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에서 장남으로 살아가기
윤영무 지음 | 명진출판
PART1 대한민국 장남보고서장남은 전쟁 중나는 장남이다. 내 아래로는 아우 넷이 있다. 새벽녘, 세수를 하시는 아버지와 그 곁에서 수건을 들고 계시는 어머니께 아침인사를 드리는 것으로 하루 일과는 시작되었다. 아버지와 똑같이 세수를 한 뒤 마당과 골목길의 빗자루질을 마칠 즈음이면, 동생들은 길게 하품을 하며 방문을 드르륵 느리게 열었다. 그렇게 마흔 몇 해의 아침이 가고, 그때의 아버지처럼 나도 한 집안의 가장이 되었다.
나는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서 이불을 개어 장롱 속에 넣는다. 6시 정각, 어린 시절 빗자루질을 하기 위해 골목길을 나섰던 대신 나는 양복으로 차려 입고 택시를 잡기 위해 집을 나선다. 6시 10분, 사우나탕에 들어가 땀을 빼고 팔굽혀펴기를 한다. 7시 12분, 회사에 도착해 구내 이발관으로 가서 머리를 손질하는 사이에 신문을 읽는다. 7시 20분, 분장실로 가서 분장이 끝나면 본격적으로 방송 준비에 들어간다. 7시 35분, 스탠바이. 7시 45분, 방송에 들어간다. 7시 50분, 방송이 끝나자마자 아내에게 전화한다. "일어났어? 오늘 방송 어땠어?" 가족이기 때문에 대답은 늘 '좋았다'이다.
'어쩌다 너는 이리도 힘들게 살게 되었니? 무엇 때문에….' 늦은 퇴근길, 뻐근한 뒷목을 들어 올리다 눈이 마주친 별이 이렇게 묻는 듯했다. 방송기자 생활 22년. 결코 게으름 피워 본 적이 없다. 그러는 동안 집에 있는 식구들이 환영할 만한 일은 별로 해보지 못했다. 아버지의 얼굴이 떠오른다. 아버지는 장남인 나를 인생의 등불로 생각하셨다. 언제나 믿어주었고, 믿는 만큼 조마조마하게 바라보셨다. 어느 때이든 아우들의 모습에서 나는 아버지를 찾는다. 장남으로서 나는, 그 부지런하고도 강인했던 아버지의 모습을 아우들에게 나눠줘야 할 책무가 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양복 깃을 추스르면서 골목길을 나서는 것이다. 나는 아버지에게서 장자로서 받았던 한없는 사랑과 기대를 아우들한테 대물릴 책무가 있는 것이다.
나는 아버지의 희망에 따라 서울에 있는 후기 중학교에 입학하기 위해서 시험을 봤으나 떨어지고 말았다. 합격자 발표 게시판을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당황하시던 아버지의 얼굴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서울로 올라가자, 짐을 싸라." 아버지(초등학교 교사)는 사직서를 던지고 나를 서울의 한 초등학교에 재입학 시켰다. 장남인 나와 막내 동생이 부모님을 따라 먼저 서울로 올라왔다. 다른 동생들은 시골에 남아 있어야 했다. 그러나 서울에 올라온 후 아버지의 사업이 줄줄이 실패를 하듯 나의 성적도 곤두박질 쳤다. 우울한 사춘기가 시작된 것이다.
열아홉의 겨울, 나는 대학 입학시험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아버지는 마른버짐이 가득한 손으로 나에게 학원 등록금을 쥐어주셨다. "어떡해서든 대학에 가라. 너는 꼭 대학을 마치게 하겠다. 너는 아무 걱정도 하지 마라." 서울에 올라온 이후로 한 번도 '공부하라'는 말을 부모님에게 들어본 적이 없었다. 재수 생활은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일단 동생들 볼 낯이 없었다. 동생들이 공부를 게을리 한다면 무슨 낯으로 야단을 치고 독려를 한단 말인가. 그렇지 않아도 동생들도 공부를 뒷전에 두기 시작하는 눈치였다. 장남으로서 무언가 특단의 대책을 세워야 했다.
"아버지, 장남이라고 꼭 대학에 들어가란 법 있습니까, 될 놈만 집중적으로 밀어줍시다!" "쓸데없는 소리하지 마라. 내가 다 책임질 수 있다." 아버지는 한숨을 쉬셨다. 당시 형제들의 학비를 대기 위해 맏이가 공장에 다니는 풍경은 흔한 일이었다. 우리 집 형편도 그들과 다를 것이 없었다. 될 놈만 밀어주자. 이게 내 생각이었다. 이 사실이 공표되자 형제들은 너나없이 공부에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특히 성적이 제일 나빴던 넷째 동생의 비약은 눈부셨다. 그러나 공부를 제일 잘하던 둘째가 대학을 포기하게 됐다.
