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생목록
재생목록이 비어 있습니다.
-
-
0:00 0:00
화면 너비 (여백)
좁게
보통
넓게
최대
배경 테마
글꼴
바탕/명조
돋움/고딕
글자 크기
작게
100%
크게
줄 간격
좁게
보통
넓게

아이들은 자연이다

장영란 · 김광화 지음 | 돌베개
서장 자연스런 부모 노릇



암탉도 엄마, 나도 엄마

짐승을 길러본 사람은 안다. 어미가 자기 새끼에게 얼마나 극진한지. 암탉이 알을 품기 시작하면 스무 하루를 품는다. 그 스무 하루 동안 하루 한 번 잠깐 나와 물 마실 때를 빼고는 하루 종일 알을 품는다. 고양이가 새끼 사랑하는 것도 대단하다. 우리 집 고양이는 마당과 집, 뒷산, 앞 논이 자기 영역이다. 그 고양이가 안방 아궁이 옆에 새끼를 낳았다. 그러더니 얼마 뒤, 새끼를 물고 집 뒤 처마 밑으로 옮겼다. 왜 그랬을까? 나중에 고양이가 아궁이 곁에서 뱀을 잡았다. 어미가 사냥을 나간 사이, 새끼를 뱀한테서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고양이는 이 뱀을 머리부터 먹기 시작하더니, 새끼들에게 젖을 한껏 빨리고 셋이 한 뭉치가 되어 늘어지게 잤다.



암탉과 고양이를 보면 누구한테 배워서 어미 노릇을 하는 게 아니다. 자기 안에 있는 유전자가 가르치는 대로 어미 노릇을 훌륭하게 한다. 짐승들을 보면서 자연스런 엄마 노릇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본다. 한 해 한 해 농사를 지어가면서, 아이들 엄마로 내가 하는 일도 달라졌다. 나는 이걸 가르칠까 저걸 가르칠까, 그런 계획을 세우지 않는다. 그저 잘 자고 잘 먹도록 한다. 아이들이 자기 몸과 마음을 따라 하루를 보낼 수 있게 해준다. 무얼 가르치려 하기보다 하루를 편안하게 지내도록, 그래서 아이 스스로 햇살과 바람 그리고 여러 생명들과 어울려 자랄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나도 수컷?

해마다 농사가 새롭듯이 자식 키우는 일도 새롭다. 곡식과 아이들, 생명을 돌보고 키운다는 점에서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한 번은 고추 농사로 실험을 한 적이 있었다. '농사에서 최대치란 뭘까'가 궁금했다. 나는 '고추 농사라면 이 세상에서 내가 제일 잘 짓는다'는 소리가 듣고 싶었다. 그 욕심을 채우고자 온 힘을 기울였다. 먼저 모종을 튼튼하게 키웠다. 아침저녁으로 자주 들여다보면서 조그마한 벌레들이 떡잎을 갉아먹지 않게, 아예 모종 곁에 붙어 지내다시피 했다. 행여나 영양이 부족하다 싶으면 손수 만든 영양제를 뿌려주었다. 밭을 가꿀 때도 그랬다. 거름도 평소보다 더 많이 넣고, 두둑을 더 넓고 높게 했다. 모종을 밭으로 옮겨 심고는 또 정성으로 가꾸었다.



그랬더니 엄청나게 자랐다. 나중에는 내 어깨만큼 자랐고, 많이 자란 놈은 내 키만 했다. 고추밭이 아니라 고추숲이었다. 하지만 문제가 생겼다. 고추가 웃자란 것이다. 예상보다 키가 너무 크다 보니 비바람을 견디기가 어려웠다. 태풍이 몰려오자 처참하게 쓰러졌다. 다시 일으켜 세우고자 했지만 이미 때가 늦었다. 뿌리가 다친 데다 웃자라 병에 걸렸다. 결국 수확이 끝나고 결산을 해보니 평년작 아래였다. 결국 최대치 농사란 나 자신의 또 다른 욕망이었을 뿐이다. 아이들도 그렇지 않을까. 아이들을 최고로 기르고 싶은 부모의 욕심에 아이들이 병들어 가는 건 아닐까? 그렇다면 일상에서 어디까지 부모가 해주어야 하고, 어디까지 아이를 믿고 내버려두어야 하는 걸까? 농사의 깊이가 끝이 없듯 자식 키우기도 그런 것 같다.



