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동화의 숨겨진 진실
이민수 지음 | 예담
1장 동화 문학의 길을 연 그림 형제삶의 다양한 원형을 포함한 또 다른 신화, 동화 20세기 말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21세기를 뜨겁게 연 최고의 문학 작품 중 하나로 조앤 K. 롤링의 <해리 포터> 시리즈를 들 수 있다. 전 세계를 강타한 <해리 포터> 시리즈의 성공은 18세기의 다니엘 디포, 조나단 스위프트, 19세기의 찰스 디킨스, 루이스 캐럴을 낳은 영국 아동 문학의 전통을 생각하면 우연이 아니다. 그들은 어린이와 성인을 모두 독자로 사로잡은 위대한 작가들이다. 하지만 영국의 아동 문학과 세계의 아동 문학이 19세기에 황금기를 맞을 수 있었던 것은 18세기 말에 출생한 독일의 그림 형제의 역할이 있었기 때문이다. 더 자세히 말해, 그들이 민담을 수집하여 시대의 흐름에 맞게 가필해 '책 동화'로 엮어낸 <어린이와 가정을 위한 동화>, <그림동화>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또한 "그림 장르"라는 단어가 생길 정도로 그들의 문체는 후세의 아동 문학 대가들이 출현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시대와 사회가 바뀌면서 사람도 시대정신도 변한다. 그리고 이 시대의 동화는 어린이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19세기에 민담이나 동화를 읽던 독자층과 현재의 독자층은 다르다. 과거에 동화가 어린이들에게 교육적, 계몽적인 목적으로 읽혔다면 오늘날 동화는 또 다른 문학의 배양소이자 상상력의 단초를 제공하는 원천이며 그 자체로 훌륭한 문학이다. 또한 동화의 독자층은 아이들에서 어른에 이르기까지 폭이 넓어졌다. 물론 할리우드가 이런 변화에 지대한 공헌을 한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이제 전래 민담이나 창작 동화를 활자매체인 책으로 엮어내던 구텐베르크 시대는 가고 영상시대, 인터넷시대가 활짝 열렸다.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는 표현방식은 순수한 활자보다는 영상이며, 영상 속에서 동화는 새롭게 재탄생하고 있다.
세계 어린이 문학의 이정표를 세운 사람을 꼽으라면 프랑스의 샤를 페로와 독일의 그림 형제, 덴마크의 안데르센을 들 수 있다. 그림 형제가 민담을 문학 동화 수준으로 올려놓으면서 동화 문학의 독자적인 길을 여는데 기여했다면 안데르센은 환상적인 창작 동화와 풍자적인 내용으로 어린이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았다. 그림 형제와 안데르센은 사회적, 정치적으로 혼란스럽던 19세기의 인물이다. 안데르센은 그림 형제가 태어나고 약 20년 후인 1805년 덴마크의 코펜하겐 근교 오덴세에서 태어났다. 안데르센이라는 인물이 없었다면 핀 섬의 오덴세는 오늘날처럼 유명한 도시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독일 헤센 주의 작은 도시 하나우(Hanau)도 그림 형제가 없었으면 지금과 같은 유명세를 타지 못했다.
19세기의 멀티형 인간이 탄생하다이제 야곱 루트비히 칼 그림과 빌헬름 칼 그림, 통칭 그림 형제라고 부르거나 야곱과 빌헬름으로 부르는 정의로운 두 형제의 삶 속으로 빠져보자. 독일과 유럽 문화사의 가장 중요한 인물이자 정신사적 인물인 그림 형제는 민담 수집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평생 성실하게 산 그림 형제의 인생은 학문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그림 형제의 삶은 결코 평탄치 않았지만 그들의 인생 사전에 낙담이라는 말은 없었다. 그들은 평생 노력하며 희망을 잃지 않았다. 그들은 한 마디로 멀티형 인간이었다. 법학을 전공했지만 시문학의 토대인 독일 언어학과 문예학, 문헌학, 고대학의 문을 열었다. 그림 형제가 태어난 18세기 말은 정치적, 사회적으로 시민들의 삶을 뒤흔든 격랑의 시기였으며 대내외적으로 많은 변화를 겪고 있었다. 18세기 말은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제의 죽음과 프랑스 대혁명(1789년)의 영향으로 중세부터 지속되던 봉건사회가 붕괴되고 나폴레옹의 등장과 퇴장으로 독일 또한 그 높은 파고를 피할 수 없던 시대였다. 또한 증기기차와 증기선의 출현 등으로 자연과학과 경제, 산업이 급속히 발전했고, 민족주의와 시민혁명 등으로 일상의 삶이 송두리째 흔들린 시대였다.