그 후로 나는 7개월 동안 아버지의 트럭 조수로 전국을 돌아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운전사 한 명이 아버지에게 다가와 반색을 했다. "아무개 선생님 아니십니까!" "누구?" "네, 옥산 초등학교에서 선생님께 사사한…." 나는 보았다. 아버지의 얼굴이 빨갛게 물드는 것을. 아버지는 중국집에서 장남이 보는 앞에서 술잔을 기울이고 계셨다. "너는 절대로 굶어 죽는 한이 있더라도 운전 면허증은 따지 마라!" 나는 더는 자장면이 먹고 싶지 않았다. 젓가락을 내려놨다. 그 해 겨울, 나는 4년제 야간대학에 합격했다. 1975년도였다. 장남이란 그런 것이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그 모든 수모와 생존을 향한 몸부림을 두 눈 똑똑히 보고 자라는 것이 장남이다.
졸업을 한 학기 앞두고 군에 입대했다. 곧이어 아버지가 혈압으로 쓰러지셨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가족들은 모두 장남의 제대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제대 후 나는 외무고시에 열을 올렸다. 그러나 아래 동생과 어머니는 애원에 가까운 표정으로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형, 우리가 어떻게든 형 등록금을 마련해 볼 테니까 어서 졸업을 해서 취직을 해." 그렇지, 나는 장남이었다. 그 날로 외교관이 되겠다는 꿈을 접었다. 그리고 방송사에 입사시험을 보게 되었다. "자네는 야간대학을 나왔구먼." 당시 이웅희 사장과 1:1 면접을 했다. "근데 방송국에는 어쩐 일로 응시했지?" "먹고살기 위해서 들어왔습니다. 저는 장남으로서 부모님과 동생들을 책임져야 하는 막중한 책임이 있습니다!" 다행스레 결과는 합격이었다. 아버지가 제일 기뻐하셨다. "아버지, 걱정 마세요. 이제 병원도 다니실 수 있게 해 드리겠습니다." 아, 장남이란 이런 말을 해야 하는 거구나. 비로소 어른이 되었다는 기분이 들었다. 뿌듯했다.
컬러방송이 시작되었다. 방송사 기자란 직업이 대우받는 세상이 오고 있었다. 나의 직업은 집안의 체면을 세우는 장남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나가고 있었다. "결혼을 해야하지 않겠니? 아버지도 그렇고 네가 먼저 결혼을 해야 동생들도 어떻게 해보지." 어머니께서 말씀하셨다. "저 같은 장남에게 누가 시집오려고 하겠어요? 자신이 없어요." 그러나 아버지가 언제 어떻게 되실 지 모르는데, 손자라도 얼른 안겨드리는 것이 장남의 도리 아니겠느냐는 말씀에는 입을 굳게 다물 수밖에 없었다.
한 산악인에게 지금의 아내를 소개받았다. 그리고 나의 결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결혼과 동시에 우리 집은 방 세 개 짜리 2층 독채를 전세 내어 이사를 갔다. 한 동안은 장남으로서 한 가정을 꾸려 나가는 것에 대해 자부심마저 갖게 되었다. 그러나 머지않아 말로만 듣던 '고부간의 갈등'에 직면했다. 어느 날 아버지의 수발을 두고 어머니가 집사람을 크게 나무라는 일이 생겼고 마음 여렸던 아내는 편지를 써 놓고 그만 집을 나가버렸다. 다음날 처가로 간 아내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어머니에게 집사람을 잘 좀 보살펴 달라고 말했다. 그러자 어머니가 호통을 치셨다.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이제 와서 지 마누라 편만 들어! 집을 나갔으면 정중하게 사과를 하고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가르쳐야지!" 아내와 나는 아버지가 계신 안방까지 끌려갔다. 아, 나는 무능한 장남이구나. 무릎을 꿇고 고개를 방바닥에 박았다. "잘못했습니다. 모두 제가 부족한 탓입니다…." 그리고 장남이나 맏며느리 역할에 노하우가 붙다 보면 저도 모르게 하늘이 내린 사람의 모양새를 갖추게 된다는 것을 한 해 두 해가 지나면서 조금씩 알게 되었다. 아내나 나나 그렇게 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첫 손자를 안아본 기쁨도 잠시, 아버지의 건강은 점점 더 악화되었다. 늦은 밤, 동생들을 불러모았다. "아버지 정신 차리세요!" 어머니는 가느다랗게 흘러나오는 아버지의 육성을 듣기 위해 귀를 바짝 갖다 대었다. 나와 아내 그리고 네 명의 아우들은 연신 아버지의 팔다리를 주물러 드렸다. 아버지의 임종 앞에서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그런 것이 고작이었다. 내가 왜 지금껏 아버지한테 잘해드리지 못했을까. 아버지가 골목에 절뚝거리며 다니실 때, 왜 나와 계시냐고 후레자식처럼 소리를 꽥꽥 질렀던 일…. 내가 보아왔던 아버지의 반평생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어머니는 장남인 내게 아버지의 눈을 감겨드리게 했다.
