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
필 쿠지노 외 지음 지음 | 산해
사랑의 십자가와 지혜의 보리수 ┃ 정경일뉴욕 유니온 신학교의 제임스 메모리얼 채플은 중세적 분위기의 고딕 건축물이지만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종교 활동들은 진보적 현대성을 넘어 급진적, 미래적이기까지 하다. 이곳에선 다양한 이유로 차별받고 소외되고 배제당해 온 이들의 고통이 있는 그대로 표현되며, 그들에 대한 신앙적, 신학적 지지와 연대가 선포된다. 같은 뿌리인 유대교와 카톨릭 전통은 물론 불교 전통의 예불도 행해지곤 한다. 이처럼 제임스 채플은 기독교만이 아닌 이웃종교의 세계까지도 경험할 수 있게 하는 열린 공간이다. 내게 제임스 채플은 무엇보다도 불교 선(禪) 명상을 배우는 장소로서, 침묵의 세계와 일상의 세계를 주기적으로 오가며 삶의 의미를 새롭게 발견하게 해준 순례지다. 2년 전 가을, 경계 없이 신학하는 현경 선생의 '선 명상 : 선사들과의 대화' 수업을 수강한 후 미국인 친구 몇과 참선 모임을 시작했다.
어느 날 아침, 들고 나던 생각들이 일으키던 물결이 잔잔해지고 침묵의 세계로 들어가는데 문득 소리 없이 내 앞으로 다가오는 사물이 있었다. 내가 주로 앉는 맞은편에 서 있는 나무 십자가였다. 시각, 촉각, 후각이 의식에 와 닿기도 전에 내 마음 안으로 들어온 십자가가 물음을 던졌다. 십자가와 선 명상의 자리는 얼마나 먼가, 혹은 가까운가? 십자가에 달려 "다 이루었다"고 한 예수와, 보리수 아래서 "더 이상 오를 수 없는 깨달음"을 이루었다고 선포한 붓다의 삶과 뜻은 어떻게 다르고 또한 어떻게 같은가? 빛이 파동의 성질뿐만 아니라 입자의 성질도 갖는다는 현대 물리학의 발견에서처럼, 인간의 이성과 언어로는 이해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는 초월을 두 수행자가 달리 경험한 것은 아닐까? 십자가와 보리수가 하나의 빛 속에 있음을 보게 되었을 때, 내 물음은 역사의 붓다에게로 향한다. 그가 걸었던 길은 예수가 걸었던 길과 얼마나 달랐던 것일까? 그의 길이 끝나던 곳에도 십자가가 기다리고 있었을까? 붓다와 예수의 삶에도 분명한 차이가 있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예수가 종교권력과 정치권력 모두로부터 미움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반면, 왕의 아들로 태어난 고타마는 출가와 깨달음 이후에도 정치권력의 지원을 받으며 80여 평생을 살다 입적했다.
제임스 채플과 일상을 오가며 수행을 함께 해온 친구들끼리 가끔 서로의 변화와 진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때가 있다. 그때마다 나는 특별히 이야기할 만한 수행의 진보가 없다는 걸 안다. 존재의 실상을 꿰뚫어보는 푸른 눈을 갖게 된 것도 아니고, 진리를 깨달아 자유로워진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앎을 행동으로 옮길 용기가 부쩍 솟아난 것도 아니다. 그래도 꾸준한 수행을 통해, 그리고 두 스승 예수와 붓다와의 대화를 통해 조금씩 배워가고 있는 건 '믿음'의 의미이다. 믿음은 씨앗 같은, 그것도 너무 작아 잘 보이지도 않는 겨자씨 같은 거다. 하느님 나라도, 열반도 아직 씨앗 속에 감추어져 있고, 그 씨앗들은 폭력의 세력에 짓밟히고 있다. 하지만 전쟁터에서도 꽃이 피어나고 풀이 자라난다.
