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생목록
재생목록이 비어 있습니다.
-
-
0:00 0:00
화면 너비 (여백)
좁게
보통
넓게
최대
배경 테마
글꼴
바탕/명조
돋움/고딕
글자 크기
작게
100%
크게
줄 간격
좁게
보통
넓게

잃어버린 여행가방

박완서 지음 | 실천문학사
1. 생각하면 그리운 땅



자연은 위대한 영혼을 낳고 | 남도 기행

시골 바람을 쐬러 가자는 친구의 권유에 '시골 바람'이라는 말이 너무 좋아 나는 선뜻 그러자고 했다. 나에게 시골 맛이란 완전한 평화와 안식을 의미한다. 그러나 근대화로 인해 달라진 관광지 주변, 고속도로, 국도 주변의 인심과 마을 풍경을 보게 되면, 도시가 발전을 추구하는 것처럼 농촌사람들도 돈과 편리를 추구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마치 도시의 간교함과 농촌의 촌스러움을 조잡하게 뒤섞어놓은 것처럼 어중간한 시골 인심을 접하는 것은 민망하고도 피곤한 일이었다.



행선지도 일정도 알지 못한 채 오로지 친구만을 믿고 따라나선 여행은 송정과 광주를 지나 해남 대흥사 일지암으로 향하는 이박 삼일의 여정이었다. 광주에서 해남까지 시외버스로 지났던 시간은 예상치 못했던 여행의 묘미였는데, 내가 그동안 해왔던 목적지와 계획을 가진 여행과는 다른 뭔가를 맛보았기 때문이다. 드문드문 붉어진 단풍과 그만그만한 동산들, 그 사이 평야가 옹색하게 끼어 있는 조금도 새로울 것이 없는 우리나라의 대체적인 지형의 풍경을 지났건만 그날따라 이 나라 도처에 널린 산과 들과 물의 조화가 유난히도 아름답게 느껴졌던 것이다.



나의 이런 감동에 친구는 그 고장이 도시인의 마음을 사로잡는 이유가 개발에서 소외됐기 때문이라고 찬물을 끼얹었다. 그러나 나는 중년의 아낙이나 노인들이 대부분인 들녘의 일손 가운데서 어쩌다 청년을 발견하는 반가움을 느끼면서, 그들이 바로 이 세상을 지키는 의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후졌기 때문에 아름다운 이곳 농촌이 실은 뒤진 게 아니라, 먼저 발전해버렸기 때문에 땅과 인심이 돈맛밖에 모르게끔 천박하고 황폐해진 타고장들이 장차 지향해야 할 미래의 농촌상이길 꿈꾸었다면, 나는 너무 철없는 몽상가일까?



해남에서 다시 버스를 갈아타고 일지암으로 올라, 그 암자를 그날 밤의 숙소로 삼았다. 우리는 암자를 지키는 스님과 함께 푸짐하게 저녁밥을 지어먹고 장작을 지펴 뜨끈뜨끈한 구들에 허리를 지지며 달콤하게 아침을 맞았다. 산책을 나간 길에 일찍이 깨어 계시던 스님을 만나, 북쪽에 솟은 험준한 봉우리 너머 또 몇 겹의 산 너머가 다산 정약용이 오랜 유배생활을 하던 강진임을 알았다.



다산이 초의가 달인 차 맛이 생각날 때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넘어 왔다는 험준한 산을 눈앞에 바라보는 감회는 각별했다. 다산과 초의의 신분을 초월한 우정의 아름다운 일화들을 염두에 두더라도, 어떻게 단지 차를 마시기 위해 저 높은 산을 넘을 수가 있었을까. 다산으로 하여금 산을 넘게 한 힘은 차 맛뿐만이 아니라, 청아한 인품과 고담준론에 대한 갈증이었고, 그 갈증이 태산도 높은 줄 모르게 한 것이 아니었을까. 나는 다산이 넘었다는 크고 험한 산을 눈앞에 보는 것만으로도 전율을 느꼈고, 또한 이름 없이 살다 간 백성들의 한 많은 사연들이 서리서리 머무는 우리 강산의 유정함을 다시금 느꼈다. 바로 그런 자연의 정기가 지나가는 나그네의 심금을 흔들고, 고향 떠난 이를 죽어서도 뼛골이라도 묻히고 싶도록 끌어당기는 힘이 되는 것이 아닐까.