1992년, 막내가 결혼식을 올렸다. 이어서 다음해 있었던 넷째의 결혼식이 진행되는 동안 아버지의 자리에 앉아 지난날을 회상했다. 아버지는 가장 먼저 세상 구경을 나온 장남은 동생들의 본보기이고, 늘 모범이 되어야 한다고 당부하셨다. "장남은 특히 매사 일 처리할 때 공평하게 해야 한다. 먹는 것도, 입는 것도, 형제간의 우애가 깨지는 것은 분배가 화근이 되니까. 그런 것 때문에 틈이 갈라지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 "네, 아버지." "마지막으로 당부하겠다. 장남은 동생에게는 물론 남들에게도 관대해야 한다. 관대한 것은 용서를 잘 한다는 말이다. 그들을 탓하지 말고 모든 것을 네 잘못으로 돌려라. 절대 변명하지 말고, 솔직하고 짧게 말해라. 성실할 것이며 절대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 신뢰를 잃게 되면 너는 모든 사람으로부터 매장이 된다." 장남은 태어나는 것과 동시에 언제 어디서나 이런 훈계를 듣는다. 언제 어느 때라도 아버지를 대신해 집안의 CEO 노릇을 할 수 있도록 단련 되는 것이다.
"무슨 제사상이 이렇게 빈약하냐? 저희 새끼 옷 사주는 것은 아끼지 않으면서 이게 도대체 무슨 꼴이냐! 누가 볼까 부끄럽다." 제사상을 보시면서 어머니는 끌끌 혀를 찼다. 오랜만에 보는 동생들 보기에도 면구스러웠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눈에 보이는 대로 이것저것 형을 책하던 동생들이었다. 그럴 때마다 '내가 참으면 가정이 편하지' 싶어 말을 삼키곤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정말 할말이 없었다. 나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겨우 대답했다. "다음에는 잘 차리겠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얼마간은 제사를 올리면서도 꺼이꺼이, 잿밥을 먹으면서도 꺼이꺼이 울던 나였다. 사람의 일이란 것이 정말 우습다. 돌아가신 지 10년이 지나지 못해 제사상 가지고 질책 받는 장남이 되다니….
제사가 끝나자마자 동생들이 한마디하고 나섰다. 시골에 있는 땅 문제였다. 손바닥만한 밭을 어머니는 장남인 나와 둘째에게 각각 명의를 상속해줬다. 이 소식을 들은 셋째가 이의를 제기한 것이다. 순간, 나는 술잔을 동생들에게 내던지고 싶었다. 하지만 오늘은 아버지의 제삿날이다. 생각할수록 기가 막혔다. 우리 형제들 사이에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은 몰랐다. 부아가 끓어오르는 것을 애써 진정하고 말했다. "정 원한다면 내가 포기하마. 네가 그것을 가져도 좋다!"
이런 일을 예상했는지, 아버지는 나에게 단단히 이르셨던 바였다. "형제간에 법의 도움을 받는 일은 절대 없도록 해야 한다. 그 순간 형제간 신의는 깨어진다." 그래서 장남의 역할이란 것이 중요하다. 저 혼자만 잘 살겠다는 심보를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다스리고, 사람으로서의 예를 갖추게 하는 것, 그러면서 집안의 위신과 명예를 훼손하지 않고 온 가족이 조화와 화목을 이루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장남이 할 일이다.
형, 형, 우리 형!"동생 잘 챙겨라." 책가방을 챙겨주시며 어머니는 늘 당부하셨다. 장남의 사명 중 하나는 동생들에게 다가오는 위험을 막아서는 것이다. 동생의 울음소리가 멀리서라도 들릴라치면 나는 곧바로 동생의 교실로 뛰어올라 갔다. "얘가 내 동생이야. 건드리면 죽어. 알았어?" 다른 교실에 가서도 똑같이 으름장을 놓았다. 동생을 보호하기 위해 여러 교실을 돌아다니면서 동생 또래들을 공갈 협박했다. 때문에 동생은 이른바 '야코'가 죽는 일이 별로 없었다.
