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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향은 전라도 내 영혼은 한국인

인요한 지음 | 생각의나무
1 격랑의 시기에 타오른 횃불



한국의 근대사는 암울했다. 아시아의 모든 나라가 그러했듯이 한국 역시 서세동점의 시기에 때늦은 판단과 잘못된 선택으로 일본의 식민지가 되고 말았다. 세상에 대하여 깜깜했던 한국인들이 임금부터 시골 촌부까지 문을 굳게 걸어 잠그는 쇄국을 고집할 때 그 문을 연 것은 한 방의 대포였지만, 마음의 문을 두드려 연 이들은 군인도 아니요, 시인도 아니었다. 그들은 다름 아닌 선교사들이었다. 조선 땅을 찾아온 최초의 선교사는 의사 알렌이었고, 가장 이름이 널리 알려진 이들은 언더우드, 아펜젤러 목사 부부였다. 알렌은 1884년에, 언더우드, 아펜젤러 부부는 그 이듬해인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제물포를 통해 조선에 들어왔다. 언더우드 목사가 연희전문학교를 세운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1891년, 미국으로 되돌아온 언더우드의 순회강연에 감동을 받은 일곱 명의 젊은이들이 조선으로 파송될 선교사직을 자원했다.



그들 7인의 선발대가 전주와 군산 등 전라북도 지역을 중심으로 선교의 씨앗을 뿌리고 난 후, 1895년 4월 9일 선교사들이 추가로 파송되었다. 그들 무리 중에 갓 결혼한 한 쌍의 신혼부부가 있었는데, 유진 벨 목사와 부인 로테 벨이었다. 유진 벨은 나주에서 첫 번째 사역을 시작했으나 유생들의 거센 반발로 실패하고 목포로 이동해 1898년 3월부터 선교 사역을 재개했다. 고통의 시간이 쌓여갈수록 한국 사람들의 마음의 문도 조금씩 열렸다. 드디어 벨 목사는 1898년 5월 15일, 목포 최초의 개신교 교회를 설립하고 첫 예배를 드렸다. 목포 선교가 활발하게 결실을 맺어가던 1901년, 풍토병으로 그만 부인 로테 벨이 32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떴다. 지금 서울 양화대교 입구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안장되어 있는 그녀는 이 땅에서 숨진 최초의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였다.



이 무렵 미국 애틀랜타에 사는 한 청년이 한국에서 선교사로 일생을 바치기로 결심했다. 조지아 공대를 수석으로 졸업한 윌리엄 린튼(인돈)은 당시 안정된 미래가 보장되는 GE(General Electrics) 입사를 거절하고 그의 나이 스물한 살 때인 1912년, 선교사로 헌신하기 위해 한국에 왔다. 그는 주로 전주, 이리, 군산 등지에서 선교 및 교육 사역을 펼쳤는데, 장티푸스를 앓아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기도 했다. 1922년은 그에게는 운명적인 해였다. 아버지 유진 벨 선교사를 방문하러 한국에 들어온 샬럿 벨을 만난 것이다. 그들은 그 해 결혼하여 이듬해인 1923년 큰 아들 윌리엄 린튼 2세가, 뒤이어 1924년에 둘째 유진 린튼, 1926년 셋째 휴 린튼이 태어나고 1927년 드와이트 린튼이 태어났다.

초기 선교사들은 근본적으로 한국을 강점한 일본에 비판적이었다. 거기에 더해 또 하나의 갈등의 씨앗이 있었는데 바로 '신사참배 문제'였다. 신사참배가 가장 먼저 강요된 곳은 교육계였고, 당시 신흥학교 교장으로 재직 중이었던 윌리엄 린튼은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눈물을 머금은 채 1937년, 학교를 자진 폐쇄시켰다. 그러나 일제의 본격적인 기독교 탄압은 선교사들의 추방으로까지 이어졌다. 한국이 감격적인 해방을 맞게 되자 1946년 6월 추방되었던 다른 선교사들과 함께 그는 한국에 다시 돌아왔다. 선교와 교육 사업을 병행하던 중에 6.25가 터졌고 9.28 수복 후 전주로 돌아와 파괴된 신흥학교와 집을 다시 복구했다.