타임머신을 타고 간 여행 | 하회 마을 기행

몇 해 전 우리 식구와 두 딸네 식구가 함께 봉고차를 빌려서 안동군 하회 마을 쪽을 여행한 일이 있다. 세 가족 중에는 어린아이도 둘이나 있고, 또 차까지 빌린 터라 아무 데나 내리고 싶은 데서 내려서 놀고 명승지나 고적지까지 구경하면서 천천히 가다 보니 새벽에 출발한 일행이 하회 마을에 도착한 건 깜깜해진 후였다. 마을에 하나밖에 없는 여관은 이미 만원이라 봉고차에서 밤을 지새야 하나 고민하던 우리에게 지나가던 마을 사람이 아무 데나 빈방이 있는 집에 가서 재워 달라고 하면 된다고 하면서 대식구인 걸 감안해 과수댁 혼자 사는 집을 소개해주었다.



자식들은 다 대처로 나가 혼자 살고 있지만 정 많은 친척들 덕에 외로운 줄 모른다는 과수댁은 우리에게 방을 몽땅 내주고 친척집으로 자러 가버렸다. 졸지에 그 집 주인이 된 우리들은 부엌에서 밥을 해 먹고 실컷 놀다가 잠이 들었는데, 그 마음 좋은 주인아주머니가 밤중에 찾아와 나를 깨우더니 기름이며 깨소금 등이 있는 곳을 일러주며 내일 아침밥 지을 때 마음대로 꺼내 먹으라는 것이었다. 나그네에게 집을 내주고 안심이 안 돼 찾아온 줄 알았던 나는 그녀의 인심에 감동하고 말았다. 더구나 후에 우리에게 청구한 숙박비도 너무나 약소했다.



그 날 아침, 누렇게 익은 벼이삭이 고개 숙인 풍요한 들판을 지나 마을로 접어들면서 나는 서울에서 안동군 풍천면으로 봉고차를 타고 여행을 온 게 아니라 20세기에서 16~17세기 경으로 타임머신을 타고 여행을 온 게 아닌가 하는 환각에 사로잡혔다. 양반의 기와집과 하인들의 초가가 한데 어우러진 마을은 곧 어디서 벽제 소리가 들릴 것처럼 몇 백 년 전의 반촌(班村)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특히 임진왜란 때의 명재당 서애 류성룡의 종가 건물인 충효당은 아직도 류성룡가의 종부가 지키고 있고, 류성룡이 임진왜란의 전황을 객관성 있게 기록한 <징비록>을 비롯한 보물들과 전선에서 사용했다는 갑옷, 투구, 허리띠 등이 소장되어 있어 참으로 볼 만했다.



하회(河回) 마을은 한자풀이 그대로 낙동강 줄기가 태극 모양으로 휘돌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 마을을 휘감고 있는 강을 건너면 하회 마을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언덕이 있다. 언덕에서 하회 마을을 내려다보면 옛사람의 집터 잡는 안목에 감탄과 신비감을 느끼게 된다. 옛사람들은 당장 살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몇 백 년을 두고 후손이 번창할 자리를 집터로 잡았던 것이다. 류씨가는 그 마을에서 류성룡 같은 명재상을 냈을 뿐 아니라 임진왜란 때도 다행히 전화(戰禍)를 입지 않았다고 한다. 아직까지 이 마을은 기름지고 넓은 들을 끼고 있는데, 이 또한 하회 마을의 근대적인 각박함에 물들지 않은 넉넉함과 관계가 있을 듯하다.