깨어남의 종이 울리고, 제임스 채플의 문을 나서는데 문득 기척을 느껴 뒤돌아보았다. 하나의 빛 아래, 하나의 땅 위에 나란히 서 있는 십자가와 보리수가, 근기는 약하지만 믿음을 잃지는 않은 한 수행자를 격려하듯 사랑과 지혜의 기운을 발산하고 있었다. 나는 수행의 자리에서 주운 믿음의 씨앗 하나를 들고 위험할 수도 있고 평화로울 수도 있는 순례지인 세상으로 걸어 나왔다.
기적을 찾아서 ┃ 앤 후드아버지가 폐암 진단을 받았을 때, 그것도 이미 수술마저 불가능하다는 통보를 받았을 때, 나는 아버지에게 기적을 찾아드리기로 결심했다. 우리 가족은 이미 의학적인 조치를 취하느라 그해 9월을 거의 반 소비한 상태였지만 도무지 희망은 보이지 않았다. 우리가 잡을 수 있는 최상의, 그리고 가장 합리적인 희망은 불가사의하게도 기적에 의존하는 것이었다. 우리 가족은 평소 현대 의학에 대해서는 좀 회의적이었다. 그보다는 주문이며 마법적인 힘을 가졌다고 알려진 물약, 기도의 힘을 믿었다.
아버지는 인디애나 주의 전형적인 와스프(WASP. White Anglo-Saxon Protestant : 미 대륙 초창기 이민자들의 자손으로서 미국 사회의 주류를 이루어왔음)로 이탈리아 출신의 왁자지껄한 대가족에 장가든 이후 어느 면에선 동서나 처남들보다 더 이탈리아 사람같이 된 분이었다. 키 187cm에 몸무게가 90kg이 넘는 아버지가 의사에 대한 농담을 하실 때면 곧 돌아가실 분으로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는 돌아가시도록 내버려둬서는 안 되는 분이었다. 만약 의학이 아버지에게 기껏해야 1년 반밖에 허락할 수 없다면, 아버지를 고칠 수 있는 진정한 희망은 하나밖에 없었다. "뉴멕시코에 기적의 흙이 있는 곳이 있대요, 가서 그걸 좀 가져올게요."
1810년 무렵 언젠가 수난 주간 동안 돈 베르나르도 아베이타라고 하는 남자가 치마요 언덕에서 십자가의 길을 연기했다고 한다. 그때 그는 갑자기, 어느 한 비탈에서 빛이 올라오는 것을 보았다. 빛 가까이로 더 다가가자 그 빛이 땅에서 올라오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손으로 땅을 파보니 그곳에서 십자가가 나왔다. 그는 인근 마을의 산타크루즈 교회로 달려갔고, 신부님과 교구 사람들이 십자가를 교회로 가져왔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 십자가가 없어졌다. 어찌된 일인지 십자가는 처음 발견되었던 장소로 되돌아와 있었다. 똑같은 일이 두 번 더 일어났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곳에 교회를 짓기로 했는데, 그것이 바로 엘산투아리오 교회다. 이 성당에 포치오(우물이라는 뜻)라 불리는 구멍이 있고, 그 속에 치유의 흙이 담겨 있었다. 엘산투아리오 교회에서 얻어 온 흙을 가지고 로드아일랜드에 도착했을 때 나는 어떤 일이라도 일어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혔다.
