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격이 운명이다
존 맥케인 외 지음 | 21세기북스
신뢰 - 신뢰는 불가능한 도전을 가능하게 만든다 아문센과 스콧이 남극점에 도달한 이후 아일랜드 출신 탐험가 새클턴은 그 이상의 남극 탐험 계획을 세웠다. 북동해 웨델 해에서 서부 로스 해까지 2,900킬로미터를 횡단하기로 한 것이다. 새클턴은 유빙의 습격에 견딜 수 있게 특수 제작된 배(인듀어런스 호)를 구입하고, 위업달성에 참가할 대원들을 모으기 위해 다음과 같은 광고를 내고 5천 명의 지원자 중 27명을 선발하였다.
"위험한 여행에 함께 할 사람을 찾습니다. 급료는 적고 뼈가 으스러지도록 추울 것이며 오랫동안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있어야 합니다. 항상 위험이 도사리고 있으며 무사히 돌아오리란 보장도 없 습니다. 성공할 경우 대가는 명예와 인정뿐입니다."
원정은 1914년 8월 1일 시작되었다. 사우스 조지아 포경 기지를 떠난 인듀어런스 호는 6주 동안 고된 항해를 했다. 하루만 더 가면 남극 대륙에 닿을 참이었는데 배는 광풍에 휩쓸려 유빙 안에 갇혀버렸다. 열 달 동안 원정대는 빙하에서 빠져나오려고 몸부림쳤지만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1915년 11월 21일 새클턴은 배를 포기하기로 결정했다. 며칠 후 배는 거대한 빙하의 압력을 받고 부서져 가라앉았다. 이후 원정대는 형편없는 식량으로 버티며 유빙 위에 텐트를 치고 살다가, 1916년 4월 16일 빙하에 갇힌 지 열 다섯 달만에 구명보트를 타고 바다로 나갈 수 있었다. 일주일 동안 보트를 타고 광풍 속을 항해한 끝에 작은 바위섬(엘리펀트 섬)에 도착한 대원들은 이곳에서 물고기와 펭귄을 잡아먹으며 다섯 달 가량을 버텼다.
인듀어런스 호가 침몰한 후 새클턴은 갈 데까지 간 원정대를 인간적으로 통솔하기 시작했다. 그는 엄청난 고난 속에서도 지칠 줄 모르고 대원들을 격려했으며 같이 희생하고 의논하고 농담하고 노래를 불렀다. 그들이 낯설고 무자비한 얼음 나라에서 최후를 맞이할 것이 확실했지만 새클턴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엘리펀트 섬에 도착한 지 일주일 후 새클턴은 대원 5명과 함께 구명보트(제임스 케어드 호)를 타고 1,200킬로미터를 항해하여 사우스 조지아로 구조 요청을 하러 가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프랭크 와일드에게 지휘권을 넘겨주고 섬에 남아 있는 22명을 보살피도록 하였다. 새클턴은 제임스 케어드 호를 타고 사나운 풍랑 속에서 17일을 항해했다. 천신만고 끝에 사우스 조지아에 도착했지만 해안을 잘못 찾았기 때문에 기지로 가기 위해서는 빙하로 뒤덮인 산을 넘어야 했다. 1916년 5월 20일 새클턴은 대원들과 산을 넘고 또 넘는 36시간의 사투 끝에 포경기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몸은 더러운데다 얼어붙어 있었고 지쳤다는 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지친 상태였다.
이튿날 새클턴은 포경선을 타고 엘리펀트 섬으로 떠났다. 그들이 100킬로미터 정도 항해했을 때, 지겨운 유빙을 만나 포클랜드 제도로 떠밀려갔다. 여기서 새클턴은 우루과이 정부에서 어선을 빌려 6월 10일 항해를 재개했지만 얼음 때문에 돌아가야 했다. 다시 새클턴은 돈을 빌려 범선을 대여하여 7월 12일 항해를 재개했지만 이번에는 항해 도중 엔진이 멈춰버렸다. 8월 30일 네 번째 도전을 시작했다. 이번에는 칠레 정부에서 빌린 증기선으로 마침내 엘리펀트 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섬에 남은 대원들을 지휘하던 프랭크 와일드는 구명보트에 탄 대장의 모습을 발견하던 순간을 "물에 거품이 이는 걸 보고 기뻐서 기절하는 줄 알았죠. 말을 할 수 없었어요."라고 회상한다. "모두 무사합니까?" 새클턴이 멀리서 소리쳤다. "네, 무사해요." 다들 큰 소리로 대답했다. 그러자 누군가가 "하나님, 감사합니다."라고 외쳤다. 한 사람도 잃지 않았다. 어니스트 새클턴 경은 목표에 충실했고 대원들도 그 점을 잊지 않았다. 구조 후 60년이 지난 어느 날, 원정대의 일등 항해사였던 라이오넬 그린스트릿은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는지 질문을 받았다. 그는 짤막하게 대답했다. "새클턴이었으니까요."
