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리슨 래퍼 이야기
앨리슨 래퍼 지음 | 황금나침반
따님입니다, 래퍼 부인1965년 4월 7일, 내가 세상에 태어났을 때, 어머니는 진정제에 취해 힘없이 누워 있었고, 자신이 장애아를 낳았다는 사실은 다음날에서야 알게 되었다. 어머니는 깊은 절망 속으로 빠져들었고, 잠옷 바람으로 병원을 빠져나가려다 붙잡혔다. 병원에서는 어머니에게 법적인 의무와 책임에 대해 준엄하게 경고하고 출생증명서에 기입할 아기 이름을 물었다. 어머니는 임신 중에 프란체스카라는 이름을 지어두고 있었지만 불쑥 "앨리슨"이라는 이름이 튀어나왔다. 나는 중간 이름이 없다. 그냥 '앨리슨 래퍼'이다. 태어난 지 일주 일 된 앨리슨 래퍼는 양쪽 팔이 없었고, 넓적다리뼈에 발이 달려 있었다. 탈리도마이드 기형처럼 보였지만, 실제 병명은 해표지증(Phocomelia, 짧은 팔과 다리에 손과 발이 붙어 있는 선천성 기형)이었다. 나는 중증의 불구자로 간주되었으며, 병원에 남겨졌다.
나의 어머니 베로니카는 버밍엄의 노동자 계층의 가정에서 성장했고, 고든 래퍼와 결혼했다. 그들의 결혼은 오래가지 못했다. 어머니는 나보다 먼저 태어난 언니 바네사를 위해 아버지와 다시 합쳐보려고 노력한 적이 있었지만 얼마 안 가 다시 헤어졌다. 그리고 그 사이에 나를 임신한 것이었다. 내가 태어났을 때 어머니는 여덟 살이 된 딸 바네사와 친정 부모와 함께 살고 있었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정신 바짝 차리고 먹고살 궁리를 하라"고 충고했고, 의사도 아이를 정부에 맡기라고 권유했다. 어머니는 결국 나를 포기했고, 다시 루카스 자동차 부품 연구소의 기계공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나는 더 이상 그녀의 삶 속에 존재하지 않았다.
홈, 스위트 홈당시 영국에서는 장애아들을 시설에 수용하는 것이 현명한 처사라고 생각했다. 사실 장애아의 부모는 아무런 보조를 받지 못했다. 나는 사설 보육원에 옮겨졌다가 7주쯤 되었을 때 어린이집으로 옮겨졌다. 어린이집은 신체장애와 정신지체를 가진 250명의 장애아를 수용하고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곳의 간호사들은 정신지체와 신체장애를 잘 구분하지 못했던 것 같다. 간호사들은 내가 말을 하고 그림을 그리는 등, 정상적인 지능을 갖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곤 했다. 어린이집의 건물은 베네딕트 수도원과 같이 긴 회랑과 높은 회색 돌담으로 둘러쳐져 있었다. 그 건물 설계에는 당시의 사회적 관념이 반영되어 있었다. 당시 사람들의 생각에 따르면 장애아들은 원죄를 갖고 태어났기 때문에 그만큼 더 착하고 성스러워야 했던 것이다.
간호사들은 매우 엄격했고, 우리에게 애정을 표현하지 않았다. 그것은 감정적인 애착으로 이어질 수 있는 행동은 피해야 한다는 시설의 방침에 의한 것이었다. 우리는 자주 의사들에게 진찰을 받아야 했는데, 간호사에게 호명된 아이들은 가축 운반차처럼 생긴 작은 수레를 타야 했다. 그 수레는 양옆이 높아서 안에 들어가면 밖이 보이지 않았다. 직원이 수레를 끌고 물리치료실로 가는 동안, 아이들은 한데 엉켜 이리저리 굴러 다녔다. 물리치료실에 도착하면 아이들은 벌거벗거나 속바지만 입혀진 채 진찰대에 올려졌다. 그리고 진찰대에 누우면 열 명이 넘는 의사들이 빙 둘러쌌다. 그들은 아이들의 몸을 여기저기 찔러보고 잡아당겨 보고 돌려보기도 하면서, 알아들을 수 없는 의학용어로 이야기했다.
의사들은 순수하고 냉정하게 아이들을 살폈지만 나는 그들의 과학적 흥미가 불편했다. 의사들은 우리가 좀더 잘 움직일 수 있고 외관상으로도 보기 좋게 해주려고 애썼다. 그 방법은 수술이었다. 당시 나와 가장 친하게 지냈던 친구 필도 교정수술을 받았다. 하지만 필은 수술 받은 지 몇 달만에 내 삶에서 사라졌다. 필이 없어지자 나는 피터 헐과 타라 플러드와 친하게 지냈다. 피터는 다리가 없고 어깨에 뭉툭하고 짧은 팔이 달려 있었다. 그는 나중에 장애인 올림픽에 수영 선수로 출전해서 금메달과 은메달을 땄고, 여왕으로부터 대영제국 국민훈장을 받았다. 타라는 다리가 짧고 팔꿈치 이하가 없었는데, 두뇌가 명석해서 나중에 대학을 나와 좋은 직장에 들어갔다.
