김미경이니?"라고 말을 걸었다. 내가 머쓱해하며 그렇다고 대답하자, "아, 네가 수석을 차지한 애 맞구나? 난 차석을 한 혜준이라고 해" 하며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아이들이 하나 둘 내 주위로 모여들었다.

그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던 부모님은 자랑스러운 표정을 숨기지 못하셨다. 아버지는 너무 으쓱해지신 나머지 아직 친해지지도 않은 과 친구들을 떼로 데리고 가서 비싼 갈비탕까지 사주셨다. 아버지는 식사도 하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시골 증평에서 자식을 키우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애가 어떻게 공부했는지 구구절절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으셨다. 아이들은 재미있게 들어주었지만 나는 아버지가 그냥 빨리 가셨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했다.



어쩌면 내 인생은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카라카에 가입하기 위해 대강당 지하로 가던 날 확 바뀌어버렸는지도 모른다. 사실 내가 대학에 다니던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여자가 대학에 가는 것을 시집을 잘 가기 위한 코스쯤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음대는 최고의 간판이 되었다. 정해진 코스만 따라갔다면 나도 '사모님~~~~' 소리 들으면서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카라카 서클룸을 찾아가다가 코스를 벗어나 문이 약간 열려 있는 한 서클룸 앞에 멈춰 섰다. 열린 문 사이로 우수에 젖은 한 남학생의 옆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 남학생은 언뜻 보기에도 어려워 보이는 책을 읽고 있었다. '아, 여기에 들어갈까? 근데 뭐 하는 서클이지?'라고 생각할 때 룸에서 '복사꽃'이라 불리던 복학생 선배가 튀어나와 자기네 서클에 가입하라고 권했다. 그 선배에게 받아 덜렁덜렁 들고 온 책은 『해방 전후사의 인식』이었다. 교문을 지나다 검문이라도 당하면 엄청 문제가 될 책이었다. 집에 와서 별 생각 없이 펼쳐 든 그 책은 내 머릿속을 뒤흔들어 놓았다. 내가 지금 여기서 살아가고 있지만 그동안 전혀 알지 못했던 새로운 세상으로 나를 안내했다. 아카라카 치어리더의 꿈은 그렇게 해서 흐지부지되었다.



그리고 막걸리 마시고 꽹과리 치며 의기투합하고, 밤새도록 민족과 민주주의에 대해 토론하며 고뇌하고, 화염병을 만들고 데모하고, 그 우수에 찬 남학생과 연애도 하는 생활이 계속되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때 내가 했던 고뇌와 내가 쏟았던 열정이 국가와 민족을 위해 제대로 쓰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하여간 악보보다는 전단지나 사회과학 도서를 끼고 다니는 시간이 많았고, 음대 건물보다는 사회과학대 건물에서 주로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보니 연애하는 남자들이 대부분 그런 사람들이었다. 그런 남자 취향 때문에 친구들과 커플 모임이 있을 때는 가끔 창피하기도 했다. 실컷 먹고 놀고 나서 계산할 때 보면 친구들의 남자친구들은 가죽 지갑에서 돈을 꺼내는데 내 남자친구는 '찍찍이 지갑'에서 돈을 꺼냈다. 지갑을 열 때마다 '찍~' 하는 소리가 창피하기도 했다.



어느 날 친구가 끝내주는 미팅이 있다면서 나를 꼬드겼다. 친구 말대로 남자들의 프로필은 훌륭했다. 한눈에 보기에도 고급 분유를 먹고 자란 남자들이었다. 땟물 흐르는 남자들만 보다가 부티가 줄줄 흐르는 남자들과 마주앉으니 어색하기도 했지만 마음이 영 불편했다. 이야기를 나눠보니 무언가 죽기 살기로 해서 이루어낸 경험도 없었고, 필이 꽂힐 만한 히스토리나 근거도 없었다. 이야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내가 누군가를 배신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그 자리에 더 있을 수 없었다. 남자친구가 있던 것도 아닌데 그냥 '내가 왜 이 자리에 있지? 여기 있는 것은 내가 아닌 것 같아'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끔은 그때 '김중배의 다이아몬드'를 선택하지 않은 것을 후회할 때도 있다. 살다보니 돈이 없어 불편할 때도 많고, 근거 없는 돈이 오히려 쓰기 편하기도 하니 말이다.



