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생목록
재생목록이 비어 있습니다.
-
-
0:00 0:00
화면 너비 (여백)
좁게
보통
넓게
최대
배경 테마
글꼴
바탕/명조
돋움/고딕
글자 크기
작게
100%
크게
줄 간격
좁게
보통
넓게

천재 파티시에, 프랑스 요리의 왕

이안 켈리 지음 | 말글빛냄
미식가를 위한 연회

1829년 7월 6일 파리의 이른 저녁. 여행 작가이자 문장가인 모건 부인은 달리는 마차 안에서 정찬에 초대받았을 때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린다. "유럽 최고의 식사를 대접해 드리죠! 직접 맛보시고 이 천재요리사를 평가해 주시기 바랍니다." 로쉴드 가문의 식사 초대를 받고 모건 부인은 시기심과 경외심이 동시에 일었다. 왜냐하면 이 부부의 요리사는 앙토넹 카렘이었기 때문이다. 모건 부인을 비롯해 파리의 모든 사람들은 앙토넹의 요리를 맛보고 싶어 했다.



모건 부인은 앙토넹에 관한 것이라면 모두 알고 있었다. 그가 나폴레옹과 황후를 위해 만들었던 웨딩케이크나 러시아 황제를 위해 준비했던 진수성찬, 런던의 섭정 왕자를 위해 공들여 만들었던 파테(짓이긴 고기나 간을 요리한 것) 등. 뿐만 아니라 그녀는 앙토넹의 책들도 읽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앙토넹이 가난뱅이에서 부자로 성공한 과정, 프랑스 혁명으로 버려진 고아가 왕들의 요리사, 요리사들의 왕으로 성장한 과정을 잘 알고 있었다. 앙토넹의 요리법들은 당시 만인의 입에 오르내렸다. 요리는 1829년 프랑스에서 대표적인 화제였기 때문이다. 이 때가 바로 미식법이 최초로 등장한 시기였고, 또한 요리사가 최초로 유명인이 된 시기이기도 했다.



1829년 7월 6일. 정찬 12시간 전. 실제 나이인 45세보다 더 늙어 보이는, 여위고 핏기 없는 한 남자가 이른 아침 파리의 숨막히는 공기 속에서 힘겹게 숨을 토해 냈다. 주치의인 브루세와 로크는 병에 대해 의견을 달리했지만 앙토넹 카렘은 알고 있었다. 옛 동료들과 친구들 중에도 같은 증상을 보인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평생 요리에 사용해 온 숯의 유독가스 때문에 서서히 죽어가는 중이었다. 그러나 앙토넹은 쇠약해져 가는 왼팔을 짚고 마차에 올랐다. 그리고 이날 모건 부인이 밟게 될 똑같은 경로를 따라 이동했다.



파리를 뒤로하자 공기는 조금 맑아진 것 같았고 앙토넹은 그 날 해야 할 일로 생각을 돌렸다. 로쉴드 가문의 전원저택 오렌지 밭에서 열릴 정찬이 바로 그것이었다. 한때 샹젤리제에서 만 명의 식사를 준비하기도 했던 그에게 이 정찬은 그리 대단한 일도 아니었다. 그렇긴 해도 준비 작업은 이미 전날부터 착수된 상태였다. 오전 7시 앙토넹이 도착하자 저택 주방에는 정적이 엄습했다. 앙토넹은 오른쪽 집게손가락에서 다이아몬드 반지를 빼고 소매를 걷어 올렸다. 그는 직접 고안한 흰색 토크(챙이 없는 둥글고 작은 모자)를 쓰고 조수 제이를 보며 미소 지었다.