우리에게는 재활과 독립이 중요했으므로, 어린이집 건너편에 있는 연구소에서 정기적으로 의족과 의수를 맞춰야 했다. 그곳의 기술자들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 우리에게 편견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들에게 우리는 사회의 해충이 아니라 물리학 숙제에 가까웠다. 기술자들은 우리의 가슴, 윗몸, 팔 둘레, 어깨넓이를 수없이 측정하면서 작업을 했다. 하지만 그들이 만들어준 의족과 의수는 우리에게 별 효용성이 없었다. 내가 처음 착용한 의수의 끝에는 후크 선장의 것처럼 생긴 갈고리가 달려 있었는데 어깨의 움직임이 갈고리까지 미치지 못해 사용하기가 불편하고 어려웠다. 그 후 사용하게 된 새 의수는 가스 실린더로 작동하도록 되어 있는 금속 재질이어서 보기에는 훌륭했지만 역시 사용하기 힘들었다. 우리는 장난을 치거나 탁자에 구멍을 내는 용도로 그것을 사용했다.
연구소의 직원들은 우리가 의수족을 능숙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하려고 애썼다. 그것은 독립이라는 궁극적인 목표를 위한 기본적인 조건이었다. 따라서 식사시간에는 항상 우리가 보조기구를 사용하는지 감시했다. 하지만 그놈의 쇠붙이는 절대 기대를 충족시켜 주지 못했다. 내가 의수로 할 수 있는 기술은 음식을 접시 가장자리로 밀어 놓는 것뿐이었다. 집게는 음식을 잡지 못하고 빙글빙글 돌기만 했다. 그래서 나는 따뜻한 음식을 먹을 수 없었고, 어쩌다가 음식을 집었더라도 턱이나 눈에 발려지거나 식탁 아래로 떨어뜨리거나 다른 아이의 무릎이나 얼굴에 던져졌다. 다행히도 연구소 직원들의 실험이 모두 실패로 끝난 것은 아니었다. 기술자들은 우리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고 직접 체험을 했기에 내가 열 살이 되었을 때 그 결과물들은 그만큼 더 훌륭해졌다.
사랑하는 어머니나의 어머니 베로니카 바버는 남동생 두 명과 함께 자랐다. 그녀의 아버지는 좌익이었고 시의회 의원이자 조합원으로 일했는데, 당시에 그 직책들은 모두 대가없이 하는 일이었다. 그녀는 구식이었고, 돈과는 거리가 멀었으며, 자신의 원칙을 지키면서 살았다. 어머니는 열다섯 살에 학업을 중단하고 루카스 자동차부품 공장에서 기술자로 일했다. 어머니는 노동자라기보다는 미용사처럼 보였다. 그만큼 외모에 상당히 신경을 쓴다. 나보다 화장하는 시간이 더 오래 걸리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어머니는 육감적인 몸매를 가진 매력적인 여성으로 항상 숱이 많은 검은 머리를 한껏 부풀리고 다녔다. 어머니를 만난 적이 있는 내 친구들은 거대한 벌집 모양으로 치솟은 어머니의 머리를 기억한다. 그렇게 모양을 내려면 몇 시간씩 걸렸을 것이다.
어머니는 남자들에게 상냥하고 쾌활하며, 특히 사교 행사에서 시선을 받는 것을 즐겼다. 하지만 화려한 외모에도 불구하고 신분 상승이나 돈을 버는 일에는 그다지 욕심이 없었다. 어머니의 남동생인 닉은 큰 집과 사업체를 갖고 있는 수완가였지만, 어머니는 침실이 둘인 공영주택을 소유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하고 있었다. 물론 집의 내부는 공들여 꾸며 놓았다. 어머니는 내가 태어난 후 얼마 되지 않아 공장 기술자인 앨런 바버와 재혼했다. 나는 앨런을 매우 좋아했고, 지금까지도 그를 아빠라고 부르고 있다. 앨런은 나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사랑한다. 어릴 때 집에 갈 때면 그는 나를 무릎에 올려놓고 공중으로 들어 올리곤 했다.