인생이 참으로 아이러니하다는 사실은 증평이라는 촌 출신에 그것도 여자로 태어나서 가난한 남자를 좋아하는 못 말리는 취향이 오히려 지금의 내가 있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다지 좋지 않은 이런 조건들 때문에 더 노력하고, 꿈을 이루기 위해 도전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2. 꿈은 당신의 미래를 책임질 충분한 자산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우리나라 사람의 평균수명은 64~66세였다. 예순 살을 넘기기가 얼마나 힘들었으면 예순한 살에 크게 잔치(환갑)를 했을까. 그런데 요즘은 평균수명이 남자는 75세, 여자는 82세로 늘어났다. 평균수명이 늘어나고 오래 산다는 것이 좋기만 한 것은 아니다. 돈을 벌 수 있는 시간은 한정되어 있는데, 복지시설도 그다지 좋지 않은 나라에서 오래 산다는 것이 어떤 때는 대책 없는 일이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 정도다. 지금 30~40대의 평균수명은 90~100세 정도 된다. 자칫 '실수'하면 그중 3% 정도는 110세까지 산다고 한다. 당신은 100세까지 살 준비를 잘 하고 계시는가. 흔히 '노후자금'이라고 하는데, 그 보다는 '노후생계비용'을 준비해야 한다.



'열심히 키워놓은 아이들한테 의지하면 될 거야.' '자식들이 돌봐 주겠지'라고 생각하는가. 아이들은 이미 엄청난 경쟁사회에서 자신을 책임지고 살기에도 버거운 데다가 그 세대에서는 부모를 반드시 책임져야 한다는 의식도 약해진다. 우리가 100세일 때 자식 나이도 70~80일 텐데 늙은이들끼리 뭘 부양하고 부양받겠는가! '남편이 알아서 해주겠지'라고 기대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요즘은 40대 후반에서 50대 중반이면 은퇴한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게다가 남자들은 40대 중반을 넘어서면 여자에 비해 극도로 심약해진다. 그런데 여자는 남자보다 수명이 6~8년 정도 길다.



제일기획에서 발표한 '와이세대리포트'를 보면 흥미로운 내용이 있다. 65세 이상 되는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을 대상으로 일주일에 외출을 몇 번 하는지 물어봤는데, 할머니들은 매일 외출하고 하루에 밥을 네 끼 이상 먹는다고 한다. (옆집 가서 한 번, 앞집 가서 또 한 번 이런 식으로). 그에 반해 할아버지들은 일주일에 1~2회 정도 외출한다고 한다. 그것도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꼭 누가 죽어서 초상집 가는 경우이고, 누구에게 전화할 일도 거의 없다고 한다.



어쨌든 여자의 삶은 나이 들수록 훨씬 더 활동적이 된다. 폐경 이후에 더 많이 분비되는 남성호르몬의 영향도 있지만 여자로, 아내로, 엄마로, 며느리로 살면서 닥치는 여러 가지 일을 처리하면서 더 강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니 결국 남편에게 노후를 의지하기보다는 아내가 노후를 준비하는 것이 더 현명한 선택이다. 여자는 대부분 남편의 은퇴와 자신의 폐경기가 맞아떨어지는 나이 50이 되어야 닥친 현실에 놀라곤 한다.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우리가 기대하는 것보다 훨씬 더 오래 살게 될 것이라는 점과 생계책임자인 남편이 예상보다 훨씬 빨리 집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점에 놀랄 것이 아니라 그것에 대해 전혀 준비하지 못한 자신에 대해 놀라야 한다는 것이다.



작곡을 공부한 내 첫 직장은 광고회사였다. CM송을 만드는 일을 했는데 오래가지 못했다. 가장 큰 이유는 엔지니어들과 마찰이 생겼기 때문이다. 오랜 경력을 근거로 단단해진 그들의 고집과 CM송도 창작이라는 생각으로 밀고 나간 내 고집이 갈등을 일으켰다. 결국 심한 언쟁까지 하고 회사를 그만두었다. 생각해보니 그것은 기 싸움이었다. 하지만 엔지니어들과의 마찰이 회사를 그만둔 이유의 전부는 아니었다. 월급이 너무 적은 점도 꽤 크게 작용했다. 그 당시 월급이 25만 원 정도였는데, 어느 세월에 돈을 모으나 싶었다.