그 흙을 받은 지 24시간 만에 아버지는 호흡곤란에 빠져 급히 구급차를 타고 병원으로 실려갔다. 진단을 받은 지 석 달째 되는 크리스마스였다. 신앙에 위기가 닥칠 법한 일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정반대의 일이 일어났다. 아버지의 발작은 폐렴으로 판명되었다. 좀처럼 회복이 되지 않자 의사는 종양이 더 자랐을 거라고 추측하며 CT촬영을 하자고 했다. 나는 아버지한테 가서 검사 준비가 되셨느냐고 물었다. "아냐, 괜찮다." 아버지는 상당히 자신 있게 말씀하셨다. "종양은 없어졌다." "없어졌다구요?"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셨다. "여기 앉아서 암이 내 몸을 떠나는 것을 지켜보았다. 사악하게 생긴 시커먼 것이 요동치며 성질을 부리는 듯하더니 불꽃처럼 내 가슴에서 빠져나가더라." 나는 암덩이가 사라질 수 있으리란 걸 얼마든지 믿을 태세가 되어 있었지만, 그렇게 눈에 보이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리라고는 기대하지 못했다. 다음날, 병원에서 엄마의 전화가 걸려왔다. "앤!" 엄마는 놀라 소리쳤다. "CT촬영을 했더니 암이 완전히 사라졌다는구나. 없어졌어!" 수화기 너머로 아버지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엄마는 의사가 검사결과를 들고 병실로 들어올 때 했던 말을 되풀이하셨다. "이건 기적이야!"
아버지의 집 ┃ 메리 맥휴여기 있다. 우리 집. 진초록 셔터. 하얀 기둥, 붉은 벽돌 계단이 있는 식민지 양식의 하얀 집. 여긴 더 이상 우리 집이 아니다. 하지만 어릴 적 나는 여기 살았고 언제나 그 안으로 다시 한 번 들어가보고 싶었다. 그래서 1월의 어느 일요일 오후, 그렇게 해보기로 결심했다. 차를 몰고 세 번이나 그 집 앞을 왔다 갔다 하고 나서야, 구부러진 골목길을 따라 걸어가 초인종을 누를 용기가 생겼다. 자그마하고 상냥하게 생긴 여자가 문을 열었다. "귀찮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제가 이 집에서 자랐거든요, 들어가서 집안을 좀 둘러볼 수 있을까요?" 그녀가 미소지었다. "물론이죠."
현관을 지나 중앙의 응접실로 들어가며 나는 숨을 죽였다. 다시 어린아이로 돌아가고 있었다. 1930년대, 엄마와 아빠와 함께 이 집 안에서 더없이 안전하던 그때로, 열두 살에 낯선 도시로 이사해야 했던 끔찍한 기억, 사춘기 때 온몸을 마비시킬 것만 같았던 수줍은 성격, 정신지체의 동생 때문에 당황스러웠던 일들, 막내아이가 빛을 잃어가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던 괴로움, 이 모든 것들로부터 안전했던 시절, 나는 미래로부터도 안전한 채 일곱 살의 어린아이로 돌아가서 지금 여기에 있다.
웃는 얼굴의 젊은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나는 다 잃어버렸다. 지금은 어두운 이미지의 아버지만 떠오른다. 침묵, 찌푸린 이맛살, 인생에 대한 좌절만이 떠오른다. 아버지의 유일한 아들, 이름까지 그대로 물려받은 아들이 언제까지나 다른 사람에게 의존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무력한 존재로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 아버지로서는 견디기 힘드셨음에 틀림없다. 재키는 한 살 때 대뇌마비로 인한 뇌손상 진단을 받았다. 태어날 때 의사의 실수 때문이었다. 엄마는 늘 제대로 된 의사, 제대로 된 교사를 만날 수 있었더라면 아이가 괜찮았을 거라는 생각만 하고 계셨다. 그래서 엄마는 차를 몰고 30년대의 열악한 도로를 달려 아동병원을 찾아다녔고, 의사들이 재키는 햇볕을 많이 쬐어야 한다고 해서 플로리다에도 갔다. 공립학교를 설득해서 재키를 다른 아이들과 한 반이 되게 받아달라고 했다. 하지만 엄마는 곧 재키가 따라갈 수 없다는 사실에 직면해야 했다. 엄마는 이 모든 것을 혼자 해냈다. 아버지 없이. 아버지는 당신 속으로 깊이 칩거했다.
