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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의 바이올린

진창현 지음 | 에이지21
제1현



바이올린과의 만남

내가 여섯 살 때의 이야기다. 집 밖에서 묘한, 하지만 매력적인 소리가 들려왔다. "엄마, 저 사람 뭐야?" "저 사람 바이올린을 켜는 사람이야." 나는 밖으로 나가 아이들과 함께 음악에 몸과 마음을 맡겼다. 사실, 그 남자는 약을 파는 행상이었다. 초등학교 2, 3학년이 되어서도 바이올린의 음색이 들려오면 나는 즉시 집을 뛰쳐나갔다. 아마 지금 듣는다면 한심한 연주였을 테지만 어린 시절의 기억은 소리보다는 감동이 더 선명하게 남는다. 이것이 나와 바이올린의 첫사랑 같은 만남이었다. 초등학교에 들어간 이후, 바이올린과의 두 번째 만남을 가졌다. 우리 집에 학교 선생님이 하숙생으로 들어온 것이다. 아이카와 선생님은 바이올린을 가지고 있었는데, 처음으로 바이올린을 만져본 것이 그때였다. 이번에는 귀와의 만남뿐 아니라 손가락과의 만남도 이루어진 것이었다.



어린 바이올리니스트

바이올린을 켜는 것은커녕 악기를 구입하거나 만져볼 수조차 없던 가난한 내게 선생님이 바이올린을 익숙한 악기로 만들어준 것은 지금 생각해보면 그야말로 기적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사건이다. 선생님은 시간이 있을 때마다 내게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었고 나는 하루하루가 천국 같은 기분이었다. 아이카와 선생님에게는 두 곡만을 배웠다. 역시 아이는 기억력이 빠른 것인지, 아니면 열심히 연습한 덕분인지 내 실력은 눈에 띄게 향상되었다. 비록 두 곡밖에 연주할 수 없었지만 나는 이미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가 된 듯한 기분에 잠겨 있었다.



나는 김천중학교에 입학했다. 중학교에 진학하기는 했지만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이미 우리 집에는 나를 학교에 계속 보낼 수 있을 정도의 경제적 여유도 없었다. 결국 나는 일본으로 건너가기로 결심했다. 어머니에게 일본으로 건너가겠다는 결심을 털어놓자 어머니는 쓸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엄마, 반드시 훌륭한 사람이 되어서… 그래서… 돌아올게요."



구라마 덴구의 나라

항구에 도착하자 형의 모습이 보였다. 하숙집에 도착해서 형에게 건넨 것은 한 개를 남겨둔 어머니의 주먹밥이었다. 형은 정말 맛있게 먹었다. 나는 형의 배려로 야간중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기대에 부풀어 건너온 일본. 그러나 학창 생활은 참혹했다. 일을 해서 더 많은 돈을 벌어야 하기 때문에 수업을 빼먹는 경우가 일상다반사였다. 일본에서 종전을 맞이했다. 종전 후의 혼란스런 시대에 대학에 진학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언젠가는 대학에 다니겠다는 꿈을 꾸면서 나는 중학 시절부터 일을 하고 있었다. 종전 후, 조선인들 대부분은 조국으로 돌아갔다. 나는 자력으로 하카다에 남았다.

친구를 통해 하야카와에서 일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나는 서둘러 하야카와로 향했고 일을 얻는 데 성공했다. 현장으로 향하자 진주군인 흑인들이 불도저 두 대를 가져와 작업하고 있었다. 나는 엉성한 영어 실력으로 불도저를 운전하는 미군 병사의 통역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런 와중에 공사 현장의 인부 한 명이 이런 말을 해주었다. "너, 영어를 꽤 잘한다. 요코하마로 가서 린타쿠를 몰아. 그게 돈벌이가 되는 거야. 영어를 조금만 하면 일할 수 있어." 나는 요코하마로 떠날 결심을 굳혔다.

린타쿠는 자전거를 이용한 인력거 같은 것으로 요즘으로 치면 택시다. 린타쿠를 운전하는 동료들 중에서도 나는 특히 친절하게 통역해 주었기 때문에 미군 병사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 덕분에 돈도 많이 모을 수 있었다. 린타쿠를 모는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계기를 찾고 있던 시기에, 역시 동료가 이런 말을 들려주었다. "너, 대학에 들어가라. 이런 일을 직업으로 삼으면 안 돼." 그도 조선인이고 대학생이었다. 그래서 나는 메이지 대학 2부 영문과에 입학했다. 언젠가 대학을 졸업하면 조국으로 돌아가 모교의 영어선생님이 되겠다는 희망이 가슴속에 끓고 있었다.