희망 - 희망은 절망을 위한 신의 선물이다1940년 6월 23일 미국 테네시주의 가난한 흑인 가정에서 태어난 윌마 루돌프는 다섯 살이 되기 직전 성홍열과 폐렴을 심하게 앓았다. 고비를 넘긴 듯 보였을 때 이상한 증세가 나타났다. 윌마의 한쪽 다리가 휘기 시작한 것이다. 의사가 왕진을 와서 살펴보더니 소아마비로 걸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윌마는 절망의 수렁에 빠졌다. 학교 다닐 나이가 되었지만 집안에 갇혀 지내야 했던 그녀는 침대에 누워 하루 종일 울었다. 절망에 빠진 윌마를 구한 것은 가족이었다. 윌마는 어머니와 함께 토요일마다 내시빌의 메하리 의과대학으로 가서 물리치료를 받았다. 버스로 왕복 2시간이 걸렸고 당시 흑인은 법에 따라 버스 뒤에 타야 했다. 어머니는 의사들이 하는 것을 주의 깊게 관찰했다가 집에 와서 똑같이 치료해 주었다. 매일 하루에 네 번 어머니 또는 언니와 오빠가 윌마의 다리를 마사지했다. 윌마 또한 재활 치료에 열심이었다. 엄청난 고통이 뒤따랐지만 그녀는 점점 다시 걸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커져갔다.
일곱 살 때 다리 보호대를 차고 목발을 짚은 채 학교에 다닐 수 있게 된 윌마는 목발과 보호대 없이 걷기 위해 매일 애를 썼다. 그 결과 열 살이 되던 해 소아마비를 완전히 극복하고 혼자 힘으로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오랜 시간 재활 노력을 하면서 특별한 힘을 가진 소녀로 자라난 윌마는 운동선수가 되는 것에 자신의 온 힘을 쏟아 붓기로 결심했다. 윌마는 7학년이 되었을 때 농구부에 들어갔다. 처음 두 시즌은 벤치만 지켰지만 연습은 누구보다도 열심히 하였다. 세 번째 시즌이 시작되었을 때 관중들은 눈에 띄는 속도와 기량을 자랑하는 윌마 루돌프란 선수를 처음 보게 되었다. 이후 윌마는 테네시주 최고 여자 농구팀의 간판선수가 되었고 고등학교 때는 팀을 주 결승전까지 끌고 갔다. 당시 윌마의 농구하는 모습을 눈여겨본 테네시 주립대의 여자 육상 팀 감독 에드 템플이 그녀를 여름 캠프에 초대했다. 여름 내내 윌마는 바람처럼 빠른 달리기 실력을 마음껏 과시했고, 새 학기부터는 농구 대신 육상에 전념하였다. 1956년 16살이 된 윌마는 호주에서 열린 올림픽에 출전하여 400미터 계주에서 동메달을 땄다. 4년 후 20살이 된 윌마는 로마 올림픽에 나섰다. 육상 선수로서 윌마의 명성은 점점 높아졌지만 그녀가 개인별 경기에서 메달을 거머쥘 거라고 예상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첫 경기가 있기 전날 윌마는 연습을 하다가 발목을 삐었다. 발목은 놀랄 만큼 부어 올랐고 변색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평생 걸을 수 없을 거란 말을 들은 소녀에게 삔 발목쯤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드디어 100미터 첫 경기. 총소리가 나자마자 윌마는 총알처럼 튀어나갔고 11초 후 결승선을 넘었을 때 세계신기록이 나왔다. 다음날 200미터에서도 그녀는 24초의 기록을 세우면서 우승했다. 관중은 그녀의 속도, 품위, 아름다움에 압도당하고 속도를 무색하게 만드는 길고 유연한 다리의 움직임에 감탄했다. 마지막 경기인 400미터 계주에서 미국은 세 번째 주자까지 선두를 지켰다. 그러나 마지막 주자 윌마가 바통을 더듬느라 머뭇거리는 사이 2명이 그녀 곁을 앞질러 지나갔다. 흥분한 관중들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들은 입이 딱 벌어졌다. 윌마가 피스톤처럼 팔을 흔들면서 놀라운 속도로 트랙 위를 날아갔기 때문이다. 약 87미터 지점에서 윌마는 선두를 탈환했고, 2위와 간발의 차이로 결승선을 통과했다. 사상 최초로 여성 올림픽 3관왕이 탄생한 순간이었다. 한 소녀가 소아마비와 가난과 인종차별을 극복하고 당대의 가장 위대한 여성 운동 선수,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사랑 받는 사람 중 하나가 된 것이다.