1955년 10월 1일, 그는 대전 지역에 기독교 대학을 세우고 초대 학장으로 취임했다. 그의 나이 69세 때였다. 개교 당시 '대전기독학관'이라는 이름으로 인가를 받았던 이 학교는 3년 후 대전대로 교명이 바뀌었다가 이후 숭전대를 거쳐 지금은 한남대로 교명을 변경했다. 100년 전 이 땅이 일제의 탄압으로 깊은 슬픔에 잠겨있을 때 21살의 나이로 이 땅을 찾은 푸른 눈의 젊은이 윌리엄 린튼은 이 땅에서 근대 한국 민족의 수난사를 함께 겪었다. 그는 선교사이며 동시에 교육자였고, 외교관이었으며 또한 언어학자였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한국을 사랑했던 사람이었고 한국이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 이 땅에서 48년간 마지막 운명하기까지 그의 삶 전부를 헌신했다. 또한 한국에서의 그의 삶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자녀들과 손자인 존 린튼에 이르기까지, 4대에 걸쳐 이어졌다.



2 내가 사랑한 사람들 나를 사랑한 사람들



내 아버지 휴 린튼

아버지 휴 린튼은 할아버지 윌리엄 린튼의 셋째 아들로 1926년 전북 군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역시 할아버지와 마찬가지로 현대 한국의 굴곡 많은 역사를 온몸으로 체험했다. 신사참배 문제로, 1940년 온 가족이 미국으로 강제추방 당했을 때 아버지는 평양외국인학교를 다니던 학생이었다. 미국에 돌아가서도 아버지는 자신의 고향 한국을 잊지 않았다. 고등학교 졸업 후에 해군 장교로 지원하여 일본과의 전쟁에 참전했고 전쟁 후에는 어스킨 대학과 프린스턴 신학대에서 신학을 공부하다가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다시 해군 장교로 복귀,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했다. 1953년 한국에서 전역한 후 아버지는 미국으로 들어가 어머니 로이스 린튼과 세 아들을 데리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아버지가 맡게 된 선교지는 순천이었다. 그 때가 1954년이다.



"그대로 들어오지 말아요, 거기서 옷을 전부 벗고 들어오세요." "허허 참, 알았소." 아버지는 먼지를 흠뻑 뒤집어 쓴 채 현관문을 여셨다. 아버지가 어느 섬에서 선교 사역을 하고 3주 만에 집에 돌아오신 날 저녁 일이었다. 순천을 중심으로 섬과 농촌을 돌아다니며 선교활동을 하셨던 아버지는 2~3일은 기본이고, 어떤 때는 열흘, 3~4주 만에 집에 돌아오시곤 했다.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밖에서 옷을 벗게 한 것은 진드기나 벼룩, 이, 빈대 등 때문이었다. 지금이야 그렇지 않지만, 당시는 전염병이 심심치 않게 발생하던 때였고 섬과 바닷가 마을은 아무래도 위생적으로 뒤떨어져 있었던 탓이다. 이를 잡는다고 머리에 DDT를 뿌리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였고, 빡빡 깎은 머리에 '버짐'이 생기는 피부병도 일상적인 일이었다. 더욱이 내 위로 형들 세 명이 폐결핵에 걸렸으니 어머니의 조바심은 충분히 그럴 만 했다.



아버지는 검정 고무신을 좋아했다. 좋아하는 정도가 아니라 없어서는 안 될 필수품이었다. 그런 아버지를 한국인들 역시 좋아했다. 당연히 우리들도 검정고무신을 신었다. 낡아서 너덜너덜 구멍이 뚫리면 타이어 수리하는 곳에 가셔서 땜질해 신으셨다. 오죽하면 아버지의 별명이 '순천의 검정고무신'이었다. 아버지가 하신 중요한 일 중 하나는 간척 사업이었다. 교회 개척을 위해 검정고무신 바람으로 남도 지역 곳곳을 다니시면서 아버지가 보신 것은, 너무나 가난하게 살고 있는 사람들의 현실이었다. 아버지는 그들에게 '영혼의 양식뿐만 아니라 육신의 양식'도 절실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1960년부터 1970년까지 자그마치 10년에 걸쳐 바다를 막고 메워 20만 평의 간척지를 조성했고 이 땅은 집 없고 땅 없는 사람에게 분배되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땅에 지금은 광양 제철소가 들어서 있다. 아버지 휴 린튼은 남해안 지역 시골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면서 600곳이 넘는 교회를 개척했다.



오랜 한국생활 탓인지 아버지는 대부분의 한국 아버지들처럼 가부장적이고 유교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말로 표현을 안 했다 뿐이지 자식들이 훌륭히 성장하기를 아버지는 언제나 간절히 기도했다. 그리고 그 기도를 하나님은 전부 다 들어주셨다. 아들 3명이 폐결핵에 걸렸으나 다 치유됐고, 미국인이면서도 영어보다도 한국어가 능숙했던 꼬마들이 모두 미국이나 한국에서 대학까지 마쳤다. 여섯 자녀, 5남1녀 가운데 박사가 2명이고 모두 대학교수, 건축가, 컨설팅, 의사 등의 일을 하면서 하나님을 섬기고 타인을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살고 있으니 아버지의 기도가 그대로 실현된 것이다.

