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생목록
재생목록이 비어 있습니다.
-
-
0:00 0:00
화면 너비 (여백)
좁게
보통
넓게
최대
배경 테마
글꼴
바탕/명조
돋움/고딕
글자 크기
작게
100%
크게
줄 간격
좁게
보통
넓게

의지의 힘

새무얼 스마일즈 지음 | 21세기북스
새무얼 스마일즈 지음

21세기북스 / 2007년 4월 / 449쪽 / 18,000원



1 네 안의 가능성을 깨워라




조지 스티븐슨은 1781년 6월 9일, 뉴캐슬-온-타인(Newcastle-on-tyne)에서 가까운 와일램이라는 탄광촌에서 태어났다. 스티븐슨의 부모님은 스코틀랜드 국경을 넘어 이곳 탄광에 정착했고, 아버지 로버트 스티븐슨은 낡은 증기기관에 불을 때는 화부로 일했다. 육남매 중 둘째로 태어난 조지 스티븐슨은 여느 노동자의 아이들과 다름없는 생활을 했다. 조지는 학교에 다니는 대신, 아버지의 직장에 도시락을 갖다 주거나 어린 동생들을 데리고 노는 일을 맡았다. 당시 화부의 봉급으로는 아무리 절약해도 아이들을 입히고 교육시킬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조지가 맡은 책임 중에는 동생들이 트램로드(말이 수레를 쉽게 끌 수 있도록 나무를 깔아 만든 선로)쪽으로 가지 못하도록 지키는 일도 있었는데, 당시만 해도 사람들은 수레를 오로지 말이 끌 수 있는 것이라고 믿었다.



조지는 조막만한 손이 여물자 농사일을 돕기도 하고 아버지가 일하는 탄갱에서 석탄 속의 잡석이나 불순물을 골라내는 일을 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석탄마차를 끄는 말을 몰기도 했는데, 마침내는 아버지의 조수로 일하게 되었다. 기다리던 승급이었지만 탄광의 석탄이 고갈되면서 조지 가족은 새로 문을 연 위닌 탄광 근처로 이사를 해야 했다. 이곳에서 열다섯 살의 조지 스티븐슨은 친구 빌 코와 함께 다리 부근에 세워진 양수기 기관을 맡아 일하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 워터로에 새로 생겨난 탄광에서 양수기 기관을 점검하는 기관사가 되었다. 아버지 로버트 스티븐슨은 이곳의 화부였는데, 기관사는 화부보다 더 높은 직위였다. 이때 조지의 나이 열일곱 살이었다.



습관은 세상을 헤쳐 나가는 데 있어 가장 든든한 철옹성으로, 우리는 그것을 신념이라고도 부른다. 가난한 부모에게서 절제·절약·인내를 물려받은 조지 스티븐슨은 무슨 일을 하든지 작은 문제를 소홀히 생각하지 않고 완벽하게 처리하고자 노력했다. 스티븐슨은 화부로 일할 때부터, 특히 기관사가 된 이후에는 줄곧 기관과 기관의 동력 장치를 공부하고 연구했다. 그리고 여가 시간에는 부품을 닦거나 기계를 분해하여 기관의 구조와 조작법을 연구했다. 스티븐슨은 기관에 대해 완전히 파악하게 되자, 와트와 볼턴이 만든 멋진 증기기관에 대해서도 알고 싶었다. 하지만 호기심을 풀려면 책을 읽어야 했다. 간혹 글을 아는 동료들은 신문이나 책을 읽어주었는데 그 속에는 스티븐슨의 흥미를 자극하는 정보와 지식이 수없이 많았다.