어린 나이에 형으로서 느껴야 했던 또 하나의 책무는 옷을 늘 깔끔하게 입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왜냐면 내 옷은 다시 동생들에게 돌아가기 때문이다. "형이 곱게 입어서 새 옷이나 진배없다. 이제 네 몸에 맞으니 둘째가 입어라." 옷의 대물림은 이상한 결과를 안겨준다. 부모님이 사준 옷인데, 동생들이 마치 형이 사주는 것으로 착각한다는 것이다. "형아, 고마워! 형아 옷, 내 것 됐다." 하지만 옷을 동생에게 물릴 때면, 괜히 소중한 것을 남에게 빼앗기는 양 억울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엄마, 내 옷을 왜 동생에게 주는 거야?" 그럴 때면 어머니는 나에게 '동생보다 철이 덜 들어도 한참을 덜 들었구나'고 꾸지람을 하셨다.
넷째 동생의 입가에 있는 흉터가 떠오른다. 내가 분을 참지 못해 던진 숟가락이 동생의 얼굴에 맞았고, 입가가 찢어지고 만 것이다. 당시 중학생이었던 나는 아버지를 돕겠다며 신문배달에 나섰다. 어느 날 부엌에서 밥상을 차려와 방에서 먹고 있었다. 때마침 둘째 동생이 들어왔다. 가방에서 야구글러브를 꺼내는 둘째를 보고는 한마디 했다. "집안도 어려운데 야구를 해서 뭐하냐. 야구하면 돈도 많이 든다던데. 꼭 해야겠어?" "엄마도 해 보라고 했는데, 형이 왜 그래? 나는 할거야!" 말끝마다 반항을 하는 동생이 그렇게 미울 수가 없었다. 손에 쥐고 있던 숟가락을 '야, 이 새끼야!' 하면서 동생을 향해 던졌다. 순간, 넷째 동생이 울어 제쳤다. 넷째 동생의 입술에 숟가락이 튀어 날아간 것이었다. 아버지는 동생의 상처보다 형제들이 서로 싸웠다는 사실에 크게 낙심하셨다. 둘째 동생에게 사과한 것은 한참 뒤 어른이 되어서의 일이다. 진심으로 용서를 구했다. "형, 무슨 소리야. 난 다 잊어버렸어. 다 우리 잘 되라고 그런 것인데 뭘 그런 걸 기억해 내고 그래!"
몸의 상처는 날이 가면 쉽게 아문다. 하지만 형제간의 앙칼진 말이나 가시 돋친 말 한마디는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형제이기 때문에 더 아프고 오래 간다. 그러나 아무리 아프더라도 도려낼 것은 꼭 도려내야 한다. 어쩌다 머뭇거려 시간이 흘러도 형제간의 앙금은 꼭 풀어내야 하는 것이다. 가슴을 치는 한으로 남기 전에 말이다. 용서 청하기를 두려워 할 일도 없다. 용서를 빌면 용서가 되고, 화해를 청하면 화해가 되는 것이 바로 형제이다.
낯선 사람을 만나 통성명을 하다 보면 서로 장남이란 사실을 알게 될 때가 있다. 그러면 왠지 가슴 찡한 정 같은 게 느껴진다. 지난해에 만난 B씨가 그랬다. 서로 장남이란 사실을 알게 된 이후, 죽마고우처럼 마음이 맞았는데 의외인 것은 그 집은 동생이 어머니를 모신다는 것이었다. "외국 살다 왔어요?" B씨는 아니라고 대답했다. "동생에게 부모님을 모시라고 집을 한 채 사주었습니다. 우리 집사람이 워낙 어머니와 뜻이 안 맞아서요…." 그는 말을 이었다. "사실 장남이 제사를 지내고 안 지내는 것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장남의 책임이 법으로 정해진 것도 아니고…. 저희들은 형이 모든 책임을 떠맡아 형제간에 의를 상하느니 좀더 합리적인 방법을 찾아보자고 하는 쪽입니다. 물론 이렇다 해도 형으로서 감수할 부분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지만요. 장남으로서 정말 어디 하소연도 못하고, 울고 싶을 때가 어디 한 두 번입니까? 그런데도 옆에서 동생들이 '형, 힘들지?' 그렇게 한마디만 해줘도 모든 시름이 사라지는 게 장남 아닙니까." 형들도 때론 자신의 짐을 나누어 갖고 싶어진다는 그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장남도 가끔은 울고 싶은 법이다.
60년대, 삼형제가 산에 올랐다가 길을 잃어 형은 죽고 동생들은 살아 돌아온 사건이 있었다. 형은 동생과 자신의 몸을 묶고 서로 놓치지 않도록 했다. 그러나 더 이상 나갈 수가 없었다. 형은 동생과 함께 바위 밑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몸을 싸자, 서로 안고 있으면 덜 춥다! 졸면 죽어, 자지 마!" 이튿날 아침, 수색대는 잠들어 있는 동생을 꼭 싸안은 채 꽁꽁 얼어버린 싸늘한 형을 발견했다. 동네 사람들은 형을 추도하는 묘비를 세웠다. 아우 사랑이 유별난 형의 이야기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