선한 사마리아의 선교사, 포사이트

내가 의사의 길을 택하게 된 것은 어려서부터 결핵치료사업을 하시던 어머니를 옆에서 지켜봐 왔던 것이 큰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의사가 되고 나서는 내가 가진 능력과 재주로 어떤 의사가 되어야겠구나 하고 마음먹게 한 분이 있다. 선교사이자 의사였던 포사이트가 바로 그 분이다. 1898년부터 유진 벨 목사와 함께 목포에서 의료선교 활동을 벌였던 오웬 선교사는 1909년 4월, 선교 순회 도중 급성 폐렴에 감염되었다. 그의 상태가 심각해지자 광주에서 목포 선교병원에 전보를 쳐 또 다른 의사를 급히 광주로 오게 했는데 그가 바로 포사이트였다. 전보를 받은 포사이트는 1909년 4월 4일, 목포를 떠나 광주로 향했다. 조랑말을 타고 광주로 오던 그는 광주 길목에서 길거리에 쓰러져 있는 한 여자를 발견했다. 한센병 환자였다. 손과 발은 짓물렀고 퉁퉁 부어 상처투성이인 데다가 걸친 누더기 옷은 피와 고름으로 얼룩져 있었다.



위독한 동료 선교사의 병을 고치러 가는 바쁜 몸이었지만 죽어가는 환자를 그냥 놔두고 갈 수 없었던 포사이트는 길을 멈추고 말에서 내려 그녀를 감싸 안아 자신의 말에 태웠다. 그리고 자신은 걸어서 함께 광주로 들어왔다. 오웬 목사는 그가 도착하기 전에 이미 운명한 상태였다. 포사이트는 광주에서 활동하던 의료 선교사 윌슨을 찾아가 그 여자에 대한 치료와 거처를 부탁했으나 마땅히 거처할 곳이 없었다. 고심 끝에 그는 광주 동남쪽에 위치한 벽돌 굽던 가마터를 발견, 그녀를 옮겨두고 선교사들이 쓰던 침구와 옷가지를 주어 거처하게 했다. 포사이트가 한센병 환자를 극진히 보살펴 주었다는 얘기가 소문으로 전해지자 한센병 환자들이 하나 둘씩 광주로 찾아들기 시작했다.



포사이트에 감명을 받은 윌슨과 광주 지역 의료 선교사들은 1912년 광주군 효천면 봉선리에 한센병원을 세웠다. 한 여자 한센병 환자와의 우연한 만남이 4년 만에 커다란 결실로 이어진 것이었다. 봉선리 한센병원은 1926년에는 조선총독부의 퇴거 명령을 받아 현재 위치인 여수 율촌면 신풍리로 이주했는데, 그때부터 '애양원'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그 뒤편에 애양원 교회가 있고, 역시 한센병 환자와 평생을 함께 한 손양원 목사의 묘소와 기념관도 있다. 포사이트 선교사가 이 땅에 온지 100년이 넘었다. 100년 동안 많은 것이 변했지만 그러나 그의 선교 정신은 여전히 살아있으며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한 그 마음 또한 여전히 빛을 발하고 있다.



내 정신의 거울, 손양원 목사

산돌 손양원(孫良源) 목사는 1902년 경남 함안에서 출생, 7살 때부터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고 함안의 칠원 공립보통학교에 입학, 3학년 때 신사참배를 거부해 퇴학을 당했다. 그러나 그에게 세례를 주었던 맥레(맹호은) 선교사의 도움으로 복학해 1919년 18세의 나이로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의 중동학교에 진학했다. 가난했던 그는 밤에 만두 장사를 하면서 학비를 벌었다. 그러나 극심한 생활고로 학업을 중단했던 그는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의 스가모 중학교 야간부를 졸업하고 1923년 귀국했다. 다음해 정양순 여사와 결혼하고 경남 성경학교에 입학했다. 큰아들 동인이가 한 살이 되었을 때, 부산 감만동 한센병자교회 전도사로 부임했는데, 당시 이 교회는 신도 600여 명 대부분이 이른바 '문둥병'이라고 하는 한센병자들이었다.



손 목사는 37세이던 1939년 여수 애양원에 딸린 애양원 교회로 부임했다. 애양원은 1909년 광주 양림동에서 시작할 때 환자가 불과 한 명이었으나 시간이 흘러, 1,000명 이상을 수용하는 대규모 한센병자 수용소가 되었다. 손 목사는 애양원 교회에서 10여 년간 목회를 하였다. 가족들로부터도 철저하게 버림받은 그들에게 손 목사는 구원과 희망의 상징이었다. 육체는 말할 수 없이 일그러졌지만, 아름다운 예수의 아들, 딸로 만들어야 한다는 게 손 목사의 의지였다. 그는 환우들과 함께 음식을 먹고 함께 잠자리를 했다. 중환자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기도를 하고 음식을 함께 나누어 먹었다.