저녁 메뉴는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코스와 달리 7가지 서비스로 구성되었으며 손님들은 18가지 요리 중에서 선택할 수 있었다. 앙토넹은 '프랑스식 서비스'를 원하는 프랑스인 고용주들의 입맛에 맞춰 거의 모든 요리를 식사 시작부터 테이블에 올렸다. 따라서 수프와 앙트레(생선요리와 고기요리 사이에 내는 중간요리), 즉 말 그대로 '시작만' 따끈하게 즐길 수 있는 셈이었다. '프랑스식 서비스'에서는 모든 요리가 완벽하게 대칭으로 배열되어야 했다. 따라서 요리는 반드시 두 가지 혹은 네 가지였다. 테이블 위의 접시들과 포크, 나이프 등은 두 번에 걸쳐 완전히 다시 배치된다. 수프 다음에는 따뜻한 생선 요리가 제공되고 고기 요리와 앙트레 다음에는 차가운 디저트들이 이어진다. 고대 그리스 신전 모양으로 만든 설탕 과자 '술탄의 신전'은 화려한 중심 디저트로서, 식사 내내 테이블 위를 지키게 될 것이었다. 주방의 일과는 메뉴와는 반대 순서로 디저트부터 시작된다.



모건 부인이 로쉴드의 옆 자리에 앉은 시각은 7시였다. 하인들은 포타주(수프)를 손님들의 선택에 따라 대접했다. 따뜻한 접시와 함께 생선 요리가 나왔다. 손님들은 공 들인 그로스 피에스(큰 덩어리의 고기 요리)와 곁들이는 요리들을 담아 먹었다. 다음으로 하인들이 앙트레를 내왔다. 볼로방과 쇠고기, 닭고기 그리고 치커리를 곁들인 토끼고기였다. 주방에서 앙토넹은 몇 시간 만에 의자에 앉을 수 있었다. 길고 긴 준비 시간에 비해 앙토넹의 작품이 누린 영광의 순간은 잠깐이었다.



식당 안에는 로쉴드의 정계 친구들뿐만 아니라 작곡가 로시니 등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지만 모건 부인만이 앙토넹의 설탕 신전에 새겨진 자신의 이름을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앙토넹을 만나고 싶다고 청했다. 두 사람이 만났을 때 앙토넹은 18시간째 쉬지 못한 상태였다. 만남은 짧게 끝났다. 모건부인은 "그는 예의를 지킬 줄 아는 신사였다. 각자의 작품에 대해 서로 축하의 인사를 나눈 후 그는 공손히 인사하고 마차에 올라 파리로 돌아갔다."라고 했다. 이날의 정찬은 그가 준비한 마지막 정식 식사 중 하나였다. 앙토넹은 일류 요리사의 삶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이 일은 우리를 죽이고 있습니다. 요리를 하고나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기록해서 책으로 남기는 것뿐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지독한 후회에 빠지기 때문이죠." 그로부터 3년 후 앙토넹은 세상을 떠났다.



빵 굽는 소년

1783년 파리 센강 기슭 빈민가에서 앙토넹은 태어났다. 프랑스 혁명 중이던 1792년 가을 앙토넹의 아버지는 파리의 메인 거리에서 앙토넹을 버렸다. 그러나 앙토넹은 한 요리사의 도움으로 공포에서 구출되었다. 앙토넹의 이야기는 완벽한 혁명기적 낭만성을 배경으로 한다. 장차 프랑스 요리의 체계와 고전주의를 창조할 아이가 공포정치의 혼란 속에 빈민굴에서 등장한 것이다. 나폴레옹도 인정하게 될 요리사가 말이다.



앙토넹은 자신을 구해준 요리사를 따라 싸구려 음식점에 들어가 하급 주방 보조로 일했다. 앙토넹이 흘러 들어간 파리의 요리업계는 정치계 만큼이나 혼란(격정)에 빠진 상태였다. 당시는 '고전' 요리법과 '현대' 요리법에 관한 열띤 논쟁이 펼쳐지던 때였다. 논쟁의 중심에는 레스토랑과 앙토넹의 최대 관심사였던 수프가 있었다. 혁명 전 파리의 '레스토랑'에서는 음식을 제공하지 않았다. 단지 수프(부용과 포타주)를 제공하여 기분을 풀어주는 곳이었다. 수프는 이전 세대로 치자면 커피와 같은 역할을 했던 것이다.