열여덟 살이 된 스티븐슨은 하루 열두 시간씩 기관을 점검하며 일주일에 12실링(60펜스)을 벌게 되자, 야학에서 3펜스의 돈을 지불하고 글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열아홉 살부터는 일주일에 4펜스를 내고 수학을 배웠다. 또한 이 무렵, 단짝 빌 코가 윈치기관(탄갱에서 석탄을 끌어올리는 데 쓰인 기관)의 제동수로 일하게 되자, 그에게서 열심히 제동기술도 배웠다. 그리고 1802년 23살에 마침내 돌리 탄광의 제동수로 일하게 되었다. 이로써 스티븐슨은 돌리 탄광에서 가장 많은 보수를 받는 직원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2 연약한 뿌리에서는 꽃이 피지 않는다



조지 스티븐슨은 근면성과 끈기, 호기심에서 우러나온 특별한 습관 외에는 이렇다하게 내세울 게 없었다. 어릴 때부터 천재성을 보인 것도 아니고 남들보다 교육도 덜 받았다. 하지만 그는 늘 무언가를 하고자 하는 의지로 불타올랐다. 돌리 탄광에서 제동수로 일하는 동안 스티븐슨은 1주일에 약 1파운드(100펜스)의 임금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시간이 남으면 또 일을 했다. 그는 여가 시간에 동료들의 신발을 만들거나 수선하기 시작했는데, 한 번은 그가 연모해오던 이웃마을의 참한 처녀 패니 헨더슨의 신발에 밑창을 대는 일을 맡게 되었다. 그때 스티븐슨은 얼마나 들떠 있었는지, 수선을 끝낸 신발을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다가 친구들에게 자꾸 꺼내 보이며 "얼마나 멋진 작품인지 좀 보라고!"라며 소리쳤다.



스티븐슨은 윌링턴 키의 밸러스트 힐(Ballast Hill)에서 제동수로 근무할 때 패니 헨더슨과 결혼했다. 밸러스트 힐 정상에는 부두에서 쏟아낸 화물을 비탈면 위로 끌어올리는 고정기관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스티븐슨은 바로 그 기관의 제동을 담당했다. 스티븐슨은 밤이면 이 기관을 좀더 효율적으로 개선하기 위해 영구운동(Perpetual Motion, 외부에서 에너지를 공급받지 않아도 자동적으로 움직이는 기계 운동) 연구에 빠져 있었다. 그는 기계의 모형을 만들기까지 했는데, 이 기계에는 나무 바퀴가 달려 있었고, 그 주위에는 수은으로 채워진 유리관이 끼워져 있었다. 바퀴가 돌아가면서 수은이 아래쪽에 있는 관으로 흘러 들어가면 장치는 계속해서 스스로 운동을 했다. 그는 이 기계를 설치하여 석탄 적재소와 탄광을 연결하는 자동 급경사 철도를 설치했다. 석탄을 가득 실을 수레가 내려가면서 빈 수레를 비탈 위로 끌어올리는 방식인 이 철도는 그 지역에 설치된 최초의 자동 철도였다. 하지만 스티븐슨은 이것이 영구운동이라는 것을 증명하지는 못했다.



1803년 12월 외아들 로버트가 태어났고, 다음해 스티븐슨은 일대에서 가장 유명한 탄광촌인 킬링워스의 웨스트무어 탄광의 제동수가 되었다. 하지만 얼마 후 그는 스코틀랜드로 떠나게 된다. 스코틀랜드의 한 탄광 소유주가 자신의 탄광에서 사용하고 있는 증기기관을 감독해 달라는 제의를 했는데, 스티븐슨은 얼마 전 죽은 아내로 인해 큰 상실감에 빠져 있었다. 스티븐슨은 어린 로버트를 이웃에 맡기고 스코틀랜드로 떠났다가 1년 후 다시 돌아와 웨스트무어 탄광의 제동수로 복귀했다. 이때 아들 로버트는 어느새 학교에 갈 나이가 되어 있었다. 교육을 못 받은 불이익을 뼈저리게 느낀 스티븐슨은 부모님을 봉양하는 등 어려운 형편이었지만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아들을 교육시키리라 마음먹었다.

