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에게 따지다
유호종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1. 모습 : 삶의 또 다른 이름, 고통삶의 어느 길목에서 불쑥인간이 고통을 느끼는 것은 1 더하기 1이 2가 되듯이 논리적으로 필연적인 것은 아니다. 인간이면 당연히 고통을 느낄 수밖에 없다거나 어떤 상황에서는 필연적으로 고통을 느껴야 한다고 생각할 근거 같은 것은 없는 것이다. 가령 우리는 벌거벗고 있어도 부끄러움을 몰랐던 아담과 이브처럼 전혀 고통을 느끼지 않는 인간을 충분히 생각해 볼 수 있다. 고통 역시 살면서 그것을 경험해 본 후에야 비로소 알게 될 때가 많다.
온 몸과 마음으로고통은 흔한 만큼 종류도 다양하다. 여러 다른 기준에 따라 고통의 종류를 구분해 볼 수 있다. 가령 누가 그것을 느끼는가에 따라 동물의 고통, 어린이의 고통, 어른의 고통이 나뉘고, 원인이 무엇인가에 따라 빈곤의 고통, 실연의 고통, 질병의 고통 등이 나뉜다. 흔히 '정신적 고통'으로 불리는 것은 몸이 아니라 마음이나 정신에서 느끼는 고통이다. 이런 고통들은 전형적으로 어떤 의식적, 무의식적 생각이 전제될 때 발생한다. 그래서 그 원인이 되는 생각이 무엇이냐에 따라 명칭이 붙여지는 경우가 많다. 이런 고통으로 후회, 회한, 상실감, 죄책감, 실망감, 절망감, 슬픔, 비탄, 우울, 불안감, 초조함, 공포심, 두려움, 무력감, 외로움, 수치심, 굴욕감, 열등감, 안타까움, 안쓰러움, 분노, 미움, 혐오감 등이 발생한다. 신체적 고통이 전형적으로 몸의 이상에 대한 정보를 주는데 비해 이런 고통들은 몸이 아닌 외부 세계에 대한 정보를 준다.
몸과 마음(정신), 감각기관은 나를 이루는 모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몸으로도, 마음으로도, 감각기관으로도 고통을 느낀다는 것은 나의 모든 것이 고통을 느낀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고통은 우리 인간에 대한 근본 규정 중의 하나가 된다. 즉 우리는 '고통을 느끼는 존재'인 것이다.
감상적 대응을 넘어서 고통은 그냥 두고 볼 수 없고 어떻게든 대처해야 하는 문제임은 직관적으로 명확하다. 그렇다면 고통은 어느 정도나 큰 문제인가? 큰 문제에는 그 만큼 그 문제를 해결하려는 많은 노력과 주의가 요구된다. 고통에 대응하는 방법 중 하나가 바로 우리의 감성을 이용하는 것이다. 이런 감성적 대응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이제 우리의 이성을 이용해야 한다. 즉 고통의 정체와 여러 측면에 대해 이치에 맞고 꼼꼼하게 하나하나 따지고 탐구해야 한다. 이런 작업은 노래 부르기보다 훨씬 오랜 노력과 많은 시간이 걸리고 무미건조하지만 고통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을 위해서는 불가피하다. 베짱이의 노래는 여름의 무더위는 식힐 수 있지만 겨울의 고난과 추위는 개미의 차근차근하고 오랜 노동으로만 대처할 수 있다.
2. 원인 : 세계와 나의 슬픈 만남초대받지 않은 손님고통은 우리 밖에서 우리에게 닥쳐오는 것으로 보일 때가 많다. 그러므로 고통의 원인으로 무엇보다 고통을 느끼는 주체를 둘러싼 외적 상황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렇게 외부 상황이 우리에게 고통을 일으키므로 이 상황에 따라 고통의 명칭을 붙이기도 한다. 전쟁의 고통, 사회적 고통, 경제적 고통, 시대의 아픔, 실직의 고통, 실연의 아픔, 청년 실업자의 고통 등등이 모두 그렇게 붙여진 고통의 이름들이다. 그리고 이렇게 외부세계의 상황이 고통을 일으키므로 특정 상황이 얼마나 큰 고통을 불러일으키는지에 대한 연구가 '스트레스를 불러일으키는 생활사건 조사'라는 명칭으로 심리학 등의 학문 분야에서 계속 이어져 왔다.