1948년 여순사건이 터졌을 때, 손 목사의 두 아들 동인과 동신은 각각 순천사범학교와 순천중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아버지를 닮아 신앙과 민족정신에 불탔던 이 두 형제는 좌익 동기생들에 의해 인민재판에 회부되어 무자비하게 처형되었다. 당시 동인은 24살, 동신은 19살이었다. 두 아들을 동시에 잃은 손 목사는 며칠 동안 그야말로 비통의 시간을 겪었지만 장례식 때 뜻밖에도 이런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나 같은 죄인의 혈통에서 순교의 자식들을 나오게 하였으니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나의 사랑하는 두 아들을 총살한 원수를 회개시켜 내 아들로 삼고자 하는 사랑의 마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두 아들의 순교로 말미암아 무수한 천국의 아들들이 생길 것이니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이후 그는 체포되어 총살직전에 있던,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인 좌익계 학생 '안재선'을 구명하여 그의 성을 '손'으로 하고 자신의 아들로 삼았다. 손재선은 고려 성경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목사로 활동하다가 1979년 서울에서 별세했다. 1950년 6.25가 발발하고 호남도 공산군의 수중에 떨어졌을 때 많은 교회와 교인들이 전부 피난을 갔지만 손양원 목사는 남아서 1,000명이나 되는 양떼(한센병 환자)들을 돌보았다. 그러다가 1950년 9월 13일,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여수 근교 미평 과수원으로 끌려갔다. 거기서 그는 총의 개머리판에 맞아 얼굴이 피투성이가 된 채로 마지막까지 복음을 전하다 총살을 당했다. 그의 나이 48세였다. 나는 수시로 여수 애양원에 있는 그의 묘소를 찾곤 한다. 푸른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그의 무덤 앞에 앉아, 나는 내 삶이 그가 실천했던 삶의 10분의 1만이라도 되게 해달라고 늘 기도드린다.



3 내 고향, 전라도 순천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지금도 꿈속을 걷는 것 같다. 아름답고 순수했던 유년 시절, 이제 다시는 돌아갈 수 없기에 더욱 그립고 안타까운 그 시절, 그때 나는 참 짓궂기 그지 없는 소문난 개구쟁이였다. 순천 매곡동을 내 집 마당처럼 휘저었고 동네 아이들과 순천 구석구석을 망아지처럼 쏘다녔다. '매곡동의 짠이'하면 순천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예닐곱 살 때, 추석이나 설날 같은 날 딴에는 새 옷을 차려입고 이웃형들을 따라 동네 마실을 나가면 나는 동네북이 되었다. 어른들은 파란 눈 아이를 신기한 듯 바라보다가 자기들끼리 의례 한두 마디 나누었다. "아따, 이놈 미국 넘 같은디, 때때옷을 입어 붕께 솔찬히 이쁘구만이~." 얌전히 있으면 예쁘다는 소리나 듣고 말텐데 나는 참지 못하고 꼭 말대꾸를 했다. "이놈이 머여, 내 이름은 짠이여." 그러면 어른들은 허허 혹은 픽 웃다가 내 머리에 꿀밤을 먹였다. "허허, 요놈 봐라. 한국말을 나수 잘 허네. 근디 요놈이 어른한테 막 대드네이."

내 이름은 한국말로 인요한이고 영어로는 존 린튼인데, 사람들은 나를 부를 때 '짠이'라고 불렀다. 미국 이름인 '존'이 전라도 버전으로 '짠'이 된 것이다. 여름과 가을이면 앵두며 감이며 수박을 서리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서리할 목록이 정해져 있었다. 늘 배가 고팠지만, 어찌 보면 먹을 것이 지천으로 널려있는 때이기도 했다. 겨울이면 쥐불을 놓고 연을 날리며 낮 시간을 보내고 대보름에는 다른 동네 아이들과 신나게 돌을 던지며 놀았다. 한국말을 하며 한국 친구들과 지내면서 나는 스스로 외국인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친구들 역시 어떤 차별대우도 하지 않았다. 물안개처럼 아련한 그 시절의 추억은 나의 정서에 큰 영향을 주었다. 웬만한 전라도 사람 못지않은 '징글징글한 전라도 기질'도 그 때 다 몸에 배었다.



4 의사의 길을 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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