지혜 - 참다운 지혜는 부정을 긍정으로 바꾼다엘리자베스가 태어났을 때 왕(헨리 8세)은 크게 실망했다. 그는 왕위를 계승할 아들을 얻기 위해 전 부인과 헤어지고 교황으로부터 파문을 당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말짱 허사가 되었다. 고작 딸 하나를 더 낳기 위하여 이런 짓을 하다니! 헨리의 분노를 산 엘리자베스의 어머니 앤 볼린은 거짓 죄로 재판을 받고 엘리자베스가 두 살 반이 되던 해에 처형당했다. 이후 엘리자베스는 헨리가 세 번째 부인에게 얻은 왕자 에드워드와 어린 시절을 함께 지냈다. 계모인 캐서린 파는 정이 많은 여자였기에 엘리자베스가 합당한 대우와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보살펴 주었다. 헨리가 죽고 에드워드가 왕위에 오른 후 에드워드의 숙부 토머스 시모어는 엘리자베스와 결혼하고 왕을 납치한 후 자신이 직접 섭정을 할 계획을 세웠다. 음모는 발각되고 시모어는 체포되었지만 시모어가 엘리자베스에게 청혼을 했기 때문에 그녀도 런던탑에 갇히게 된다. 에드워드의 신하는 그녀를 오랫동안 조사했다. 그녀는 수많은 질문에 신중하게 대답했는데, 변호기술이 조금만 미숙했어도 그녀 역시 어머니의 운명을 뒤따랐을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아직 소녀였고 도움 받을 어른도 없이 완전히 혼자였지만 놀랄 만큼 대담하고 능숙하게 자신의 무죄를 주장했다
얼마 후 15살짜리 왕 에드워드는 결핵으로 죽었고 그를 이어 엘리자베스의 이복언니 메리가 여왕의 자리에 올랐다. 메리는 엘리자베스를 좋아하지 않았고 믿지도 않았다. 메리가 카톨릭 교회를 부활시키려 하는 움직임 때문에 많은 신교도들이 반대여론을 형성하자 메리 여왕은 신하들의 주장을 받아들여 엘리자베스를 체포했다. 엘리자베스는 언니보다 인기가 있었지만 그녀를 보호해줄 사람은 없었다. 17년 전 어머니가 최후를 맞은 런던탑에 갇힌 엘리자베스는 몹시 두려웠지만 끔찍한 계략 앞에서도 중심을 지키며 꿋꿋이 버텼다. 그녀의 목숨을 구한 것은 형부가 될 스페인의 필리페 2세였다. 그는 인기 많은 처제의 피를 손에 묻힌 여왕과 결혼하여 여론을 악화시키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고, 메리에게 엘리자베스를 너그럽게 봐주라고 설득했다. 필리페 2세와의 결혼에 목을 매고 있던 메리는 결국 엘리자베스를 풀어주었다. 엘리자베스가 석방되는 날 그녀를 보러 나온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지나가는 그녀에게 박수를 보냈다. 여전히 언제 죽을 지 몰라 겁을 내던 엘리자베스는 백성들의 격려에 기운을 얻고 자신감을 회복했다.
메리 여왕이 즉위 5년 만에 아이도 없이 죽자 엘리자베스는 25세의 나이에 영국 여왕의 자리에 올랐다. 당시 영국은 재정이 고갈되고 병력은 줄어든 데다 종교 분란으로 국력이 소진된 상태였다. 신하들은 그녀가 빨리 결혼을 해서 남자 왕이 영국을 안정적으로 다스리길 바랐지만 그녀는 결혼 생각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어린 시절 그녀를 두려움에 떨게 했던 위험, 불행, 불확실성 속에서 강철같이 단련된 용기와 확신을 가지고 통치를 시작했다. 그녀는 신하들에게 말했다. "나는 사자는 아닐지 몰라도 사자의 새끼다. 따라서 사자의 심장을 가지고 있다." 그녀는 국교회를 부활시켰고 구교도들을 백성으로서 포용했다. 또한 경제정책으로 국부를 증대하고 군대를 강화하고 해군을 조직했다. 그 결과 수백 년 동안 해상권을 제패한 영국의 신화가 시작되었다. 시간이 갈수록 그녀의 자신감은 사람들에게 확신을 주었고 그들이 군주를 신뢰하도록 만들었다. 이때는 영국 역사에서 황금기의 시작이었고 후대에도 엘리자베스 시대로 불리게 되었다. 그녀는 44년 간 영국을 다스렸는데 영국 역사에서 가장 오랫동안 치세했던 군주 중의 한 사람이자 역사상 최고의 군주로 기억되고 있다. 그녀에겐 배우자가 없었지만 영국이라는 남편이 있었다. 백성들은 그녀를 사랑했고 그녀 또한 그들을 사랑했다. 엄마 없이 자라 무서운 적의 야망에 잔인하게 노출되었던 한 소녀가 온갖 위험을 견디고 살아남을 만큼 자신감을 가졌던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다. 그녀는 영국에서 가장 당당하고 단호하며 지혜로운 군주였다.