회사를 그만두고 피아노 레슨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음악은 내가 좋아하는 것이니 일단 재미는 있을 것 같았고, 회사원으로서가 아니라 주체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니 그 또한 흥미로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당시 레슨비가 한 달에 3만 원이었으니 10명만 가르쳐도 월급보다 많았다. 나는 사업계획을 치밀하게 세웠다. 시작하면 성공해야 직성이 풀렸기 때문에 대충 시작할 수 없었다. 따로 경영공부를 하지 않았지만 주먹구구식으로는 그 어떤 일도 성공할 수 없다는 개념이 서 있었다.



가장 먼저 전단지를 만들어 전봇대며 아파트 입구에 붙이고 다녔다. 경비원 아저씨 눈을 피해가며 붙이는데 '부끄럽다'는 생각보다 '어떻게 하면 많이 붙일까'라는 생각만 했다. 하지만 경비원 아저씨가 정말 무섭긴 무서워서 붙이다가 들키면 줄행랑을 치기도 했다. 하다하다 나중에는 경비원 아저씨를 아군으로 삼는 방법을 택했다. 담뱃갑을 쥐어드리며 애교 있게 부탁하는 방법이었다. 거절하는 아저씨는 없었다. 마음 통하는 사람들끼리, 없이 사는 사람들끼리 담배 한 갑이 엄청난 걸 바꿀 수 있다는 것을 20대 후반에 배웠다. 그 추운 날씨에 전단지 400장을 붙이고 다녔던 날, 밤새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었다. 서럽기도 하고 처절하기도 하고, 이유를 알 수 없는 오기가 나기도 했다. 그리고 그 눈물은 다음 날부터 보상을 받으면서 내가 그렇게 상냥하게 전화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목표를 가지고 덤벼들면 자신도 모르는 여러 가지 능력이 발휘되게 마련이다.



그렇게 하여 '김미경 피아노 교실'이 탄생했다. 나는 단순히 피아노 레슨 선생님으로 그 일에 접근하지 않았다. 선생님이자 피아노 교실 경영인으로 접근했다. 사업에 성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연구에 연구를 거듭했다. 그때 가장 큰 화두는 '어떻게 하면 고객을 만족시킬까' 하는 것이었다. 나온 답은 '고객을 감동시키자.' 그때까지만 해도 경영관련 책들을 읽지 않았는데 그런 생각이 들었다. 관심과 애정을 가지면 아이디어는 나온다는 것을 이때 체험했다.



피아노 교실을 시작한 뒤 남편 아침식사 메뉴는 무조건 토스트였다. 집에서 국이나 찌개 냄새, 반찬 냄새가 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원룸이라 주방이 드러나 있었는데 예쁜 커튼으로 가렸으며, 옷도 회사에 출근하는 사람처럼 입었다. 그곳은 내 집일 뿐 아니라 회사였던 것이다. 금방 입소문이 났다. 나도 예측하지 못한 정도의 반응이었다. 나중에는 레슨 받는 아이들이 60명 정도 되었다. 처음에 피아노 한 대로 시작했지만 나중에는 넉 대를 더 들여놓아야 했다. 잠은 그야말로 피아노 다리 사이에서 잤다.



1년 만에 원생 200명을 확보했고, 강사는 10명 정도 되었다. 내가 좋아하는 일로 시작한 사업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런데 그 기쁨과 보람은 유통기간이 그다지 길지 않았다. 피아노 교습을 시작한 지 3년쯤 지나자 갑자기 그 일이 재미가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엄마들과 접촉하는 일이 적성에 그다지 맞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게다가 내가 하는 일이 기계적이라는 생각이 자꾸 고개를 쳐들었다. 그와 함께 언제부터인가 알 수 없는 느낌이 자꾸 나를 잡아당겼다. 전처럼 신나지도 않았고 꼭 무엇을 잃어버린 듯 허전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굳이 변화의 결정적인 계기를 찾자면 오랜만에 친구들과 만난 일 때문이었다. 음대를 다녔으면서도 정외과나 신방과 친구들과 많이 친했는데 그 친구들은 거의 직장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 친구들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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