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일찍 나이 들어버린 너무 늦게 깨달아버린 2
고든 리빙스턴 지음 | 리더스북
몇 년 전 텔아비브의 디스코장에서 폭탄이 터져 이삼십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지만, 그 후에도 젊은이들은 움츠러들지 않았다. 그들은 떠들썩한 밤문화를 되찾았다. 오늘날 폭발이 있었던 장소 밖에 세워진 위령비에는 고인들의 이름 아래 한 줄의 문장이 새겨져 있다.
"우리는 춤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 진 와인가튼, <워싱턴 포스트 매거진>
새로운 도전을 맞이하기에 너무 늦은 나이란 없다2년마다 한 번씩 열리는 트랜스팩대회는 로스앤젤레스에서 호놀룰루까지 태평양을 횡단해야 하는 아주 힘든 요트 경주입니다. 따라서 그 대회의 출전 자격을 얻는다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기보다 더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2003년도에 로이드 셀린저라는 70세의 한 노인이 이 대회에 참가하겠다고 나섰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존심이 강한 70세 노인이 할 만한 행동을 하고 말았습니다. 나이를 속였던 것입니다. "40대 선장에게 내 나이를 69세라고 소개했습니다. 그러면 좀더 나을 것 같아서요." 그러나 결과는 예상 대로였습니다. 결국 선장으로부터 참가를 거절당한 로이드는 완벽한 복수를 생각해냈습니다. 2005년도 트랜스팩대회를 위해 직접 전장 12미터의 보트를 마련하고 선원들을 모집한 것입니다. 물론 선원이 되기 위해서는 65세 이상이어야 한다는 조건을 붙여서 말입니다.
사무엘 존슨의 말처럼 배는 침몰할 수도 있는 위험까지 더해진 감옥과도 같았습니다. 파도가 몰아치는 바다 위에 떠 있는 작은 배는 어찌 보면 세상의 축소판처럼 보였습니다. 우리는 고독했지만 우리를 움츠러들게 하는 거대한 힘과 싸워 이길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우리의 운명에 대해 완전히 무심한 우주 속에서 우리가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도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것은 우리가 그 모든 것들을 견디어내고 육지와 인간 세상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우리는 다른 배들보다 이틀 이상 늦게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속도에서는 뒤졌을지 몰라도 패기와 열정에서는 어느 팀 못지 않았습니다.
도전도 열정도 없는 삶이란 생각만 해도 따분합니다. 하지만 우리들 대부분은 편하고 안정적인 삶을 따라갑니다. 그것은 도전적인 삶을 선택했을 때 따라오는 불편함과 두려움이 엄두가 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아주 포기하지는 못하고 언젠가는 한번쯤 도전할 기회가 있겠지 하면서 세월만 흘려보냅니다. 하지만 자신의 생각을 바꾸지 않는 한 기회는 오지 않습니다. 도전하는 사람들은 성공이냐 실패냐를 미리 계산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자신의 모든 걸 걸고 최선을 다해서 전력투구할 뿐이죠. 성공은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몰론 실패도 있겠지만 도전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들은 충분히 행복해합니다. 인생은 한 번뿐이고 리허설도 없습니다. 만약 도전을 꿈꾸고 있다면 더 이상 주저하며 머뭇거리지 말고 지금 당장 실행하십시오. 그 자체만으로도 당신의 삶은 특별해 질 테니까요.
언제까지나 행복한 일도 언제까지나 불행한 일도 없다사람들은 불행에 대해서 많은 말들을 하곤 합니다. 그들의 말을 듣다 보면 한 번도 행복했던 적이 없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금방이라도 삶을 포기할 것처럼 그들은 불행을 머리에 이고 삽니다. 행복해지고 싶은 마음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을까요? 그렇다면 행복은 과연 무엇일까요?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나깨나 늘 행복을 추구하면서도,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만족하지 못하는 우리의 삶은 무엇이 문제일까요? 혹시 원하는 삶에 다가가지 못하게 하는 방해꾼은 바로 나 자신이 아닐까요?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세상일에는 언제나 길흉화복이 함께 한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언제까지 행복한 일도 언제까지나 불행한 일도 없습니다.
한 작가는 행복을 성취와 기대감을 비교하는 분수로 설명했습니다. 만일 분자인 성취가 더 크다면 삶에서 원하는 것을 충분히 이루고 행복해질 확률이 높습니다. 하지만 분모인 기대감이 성취할 수 있는 것보다 더 크면 만족을 못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행복은 주관적인 경험이므로 분자와 분모의 크기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나는 어느 정도의 성취에 만족하는가? 내가 나 자신에게 거는 기대는 성취할 수 있는 것들인가? 행복해지고 싶다면 스스로에게 이러한 질문들을 던져봐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과도하게 많은 것들에 욕심을 내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마음을 비우면 더 큰 것을 얻는다."는 말은 우리에게 많은 울림을 줍니다. 더 큰 것이란 물론 행복과 평화겠지요.