하지만 이런 외적 상황을 고통의 충분한 원인으로 보기는 힘들다. 이것은 동일한 외부 세계 상황이나 신체 상태에서도 고통스러워하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가 있기 때문이다. 동일한 외부 상황에 처해서도 고통을 느끼는 주체와 그렇지 않은 주체가 나뉘는 것은 그 주체들 자체의 차이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외적 상황과 함께 고통의 또 하나의 원인으로 볼 수 있는 것은 바로 주체 자신이다. 그런데 주체가 고통의 원인으로 작용할 때 두 가지 다른 측면이 있는 듯하다. 즉 주체의 좀더 항구적이고 구조적인 특성이 원인으로 작용하는 측면과 주체의 일시적인 지각과 생각이 원인으로 작용하는 측면으로 나눌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두 측면에 따라 '고통 주체의 구조적 특성'과 '고통 주체의 일시적인 지각과 생각'을 각각 고통의 원인으로 볼 수 있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우리는 상식적으로 어떤 개체는 고통을 느끼고 어떤 개체는 느끼지 않는다고 알고 있다. 하지만 이 상식에는 불분명한 부분이 있다. 가령 인간, 개, 소, 닭, 비둘기 등은 고통을 느끼고 산, 강, 돌멩이는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 상식적인 생각이지만 물고기는 어떤지는 분명하지 않다. 상식에 이렇게 불분명하거나 변하는 부분이 있다는 것은 상식에 의존해서 고통 받는 개체의 범위를 정하는 것에 한계가 있음을 보여 준다. 더 나아가 상식적으로 자명하다고 간주되며 불변하는 내용들도 논리적으로 엄밀히 따졌을 때는 정말 옳은지 검증되지 않았음을 발견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상식적으로는 식물이나 무생물은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고 생각하지만 이 역시 엄밀하게는 증명할 수 없다. 일본의 어떤 TV에서는 배추에 칼을 가까이 갖다 대면 마치 비명을 지르는 것처럼 배추 내의 전기 신호가 급변한다는 실험을 방영한 적이 있는데 이런 실험을 근거로 식물도 고통을 느낀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에게는 공원의 나무에 매달려 있는 '가지를 꺾으면 아파요'라는 말은 단지 비유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때로는 존재 자체 여부가 불확실한 존재들에 대해서도 그것이 고통을 느끼는지가 문제될 수 있다. 중세 서양에서는 '천사도 고통을 느끼는가'를 두고 큰 논쟁이 벌어졌었다.
감각 능력이 아무리 발달해도 이런 능력에 의해 느낄 수 있는 고통은 신체적 고통과 지각적 고통일 뿐 정신적 고통은 아니다. 정신적 고통을 느끼기 위해서는 감각 능력 이외에 '무엇이 어떻다'는 것을 아는 능력이 필요하다. 인식 능력은 고통의 또 하나의 원인이다. 따라서 고등한 동물일수록 고통도 더 크게 받을 것이다. 이것은 큰 고통이 고등함의 한 징표일 수도 있음을 보여 준다. 욕구의 차이에 따라서도 동일한 외적 상황에서 고통을 느끼는 정도가 달라진다. 대개 욕구의 가짓수가 많은 사람은 적은 사람에 비해 쾌락도, 고통도 자주 느낄 것이다. 욕구가 많은 사람이 적은 사람에 비해 어떤 상황을 '고통이 충족되거나 좌절된 상황'으로 받아들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욕구는 사람에 따라그 가짓수에서 차이가 날 뿐 아니라 강도에서도 차이가 난다. 즉 같은 욕구라도 더 강하게 느끼는 사람과 덜 느끼는 사람이 있다. 이중 욕구가 강한 사람은 약한 사람에 비해 욕구 충족에서 오는 쾌감도, 욕구 좌절에서 오는 고통도 크게 느낀다. 예를 들어 성취욕이 강한 사람은 목표를 성취했을 때의 기쁨도, 실패했을 때의 고통도 더 크게 느낀다.