스티븐슨은 여가시간에 괘종시계와 손목시계를 수리하고 신발을 만들거나 수선했으며, 구둣골을 만들어 구둣방에 팔기도 했다. 심지어는 광부들이 입는 옷을 마름질하기도 했는데, 지금도 킬링워스 탄광에서는 그가 만든 옷본으로 옷을 해 입는다고 한다. 스티븐슨은 이렇게 부업을 하면서도 기관의 세부 구조를 부지런히 공부했다. 그리고 얻은 지식을 기회가 올 때마다 현실적인 이익으로 전환시켰다. 웨스트무어에서 제동수로 일할 때, 그는 탄갱에서 석탄을 끌어올릴 때 사용하는 밧줄이 쉽게 마모되자 풀리(로프를 걸어 회전시키는 바퀴)를 설치하여 밧줄의 마모를 현저히 줄였다. 이때는 나폴레옹 전쟁의 여파로 밧줄 가격이 터무니없이 비쌌기 때문에 그의 발명품은 비용을 크게 절감시켰다.



스티븐슨은 자신과 관련 없는 일이라도 문제를 보면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1810년, 그랜드앨리라는 탄광 소유주의 모임에서 탄광을 개발하기로 하였는데, 수갱의 물을 퍼내기 위해 설치된 양수기가 웅덩이의 물을 퍼내지 못했다. 스티븐슨은 탄광 감독에게 기계에 문제가 있는 것 같다고 지적했으나 감독은 일개 기관사이자 제동수인 그의 의견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하지만 양수기는 계속 문제를 일으켰다. 탄광의 인부들을 통해 이 사실을 들은 스티븐슨은 어느 토요일 오후 탄광으로 직접 가서 기관을 살폈다. 그리고 수갱 관리자를 통해 탄광 감독에게 자신이 수리할 수 있음을 전하도록 했다. 1년 동안이나 양수기 문제로 골치를 앓은 감독은 비로소 스티븐슨의 말을 받아들였다. 스티븐슨은 기관을 완전히 해체했고, 1년간 문제를 일으켰던 기관은 하루 만에 탄갱의 물을 말끔히 빨아올렸다.

스티븐슨은 자기계발을 절대 게을리 하지 않았다. 저녁이 되면 연구에 몰두하는 한편 가까이에 사는 수학자 존 위검으로부터 심오한 수학의 원리들을 배웠다. 일이 바빠 위검의 집에 갈 수 없을 때는 동료를 보내 자신의 문제 풀이가 정확한지 검사받고 새로운 숙제를 받아 오게 했다. 위검은 화학과 물리학에도 조예가 깊은 사람이었다. 이처럼 해박한 지식을 가진 스승과 교류하는 것은 스티븐슨에게 큰 학문적 성장을 주었다. 스티븐슨은 이제 100파운드의 연봉을 받고 있었지만 부업을 계속하고 연구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연구하는 동안 그는 물속에서 연소하는 신기한 전등도 발명했으며, 탄갱에서 석탄을 끌어올리는 줄감개를 개발해내기도 했다.



스티븐슨은 이처럼 항상 자신이 연구하여 얻은 지식을 실용지식으로 전환시켰는데, 특히 그가 발명한 안전등은 화재로 인한 큰 피해를 막은 매우 유용한 것이었다. 당시 탄갱에서는 메탄가스로 인해 탄갱에서 화재가 자주 발생했다. 그러자 스티븐슨은 공기 관을 이용하여 화재의 위험을 막고 조명도도 더 높인 '도관 안전등(Tube Safety Lamp)'을 발명해 냈다. 킬링워스 탄광에서는 이 안전등을 곧바로 사용하기 시작하였고 이후로 사고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 발명품에 대한 명성은 다른 발명가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비슷한 시기에 험프리 데이비의 안전등이 발표되었는데 그것은 스티븐슨이 만든 것과 똑같은 것이었다. 스티븐슨은 탄광의 기관사로서 과학과 문학의 지식이나 소양을 전혀 갖추지 못한 무식쟁이였고, 그의 경쟁자는 왕립학회의 존경을 받는 교수이자 철학자였다. 언론에서는 험프리 데이비의 안전등에 관해서만 기사를 실었고, 데이비의 안전등은 눈부신 업적으로 평가받았다.