시간은 흘러, 내가 어른이 되어 아이를 낳아 기르고 있을 때 엄마가 말씀하셨다. 당시 아버지가 워싱턴에서 다른 여자와 사랑에 빠졌었다고. 아버지는 그 여자와 결혼하고 싶어했지만, 아내와 두 자녀를 버리면 실직을 당하게 될 거라는 소리에 그 관계를 정리하고 사실대로 털어놓으셨다. 나는 이 때문에, 아버지가 엄마에게 상처 준 것 때문에, 돌아가시는 침상 옆에 있을 때까지도 아버지를 미워했다. 아버지는 석 달간 호흡기에 연결된 채 누워 계셨다. 죽기를 기다리고 또 바라면서. 아버지 곁에 앉아 있었을 때, 나는 처음으로 아버지가 우리를 위해 많은 것을 포기하셨다는 것을 이해했다. 워싱턴의 그 여자를 정말 사랑하셨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이전에는 결코 들지 않았었다. 아버지가 그 여자를 다시 만난 적이 있을지 궁금했다. 아버지께 그 여자에 대해 물어보고 싶었지만, 집에서는 결코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난 왜 아버지께 당신의 삶에 대해 묻지 않았을까?
아래층으로 내려가니, 집주인이 커피 한 잔 하고 가라고 청했다. 그때 마법 같은 일이 일어났다. 그 집의 열일곱 살 된 아들이 피아노로 가더니 날 위해 베토벤의 소나타 「열정」 3악장을 훌륭하게 감정을 살려 솜씨 있게 연주해주었다. 마치 내 유년기가 음악으로 살아난 것 같았다. 눈을 감았더니 아버지가 일요일 골프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고 계셨다. 햇볕에 그을린 두 뺨과 내 두 딸의 눈동자와 같은 푸른 눈동자로. 아버지를 다시 한 번 뵐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면 1차 대전 때 해군으로 참전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펜실베이니아의 파올리에서는 어떻게 말을 타는지, 전쟁이 일어난 적이 없는 아이티에 가는 건 어떤 것인지 등을 여쭤볼 텐데.
젊은이가 피아노 연주를 마쳤다. 나는 그에게 내가 얼마나 감동을 받았는지 모르겠다면서 집으로 가져갈 선물이 되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젊고 건강했던 부모님을 내게 되살려준 집주인 부부에게도 감사했다. 하지만 그 이상의 것을 나는 얻었다. 내 어린 시절의 아버지, 내가 어릴 적에 경탄했던, 강하고 잘생기고 위트가 있는 완벽한 아버지를 발견했다. 잠시 동안 나는 그 집에서 아버지를 다시 되찾은 것이었다.
악마의 바람 ┃ 켄트 세인트 존포도주 저장고에서 나와 바람 속을 걸어가는데, 뭔가가 강하게 잡아끄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보이지 않는 힘에 이끌려 성당 위로 올라갔다. 텅 빈 거리는 곧 영혼을 쥐어뜯는 소리, 바람의 소용돌이가 점점 거세지면서 일어나는 진동 소리로 가득 찼다. 그 진동은 곧 애절하면서도 감미로운 노랫말로 변했다. 2월의 쌀쌀한 밤, 눈에 띄는 유일한 불빛은 고딕풍 스트라스부르 성당의 아름다운 뾰족탑만 비출 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들리는 소리라곤 잘 알아들을 수 없으나 의미로 가득 찬 고독한 음성뿐이었다. 성당 광장에 어두운 빛깔의 망토에 모피 모자를 쓴 사람의 모습이 드러나, 비로소 나는 이 세상 것 같지 않은 그 노랫소리가 어디서 들려온 건지 깨달았다. 몇 시간 동안이나 그 노래에 홀려 있노라니 그 역시 나를 알아보았는지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그의 이름은 에마뉘엘 미칼스키, 노래 가사는 히브리 말이었다. 에마뉘엘은 사람들에게 프랑스에 있는 유일한 나치 수용소인 나츠바일러 슈트루토프와, 그곳에 갇혀 있던 44,623명의 사람들을 상기시키기 위해 그 성당에서 노래를 부르는 듯했다. "이렇게 춥고 바람도 많이 부는 밤에 왜 나와 계세요?"라고 내가 물었다. "악마와 성당과 바람 때문이지요." 그가 말했다. 내가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하자 그는 전설 하나를 들려주었다.