1. 자연으로 한 발 한 발



도시에서 산골로

우리는 1988년 겨울에 딸 정현이를 낳았고, 1995년 여름에 아들 규현이를 낳았다. 이 글을 쓰면서 아이들은 스스로 인디언식 이름을 지었다. 큰애는 탱이, 작은애는 상상이라고. 우리는 탱이가 초등학교 2학년에 들어선 1996년 서울을 떠났다. 서울의 한 아파트에서 살다가 산골로 옮긴 것이다. 아파트 동네에서는 잘 어울리는 게 중요했다. 내가 어떻게 생각하느냐보다 학교가 무얼 바라느냐가 중요했다. 남들처럼, 남들이 다 그러니까. 어느 날 토네이도에 휩싸여 한번도 듣도 보도 못한 오즈의 세계로 떨어진 도로시, 1996년 봄 산골로 간 탱이가 바로 그랬다. 전교생 여섯 명, 선생님 두 분. 산골 분지 한가운데 자리 잡은 작은 교실 두 칸. 도시 아파트에서 나고 자란 탱이는 산길 몇 킬로미터를 혼자서 걸어 이곳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다. 여름 저녁이면 반딧불이가 날아다니고, 멧돼지 일가가 어슬렁거리는 산골. 그곳은 내게 새로운 세계였다.



절망 끝에 부르던 희망의 노래

나는 농촌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대학 다닐 때부터 서울에 살기 시작해 20년 가까이 도시 생활을 했다. 대학 때부터 '인간다운 삶'과 '정의로운 사회'를 고민했지만, 이를 삶 속에서 실천해 가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점점 더 사회는 전문화되고 상품화되기를 요구한다. 그런 흐름 속에서 난 '살아있다'는 사실이 기쁨이 아니라 고통이 되고 있음을 발견했다. 몸과 마음이 지치다 보니 도시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어디에도 없었다. 점차 우울증에 빠졌다. 나는 나 자신이 불행에 빠진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삶을 돌아보아야 했다. 내가 꿈꾸던 희망. 사람답다는 게 뭔가? 적어도 돈이나 권력에 휘둘리는 삶은 아닐 것이다.



정말 '잘 사는' 게 뭔 지에 대한 물음을 더 이상 외면할 수 없었다. 내가 진정 원하는 게 무언가. 그 물음에 대한 답을 찾아 이 년쯤 '자신을 찾는 시간'을 가져야 했다. 그 사이 아내가 늦둥이를 가졌다. 나도 새롭게 태어나야 했다. 사람들은 많은 걸 끌어안고 산다. 온갖 살림살이는 물론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까지 말이다. 잡다한 지식과 정보, 편견과 고정관념, 지난 추억과 앞날의 꿈…. 그런 걸 하나하나 버리다가 버릴 수 없는 게 있음을 알았다. 바로 목숨, '살아 있음', 생명이었다. 그 마지막 하나에서 다시 시작하자. 한번도 서울을 벗어나 본 적이 없는 아내, 당시 아내는 시골로 내려가는 게 '이민 가는 기분'이라고 했다. 그러다 한 곳을 알게 되었다. 경남 산청에 젊은이 여러 집이 모여 자급자족하며 아이들도 함께 키우고 작은 학교를 열어보자는 곳이 있었다. 우리 꿈에도 맞는 곳 같았다.