앙토넹은 수프가 건강식으로 유행하던 시기에 성장했으며 나이가 들면서 반드시 식사는 수프로 시작해야 한다고 단언하였다. 그에게 있어 이 원칙은 요리법일 뿐만 아니라 철학이자 의학이었다. 수프는 대중적인 음식이었다. 앙토넹은, 수프를 기본으로 한 자신의 메뉴들을 '누벨 퀴진'(새로운 요리라는 의미. 요리의 혁명을 일컬음)이라 불렀다. 앙토넹의 수프 요리법은 종류가 다양하다. 그러나 1790년대에 수프가 한창 유행이기는 했지만 그것이 앙토넹에게 명성을 안겨다 준 것은 아니었다. 물론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일 역시 마찬가지다. 혁명 후 프랑스 요리업계의 진정한 스타는 제빵사 및 파티시에들이었다. 앙토넹도 처음에는 제빵사로서 파리 미식가들에게 인지도를 얻었다.



1798년 앙토넹은 비비엔느 거리의 파티시에 실뱅 바일리 밑에서 견습생활을 했다. 이는 뜻밖의 행운이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집정 정부의 권력자로 떠올라 대성공을 거둔 이 시기에 바일리와 그의 야심찬 견습생도 성공가도를 달렸다. 바일리는 잠깐씩 그에게 제과-레스토랑에서 공부할 수 있게 해 주었지만, 그의 세계는 역시 바일리의 가게와 루아얄 궁전이 중심이었다. 이렇게 그는 혁명 후 파리의 가장 활기 넘치는 지역에서 요리를 했다. 루아얄 궁전은 모든 상업에 개방되어 있었다. 앙토넹은 유명 '레스토랑'에 패스트리를 배달하면서 아케이드 상점가의 탄생뿐만 아니라 파리 식품 신화의 중추부인 카페 문화의 탄생도 직접 눈으로 목격했다. 그러나 주방에서 패스트리를 만들던 젊은 시절부터 앙토넹의 건강은 악화되기 시작했다. 그가 활동하던 폐쇄된 지하공간은 어둡고, 습하고, 숯에서 나오는 유독한 일산화탄소로 가득했다.



앙토넹은 오후의 자유 시간을 도서관에서 보냈다. 그는 책을 읽고 공부하면서 학구적이고 진지해졌다. 그런데 그가 가장 열중한 분야는 고전 건축이었다. 후에 그는 이 시기를 자신의 삶에서 집중적으로 학문에 열의를 쏟고 영감을 얻던 때였다고 썼다. 앙토넹은 늘, 요리와 건축은 매우 비슷한 예술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건축은 모든 예술 가운데 으뜸이다. 그리고 건축에서 뻗어 나온 가장 중요한 가지는 제과 분야이다."



앙토넹이 '특별 작품'이라고 부르는 중앙 장식 혹은 특별 디저트는 현대 요리사들의 레퍼토리로 살아남지 못했다. 그래도 프랑스에서는 중앙 장식이 인상적인 계보를 보였다. 가장 유명한 특별 디저트는 1682년 루이 14세의 손자 세례식을 위한 케이크였다. 다행스럽게도, 건축적인 화려함을 추구하던 앙토넹의 기대에 부응하듯 '피에스 몽테'(건축 풍으로 높게 쌓아올린 케이크)는 혁명 후 테이블 장식에서 꾸준히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케이크는 곧 앙토넹의 전문 분야가 되었다. 패스트리나 빵을 만드는 작업은 세세하고 정연하다. 그러나 혁신적인 일류 요리사들은 정확성에 구애받지 않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앙토넹은 국립도서관에서 공부한 고전 건축의 균형과 바일리에게서 배운 이스트 조리법의 화학적 정밀함을 결코 잊지 않았다.



바일리의 가게에서 일하는 동안 앙토넹은 그를 성공으로 이끈 가장 중요한 세 가지를 얻었다. 앙토넹은 이곳에서 파티시에의 기술을 배웠고(17세 때 그는 '일급 요리사'가 되었다) 국립도서관에서 그린 그림들을 바탕으로 특별 디저트를 만들어 처음으로 파리에서 명성을 얻게 되었다. 비비엔느에 살던 또 한 명의 미식가 샤를 모리스 탈레랑의 눈에 띈 것도 바로 이곳에서였다.