우리가 느끼는 불행은 매우 주관적입니다. 남들이 볼 때는 별 문제가 아닌데도 나 혼자 신경을 곤두세우며 힘들어합니다. 그것이 물질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당장 어떻게 될 것처럼 허둥댑니다. 행복에 대한 자기중심적인 집착 때문이지요. 이런 사람들은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것을 갖고 있어도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자기 문제에만 매달리며 끝까지 만족을 모르는 사람들이지요. 그러나 더 많이 행복해지고 싶다는 욕심 때문에 계속 불행한 마음으로 지내는 것은 바보 같은 짓입니다. 고통스럽고 힘든 날들도 세월이 흘러 되돌아보면 오히려 행복했던 시절로 추억되곤 합니다. 그것은 한발 물러서서 상황을 바라볼 수 있는 여유가 비로소 생겼기 때문입니다. 만족하는 마음은 여유이며 능력입니다. 행복해지고 싶다면 자신의 현재를 인정하고 격려하십시오. 그러면 누구보다 행복한 자신을 만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삶이란 시간과 운명의 무거운 짐을 견디는 것이다당사자가 아닌 이상 누군가의 아픔을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어떤 방법으로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고 위로할 수 있을까요. '거짓말'이나 가벼운 다독거림 또는 간단명료한 말솜씨만으로 슬퍼하는 사람을 위로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얼굴과 성격이 모두 다른 것처럼 가슴 아픈 상실에 대한 반응 역시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최선의 위로는 슬퍼하는 사람과 함께 있어주면서 하소연을 들어주고 절망감을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아픔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슬퍼하거나 함께 있어주는 법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나라도 가르쳐줄 수만 있다면 그러고 싶습니다. 물론 슬픔을 잘 위로해주는 사람들도 있지만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더 잘할 뿐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슬픔을 함께 나누고 위로하는 데 서툰 것은 아픈 사람들의 입장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이 상실의 아픔을 겪을 때 대처하는 방식을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습니다. 비애와 애도에 대한 태도를 보면 특히 그렇습니다. 화해할 수 없는 운명에 맞서 싸우며 스스로 삶의 목적을 찾아내야만 했던 뼈아픈 경험을 해보지 않은 사람이 과연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절망감으로 무너져 내린 사람들에게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희망을 이야기할 수는 있으되 그 안에는 어떤 절실함이 없을 것이고, 그래서 아무런 위안도 되어주지 못할 것입니다. 삶은 때로 우리에게 견딜 수 없는 고통과 시련을 주고 시간과 운명의 무거운 짐을 견디어낼 것을 요구합니다. 우리는 이 무거운 짐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우리가 도움을 주는 사람뿐 아니라 우리 자신도 위안을 받고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결국 우리는 진정으로 고통을 함께 나눔으로써 삶의 또 다른 선물인 희망도 함께 나눌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슬픔과 고통을 만납니다. 특히 사랑하는 사람과의 사별은 그 중 제일 큰 아픔입니다. 내가 그 입장이 될 수도 있고 가까운 지인이 사별의 아픔을 겪기도 합니다. 이때 우리는 슬픔에 잠겨 있는 사람들을 어떻게 위로하는 것이 가장 좋을지 고민하게 됩니다. 물론 그들을 위로하는 의례적인 말들은 많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말들과 과장된 배려는 그저 형식이나 격식을 갖춘 인사일 뿐입니다. 판에 박힌 말만 늘어놓는 위로는 상대에게 오히려 피곤한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상대의 아픔과 고통을 진정으로 헤아릴 수 없다면 그저 옆에서 함께 있어주면서 이야기를 들어주는 게 차라리 나은 방법입니다. 섣부르게 자신은 모든 고통을 이해한다는 식으로 상대에게 몇 마디 던지는 것은 상대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내 체면치레일 수 있습니다.
화를 잘 내는 것은 건강한 것이 아니라 비겁한 것이다부부문제를 상담하러 오는 사람들 중에는 분노의 폭발이 어떤 식으로든 국면을 전환시켜주고 화해의 길을 열어준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분노는 분노를 낳을 뿐입니다. 누구든 공격을 당하면 이성적으로 대응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물론 화를 참는 일은 어렵습니다. 습관 때문이죠. 사람들은 상담을 할 때 자신의 대화 방식에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곤 합니다. 하지만 반성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나쁜 습관은 과감히 버려야 합니다. 사실 화를 내는 사람들을 잘 관찰해보면 상대에게 어떤 기대를 가진 사람인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불만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적개심 뒤에는 무너져버린 기대감으로 인해 느끼는 서운한 감정이 있습니다. 자신에게 그렇게 대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는 것이겠지요.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이러한 분노의 감정 뒤에 숨은 진짜 감정의 실체입니다. 그것은 바로 두려움과 불행입니다. 이 두 가지 감정은 나약함에서 비롯되며 견뎌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감정에서 벗어나기 위해 화를 내고 원망을 하는 것입니다. 화를 낼 상대가 있기만 하면 마음껏 분노를 폭발하고 자신이 느끼는 불행에 대한 책임을 그 사람에게 떠넘기곤 합니다. 스스로 희생자가 되는 것입니다. 만약 누군가에 대해 화가 난다면, 그 분노의 감정이 상실감이나 자포자기한 심정에서 나오는 것은 아닌지 잘 살펴보십시오. 그리고 상황을 변화시키기 위해 누구에게 요구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없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주변 사람들을 바꿀 수 없다면 당신이 먼저 달라지십시오. 그리고 그들을 놀라게 해보십시오.