대학 3학년 때, 내 인생을 뒤흔드는 커다란 사건이 발생한다. 선생님이 되겠다는 어린 시절의 꿈도, 그림에 대한 흥미도 그 모든 것을 한꺼번에 날려버린, 내 운명을 좌우하는 거대한 사건이었다. 그리고 어린 시절에 아이카와 선생님에게 배운 바이올린. 지금까지 잊고 있었던 존재가 갑자기 거대한 모습으로 떠올라 내 운명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특공대 전투기와 바이올린

오전 수업을 마치고 구내식당으로 가기 위해 메이지기념관 강당 앞을 지날 때였다. 강당 앞에, '바이올린의 신비'라는 커다란 간판이 세워져 있었다. 강사는 이토카와 히데오 교수라고 써 있었다. 이토카와 교수는 특공대 전투기의 설계자로, 바이올린과는 인연이 전혀 없는 인물인데 그런 인물이 왜 바이올린을 주제로 강의를 하는 것일까? 나는 거기에 흥미를 느꼈고, 또 신비감을 느꼈다. 그날, 이토카와 교수의 강연은 물리학적인 입장에서 스트라디바리우스의 소리는 주로 어떤 파장으로 성립되는가 하는 문제를 이론적으로 해명하는 것이었다. 그는 스트라디바리우스의 소리를 해명하는 것은 영원한 수수께끼이고 신비이며 인간의 힘이 미칠 수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즉 현대 사회에 이것을 재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내 귀에는 이 '불가능'이라는 말이 매우 자극적으로 들렸다. 어둠 속에 한 줄기 빛이 비쳐들었다. 바이올린을 연주할 수 없다면 제작은 할 수 있지 않은가.



바이올린 연주는 스무 살을 넘은 뒤부터 본격적으로 배웠지만 실력을 갖추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바이올린을 제작하는 것이라면 가능하다. 인생을 걸고 착수할 만한 가치는 충분히 있다. 이제 더 이상 물러설 곳도 없다. 후회도 하지 않는다. 하늘의 계시를 받는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무모한 결심인지, 바이올린 제작이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것보다 얼마나 더 고통스런 길인지, 당시 나는 전혀 깨닫지 못했다.



제2현



바이올린을 만드는 농부

나는 1956년에 대학을 졸업했다. 나는 시간이 있을 때마다 시모쿠라 악기점을 드나들며 도쿄에 있는 몇 명의 바이올린 기술자를 소개받아 제자로 받아주기를 청했다. 그러나 그때마다 일손이 남아돈다거나 내가 조선인이라는 이유에서 문전박대를 당했다. 그런 일이 계속 이어지자 의욕도 점차 잃어 갔다. 나는 직장을 구할 수 없었기 때문에 아르바이트로 파친코 가게에서 일해 보았지만, 나는 바이올린의 음색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 없었다. '바이올린을 만들어야 해. 그날의 강연, 그 감동을 도저히 잊을 수 없어.' 나는 나 자신을 고무시켰다. 그러던 어느 날, 신문기사를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환성을 질렀다. 기사에 의하면 나가노현 나카노 시에서 농사를 지으며 바이올린을 만들고 있는 농부가 있다고 하는데, 그 이야기는 드라마틱한 내용이었다. 전쟁 중에 그는 유태계 러시아인의 집에서 스트라디바리우스(러시아 황제의 궁전에서 사용되었던 바이올린)를 보았고, 그 집을 계속 방문하여 바이올린에 종이를 대고 그 형태를 신중하게 복사했다. 전쟁이 끝나자 그는 그것을 바탕으로 바이올린을 제작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하늘로 뛰어오를 듯이 기뻤다.



나는 그날로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고 배낭과 침낭을 짊어진 채 나가노행 열차에 올라탔다. 현관문을 두드리자 그 농부가 나왔다. 나는 바이올린 제작 방법을 배우기 위해 찾아왔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농부는 뜻밖의 대답을 해주었다. "내 본업은 사과 농사야. 눈이 내려 아무 일도 없을 때, 찾아온다면 바이올린을 제작하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네." 나는 나카노 시내로 돌아와 일단 일을 찾아보기로 했다. 일자리를 찾은 곳은 고물상이었다. 고철장수를 해서 어느 정도 돈을 모은 나는 집세를 지불하고 방을 얻어 겨울이 오기를 기다렸다. 마침내 겨울이 찾아와 나는 다시 사과 과수원을 찾아갔다.