악마가 새로 지은 성당의 장엄한 모습에 대해 전해 듣고 직접 보러 가겠다고 마음먹었다. 악마는 바람을 소환하여 올라타고 스트라스부르로 달렸다. 도착해서 성당을 바라본 악마는 그 웅대한 건물이 자신이 다스리는 어둠의 세력이 아니라 하느님과 빛에 바쳐진 것을 보고 크게 분노했다. 바람을 타고 그 기념비적인 건물 주변을 돌면 돌수록 분노는 커지고 마침내 폭발할 지경이 되었다. 격노한 그는 하느님의 예배당에 들어오는 사람들을 흩어버릴 요량으로 거대한 바람을 거기 남겨두기로 결정했다. 300년이 지난 지금, 심지어 여름에도 차갑고 쌩쌩한 바람이 성당 주변을 빙빙 도는 것이 느껴진다고 한다. 그래도 순례자와 관광객들이 옷을 여러 겹 껴입고 깃마저 세운 채 프랑스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당 중 하나인 이곳을 찾는 걸 보면 빛에 봉헌된 건물에 대한 인간의 감상을 악마의 바람이 저지하지 못한 것은 명백하다. 에마뉘엘 미칼스키는 다른 방법을 택했다. 희망, 기억, 믿음의 말을 전파하기 위한 수단으로 그는 악마의 바람을 이용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알사스 지방으로 가기로 한 다음 여행길에 나츠바일러 슈트루토프 수용소에 들러보기로 결정했다. 수용소에 도착하자 내 눈은 죄수들이 그러하듯 좀 더 마음을 진정시켜줄 무엇인가를 찾아 산 위쪽을 더듬기 시작했다. 수용소 안으로 들어서는데 유령 같은 안개 조각이 철조망 위로 지나갔다. 나야 잠깐 있다 떠날 것이 분명한데도 등골이 오싹했다. 수용소 주변을 걸어 다니다가 "Lanterre Des Morts"라고 씌어진 표지판을 보게 되었다. 뒤적뒤적 프랑스어 사전을 꺼내는데, 누군가가 팔목을 꽉 붙들었다. "미국인이신가요?" "네, 미국인입니다." "나는 뮐러라고 합니다. 저 표지판이 무슨 뜻인지 알려드리지요." 뮐러 씨는 그 표지판이 죄수들을 화장하고 남은 재가 뿌려진 곳을 나타낸다고 말했다. 갑자기 큰 흐느낌이 터져 나와 우리 사이의 침묵을 깼다. 뮐러 씨는 어깨를 들먹였다. 아마도 그는 이 수용소에서 죽은 가족과 친구들에 대한 생생한 기억으로 괴로워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를 부축하고 진정시키려고 애썼다. 그때였다. 뮐러 씨가 헐떡이며 "나는 이곳의 간수였소"라고 말한 것은.
눈자위가 붉게 물든 그는 2월의 어느 추운 밤에 대해 말했다. 그때 스트라스부르를 방문했는데, 애절하면서도 감미로운 음성이 들려와 자신을 성당으로 이끌었다는 것이다. 그 음성의 주인공은 에마뉘엘 미칼스키였고, 2월의 어느 추운 밤 나를 이끈 것과 같은 목소리였다. 정말이지 에마뉘엘은 "악마의 바람"을 좋은 목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순례자로 하여금 깊은 내면을 들여다보게 하는 그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