대안 학교를 만들며

간디공동체는 1996년 초 양희규 씨가 <녹색평론>에 글을 실으면서 시작되었다. 그 글에 따르면 양희규 씨는 산청에 돌로 지은 집을 한 채 마련하고, 거기를 중심으로 여럿이 모여 자급자족을 하면서 아이들도 함께 기르고, 그러기 위해 작은 학교도 열어보자 했다. 우리는 산청으로 찾아가 양희규 씨를 처음 만났다. 이곳에 모여 일한 대가로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소박하게 살고자 하는 이들이었다. 인도의 간디 정신을 이어받자고 '간디공동체'로 이름 붙였다. 낯선 사람끼리 모여 공동체를 일구는 일은 어려웠다. 그래도 공동체는 '잘' 굴러갔다. 여름 계절학교를 마치자 학부모들이 학교를 세우자 했다. 집단의 힘은 무서웠다. 이듬해인 1997년 3월, 학교 문을 열었다. 돌집과 조립식 살림집, 동그란 통나무 집. 이 세 채가 학교 건물이었다. 밤에는 기숙사, 낮에는 교실로 썼다. 그러고 나니 이제 이곳은 공동체가 아닌 간디학교다. 이런 학교가 굴러가자 사회 여러 곳에서 관심을 보였다. 교육부는 '특성화고등학교' 법을 만들었다. 간디학교가 문을 열고 일 년이 지난 뒤 양희규 씨는 정부인가를 받아 1998년 3월 '간디고등학교'를 세웠다.



초기 대안학교는 우리 교육사에서 '자기 결정권'을 일깨워주었다고 생각한다. 정부와 제도권 학교에 맡겨두었던 교육권을 되찾았다고 할까. 학생에게는 자기가 꿈에 그리는 학교를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보인 것이다. 나중에 우리 식구가 아이들과 집에서 공부하는 길을 택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경험이 뒷받침되었으리라. 우리는 1~2년 사이에 공동체가 대안학교, 거기서 다시 정부인가 학교로 바뀌는 변화를 따라가기 어려웠다. 나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대안학교 교사를 지내보고 그 일이 내가 바라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학교사회는 교사에게 직장생활이 될 수밖에 없다. 나는 좀더 자유로운 삶을 바라고 있었다. 남편은 서울을 떠나올 때 가졌던 뜻을 살려 자급자족 농사를 짓자고 했다.

2. 학교에서 벗어나



나보기, 아이 보기

상상이가 유치원에 가지 않겠다고 했다. 아이들 장난이 놀이수준을 넘고 있었다. 따돌림이나 싸움은 먼 나라의 이야기인줄 알았다. 또 탱이의 담임선생님은 "너희들은 하루라도 빨리 도시로 나가라"고 했다. 그 말이 자꾸 목에 걸렸다. 우리 삶을 송두리째 흔드는 말이 아닌가. 아이들 아버지로서 어떻게든 대안을 마련해야 했다. 진정 행복한 배움이 뭘까. 확신을 갖고자 공부를 시작했다. 아이들 문제가 아니라 바로 지금, 내 문제였다. 긴긴 산골의 겨울. 학교가 뭔지, 교육이 뭔지에 대해 근본적인 물음을 던졌다. 그리고 이런 것들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를 따져보고 싶었다.



그동안 '나'를 위한 공부를 제대로 못했다. 정해진 교과나 시험을 위해 공부했지, 자신을 위해 공부한 적은 별로 없었다. '나를 찾고 싶다. 그동안 나는 이름뿐인 아버지였다. 아버지다운 내가 아니라 나 다운 아버지가 되고 싶다.' 그렇게 마음먹으니 공부가 잘 됐다. 초등학교 교과서, 중학교 참고서도 뒤적여 보았다. 낯설고 어렵게 느껴지는 내용도 있었지만 교과서 내용을 배우는 데 아이들이 너무 많은 시간을 쓰는 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내가 조금씩 달라지는 걸 느꼈다. 그러다가 학문의 근본을 다루는 책도 보았다. 수란 무얼까? 왜 수학 공부를 하는 걸까? 문제를 외우고 푸는 공부와 달리 신선한 느낌이 왔다. 뭔가 손에 잡힐 듯하니 내 관심은 국어로 넘어갔다. 국어를 '말하기, 듣기, 쓰기' 따위로 갈래 나누기 이전에 그 근본을 짚어보지 않을 수 없다. 그건 바로 언어 자체에 대한 관심을 뜻한다. 언어에 대해 탐구를 하다보니 교육에 대한 깨달음이 어느 순간 머리를 파고들었다.