어머니는 나를 안아주거나 애정표현을 해준 적이 없다. 어머니가 언니를 애지중지한 걸로 봐서는 분명 사랑과 애정을 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외모나 다른 사람의 시선에 신경 쓰는 어머니는 나의 장애를 감당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내가 버밍엄에서 가장 가깝게 지낸 사람은 언니 바네사였다. 언니는 어머니와 취향이 비슷해서 화려한 것들을 좋아했지만 내게 잘 대해 주었다. 언니는 다른 사람들의 눈총을 개의치 않고 공원과 수영장 같은 곳에 나를 데리고 다녔다. 일곱 살 되던 해, 나는 맹장염을 앓은 적이 있다. 크리스마스 때 집에 갔는데 구토가 심해 밤새 화장실에 있어야 했다. 그때 언니는 밤새도록 나를 붙잡고 있었다. 내 체중을 지탱하느라 힘들었을 텐데 언니는 괜찮아 질 거라고 나를 위로하며 인내심을 잃지 않았다.
어머니는 내가 사용하는 여러 가지 보조기구들이 집을 어질러놓는다고 여겼지만, 나는 기구들을 사용하여 혼자 독립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옷을 입기 위해 맨 처음 사용한 기구는 이젤처럼 생긴 나무 스탠드였다. 스탠드에는 나무 막대기 두 개가 앞으로 연결되어 있었는데, 바지를 입으려면 두 개의 막대기 위에 옷을 걸치고 다리를 넣은 다음 몸을 비틀면서 입어야 했다. 티셔츠와 블라우스도 막대기 사이에 목 부분을 벌려서 걸어놓고 머리부터 집어넣어서 입었다. 나중에는 한 쌍의 지팡이를 사용했는데 지팡이 끝에 달린 갈고리로 옷을 당겨서 입도록 되어있었다. 지팡이는 어디든지 갖고 다닐 수 있어서 지금까지도 사용하고 있는데, 입으로 갈고리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목을 심하게 비틀어야 하기 때문에 지금도 목과 등에 많은 문제가 생기고 있다.
나는 가끔 방문객들에 의해 외출을 했다. 나는 명절에 집에 가면 외출했던 이야기를 자랑삼아 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나를 찾았던 방문객들이 점점 나를 찾지 않았다. 후에 들은 얘기에 의하면, 어머니는 내가 칭찬한 방문객과의 외출을 허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 사실을 일찍 알았더라면 집에 가서 부모님께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머니는 무슨 일이든지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하는 것을 매우 어려워하는 것 같았다. 반면에 나는 어머니가 왜 나를 버렸는지, 왜 나를 대하는 태도가 항상 냉정한지를 알고 싶었다. 어머니는 항상 다른 사람을 탓했고, 또한 영국인다운 방식으로 감정을 엄격하게 통제했다. 그래서 내가 울거나 감정적이 되는 것도 싫어했다. 게다가 사실을 왜곡하기까지 했다.
나는 책을 쓰기 위해 가능한 많은 자료를 여러 곳에 요청했다. 그러던 어느 날, 외출 후 집에 돌아와 보니 커다란 봉투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내가 시설로 옮겨졌을 때 사회복지부에서 작성한 수용 허가서였다. 나는 대충 목록을 훑어 내려갔다. 이름, 생일, 국적과 출생지…. 반쯤 내려갔을 때 가족이라는 항목에서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어머니의 첫 남편 고든 래퍼, 즉 내 아버지가 친아버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거기 기록된 내 아버지는 버스 기사였던 조지 모튼으로 되어 있었다. 나는 39년 동안 래퍼라는 성을 갖고 살면서 고든 래퍼가 나의 아버지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어머니는 조지 모튼과 관계를 갖고 나를 임신했던 것이었다. 나는 어머니가 진실을 말하지 않았다는 배신감과 마침내 진실을 알게 되었다는 작은 안도감까지 만감이 교체했다. 그때의 감정은 어머니와의 관계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하급반 기숙사다섯 살이 되면서 나는 다른 건물에 있는 하급반 기숙사로 옮겨졌다. 그곳에서는 우리를 보살피는 간호사들 외에 우리를 감독하는 보조직원들이 있었다. 보조직원들은 군대의 훈련 조교들처럼 질서와 시간 엄수에 집착했으며 우리를 학대하고 착취하고 탄압했다. 그 시절에는 법과 규정을 가진 아동보호기관이 없었으므로 그들을 견제 할 수 있는 장치는 아무것도 없었다. 보조직원들 중 특히 폭력적인 사람이 하나 있었다. 그 직원은 가장 몸이 불편하고 약한 아이를 때리고 발로 차고 쥐어박곤 했는데 정도가 지나쳐서 아이를 다치게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가 아이들을 상대로 즐겨 했던 장난은 우리를 집어던지는 것이었다. 일종의 표적 맞추기 놀이였다.
