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는 왜 갔어?
김대오 지음 | 사군자
잠자리 꼬리 물을 적시다중국인의 만만디, 그 느림에 대하여중국은 그 변화의 템포와 생활의 리듬이 우리에 비해 아주 느리다. 황하는 늘 범람하여 부지런히 서둘러 농사를 지은 사람과 느긋하게 농사를 지은 사람의 구분을 휩쓸고 가 버렸다. 중국의 차 문화에서도 잘 나타나듯이 중국인들은 대자연의 거대함 앞에서 인간의 서두름이 별 효용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 같다. 일종의 '체념의 느림'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개혁 개방 이후 자본주의 문화가 휘몰아치면서 현대 중국의 느림의 가치와 의미도 변하고 있다. 나는 그것을 '전략적 느림'이라고 말하고 싶다.
경제 교류에 나선 중국인들은 한국인이 갖고 있는 조급함을 만만디로 공략하여 경제적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실용주의의 전략적 느림을 구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인들은 자신들이 더 이상 물러 설 곳이 없는 벼랑 끝에 몰리기 전까지는 태연하게 만만디 전략으로 상대방의 의중을 저울질하며 경제적 실익을 챙기려 한다. 그래서 때로는 포기할 줄도 알아야 한다. 일단 돌아서면 붙잡는 것이 중국인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느림은 발 빠르게 움직이며 흘리는 땀으로 남보다 미리 준비된 자가 누릴 수 있는 삶의 여유가 아닐까? 중국인들은 결코 느리지 않다. 그리고 중국인의 전략적 느림을 깨뜨리는 방법은 우리가 성실한 노력과 최고의 기술로 진정한 느림의 여유를 배우는 것이다.
* 런민비'중국인의 피에는 런민비가 흐른다'고 한다. 중국인들은 돈을 향해 가는 것이 그들의 밝은 미래를 향해 가는 것이라고 철썩 같이 믿고 노골적으로 돈을 밝힌다. 사실 오늘날 중국은 자본주의보다 더 자본주의적인 나라이다. 모든 것이 돈으로 계산되고 또 돈으로 해결되는, 그래서 더 급속도로 금전만능사회이 모순과 폐단이 생겨나고 있다. 현재 중국 런민비 1위엔은 우리나라 돈 130원 정도에 해당된다.
베이징살이 '만만치 않네!'나는 '중국은 싸니까'하는 생각으로 네 식구가 중국에 가면서 3000만 원 정도를 챙겼다. 그러나 1년 반 정도가 지나자 준비한 돈은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비행기 값이 왕복 40만 원 정도라고 해도 가족의 대소사로 한국을 자주 오가게 되면 그 비용도 만만치가 않다. 집값은 모두 월세인데 한국과 비슷할 정도로 비싸다. 지금은 외국인도 주택구입이 가능하기 때문에 3년 이상 중국 생활을 할 사람은 융자를 받아서라도 집을 사는 것이 낫다고들 한다. 교육비도 만만치가 않다. 청화대학 석사과정 1년 학비는 2만 3천 위엔(300만 원)이다. 또한 아이들 학비만 놓고 봐도 '중국은 싸다'가 아니라 '중국은 비싸다'가 맞는 말이다.
상대적으로 식비는 저렴하지만 외식비를 포함하면 한 달에 보통 2000위엔이 넘는다. 여기에 비싼 택시비와 전기세, 수도세, 전화세, 가스세, 인터넷, 핸드폰 사용료 등을 합치면 거의 5000위엔 정도가 생활비로 든다. 나는 X비자여서 1년에 한 번 비자와 거류증을 연장하면 되지만, 가족들은 L비자여서 3달에 한 번 비자를 연장해야 했다. 비자 연장은 한 번에 1인당 150위엔이다. 그것도 기한을 어길라치면 최대 5000위엔의 벌금을 내야 한다. 그리고 의료비도 만만치가 않다. 중국에 교민이 30만 명에 달하지만 교육과 의료비에 대한 정부지원도 전무하다. 또한 거리에 따라 다르지만 가족이 4박 5일로 여행하면 보통 1만 위엔 정도는 들었던 것 같다. 베이징살이는 그렇게 저렴하고 만만한 곳이 아니다. 치밀한 계획과 준비가 있어야 할 것이다.
* 중국인들에게 피해야 할 선물 세 가지우선 손수건이다. 눈물을 닦는다는 의미가 있어서 일반적으로 기피되는 선물이다. 둘째는 우산이다. 우산의 발음이 헤어진다는 말의 발음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셋째는 시계이다. 보통 손목시계는 괜찮지만 괘종시계 같은 벽시계는 안 된다. 시계를 준다는 말의 발음이 임종을 지킨다는 말의 발음과 같기 때문이다. 보통 선물을 줄 때는 쌍으로 주는 것이 좋고 중국인들이 선물을 두세 번 거절하는 것은 통상적인 관례이므로 다시 권하여 전해주는 것이 예의이다. 포장지는 물론 붉은색을 쓰는 것이 좋다.