탈레랑 저택의 아침식사

샤를 모리스 드 탈레랑 페리고르는 인생에서 대화와 정치, 여자 그리고 음식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다. 혁명 전후 그는 루아얄 궁전에서 아침 식사를 했고 오를레앙 공작 서클의 일원이었다. 학구적이고 순수했던 앙토넹은 약삭빠른 정치가를 알게 되고 우호를 얻었다. 단 것을 좋아하는 탈레랑을 앙토넹에게 소개한 사람은 탈레랑의 요리사장 부셰였다. 탈레랑과 앙토넹은 공통점이 상당히 많았다. 두 사람 모두 부모에게 버림받았다는 정신적 상처를 안고 있었다. 두 사람은 급변하는 (외교술과 미식법이라는)'매체'를 통해 경력을 쌓았고, 그 과정에 부지런히 몰두하고 전략적으로 매력을 활용해 친구는 물론 적도 많이 얻었다. 30년 넘게 알고 지내면서 탈레랑과 앙토넹은 서로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갈리페 저택의 지하실에서 앙토넹은 총재정부와 집정정부, 제1제정의 화려한 행사들을 위해 음식을 만들었던 요리 팀의 일원이 되었다. 그는 주로 특별 디저트를 맡았다. 앙토넹의 특별 디저트들은 유명 크리스털 세공인인 바카라가 만든 크리스털 식기들과 미를 겨루며 나폴레옹 1세 시대의 상류층 손님들을 기다렸다. 소설가 스탈 부인은 자주 찾아오는 손님이었다. 정치 저술가인 샤토브리앙과 시인 아르노 그리고 나폴레옹과 조제핀 부부 역시 마찬가지였다.



탈레랑의 연회에서 언제나 중심은 음식이었다. 조제핀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그는 여자들만 자리에 앉는 정찬을 열었다. 나폴레옹까지 포함해서 배우자들은 모두 여자들의 뒤에 서서 접대를 했다. 사실 나폴레옹은 식사를 귀찮게 여겼다. 식사가 20분 이상 계속되면 그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아, 힘이 부패하기 시작하는구나." 반대로 탈레랑은 맛있는 음식에 완전히 얽매어 있었다. 부패든 그 반대든 상관없었다. 앙토넹은 탈레랑이라는 박식한 감정가에게서 배울 점이 많았다. 다음은 앙토넹이 한 말이다. "부유한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가장 고귀한 칭찬은, 그가 미식가라는 칭호를 마땅히 받을 만한 사람이라는 것이며, 좋은 와인과 음식을 친구들과 함께 나누는 이는 누구보다 고귀한 사람입니다."

갈리페 저택에서 앙토넹은 연회 요리 규칙들을 익히기 시작했다. 수백 그릇의 요리를 포함해 연회 전체를 맡았다. 앙토넹이 경험을 쌓아감에 따라 탈레랑은 그를 유력한 지인들에게 소개하기 시작했고 이 사람들 가운데는 나폴레옹의 누이인 폴린 보르게제(뇌이 성의 주인)도 있었다. 이 무렵 앙토넹의 일은 두 가지로 나뉘었다. 한 가지는 장드롱의 제과점과 갈리페 저택에서 하는 일이었고, 또 한 가지는 부유한 탈레랑의 연줄을 통해 나폴레옹의 누이와 같은 고객들의 의뢰를 받는 것이었다.