그는 5~6미터 떨어진 곳에 쿠션을 놓아두고 아이를 집어서 목표지점에 던졌다. 하지만 대부분은 빗나가서 아이가 딱딱한 바닥에 떨어졌다. 아이들은 아파도 울 수가 없었다. 울면 야단을 치거나 더 세게 던졌기 때문이다. 우리는 폭력에 시달리다 못해 학교 교사에게 도움을 청한 적이 있었다. 선생님은 우리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였고, 간호부장에게 상의했다. 그런데 어떤 이야기가 오고 갔는지는 모르지만 우리에게 돌아온 것은 보복이었다. 기숙사의 담당 간호사는 우리가 거짓말을 했다고 야단쳤고 일주일 동안 일찍 잠자리에 들도록 벌칙을 내렸다. 우리는 그때부터 누군가 우리를 위해 도와준다고 해도 결국 모든 것이 허사가 되고 오히려 벌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행히 모든 직원이 폭력적이지는 않았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를 존중해주고 독립적인 인격체로 대해 주었다. 시설에는 일반 학교와 다름없이 여러 과목들을 담당한 교사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최선을 다해 우리를 가르쳤다. 우리에게 학교는 가장 안전한 천국이었다. 학교에서 기숙사까지는 걸어서 3분 정도 걸렸는데, 우리는 학교에 있는 시간을 최대한 끌어보려고 했다. 선생님 중에 내가 제일 좋아한 사람은 제인 바톤이라는 영어교사였다. 그녀는 우리에게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고, 사실 그럴 필요도 없었는데, 우리에게 식탁예절도 가르쳤다. 나는 난독증 때문에 특별히 공부를 잘하지 못했지만 바톤 선생의 영어 수업을 좋아했다. 그녀는 읽기와 쓰기가 뒤떨어지는 내가 열등감을 갖지 않도록 배려했고, 참을성 있게 지도해 주었다.
상급반 기숙사나는 열한 살이 되자 상급반 기숙사로 옮겨졌다. 여자아이들은 위층에서, 남자아이들은 아래층에서 생활했고, 타라와 나는 나란히 침대를 사용했다. 이제 냉혹하고 고압적인 체제도 막을 내렸다. 아마도 직원들의 부당한 처사가 시설의 책임자들에게까지 흘러 들어간 것 같았다. 열두 살이 되었을 때 기숙사에 크리스라는 남자 간호사가 들어왔다. 그는 키가 180센티미터가 넘는 힘이 세고 건강한 남자였다. 우리는 십대 소녀들이었기에 가슴이 커지고 생리를 시작했다. 따라서 크리스가 우리를 목욕시키고 화장실로 데려가고 하는 것이 점점 불편해졌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그를 좋아했기에 그에게 계속 우리를 맡겼다.
어느 일요일 저녁 누구의 아이디어였는지 모르지만 우리는 크리스에게 장난을 치기로 했다. 우리는 목욕탕 욕조에 찬물을 가득 채우고 크리스에게 달려가서 한 아이가 욕조에 빠졌다고 말했다. 곧 달려온 크리스를 우리는 속옷만 남기고 욕조에 밀어 넣었다. 그리고 치약과 세제들을 욕조 안에 풀어 넣었다. 우리는 <파리 대왕>에 나오는 아이들처럼 광란상태에 빠져 소리를 지르고 야단을 쳤다. 한참 후에 부사감이 나타났다. 그녀는 "대체 이게 무슨 일이지?"라고 고함을 쳤고, 우리는 몇 주 동안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 하는 벌칙을 받았다.
상급반 기숙사는 여러 면에서 점차 개선되었다. 개인 소유물이 인정되었고, 불편한 의수나 의족을 착용하지 않아도 되었다. 따라서 식사시간은 전보다 덜 우스꽝스러웠다. 우리는 정기적으로 댄스홀에 갈 수도 있었다. 타라와 나는 빠지지 않고 댄스홀에 갔고 보통아이들 속에서 춤을 추었다. 춤을 추지 않을 때는 벽에 붙어 서서 5분마다 립글로스를 바르며 속닥거렸다. "저 남자애 말이니? 저 애가 나를 쳐다본다고? 맞아, 날보고 있어." 이렇게 비교적 자유로운 환경 속에서 우리는 최고학년을 맞았다. 타라는 학교 성적에서는 쉽게 나를 이겼다. 그녀는 매우 명석하고 공부를 좋아했던 반면, 나는 난독증이 있어서 학교 공부가 어려웠다. 하지만 학창시절 동안에 내 난독증을 발견한 사람은 없었다.
푸른색 미니메트로시설에서의 마지막 해, 나는 회장이 되었고 타라는 부회장이 되었다. 나는 학교 성적이 좋아지면서 자신감도 갖게 되었다. 외부 미술대회에서 수상했고, 교내상도 두 개나 받았다. 그리고 얼마 전 무릎수술을 받은 이래로 기동성이 훨씬 개선되었다. 졸업식 날, 내가 상을 받는 것을 보기 위해 부모님도 버밍엄에서 왔다. 어머니는 칭찬과 축하의 말을 몇 마디 했던 것 같다. 이제 나는 시설을 떠나야 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