오페라 경극, 아는 만큼 즐긴다베이징을 여행하는 사람이라면 만리장성에 오르고, 북경오리구이를 맛본 뒤, 경극을 관람하는 것이 핵심 코스일 것이다. 경극은 중의학, 중국화와 함께 중국의 3대 국수(國粹)로 여겨지지만, 그 역사는 160여 년에 불과하다. 고대 희랍의 희비극, 인도의 범극과 함께 세계 3대 고전극으로 불리는 경극. 그러나 그 고도의 상징성과 리듬을 타고 흐르는 대사 때문에 그 내용을 외국인이 이해하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극이 갖는 마약 같은 매력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중국의 사상가 왕궤웨이는 연극을 노래, 춤, 연기 그리고 이야기라고 정의 한 바 있는데, 경극이 이 같은 요소를 가장 잘 표현해 낸 예술 장르라는 것이다.
경극은 주로 노래로 표현되는데, 중국어의 음악성이 가락에 실려 아름다운 리듬이 된다. 연기도 과장과 상징의 기법을 통해 극도의 아름다움을 표출해 낸다. 여기에 풍부한 전통문화원형이 극의 줄거리로 자리 잡는다. 그리고 다양한 의상과 분장이 인물의 연기와 성격을 암시하며 화려한 시각적 효과를 이룬다. 이 모든 것들이 하나로 녹아들어 수준 높은 종합예술이 완성된다. 경극은 생활의 반영이면서도 그 삶의 본질을 과장하고 변형하여 결국 삶의 더 깊은 본질에 도달하고자 하는 변증법적 예술 장르라 할 수 있다. 경극이 규정하고 있는 상징과 약속의 문턱을 넘어서기만 하면 무궁무진한 매력을 지닌 경극의 세계에 빠져들 수가 있다. 하지만 이런 경극도 속사정을 들여다보면 위기라 불릴 정도로 대중적 기반이 취약하다. 정부의 대대적인 지원과 새로운 모색에도 불구하고 경극은 과거의 영화를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베이징은 지하에도 만리장성이 있다흔히 하는 우스갯소리로 만리장성은 진시황의 "야! 싸!" 한 마디로, 이화원의 곤명호는 서태후의 "야! 파!" 한 마디로 시작되었다고 풍자한다. 베이징 도심 지하에는 30킬로미터에 달하는 지하성이 있다. 1969년에 마오쩌둥은 "깊게 동굴을 파고 양식을 비축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지하갱도 구축작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베이징지하성은 1979년에 완공된 이후 1980년부터 외국인들에게만 개방되어 왔기 때문에 택시기사들도 정확한 위치를 잘 몰랐다. 베이징역 근처에서 힘겹게 시따머창 후통 안에 있는 작은 입구를 찾아냈다.
20위엔의 입장료를 내고 안내원을 따라 지하로 내려갔다. 한글로 된 안내표지판도 있었다. 8m 깊이의 지하요새로 내려가자 제일 먼저 반겨주는 것이 '마오쩌둥'의 초상화이다. 갱도의 폭은 약 2m 정도인데, 베이징의 도심부만 총길이가 약 30km에 달하는 둥청(東城), 시청(西城), 충원, 쉬엔우구에 거미줄처럼 지하갱도가 연결되어 있다고 한다. 그리고 베이징역, 왕푸징은 물론 텐진까지 갱도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중국의 주요도시 지하에도 이 같은 지하요새들이 남아 있는데, 만리장성보다 더 길 것이라고 한다.
갱도의 통로에는 5m마다 안전등이 걸려 있고, 그 중간에는 당시의 화생방 전용 장비들이 걸려 있다. 방호문도 보였다. 또한 지휘소, 무기고, 식량저장창고, 회의실, 도서관, 간부휴게소, 영화관, 이발소, 화장실은 물론 70여 곳의 지하수와 2300여 곳에 특수제작 된 환풍기가 설치돼 유사시 30만 명이 생활할 수 있도록 치밀하게 설계되어 있다. 원래는 주민구의 입구까지 모두 연결되어 있었다고 한다. '인민전쟁'이라는 구호가 적힌 벽화에는 땅을 파고 흙을 운반하는 노동자들의 모습이 담겨져 있다. 그 돌무더기와 흙무더기 아래 묻힌 수많은 민초들의 피와 땀은 상상하기 힘들만큼 거대한 것이었으리라.