1814년 로버트는 아버지의 기대대로 뉴캐슬의 브루스 상급하교에 진학했다. 로버트는 토요일 오후가 되면 아버지가 있는 킬링워스의 집으로 갔으며, 그때마다 《미술과 과학 레퍼토리》나 《에든버러 백과사전》을 들고 갔다. 스티븐슨 부자는 이 책들을 함께 읽고서 대화를 나누며 저녁시간을 보냈는데, 어쩌다 존 위검이 놀러오면 활발한 과학토론이 이어지기도 했다. 로버트는 뉴캐슬 도서관에 소장된 책들을 대출할 수 없었기 때문에 대신 그 책들을 읽고 공부해서 아버지에게 설명해주기도 했다. 그러면 스티븐슨은 아들에게 기관이나 기계의 설계도를 내밀면서 기계의 구조와 작동에 관해 설명해 보라고 하였다. 부자는 이런 훈련을 통해 어떤 복잡한 기계의 설계도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웠다.



3 포기하지 않으면 불가능은 없다



다른 역사적인 발명들도 마찬가지겠지만 철도의 시작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1602년 보몬트(Beaumont)는 자신이 소유한 뉴캐슬 부근의 탄광에서 강나루까지 목재 레일을 깔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 운송 방식이 전국의 주요 탄광지역으로 퍼져나갔다. 그러나 이 원시적인 목재 선로에서 석탄차를 끄는 건 여전히 말이었다. 따라서 선로상의 견인력을 개선할 기계장치가 절실히 필요했다. 당시 발명과 설계에 빠져 있던 수많은 사람들이 세상에 다양한 의견을 내놓았는데, 그중 가장 돋보인 것이 제임스 와트가 발명한 증기기관이었다. 와트의 증기기관은 산업 전체에 어마어마한 동력을 제공하면서 무역업자와 제조업자의 수가 급속히 늘어났다. 하지만 와트는 응축기관의 개선에만 매달려 증기기관차를 성공시키지는 못했다.



1802년에는 콘월의 주석 광산 감독자였던 리처드 트레비식이 일반도로에서 이용할 수 있는 증기자동차에 대해 특허를 획득했다. 그의 증기자동차는 증기의 탄성으로 피스톤을 움직이는 원리로 제작된 최초의 고압기관이었다. 하지만 트레비식의 증기차 역시 실용화 단계로 발전되지는 못했다. 트레비식은 자신이 만든 증기차를 선로에서 시험운전 했는데, 덜컹거리며 요란하게 움직이는 기관차 때문에 주철로 만든 레일이 계속 훼손되었다. 또한 레일이 차체의 무게를 견뎌내지 못해 기관차가 이탈하기도 했다. 트레비식은 몇 번 실험을 해도 개선되지 않자 포기하고 말았다. 트레비식 외에도 여러 발명가들에 의해 기관차가 많이 등장했지만 마찰에 따른 동력 손실이 크거나 수리가 어렵고 실험 중에 기관이 폭발하기도 했다.



조지 스티븐슨 역시 '이동식 기관(Travelling Engine, 기관차)'을 효율적인 동력 기관으로 만들기 위해 고민하고 연구했다. 그러던 차에 탄광소유주의 의뢰에 의해 기관차를 제작하게 되었다. '블러처'로 불린 이 기관차는 스퍼기어를 통해 동력을 바퀴에 직접 전달하였기 때문에 기관차 자체의 하중으로 바퀴가 레일에서 이탈하지 않았다. 1814년 7월 25일, 그는 블러처를 킬링워스 철도에 올려놓고 곧바로 성능을 실험했다. 기관차는 30톤의 화물을 실은 8량의 화물차를 오르막길에서 시속 6.5킬로미터로 끌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경제성이었다. 스티븐슨의 기관차는 비용 면에서 말과 별 다른 차이가 없었다. 만약 스티븐슨이 증기분사 방식을 이용해 속도를 단번에 두 배로 끌어올리지 않았더라면 블러처는 실패작으로 남았을 것이다.