장자는 처의 장례식에서 춤을 추었다. 디오게네스는 노숙자 생활을 하면서도 다만 햇빛만 가려지지 않으면 만족하였다. 이렇게 인격적으로 완성된 경지에 이른 사람은 보통 사람들이 정신적으로 괴로워하는 상황에서도 평안한 심정을 유지하는 것 같다. '달관'이나 '득도'는 신체적 고통만 느끼고 정신적 고통은 거의 느끼지 않는 이런 인격 완성의 경지를 일컫는 말이다. 그렇지만 인격적 미성숙의 인격 발달이 모든 단계에서 정신적 고통의 원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인격적 성숙이 정신적 고통의 원인이 되는 경우도 있다. 이것은 비교하자면 불교 승려 중에서 술과 고기를 먹고 이성과 자고 길거리에서 소리를 지르거나 춤을 추는 등 파격적인 행위를 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과 비슷하다. 원효처럼 더 이상 계율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정신에 도달한 사람이 때로 이런 파격적인 행위를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를 추스를 수 없고 허황된 자만에 빠진 사람이 도통한 척 그런 파격행위를 하기도 하지만 말이다.
3. 의미 : 개똥의 쓸데"한 말씀만 하소서"이것은 중견작가 박완서 씨가 20대의 유망한 의사였던 아들이 죽은 후 겪은 처참할 만큼 고통스런 체험을 기록한 책 제목이다. 이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작가는 그 고통의 시간 동안 주로 상대했던 신(神)에 대해 '아들을 돌려달라'며 원상복귀를 요구하지 않는다. 그것은 신이 그런 소원을 들어줄 리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비록 신은 전능하지만 그가 만든 자연법칙에 자주 개입함으로써 이를 훼손시키는 것은 매우 삼간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기적이 드문 이유인데, 특히 죽은 자를 살리는 기적은 성경에서도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고통의 의미를 아는 것은 또한 그 고통에 어떻게 대응해야 바람직한지 알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고통의 의미에 따라 바람직한 대응 방법도 달라진다. 흔히 고통은 없앨 수 있는 한 최대한 없애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지만 이는 잘못된 것이다. 고통의 의미를 알고 있다면 그 고통을 무조건 없애려 하기보다 그 의미를 실현하거나 그 의미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대응해야 한다.
눈이 있는 자, 보라고통은 때로 주체에게 위험을 알리고 이에 대처하게 함으로써 주체가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게 해준다. 즉 고통은 다가온 위험에 대한 신호의 역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주체가 이 위험에 대처하는 행위를 하도록 재촉하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고통 외에도 주체적인 위험을 알고 대처하게 해주는 효율적인 방법이 있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 고통은 더 이상 '위험을 알리고 대처하게 함'이라는 의미를 갖는다고 보기 힘들다. 고통은 그 고통보다 더 큰 쾌락이나 행복을 이루는 한 요소가 되는 경우가 있다. 가령 산악인이 눈 덮인 높은 봉우리를 등반할 때 겪는 힘겨움과 고통은, 정상에 올랐을 때 느끼는 벅찬 성취감의 한 요소가 되는 것으로 보인다. 만약 이런 고산 등반이 산책처럼 쉽고 편안하기만 했다면 그 산악인은 상쾌함을 느낄지 모르지만, 벅찬 성취감은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성취감은 '고통을 견디어 내었다는 점에서 자기에 대해 느끼는 만족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더 큰 행복의 요소가 되는 고통이라도 만약 그 고통 없이도 동일한 행복을 획득할 수 있다면 이런 의미를 인정하기는 어렵다.
그자체로 소중한 개똥?인간의 실제 체험에 비추어 보면 고통은 머릿속에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힘겹고 심각한 것으로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낫다'라고 말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리고 이 고통의 문제에서는 실제 체험에 입각한 결론이 미리 전제한 세계관으로부터 이론상으로 도출한 결론보다 훨씬 진실에 가까워 보인다. 하지만 극심한 고통을 직접 체험한 사람들은 모두 고통은 '없는 것보다 못한 것'이라는 데 동의할 것인가. 소수이지만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그 고통을 그 자체로 '없는 것보다 나은 것'으로 직관하는 사람이 있는 것 같다. 또 하나, 고통의 의미에 대한 입장을 갖는데 중요한 것은 각자의 입장으로부터 그의 적합한 실천의 지침을 이끌어 내는 것이다. 실제로 고통의 의미에 대한 입장에 따라 그 고통을 대하는 사람들의 대응은 달라진다.