거대한 문화유산, 그 메타포의 세계거대한 권력의 집, 자금성황제만이 다녔다는 톈안먼의 가운데 문을 들어가면 양 옆으로 문물전시관과 보위대의 훈련장면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단문을 지나면 세계에서 가장 큰 궁궐이 펼쳐진다. 자금성은 1407년에 건립되어 1420년에 완성되었다. 남북 약 1,000m, 동서 약 760m의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둘레에 방어호를 파놓았다. 고궁에는 네 개의 출입구가 있다. 단문을 지나면 오문이 나온다. 오문은 황제의 명을 거슬린 죄수들을 처형하거나 황제가 조서를 발표하던 곳이었다. 오문에 있는 다섯 개의 아치형 문도 봉건계급의 신분제도를 반영하고 있다. 중앙의 통로는 황제의 전용 문으로 황제 외에는 혼례를 마치고 입궁하는 황후와 황제 앞에서 치르는 전시에서 장원으로 합격한 자만이 이 문으로 출궁할 수 있었다. 문무백관은 동문을, 황실의 종친은 서문을 이용하였다.
고궁 성내는 남과 북의 두 구역으로 크게 나누어져 있다. 남쪽은 황제가 정무를 보던 전외전, 북쪽은 황제의 사적인 생활을 위한 후내전으로 나뉘어져 있다. 외전의 태화전은 남북 33m, 동서 60m의 위풍당당한 건물로서 자금성의 정전(正殿)이며, 중요한 의식장으로 사용되었다. 태화전은 황제의 즉위식, 제전(祭典), 조서반포, 황태자의 탄생축하, 황제의 생일축하 등 국가행사를 거행하던 곳이다. 태화전은 이중처마에 높이가 35m, 면적이 2,377평방미터나 되는 중국 최대의 목조건축물이면서 최고통치자의 위엄과 권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24명의 황제가 오백여 년 동안 앉았던 태화전의 금방울옥좌는 값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할 것이다. 북문인 신무문을 통해 고궁을 빠져 나오니, 양옆으로 50m 너비의 호성하가 흐르고 있고 10m 높이의 높다란 성벽이 있다. 황제는 무엇이 두려워 이렇게 넓은 방어호와 높은 성벽, 심지어는 땅을 파고 침입할까봐 고궁의 바닥에 40여 장의 벽돌까지 쌓게 된 것일까. 100만 명 이상이 동원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고궁의 건축규모는 절대권력의 유산이자, 그 아래에서 피땀 흘렸을 수많은 민초들의 위대한 희생물의 결과물이다. 중국의 건축정신과 건축수준을 한 눈에 보여주는 고궁은 1987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 고궁에서 정사보다는 자연 속에서 풍류를 즐겼던 황제들황제는 늘 고궁에 머물며 정사를 처리했을 것 같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 1709년 강희제 때 건립하기 시작하여 건륭제 때까지 150여 년에 걸쳐 '모든 정원의 으뜸정원'인 원명원이 완성되자 황제들은 주로 그곳에 머물렀던 것으로 역사기록은 전한다. 건륭제는 고궁에서 머문 날이 105일인데 비해 원명원에서 지낸 날은 168일에 달했고, 도광 24년, 도광제는 원명원에서 274일을 머물렀고 고궁에서 지낸 것은 73일에 불과했다.
중국 전통 원림의 결정판, 이화원베이징의 서북쪽에 위치한 이화원은 원래 12세기 금, 원대부터 황실의 휴식과 유람을 위한 정원이었다. 1750년, 건륭제는 모친의 회갑을 맞이하여 청의원을 개조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연수사를 지어 모친에게 바친다. 1885년 광서제의 아버지 혁현은 10년 동안 청의원을 확장·보수하고 '이화원'으로 개칭하였다. 이화원은 인수전을 중심으로 한 정치활동 공간, 옥란당과 낙수전을 중심으로 한 황제와 황후의 생활공간, 그리고 만수산과 곤명호를 중심으로 하는 풍경유람구역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화원은 주위가 약 8km, 총면적이 290만 평방미터에 달한다. 그 중 수면이 3/4을 차지하며 세계에서 가장 큰 황실 원림이면서 중국 전통 원림의 원칙을 가장 완벽하게 구현해 내고 있는 정원으로 평가받는다. 또한 손으로 평지의 흙을 파서 거대한 곤명호를 완성하고 그 흙으로 만수산을 만들었으니, 중국문화가 보여주는 또 하나의 우공이산(愚公移山)이라고 칭할 만하다.