스티븐슨은 블러처의 문제점을 보완한 두 번째 기관차 제작에서 트레비식의 방식을 응용했다. 트레비식은 증기를 배출하는 연통을 도입했는데 이는 단지 소음을 줄이기 위해서였을 뿐 동력과 관련된 원리를 알지 못했다. 그래서 기관차를 개선시킬 수 없었던 것이다. 반면 스티븐슨은 증기가 연통을 통해 배출되면 곧바로 배출되는 것보다 속력이 빨라진다는 것을 발견했다. 증기가 연통에 들어가면 화실에서 연기로, 혹은 연통 내의 상승기류로 연소를 촉진하면서 기관의 동력을 두 배 이상 증가시켰던 것이다. 스티븐슨은 다른 발명가가 먼저 발명해놓고도 실용화시키지 못한 것을 그 특유의 끈기로 결국 성공시켰다. 더욱이 이 발상은 당시에 크게 주목받지 못했지만 철도의 운명을 좌우할 만큼 중요한 것이 되었다.



4 이성으로 비관해도 의지로 낙관하라



1816년 9월 30일, 스티븐슨은 뉴캐슬의 주철업자인 로시와 공동으로 레일과 좌철 개량방식에 대한 특허를 인정받았다. 스티븐슨은 기관차의 문제점이 선로가 완전하지 못한 점과도 결부된다고 생각했다. 당시의 선로는 높이가 일정하지 않았고 이러한 기복은 동력 손실을 가져왔다. 또한 레일과 부딪쳐서 발생하는 충격과 요동으로 바퀴가 선로를 벗어나곤 했다. 스티븐슨은 레일과 레일의 불완전한 결합으로 발생하는 기복을 줄이기 위해 레일을 고정시키는 좌철(chair, 너트 밑에 끼우는 둥글고 얇은 쇠붙이)을 고안해 냈다. 또한 그때까지 주철 레일에 이용되던 맞붙임 접합법(butt-joint, 두 개를 맞붙여 붙이는 방법) 대신 겹침 접합법(half-lap joint, 가장자리 두께의 반을 잘라내어 맞붙이는 방법)을 이용하여 선로의 길이를 더 확보하고, 마차와 기관차를 부드럽게 움직일 수 있도록 하였다.



특허를 위한 스티븐슨의 보고서에는 기관차를 개량한 내용들도 적혀 있었는데, 무엇보다도 가장 기발한 부분은 용수철 시스템이었다. 그는 보일러에서 생성되는 증기가 용수철 기능을 수행하는 방식을 고안해 냈다. 당시의 기관은 전체 하중이 차륜 네 개에 고르게 분산되지 않고 대각선 방향의 두 개로 쏠리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기관차가 요동칠 때마다 레일과 좌철이 파손되고 기관차가 레일을 이탈하기도 했다. 스티븐슨은 보일러 내부와 연결된 네 개의 실린더를 장치했다. 실린더 안에는 막대가 달린 피스톤이 들어 있었는데, 실린더가 증기압을 피스톤 상부에 가할 때의 압력이 기관 하중을 4분의 1로 감소시켰다. 즉 네 개의 움직이는 피스톤이 충격을 완화하는 용수철 역할을 하게 되면서 네 바퀴의 축이 항상 동일한 하중을 받게 된 것이다.



스티븐슨이 제작한 이 기관차는 시속 6~8킬로미터의 속도를 내며 매일 킬링워스의 철도를 오갔다. 하지만 스티븐슨의 이 중요한 발명은 사람들의 관심밖에 있었고, 정부는 유료 도로 건설에 영향을 미칠 증기차 연구에만 어마어마한 지원금을 쏟아 붓고 있었다. 다행스러운 것은 실용적이고 대중적인

전문 열람 제한

미가입 상태이므로 요약본의 일부만 제공됩니다.
더 깊이 있는 내일의 통찰력과 지식 에너지를
프리미엄 무제한 이용권으로 충전해 보세요!

멤버십 가입 / 결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