생각하면 그리운 땅 | 섬진강 기행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 중에는 섬진강을 좋아하는 이들이 많다. 그들이 섬진강을 말할 때면 늘 배어 있던 짠한 그리움이 내게도 전해진 것인지 나 또한 그 곳을 가보기 전부터 그리움의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한 십칠팔 년 전, 화창한 봄날 나는 처음으로 섬진강을 만났다. 더디게 가는 시골 버스처럼 황혼도 질 줄을 몰랐고, 옆구리에 섬진강을 끼고 벚꽃과 배꽃 등이 희게 핀 길은 밤새도록 어둠이 찾아오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때만 해도 사람들이 손만 들면 버스가 서던 때라 버스가 자주자주 섰고, 시골 사람들이 올라 탈 때마다 땅거미 같기도 하고 저녁밥 짓는 연기 같기도 한 부드러운 어둠 속에 하체를 노곤하게 풀어놓은 마을의 집들이 보였다가 사라지곤 했다. 그리고 그때 나는 큰 강이 그렇게 사람살이와 거리감이라곤 없이 가까이 붙어서 흐르는 것을 처음 보았다.



지난 가을에 곽재구 시인의 안내로 다시 그 곳을 찾았다. 매화철, 벚꽃철, 단풍철 혹은 철쭉 필 때도 아닌 여름의 끝자락이라는 애매한 시점이 마음에 걸렸지만, 막상 가 보니 역시 섬진강변이었다. 푸른 들과 나무 사이로 보이는 추수를 앞둔 논의 빛깔은 단순한 심미안을 넘어 더할 나위 없이 깊은 평화와 만족감을 안겨주었다. 길을 따라 보성강변에 있는 마을에 들렀다. 서까래와 기둥이 반듯한 정갈한 집들 사이사이, 대문이 따로 없어 마당인지 길인지 분명치 않은 곳곳에 백일홍, 봉숭아, 깨꽃 등이 야생초처럼 피어 있는 것을 보고 유년을 추억하며 반가워했다. 이름을 알 수 있어서 반가운 꽃들이었다. 이름을 안다는 건 얼마나 좋은 일인가.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는 누구나 알 듯 <토지>에 나오는 고장이고 TV에 방영된 <토지>를 찍은 곳이기도 하다. <토지>가 '1897년 한가위, 까치들이 울타리 안 감나무에 와서 아침인사를 하기도 전에……' 하고 시작하니 나는 그로부터 정확히 100년 만에 그 곳에 선 것이다. 현재는 비록 최치수네를 방불케 하는 대갓집은 없지만, 중요한 것은 작가가 만일 섬진강 유역의 땅에 만석꾼인 대지주를 설정했을 때, 그가 살 집을 앉힐 자리는 평사리밖에 없다는, 그래서 그곳에 오면 저절로 대지주의 아흔아홉 칸 정도 되는 집을 찾게 된다는 데 있다. 그 정도로 평사리는 섬진강 유역의 땅치고는 드물게 망망한 평야를 앞벌로 거느리고 있다.



평사리의 집들은 '공루'라는 다락방을 가졌다는 특징이 있는데, 물건을 수납하는 다락이나 벽장과는 달리 공루는 대개 바깥채의 문간 옆 광이나 마루방의 천장을 이용해 바람이 잘 통하게 꾸며져 있고, 누구 집 공루든지 앞벌을 향해 탁 트여 있다. 사방에 텃밭도 있고, 개울, 뒷동산도 있는데 일제히 앞벌만 보고 있는 이유가 뭘까. 황금물결을 보며 먹지 않아도 배부른 만족감을 누리려는 것인지, 머슴이나 소작인들이 게으름을 피울까 감시를 하려는 것인지. 여하튼 그 날 공루에서 만난 노인들의 화제는 그도 저도 아닌, 추석에 자식이 다녀간 얘기, 안 다녀간 얘기, 아직 젊은 노인이 먼저 간 얘기 등 쓸쓸한 것들뿐이었다.