대부분의 학문은 언어를 기초로 한다. 글자란 추상화된 기호가 아닌가. 추상화란 많은 부분을 버리고 뼈대를 추린 것이다. 삶을 전체적으로 바라볼수록 언어가 갖는 한계는 많다. 경이로운 영역에서는 '말'로는 설명이 안 되는 게 얼마나 많은가? 언어가 불완전한데 학문이 완전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불완전한 학문'을 익히기 위해 너무 고생할 필요는 없으리라. 공부를 바라보는 눈이 조금 느긋해진다. 아이들에게 공부를 억지로 시켜야 할 이유는 없는 것 같다. 점점 자신이 생기니, 그동안 나를 주눅 들게 했던 과목에도 도전했다. 그건 바로 자연과학이었다. 물리에 관심을 갖다보니 양자역학도 만났다. 양자역학은 뉴턴 역학과 달리 인간의 자유의지와 맞물려 있다. '관찰자의 행위가 실험결과에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놀라운 이야기였다. 과학이 그러하니 교육은 더 말할 것도 없으리라. 아이들 성장을 제대로 이해하자면 얼마나 변수가 많은가. 그 다음부터는 공부의 즐거움에 푹 빠져들었다.

그런데 이런 공부보다 더 큰 영감을 준 건 사실 병아리였다. 병아리가 보여주는 생명력은 놀라운 것이었다. 병아리는 내게 잠자던 생명 본성을 일깨웠다. 우리 아이들도 자라는 생명이다. 병아리도 알아서 잘 하는데 우리 아이들이라고 못하란 법이 있겠나. 공부를 하는 이유도 다 잘 살자고 하는 것 아닌가. 잘 살자면 잘 배워야 하리라. 잘 배운다는 것은 뭔가. 바로 생명 본성에 충실한 배움이 아닐까. 밝은 눈빛을 적시는 배움. 싱싱한 배움. 아이 자신에게 가장 소중하면서도 절실한 배움. 어느새 학교는 저 멀리 사라지고, 우리 아이들이 성큼 내 앞에 다가온 듯 가까이 보였다.



소중한 배움을 찾아

2001년 3월 탱이는 중학교에 입학을 하고, 새로운 환경을 재미있어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재미는 잠깐, 조금씩 힘들어하기 시작했다. 당시 탱이가 쓴 글. "내가 학교에서 얻을 수 있는 게 뭘까? 어차피 공부는 내가 책보고 하는걸. 괜히 아침저녁 엄마한테 미안하고, 중간고사 다가오고 친구들은 모두 열심히 공부를 한다. 나는 평소처럼 공부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친구들과 동떨어져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제 내 세계는 이곳이 아니구나." 결국 아이는 중간고사 보기 전날 학교를 그만두기로 했다.