분노란 상처 입은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거나 누군가로부터 버림을 받았을 때 분노를 표출합니다. 누구든 내면에 억압된 분노를 조금씩은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감정은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따라 삶의 질은 각자 달라집니다. 화를 이기지 못해서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짓는 사람들을 보면 안타깝습니다. 하지만 어떤 이유도 죄에 대한 변명은 되지 못합니다. 따라서 화가 날 때에는 자신의 마음을 먼저 들여다봐야 합니다. 무엇이 자신을 화나게 했고 어떻게 하는 것이 그 문제를 풀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인가를 천천히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분노에 차 있는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다 보면 어느새 평화는 찾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용서는 원망할 권리를 포기함으로써 평화를 얻는 것이다미국에서 정의의 수호를 이야기하는 법은 응징과 보복을 토대로 하고 있습니다. 두 가지만 예를 들어보죠. 미국인들 74퍼센트는 사형제도에 찬성하고 있습니다. 또 세상에서 소송을 가장 많이 하는 나라도 미국입니다. 미국인들은 다른 사람에게 주는 피해나 실수에 대해서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습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용서는 당연히 인기가 없습니다. 용서의 정의는 '원망할 수 있는 권리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흔히 용서를 망각이나 타협과 혼동합니다. 하지만 용서는 떠나보내고, 놓아주는 행위입니다. 그리고 용서는 다른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 주는 선물입니다. 용서는 가해자들의 책임을 면제시켜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지고 있는 원망의 짐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용서는 이타적이기보다 이기적입니다.
사람들은 원망하는 마음을 가슴에 품고 상담을 받으러 옵니다. 그들은 자신의 원망이나 실수가 과거에 겪은 불행(어린 시절에 받은 학대, 부모의 알코올 중독, 실패한 결혼)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설명하곤 합니다. 사람은 어느 정도 과거에 의해 영향을 받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런 식의 합리화는 자신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어느 누구도 과거에 일어난 일을 되돌릴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의식적인 선택이 요구되며, 역설적인 표현이지만 힘이 아닌 용기가 필요합니다. 용기를 내서 자신을 아프게 한 사람들뿐 아니라 단점과 실수투성이에 기회를 낭비한 우리 자신도 용서해야 합니다.
진심으로 용서를 하는 사람은 상대를 밑에 두지 않습니다. 결코 "네가 잘못했지만 용서할게."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판단하지 않고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원한도 없이, 불평도 없이, 마음도 없이 용서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용서는 내면의 평화를 열어주는 열쇠입니다. 우리는 용서를 상대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상대에 대한 원망과 비난을 쏟아내며 절대로 용서할 수 없는 마음이 되었을 때 우리는 불편해집니다. 당장에는 그렇게 라도 화풀이를 해야 속이 시원할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상대에 대한 분노로 하루 하루가 엉망으로 흘러갈 뿐입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은 용서하는 데 지체하지 않습니다. 용서야말로 불필요한 고통 속에서 자신을 꺼내줄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죠.
걱정과 두려움만으로 안정된 삶을 지켜낼 수는 없다용기의 정의는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영웅을 찬양하는 국가인 미국이 하는 행동은 마치 불안 장애 환자처럼 보입니다. 미국에서는 두려움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는 지수로 흔히 총기 판매량을 들곤 합니다. 9·11 테러 이후에 총기 판매는 전국적으로 급증했습니다. 테러 공격을 총으로 막아보겠다는 어리석은 미국인들이 그만큼 많다는 것입니다. 하긴 위협을 느끼면 무조건 총을 사는 사람들이 미국인입니다. 미국 원주민 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영원히 산다면 용기 같은 것은 필요 없을 것이다." 그렇습니다. 인간이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점은 죽음을 인식한다는 것입니다. 용기는 나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들의 필멸을 직시하고 살아 있는 한 두려움 없이 살겠다는 의지입니다.
대인관계가 발전하지 못하는 이유는 서로 친밀한 사이가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을 드러내 보이지 않으려고 애씁니다. 다 드러내 보였다가는 상처를 받을 수도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외로운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상처받는 것을 피하기 위해 노심초사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랑에 실패한 사람들은 더 이상 거부당하지 않으려고 좋아하는 사람이 나타나도 다가가지 못하고 전전긍긍합니다. 그리고 상처를 받느니 차라리 외로움을 선택합니다. 막연한 불안에 떨지 말고 우리의 행복을 위협하는 실체와 맞서 싸우는 용기를 발휘해야 합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우리 스스로도 자랑스럽게 생각할 수 있는 무언가를 우리 자신에게서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옛 속담에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구더기 때문에 장을 못 담그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두려움에 사로잡힌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스스로 없애고, 자신을 늘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물론, 거뜬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들도 애써 피하려 합니다. 또한 위험을 피하려고 어떻게든 몸을 사리기 때문에 시간과 에너지를 창조적인 곳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