보성강을 끼고 압록에 이르러 섬진강과 만나고 구례를 거쳐 화계, 악양, 하동까지의 길은 정말로 환상적이었다. 나는 그날 온종일 한 번도 공장이나 고층 아파트의 회색빛 직선을 보지 못했음을 떠올리고 오늘 하루 누린 평화와 행복의 원인이 바로 그것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쩌면 스스로의 고장이 낙후되었다고 생각하는 그곳에 사는 분들은 그런 데 감동하는 외지인을 욕하고 비웃을지 모른다. 그러나 모든 것은 돌고 돈다. 가장 앞서갔다고 생각되는 게 가장 처진 게 될 수도 있다. 지금 가장 낙후된 고장처럼 보이는 것이 가장 앞선 희망의 땅이 될 수도 있다. 발전이란 이름으로 만신창이가 된 국토에 마지막 남은 보석 같은 땅이여, 영원하라.





2. 잃어버린 여행가방



잃어버린 여행가방

프랑스 작가 미셸 투르니에가 쓴 매우 이색적인 경매 이야기를 다룬 산문이 있다. 해외에서는 온갖 것을 경매에 부쳐서 잊혀진 사건에 대한 호기심을 유발하기도 하고 엉뚱한 사람에게 이익을 안겨주거나 이미 죽은 사람의 비밀이 만천하에 드러나기도 한다. 때로는 생전에 알려진 것과 전혀 다른 면이 드러나는 편지 등이 공개되기도 하는 걸 보면 세속의 호기심이 저승길까지 쫓아다니는 것 같아 섬뜩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투르니에의 글에 나오는 경매는 그런 큰 이익이나 세인의 호기심을 겨냥한 게 아니라 지극히 사소하고 유쾌한, 서민적인 축제 같은 것이다. 즉 매년 1월 독일의 루프트한자 항공사에서 여행객들이 분실하고 찾아가지 않은 여행가방을 공개적으로 경매에 부친다는 것이다.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모른다는 게 호기심을 자극하지만 주인을 찾을 수 없는 가방은 주인에 대한 작은 단서도 없을 뿐더러 주인의 애착과 성의까지 없다는 증거이니 굉장한 귀중품이 들어 있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



어쨌든 일단 낙찰을 받은 사람은 즉시 관중들 앞에서 가방을 개봉하여 그 내용물을 만천하에 공개당한다. 낙찰자나 구경꾼이나 같이 낄낄대며 즐거워하는 광경에 눈에 선하다. 타인의 사생활을 엿보고 싶은 숨은 욕망은 국적이나 개인차에 상관없이 공통된 것인가 보다. 나도 오래 전 처음 나선 해외여행에서 여행가방을 잃어버리고서 오랫동안 가슴앓이를 했다. 다양한 기후의 나라를 여행해야 했기 때문에 갈아입을 겉옷뿐 아니라 내복을 많이 준비해 가지고 다니면서 한 번도 빨지 않은 더러운 옷들을 꾸역꾸역 담아놓은 가방이었던 것이다. 루프트한자 항공이 아니었으니 경매에 부쳐 개봉하지는 않겠지만, 만일 겉모양만 보고 슬쩍 빼돌린 속 검은 사람이 개봉을 했다고 생각하니 너무 창피했다.

그때만 해도 국내에선 커피가 비싼 귀물이라, 파리에서 인스턴트커피를 잔뜩 사서는 옷 사이사이에 끼워두었었는데, 때묻은 속옷말고도 나의 이 궁상맞은 행동이 드러난다고 생각하니 더욱 수치스러웠다. 나의 그 큰 여행가방 안에는 1980년대 내 나라의 궁핍과 나의 나태가 고스란히 들어 있었던 것이다. 나는 누군가가 우연히 가방을 주웠든 혹은 정말로 속이 검었든 간에 내 가방을 열어보고 실망하고 분노하고 경멸했을 생각을 하며 오랫동안 심한 수치감으로 괴로워했다. 그 후에는 여행을 떠날 때 절대 양말이나 속옷을 많이 가져가지 않고 그날그날 빨아 입는 습관을 들이게 되었다.