농부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놀랍군. 이런 곳에서 버텨내다니. 사실, 바이올린 제작기술은 다른 사람에게 가르쳐주는 게 아냐. 전에, 다시 찾아오면 가르쳐주겠다고 말한 건 자네가 포기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야. 안됐지만 가르쳐줄 수 없네. 돌아가게." 나는 화를 억누르고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그 설계도를 보여주실 수 있나요?" 반 년 동안이나 기다리게 했던 것이 미안했던 듯 그는 설계도를 보여주었다. "설계도대로 만든다고 해서 소리가 제대로 나오는 것은 아냐. 이런저런 경험과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하나하나 터득해야지…." 그는 설계도를 즉시 둘둘 말기 시작했다.



나카노 역까지 오는 동안 시모쿠라악기점의 담당자가 건네준 편지가 떠올랐다. 나는 그 주소의 주인인 스즈키 시로 선생 댁을 방문했다. "1년만이라도 좋습니다. 부디 가르쳐 주십시오." 나는 간절하게 매달렸지만 소용이 없었다. 다만 나의 열성이 전해졌는지 모르겠지만, 그는 공작용 칼과 바이올린을 깎을 때 사용하는 대패를 한 개씩 내주었다. 내가 고맙다는 인사를 한 뒤에도 뚫어지게 그 도구를 들여다보고 있자 시로 선생은 나를 공방으로 안내하여 실제로 바이올린을 깎는 장면을 보여주며 이렇게 말했다. "큰 공장에 취직해서 배우도록 하게. 중요한 것은 스스로 연구해서 터득해야 해." 잇달아 거절을 당하자 나도 역시 진이 빠졌다. 나는 눈앞에 있는 바이올린 제작용 목재를 바라보면서 별생각 없이 질문을 던졌다. "이 재료는 어디에서 구하는 거죠?" 지금 생각해보면, 이것은 내 인생을 결정짓는 질문이었다. 나를 안쓰럽게 생각한 시로 선생은 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대답해 주었다.



나는 시로 선생의 말을 가슴에 담고 눈이 내리는 길을 걸어 영림서를 찾아갔다. 영림서에서 나무를 구해 껍질을 벗긴 뒤에 다시 마쓰모도의 시로 선생 집을 찾아갔다. 재료까지 구해서 다시 찾아가자 시로 선생은 역시 놀라는 모습을 보였지만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자네가 기술을 배울 수 있는 장소는 기소 후쿠시마의 스즈키바이올린 공장밖에 없어." 그 말을 듣고도 납득할 수 없었던 나는 신슈 근처를 이곳저곳 유랑했다. 여기저기에 찾아가서 제자로 받아달라고 간청했지만 모두 거절당했다. 나는 결국 기소로 향하기로 했다. 기소 후쿠시마로 향했을 때는 이미 1957년 8월의 무더위가 기승을 부렸다. 당시 내 나이는 이미 28세였다.



애벌레와 반딧불이

나는 역사 대합실에서 숙박을 했다. 나는 매일 아침 역사를 나와야 했다. 그리고 밤이면 벤치에 침낭을 펴고 잠을 청했다. 식사는 식빵을 사서 기소 강변에서 먹었다. 역사에는 스즈키바이올린 전시용 부스가 있어서 매일 그걸 들여다보았다. '오늘은 반드시 스즈키바이올린 공장에 가야지.' 그러나 좀처럼 결심을 굳히지 못한 채 시간은 흘러갔다. 그런 식으로 2~3일을 보낸 아침에, 나는 스즈키바이올린 공장을 방문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사장에게 면회를 신청하여 시로 선생의 소개장을 건네주고 사정을 설명했다. "자네, 조선인인가?" 나는 맥이 빠졌다. "그렇습니다." "미안하지만 안 되겠어." 나는 포기할 수 없었지만 다시 역사에서 잠을 자는 생활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 이후, 1주일 정도 스즈키바이올린을 매일 찾아가 거절을 당하는 나날이 되풀이되었다. 그사이, 나는 애벌레처럼 침낭 안에 머리까지 파묻고 잠을 자고 있었다. 역사 안에는 대량의 모기가 날아다녔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기소산맥의 임도를 만들기 위한 공사현장에서 4년을 보냈다. 현장에는 단풍나무나 가문비나무가 많았다. 나는 틈틈이 바이올린을 만들기에 적합한 재료를 모으면서 바이올린 제작에 들어가기 전의 에너지를 이곳에서 충전했다. 기술자의 제자로 들어가거나 공장의 직원으로 취직하는 길은 단절되었다. 하지만 운명은 나를 점차 나무 쪽으로, 바이올린 쪽으로 이끌어주려 하고 있었다. 내게는 그것이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하늘의 계시처럼 느껴졌다. 나는 좋은 나무를 발견하면 회사에서 운영하는 제재소에서 바이올린 제작에 적합한 두께로 제재해 달라고 하여 창고 한 모퉁이에 쌓아두었다.