미식법 : 성직자 없는 신앙

미식법이란 '맛있는 음식을 만들고 즐기는 법'이라는 뜻으로 아카데미 프랑세즈에서 정한 용어이며, 19세기 첫 십년 사이에 등장했다. 그리모 드 라 레니에르는 1803년 『미식가 연감』을 통해, 그리고 이후 『미식가를 위한 안내서』를 통해 파리 음식 및 프랑스 요리의 기준을 세웠다. 새로운 레스토랑들을 소개하는 여행 지도이자 앙토넹과 같은 요리사들의 솜씨에 대한 찬가였던 『미식가 연감』은 파리 미식가에 관한 신화를 만드는 데 일조했다. 이 책이 아니었다면 앙토넹은 결코 그처럼 유명한 스타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1814년 『미식가 연감』에 실린 레스토랑의 수는 3천 군데가 넘었다. 그러나 앙토넹은 직접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문제를 진지하게 고려해 본 적은 없었다. 그는 현실적인 사람이었다. 십 년 동안이나 일을 해왔지만 아직 그는 법적으로 성인도 되지 않은 상태였다. 또한 그는 프랑스의 '변덕쟁이들' 혹은 정치계의 바람잡이들 중에서도 전형이라 할 수 있는 탈레랑의 지도를 받고 있었다. 앙토넹은 뒤숭숭한 시대에 어느 곳이든 상류인사가 주도권을 잡고 있는 곳에서 개인적으로 요리하는 편이 덜 위험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전문인 특별 디저트는 일회성이라는 본질 때문에 이곳저곳을 순회했고 덕분에 꽤 벌이가 되었다. 레스토랑 운영이라는 책임에 구속받지 않았기에 앙토넹은 창작활동에 시간을 투자하며 자치권을 누릴 수 있었고, 자주 방향이 바뀌는 정치계의 바람에도 좀 더 탄력적으로 대응할 수 있었다.



1803년 겨울에서 1804년 사이 앙토넹은 그동안 번 돈으로 새로이 개발된 페 거리에 제과점을 열었다. 이미 인기를 끌고 있던 앙토넹의 퍼프 패스트리뿐 아니라 아몬드 크로캉(croquant: 바삭바삭한 쿠키)도 굉장히 잘 팔려 나갔다. 앙토넹이 (굉장히 가벼워서 오븐에서 '바람에 실려 나오는 듯한') 볼로방을 만들어 낸 것도 바로 이 시기에 이곳에서였다고 전해진다. 당시 그는 '풍성한 머랭'도 만들었는데, 이 과자는 지금까지도 파블로바(pavlova:크림과 과일 등을 얹은 머랭 과자)라는 형태로 응용되어 제과 및 디저트의 기본으로 자리 잡았다.



앙토넹은 당시 일류 요리사들의 후견 아래 그들의 주방을 함께 사용하면서 자신의 레퍼토리와 명성을 더욱 확장시키는 데 몰두했다. 후에 그는 이런 글을 남겼다. "나는 나폴레옹 결혼 축제 때 콩데 가문의 유명한 소스 조리사 리쇼 씨 밑에서 소스 조리법을 익혔다. 그리고 라즈네 씨의 지시 아래 콜드 뷔페 중 대부분의 조리법을 배웠다. 상당히 많은 것들을 보았고 그런 관찰을 통해 많은 도움을 얻었다." 앙토넹은 보수파에서 가장 유명한 요리사 라귀피에르와도 함께 일했는데 그는 나폴레옹이 모스크바에서 비참하게 퇴각하던 당시 추위로 목숨을 잃었다.



선배 요리사들의 주방에서 시간을 보내면서 앙토넹은 점차 파티시에에서 발전해 전반적인 정찬을 책임지는 자유 계약 요리사로 탈바꿈 할 수 있었다. 그가 준비하는 연회는 결코 간단치 않았지만 그의 신조는 간단했다. "미식가가 정찬을 음미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요리사에게 접대를 맡기는 것이다." 우선 앙토넹은 소규모의 사적인 정찬부터 맡았다. '간소하고도 절묘한' 이 정찬들은 '단지 네 가지 앙트레'로 구성되었다. 유명한 미식가인 작센 대사관의 라발레트는 전체 식사를 앙토넹이 혼자 힘으로 준비하도록 맡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또다른 미식가 바르브 마르부아 부인이 거느리는 마르브아 집안에

전문 열람 제한

미가입 상태이므로 요약본의 일부만 제공됩니다.
더 깊이 있는 내일의 통찰력과 지식 에너지를
프리미엄 무제한 이용권으로 충전해 보세요!

멤버십 가입 / 결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