4. 대응 : 고통은 요리하기 나름왕자로 변한 개구리고통은 소가 닭 보듯이 무심하게 그냥 두고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고통이 닥칠 때 우리는 어떻게든 대응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고통은 본질적으로 우리에게 던져진 문제이다. 이 고통에 대한 대응으로 즉각 떠오르는 것은 어떻게든 이것을 없애거나 피하는 것이다. 하지만 고통의 의미를 실현하거나 그와 부합하게 대처하는 것이 고통에 대한 바람직한 대응이라 할 수 있다.
고통은 '행복이나 쾌락의 요소나 수단'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어 의도적으로 추구하는 경우도 있다. 마라토너들은 달리기 시작한 처음에는 극심한 고통을 느낀다. 그럼에도 그들이 이 고통을 일부러 겪는 것은 이 고통 다음에는 극한 희열이 밀려온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라 한다. 그리고 매우 중요한 것으로 노동을 힘들고 고통스럽게 여기면서도 사람들이 기꺼이 노동에 참여하는 것도 그 노동으로 가능한 행복 때문이다. 특히 의미 있다고 생각되는 고통을 남에게 가할 때 이 점에 더 주의해야 한다. 단지 '그 고통이 의미 있을 것 같았다.'라는 선의만으로 남에게 가하는 고통이 정당화될 수 없다. 그 고통에 대해 매우 신중하게 평가해 본 결과 그 의미가 다른 방법으로는 실현될 수 없고 또한 그 의미가 고통의 부정적 측면을 능가함이 분명해야 한다.
도도한 눈으로 거들떠보기고통은 '더 큰 행복의 요소나 수단'이거나 '정신적 성숙의 계기'로서의 의미를 지닐 때도 있다. 그러므로 닥쳐온 고통에 이런 의미는 없는지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반면 고통에 초월적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어떤 닥쳐온 고통에서 확인 가능한 의미를 발견할 수 없을 때라도 그 고통을 없애려고 하기에 앞서 어떻게 해야 고통의 초월적 의미를 실현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문제는 자신의 고통이 위대한 목적 실현에는 기여하지만, 자기 자신에게는 아무 이익도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경우이다. 가령 헤겔의 변증법적 역사철학에서는 개인의 고통이 절대 정신의 발전을 위해 불가피하다고 보지만 그 고통이 고통 받는 개인 자신에게 어떤 보상을 하는지에 대해서는 별 언급이 없다. 또한 맑스주의의 역사발전관에서도 개인들의 희생이 모여 거대한 역사 발전이 이루어진다고 볼 뿐 그 희생된 개인들이 어떤 보상을 받는다고 보지는 않는다.
다음으로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알기 힘든 고통이 실제로 확인 가능한 의미를 갖고 있지 않다면 이 고통은 초월적 의미를 갖고 있거나 갖지 않을 것인데 이 중 어떤 것이 옳은 지는 물론이고 어떤 것이 옳을 가능성이 큰 것인지 조차 우리의 이성으로는 판정하기 힘들다. 따라서 그 가능성을 계산해야만 한다면 그 각각의 가능성을 반반씩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 고통이 초월적 의미를 갖지 않을 경우는 다시 자체적 의미는 갖고 있거나 아무 의미도 갖지 않은 경우로 나뉜다. 인류는 과거 의미를 명백히 판단하기 힘든 고통에 대해 이를 감수하는 태도를 많이 취했다. 이에 비해 오늘날에는 그런 고통은 없앨 수 있는 한 없애려 하는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 이것은 인류가 이룩한 중요한 발전 중 하나로 인류가 더 현명해졌음을 보여 주는 것으로 생각된다.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어떤 고통이 닥쳤을 때 그 고통이 참고 견디어야만 실현되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그 고통을 없애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리고 이렇게 노력할 때 많은 고통을 제거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상태로는 고통을 제거 할 수 없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 죽음은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로 간주된다. 물론 정말 죽음이 그런 길인가도 확실하지 않지만 그럴 가능성이 충분히 있으며 또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믿고 있다. 그래서 등장하는 것이 자살의 문제이다.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고통이 어떠한 확인 가능한 의미도, 초월적 의미도 갖지 않을 때 그 고통은 일견 무의미해 보인다. 하지만 그런 고통도 '무(無)'와 비교할 때에만 드러나는 자체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보는 입장이 있다. 이 입장에 따른다면 아무 수단적인 의미도 갖고 있지 않은 고통의 상태는 의식이 다른 어떤 상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