신념 - 굳은 신념은 인간의 가치를 결정한다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이 누구든 간에 돌처럼 단단한 심장도 녹여버릴 만한 장면이었다. 토머스 모어 경의 사랑하는 맏딸 마거릿은 수군거리는 군중과 무장한 병사 틈을 헤치고 아버지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감옥으로 끌려가는 아버지를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다. 토머스 모어는 정직했다는 죄목으로 6일 후 처형될 참이었다. 훗날 마거릿의 남편 윌리엄 로퍼는 『토머스 모어 전기』를 통해 당시 많은 사람들이 아버지와 딸의 애달픈 이별 장면을 보고 흐느껴 울었다고 전했다.
토머스 모어는 1478년 영국에서 태어났다. 재능 있는 학생이었던 모어는 옥스퍼드에서 학업을 했고 인본주의 운동에 참여했다. 그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변호사가 되었지만 계속 학문을 연구하여 『유토피아』를 썼다. 이 책은 상상 속에 존재하는 이상적인 문명사회에 대한 내용으로 모어에게 엄청난 찬사와 국제적인 명성을 안겨주었다. 그의 집은 항상 손님들로 붐볐는데, 젊은 왕 헨리 8세도 그를 자주 찾아왔다. 헨리 8세는 솔직하고 재미있는 모어의 접대를 무척 좋아했고 모어의 의견을 높이 평가했다. 왕의 총애를 바탕으로 공직에 발을 들여놓게 된 모어는 점점 권력이 커지는 자리로 옮겨 갔고 마침내 사상 최초로 평민 출신의 대법관이 되었다. 법조계와 대중 모두가 쌍수를 들어 신임 대법관을 환영했다. 모두 그를 대쪽 같은 사람으로 생각했고 양심적으로 직무를 수행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당시 헨리 8세는 왕비 캐서린과의 사이에 딸 메리 밖에 없었다. 헨리는 앤 볼린을 새 아내로 맞아 아들을 얻고 싶은 마음에 이혼을 허용하지 않는 교황에 맞서고 있었다. 모어는 처음에는 의회에서 헨리의 입장을 옹호하였으나 왕이 교황을 배반하고 스스로 영국 교회의 수장임을 선포하자 대법관직을 사임하고 말았다. 얼마 후 의회는 새로운 법을 제정했는데 이에 따르면 왕의 모든 신하는 앤을 왕비로 인정하고 앤이 낳을 아이를 적법한 왕위 계승자로 승인한다는 서약서에 서명을 해야 했다. 모어는 서명을 거부했다. 그는 양심 때문에 거절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고 그로 인해 왕의 분노를 달게 받아야 할 처지가 되었다. 모어는 체포되어 런던탑에 투옥되었고 재판이 열릴 때까지 15개월 동안 갇혀 있었다. 헨리 8세가 밀사를 보내 그를 설득하려 하였고 가족들은 제발 서명을 하라고 애원했지만 모어는 말을 듣지 않았다. 감옥의 축축하고 차가운 환경 때문에 건강이 악화되었지만 모어는 기도하면서 그리스도의 고통을 생각했고 죽음을 준비했다. 재판에서 배심원단은 유죄 판결을 내리고 모어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모어는 자신의 양심으로는 왕을 영국 교회의 수장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똑똑히 말했다.
재판을 마친 후 모어는 감방으로 돌아와서 기도하며 의연하게 죽음을 준비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참회의 기도문을 적었다. 그는 슬퍼하는 아내 앨리스를 위로하고 딸 마거릿에게 전할 편지를 건네주었다. 편지에서 모어는 가족을 주신 신께 감사한다고 쓰고 그들을 하나하나 축복한 다음 자기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부탁했다. 드디어 사형 집행일이 되었다. 모어는 무릎을 꿇고 단두대 받침대에 머리를 올려놓으면서 사형집행인에게 수염이 잘리지 않도록 잠깐 정리할 시간을 달라고 했다. 그는 평생 장난을 좋아했던 사람답게 마지막 농담까지 했다. "내가 알기로 이 수염은 왕을 화나게 한 적이 없다오." 마지막 연설이 허락되자 그는 군중에게 자기 영혼과 왕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부탁했다. "저는 왕의 충실한 신하로 죽음을 맞이하지만, 그래도 하나님이 우선입니다."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은 토머스 모어는 그렇게 생을 마감했지만, 그 순간부터 새로운 영광이 시작되었다.
자비 - 자비는 신의 마음과 가장 가까이에 있다메리는 부자 동네 베버리힐스에 살았다. 그녀는 명문 카톨릭 여자 학교에 다녔으며 좋은 식당에서 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