이화전의 정문인 동궁문을 지나 인수문을 들어서면 춘하추동 사계절을 상징하는 4개의 태호석이 놓여 있다. 커다란 태호석이 가로막고 서 있는 것은 모든 중국 전통원림이 그러하듯 진정한 아름다움은 쉽게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의미로 정원의 안쪽 풍경을 가로막아 감추는 역할을 한다. 인수전은 서태후와 광서제의 여름궁전으로 논어에 나오는 '인자수(仁者壽) 구절을 인용하여 명명한 것이다.
"황제는 계속되어야 한다. 죽어서도 쭉!"26명의 명, 청 황제는 사후궁전을 만들었다. 이름하여 '황릉'이다. 명대의 황릉은 베이징 북서쪽 천수산에 13개가 있다. 이를 '명13릉'이라 부른다. 청대의 황릉은 청동릉과 청서릉으로 나뉜다. 청동릉은 허베이성 준화시에 있으며, 허베이성 이현성에는 청서릉이 있다. 명, 청 황제들은 명당자리에 터를 잡고 엄청난 재원과 인력을 동원해 과학적이고 예술성이 높은 황릉을 만들었다. 명13릉 중에서 일반에게 공개되는 곳은 영락제가 묻힌 장릉, 12대 목종의 소릉, 13대 만력제의 정릉인데, 정릉은 지하궁전까지 발굴·개방되어 관광객이 주로 찾는 곳이 되고 있다.
명13릉은 일종의 가족묘이기 때문에 공용의 진입로가 필요했다. 그것이 바로 신도(神道)이다. 신도의 총길이는 2.6km에 달한다. 신도에는 사자, 해태, 코끼리 등 총 18쌍의 조각이 길 양쪽에 배치되어 있다. 신도는 죽은 황제의 시신과 혼령만이 지날 수 있기 때문에 가운데 난 길도 산 자들은 근접할 수 없는 사자(死者)들의 몫이다. 영성문은 일종의 교차로로 13릉으로 통하는 모든 길이 시작되는 곳이다. 영성문에서 곧게 뻗은 길은 13릉의 으뜸인 장릉으로 통한다.
장릉의 가장 중요한 건축물인 능은전은 썩지 않는 남목(楠木)으로 만들어졌는데, 자금성 태화전의 재료보다 더 좋은 것을 사용했다. 물론 기단이 낮고 주변에 배전과 광장이 없어 웅장함이나 권위를 느낄 수는 없지만, 능은전은 태화전과 함께 중국 최대의 고건축물에 해당된다. 18년에 걸쳐 엄청난 인력과 재원이 동원되어 최대규모로 건축된 장릉은 지하묘실의 입구가 발견됐지만 보존을 이유로 현재까지 발굴되지 않은 상태이다. 지하묘실까지 완전히 발굴되어 개방된 곳은 13대 황제 만력제의 묘인 정릉이다.
* 신선이 되어 산 위에서 배를 타고 노닐다베이징을 여행하다 보면 거대한 스케일의 역사유적지에 경탄하게 되지만 왠지 중국음식처럼 그 맛이 그 맛 같고 '느끼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그러다가도 베이징 여행에서 순수하고 상큼한 자연풍경의 맛과 멋을 느낄 수 있는 곳이 있는데, 바로 롱칭샤이다. "작은 꿰이린"으로 불리는 롱칭샤는 남방의 여성스런 수려함과 북방의 남성다운 웅대함을 동시에 갖추고 있으며 물은 거울처럼 맑고 우뚝 솟은 산봉우리는 갖가지 형상으로 펼쳐지며 한 폭의 산수화를 이루어 놓는다. 이 그림 같은 풍경 속을 배를 타고 노니는 것은 그야말로 자연이 주는 최고의 편안함이다.
변화의 회오리, 카오스의 덩어리중국은 거대한 아침형 사회저녁 9시가 넘으면 거리는 한산해지고 10시가 넘으면 중국인들은 취침에 들어간다. 중국의 밤은 고요하다. 그러나 중국의 아침은 활기차고 역동적이다. 중국인들은 새벽 5~6시만 되면 공원에 모여들어, 곧 20~30명씩 대형을 이루어 음악에 맞춰 태극권, 부채춤, 사교댄스 등 다양한 놀이들을 즐긴다. 이는 중국 어디를 가나 공통적으로 찾아볼 수 있다. 거리에는 아침 6시면 자전거 행렬이 시작되고, 7시경 출근길에 오른 중국의 거리는 그야말로 자전거들의 천국이다. 각 학교는 7시 30분가까지 등교하게 하고, 관공서들도 8시부터 정상업무가 시작된다. 반면 저녁에는 대형 상점들도 9시면 거의 문을 닫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