이제 학교와의 관계를 풀 차례다. 먼저 의무교육을 벗어나는 사례와 관련법을 알아보았다. 크게 두 가지 흐름이 있었다. 하나는 아이가 따돌림이나 폭력 따위로 망가져서 학교를 그만두는 경우. 또 하나는 부모와 아이가 능동적으로 학교를 그만두는 경우. 우리는 우리만의 경우가 있지 않을까. 탱이가 그 길을 찾아 나섰다. 하지만 세상은 불행하게도 '미성년 아동'의 판단을 잘 믿지 않는다 "아이들이 뭘 알아요? 나중에 후회할 텐데. 부모가 잡아주어야지." 그래서 관련법을 공부했다. 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의무교육은 국가와 부모에게나 '의무'이지 아이에게는 '권리'라는 점이다. 아이가 원치 않으면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아이가 행복해야 부모도 행복하다. 아이를 행복하게 자라게 하는 건 부모의 권리다. 헌법에도 명시된 '행복을 추구할 권리'라고 본다. 하지만 학교에서는 전례가 없다는 이유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학교측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이야기를 좁혀갔다. 우리 고민은 학교냐 집이냐가 아니다. 아이가 원하는 곳에서 공부를 하는 거다. 그래서 학교측과 함께 내린 결론이 '취학의무유예'였다.



프로그램 다시 깔기

학교는 학교 안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내 마음속에, 또 내 뼛속 깊이 새겨져 있었다. 시계가 째깍째깍 돌아가듯 우리 삶도 알차게 돌아가야 할 텐데…. 학교에 보낼 때처럼 긴장을 풀지 않고 뭔가를 찾아 헤맸다. 탱이가 늦잠을 자거나, 놀며 지내면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 불안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탱이와 나는 함께 공부했다. 한가하고 따스한 공부시간이었다. 조각났던 내 분신 하나가 제자리로 돌아온 시간이었다. 이렇게 해보니 교육효과는 생각보다 아주 좋았다. 엄마가 사교육 선생이 되고 집이 학교가 되는 게 우리가 바라는 것인가? 학교를 그만두면서 공부에 매달리는 건 모순이다. 한발 물러서기로 했다. 내가 가르치는 일부터 그만두었다. 학교에 다니지 않으니 학교가 그동안 우리 삶을 얼마나 얽매고 있었는지 보인다. 아이들이 학교를 그만두고 집에 있게 되면서 가족은 함께 살아가는 '절대' 공동체가 되었다. 어느 부모가, 아이가 학교를 그만둘 때 '책임질 수 있을까?'라는 진지한 물음을 하지 않으리오. 그 대답은 쉽게 나올 수 없고, 오로지 부모 자신이 공부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집안에 공부하는 분위기가 넘쳐나기 시작했다.



5. 내가 주인인 배움



전문가 아닌 전인

누가 아이들 교육의 목표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자신을 찾는 일'이라고 대답하고 싶다. 자신을 찾아가는 길을 어떤 것일까? '전인(全人)을 위한 지식 공부', '몸 공부' 그리고 '일'이다. 나는 전인이라는 말을 산골에 살기 시작하면서 처음 들었다. 그때 그 놀라움이라니! 그때 전인은 '자기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을 두루 자급할 수 있는 사람', 그런 뜻으로 다가왔다. 내게 전인이 뭔가를 제대로 알게 해준 건 탱이다. 전인, 그러니까 온전한 사람이란 오만 가지를 다 잘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탱이가 학교를 그만두고 집에서 지내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전인이 무엇인지를 알 듯했다. 배가 고프면 스스로 밥을 차려 먹는 걸 보면서, 진달래꽃에서 꿀을 따먹는 걸 보면서, 사람이 지금 여기에 집중할 수 있다면 그게 전인이 아닌가 싶었다. 내가 살아가는 지금 여기, 거기서 주는 풍요로운 영감을 느끼고, 필요한 일이 있다면 그것을 해내는 게 전인의 기본이리라.



무협지에서 보면 훌륭한 노사부는 수제자를 전인으로 키운다. 무술을 가르치기 전에 바느질, 빨래와 같은 살림살이, 강과 산에서 먹을거리 해오기, 연장 만들기처럼 사람으로 살아가는 기본을 가르친다.

전문 열람 제한

미가입 상태이므로 요약본의 일부만 제공됩니다.
더 깊이 있는 내일의 통찰력과 지식 에너지를
프리미엄 무제한 이용권으로 충전해 보세요!

멤버십 가입 / 결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