그러나 정작 두려운 것은, 내가 두고 떠날 내 인생의 마지막 여행가방에 대한 것이다. 내가 소중히 여기며 끼고 살던 물건들은 남 보기에는 하찮은 것들일 뿐이라서 나의 소멸과 동시에 남은 가족들에게 처치 곤란한 짐만 될 텐데 내가 남길 내 인생의 남루한 여행가방을 생각하면 내 자식들의 입장이 되어 골머리가 아파진다. 하지만 내가 정말 두려워해야 할 것은 이 육신이란 여행가방 안에 깃들었던 내 영혼을, 절대로 기만할 수 없는 엄정한 시선, 숨을 곳 없는 밝음 앞에 드러내는 순간이 아닐까. 하지만 한편으로 이런 가장 두려워해야 할 것을 별로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는, 내가 일생 끌고 온 이 남루한 여행가방을 열 분이 주님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게 저의 전부입니다' 나를 숨겨준 여행가방을 미련 없이 버리고 나를 온전히 드러낼 때, 그분은 혹시 이렇게 나를 위로해주지 않을까. 오냐, 그래도 잘 살아냈다. 이제 편히 쉬거라.



그 자리에 내가 있다는 감동 | 바티칸 기행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선종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깊은 슬픔과 함께 기쁨에 가까운 안도감을 맛보았다. 하느님의 미소 같았던 선한 교황님의 모습을 다시는 볼 수 없게 되리라는 게 슬펐지만, 인간적인 온갖 병고에 시달리시면서도 하느님의 대리자로서의 고된 임무를 다하시는 모습이 뵙기에 어찌나 조마조마하던지 마지막까지 존엄성을 잃지 않고 선종하셨다는 속보를 듣고 마침내 그 힘든 짐을 내려놓으셨구나 싶어 크게 안도를 하지 않았나 싶다.



외교통상부의 요청으로 조문사절단의 일원이 되어 로마에 가기로 마음을 정하고 떠나기까지 준비할 건 검정 옷 한 벌이면 충분했지만 나에게 분에 넘치는 일이 생긴 것에 대해 감사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출발일을 맞았고 장장 열 일곱 시간이 걸려 로마에 도착했다. 다음날, 총리를 단장으로 한 우리 조문단은 '행사차량' 표시를 달고 바티칸으로 출발했다. 세계 각지에서 모여든 각국의 수뇌, 왕족, 귀빈, 조문사절단, 몇 백만의 일반 조문객 등으로 로마, 특히 바티칸 대성당 앞은 그야말로 만원이었지만 행사 참가자들은 성당 안까지 질서정연하게 조금의 무리도 없이 인도되었다.



로마에는 4백만의 조문객이 모였고 넓은 바티칸 광장은 이미 입추의 여지없이 꽉 차 있었다. 성당 안의 2천여 석의 귀빈석에는 1백여 나라에서 온 사절단이 자유롭게 뒤섞여 앉을 수 있도록 돼 있었다. 피부색이 다양할 뿐 아니라 복장으로 봐서 가톨릭과 별로 친하지 않을 것 같은, 또는 적대 관계일 것처럼 알려진 종교의 지도자 복장도 많이 눈에 띄었다. 초강대국으로부터 종교가 다른 작은 나라의 지도자까지, 왕족, 귀족으로부터 침낭을 메고 걸어온 젊은이들까지 한결같이 애도하는 그는 누구인가.

주로 이탈리아 추기경이 해 오던 전통을 깨고 핍박받는 약소국이었던 폴란드에서 처음으로 선출된 교황은 진정 위대했고, 유례가 없었던 가히 세계장(蔣)이라 부를 만한 고별의식이 그걸 말해주고 있었다. 교황청 대외정책의 기조는 정의와 사랑에 기초한 보편적 평화 추구였다. 일찍이 교황 바오로 2세는 교황청의 그런 이상을 "가장 고매하며 커다란 가치의 상징인 소국 바티칸의 전쟁 능력은 무에 가

전문 열람 제한

미가입 상태이므로 요약본의 일부만 제공됩니다.
더 깊이 있는 내일의 통찰력과 지식 에너지를
프리미엄 무제한 이용권으로 충전해 보세요!

멤버십 가입 / 결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