나는 산을 내려올 때마다 스즈키 공장을 찾아갔다. 그럴 때에는 항상 선물로 바이올린을 만드는 재료를 가지고 갔다. 재료를 가져가면 사장은 크게 기뻐하였다. "이건 정말 좋은 재료야." 사장은 얼마든지 구입할 테니까 좋은 목재를 가지고 오라고 하였다. 이것이 꽤 괜찮은 장사가 되었다. 나는 가끔씩 공장으로 가서 창문을 통해 공장 내부를 들여다보았다. 바이올린 제작기술은 눈으로 훔쳐보고 배워야 했다. 그리고 언젠가는 바이올린을 직접 만들어 봐야겠다고 결심했다. 다행히 도구와 재료는 서서히 갖추어졌다. 남은 것은 여유 있는 시간이다. '내 년 겨울에는 제1호 작품을 만들어보자.'



위험천만한 노동

직접 만든 판잣집에서 생활하게 된 나는 인부로 일하는 한편으로 시간이 날 때마다 바이올린을 제작하는 생활을 2년 반 동안 계속했다. 사실, 나는 나카노에서 고물장수를 했을 때 처녀작품을 만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바이올린이라고 부를 수 있는 악기가 아니었다. 그런대로 바이올린이라고 부를 수 있는 바이올린이 완성된 것은 기소 후쿠시마의 이 판잣집에서였다. 판잣집에서 바이올린을 만드는 날이 늘어나자 바이올린 소리가 새어나갔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은 나를 정신병자 취급을 하기 시작했다. 정신병자 취급을 받은 나는 그때마다 고독감을 느끼며 슬픔에 젖었다. 하지만 결국 그런 고통을 잊도록 해준 것도 바이올린 소리였다. 새롭게 제작할 때마다 소리가 좋아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그것이 유일하게 내 마음을 지탱해 주었다.



기소에서는 스즈키바이올린이 주최하는 바이올린 교실이 열리고 있었다. 마루야마 쓰네오 씨는 우체국장이었는데, 취미 삼아 바이올린 교실을 운영하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바이올린 연주도 배웠지만 그런 한편으로 바이올린을 만들면 즉시 가지고 가서 연주해 보라고 하고 평가를 받았다. "흠, 소리가 전보다 부드럽군. 음량도 좋고. 자네, 실력이 꽤 늘었는걸." 마루야마 선생은 늘 그런 식으로 칭찬해 주었다. 판잣집에서의 생활에도 어느 정도 익숙해졌고 바이올린 연습도 재개하여 마음의 여유가 생길 무렵, 한국의 어머니에게서 처음으로 답장이 왔다. 처음으로 받아보는 어머니의 편지를 나는 밤새도록 되풀이해서 읽었다. "편지 잘 받았다. 네가 바이올린을 제작한다는 소식을 듣고 마음이 놓였다. 몸은 괜찮니? 밥은 제대로 먹고 있니?" 나는 도구상자에서 어머니에게 받은 공작용 칼을 꺼내 가만히 움켜쥐었다. "어머니…."



로망스

그녀를 만난 이후에도 나는 더욱 일에 집중했다. 그녀도 내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만약 내가 결혼한다면 그녀밖에 없다고 마음속으로 결심했다. 그녀는 아버지에게 결혼을 전제로 나를 만나겠다고 이야기한 듯했다. 나와 그녀의 아버지, 사촌오빠는 기소의 관광명소인 '기소 가교'의 온천에서 머무르며 나와 그녀의 결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일찍 아내를 잃었기 때문에 딸이 빨리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마음도 겹쳐서 그녀의 아버지는 우리의 결혼을 허락했다.



우리는 1961년 3월 3일, 기소 후쿠시마에서 조촐한 결혼식을 올렸다. 사실, 나는 어머니를 결혼식에 모시고 싶었다. 하지만 경제적인 사정이나 어머니의 건강 때문에 단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어머니에게 편지를 썼더니 다음과 같은 답장이 돌아왔다. "하나밖에 없는 며느리를 보고 싶구나. 나는 그때까지 절대로 죽을 수 없다." 나도 언젠가 아내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들을 데리고 어머니를 방문할 날이 올 것이라고 꿈꾸고 있었다.



아내가 생기면서 나는 그때까지 이상으로 열심히 일했다. 하지만 나는 항상 아내에게 미안했다. 그래서 하루 빨리 이사를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우리는 힘든 신혼 생활을 1년 정도 계속하는 한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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