이렇듯 희망과 절망이 혼재하고, 근대의 기운이 맹렬한 기세를 펼치던 시대에 그림 형제는 1785년 1월 4일과 1786년 2월 24일, 13개월 차이로 태어났다. 그들의 고향은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 동쪽에서 약 10킬로미터 떨어진 하나우다. 마인 강과 그 지류인 킨치히 강의 합류점에 있는 하나우는 850여 년의 역사를 가진 인구 9만 명의 소도시다. 그림 형제가 일생 동안 가장 중요하게 여긴 세 가지 정신적인 자산은 아마도 정직과 정의와 믿음일 것이다. 그들이 탄생한 장소에 이미 깊이 흐르고 있던 정의로운 정신은 심성이 곧은 형제에게 그대로 수혈되었고, 그들은 아무리 삶이 고달플지라도 현실과 타협하지 않았다. 그것은 엄격한 칼뱅파인 그림 가문의 정신이기도 했다. 그림 형제의 민담 수집에 지대한 공헌을 한 위그노파와의 만남은 그들에게 선험적인 운명이었을지 모른다. 형제는 그들과 두터운 친분을 쌓았고 음극과 양극이 끌리듯 프랑스에서 이주한 위그노파 여성들과 친밀하게 교류했다. 그림 형제에게 중요한 민담을 전해준 사람들이 위그노파의 후손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 역사 속에 배태된 종교개혁의 문화적인 교류와 영향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함께 성장하는 나무, 그림 형제6형제 중 야곱과 빌헬름은 유난히 우애가 깊어 죽는 날까지 함께 했고 죽어서도 나란히 묻혔다. 그들은 같은 도시에서 태어나 줄곧 같은 학교에서 공부했으며, 같은 집에서 살았고, 같은 도서관에서 근무했다. 괴팅엔 대학에서도 교수로 함께 일했고, 하노버 왕의 위헌 행위에 함께 반기를 들어 함께 해직되었다. 이렇듯 이들 형제의 일생을 관통하는 단어는 '같이', '함께'였다. 그림 형제는 어쩔 수 없이 떨어져 살아야 할 때 열렬한 사랑에 빠진 연인들 마냥 이별의 아픔을 토로한 편지를 썼다. 야곱은 1805년 스승 사비니의 초청으로 파리에 갔을 때 이별의 적적한 심경을 동생에게 다음과 같이 써 보냈다. "사랑하는 빌헬름, 이제 다시는 떨어지는 일이 없도록 하자. 우리 둘 중 한 사람을 다른 곳으로 보내려는 사람이 있거든 곧바로 거부해야 해. 우리는 함께 사는 것에 익숙하잖아. 혼자 떨어져 있는 건 죽도록 슬프다." 한 뿌리에서 함께 성장한 나무, 그림 형제는 튼튼한 나무가 되어 독일의 명성을 푸르게 빛내고 있다.
2장 그림 형제의 유년의 사랑, 슈타인나우차마 꿈에도 잊지 못할 마음의 고향야곱이 일곱 살, 빌헬름이 여섯 살 나던 1791년, 그림 가족은 하나우에서 45킬로미터 떨어진 북동쪽의 교역 중심지 슈타인나우 안 데어 슈트라세로 이사한다. 이후 그들은 1798년까지 할아버지 프리드리히 그림이 40년 동안 신교개혁파 목사로 일한 슈타인나우에서 행복한 유년 시절을 보낸다. 증조부 역시 이름이 프리드리히 그림이고 교회행정관이었다. 증조부는 세상을 떠나면서 '성실, 근면, 노력'을 유언으로 남겼으며 1798년 마흔 다섯 살의 젊은 나이로 슈타인나우에서 세상을 떠난 아버지 필립 역시 '정직'을 인생의 교훈으로 삼고 살았다.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체득한 엄격한 칼뱅파 개신교 교육은 그림 형제의 일생을 지탱한 근간이었다. 하나우가 그들에게 피와 살을 준 고향이라면 정감 넘치는 전원도시 슈타인나우는 그들의 영혼을 풍성하게 한 마음의 고향이다. 한편 하나우는 그림 형제에게 그리 유쾌한 추억을 남긴 도시는 아닌 듯 하다. 빌헬름은 하나우에서 보낸 어린 시절이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고 고백한다. 반면 슈타인나우는 형제에게 일생 동안 차마 잊지 못할 영혼의 휴식처였다. 야곱은 푸른 초원과 아름다운 산으로 둘러싸인 슈타인나우에서 보낸 유년 시절이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아 있다"고 자서전에 고백한다. 독일인들은 슈타인나우를 여우와 산토끼가 서로 잘 자라고 인사할 정도로 평화로운 소도시라고 말한다.
동화가 살아 숨쉬는 슈타인나우구불구불한 마을의 중앙로를 따라 올라가면 왼편에 1562년에 지은 목조 건물이 나온다. 이곳은 하나우에서 이사 온 그림 형제가 살던 집으로 현재 그림 형제 기념관으로 남아있다. 1층은 사택, 2층은 아버지의 집무실인 법원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야곱은 "아버지는 근면했고 규칙적이었고 사랑에 가득 찬 남자였다. 아버지의 방과 책상, 책장은 깨끗하게 정리된 책들로 가득 차 있었다."고 말한다. 화가인 동생 에밀 역시 아버지를 모든 사람에게 친절하고 진지한, 훌륭한 분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림 형제가 세상을 떠난 지 2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에밀이 묘사한 슈타인나우의 관사는 그 시절 그 모습을 대부분 간직하고 있다. 집의 내부는 물론 집 앞의 보리수하며 헛간과 장작 창고, 마차 헛간 등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관사의 뜰에 서면 그림 가족의 웃음 꽃 피는 행복한 삶이 되살아온다. 자연을 사랑하고 목가적인 농촌 분위기를 좋아한 부모님의 영향으로 그들 또한 자연에 푹 빠져 지냈다.
자연책을 즐겨 본 그림 형제 역시 보통의 아이들처럼 채집을 좋아했다. 하지만 그들의 수집벽은 유난스러웠다. 단순히 수집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수집품들을 질서정연하게 체계화했고 자연책을 보며 공부했다. 후에 빌헬름은 당시 "누에 연구서 같은 정확하고 세심한 연구서들에 경탄을 금치 못했다"고 말했다. 그들의 수집 정신과 학술적인 열정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자연에 대한 사랑과 자연과의 감정적 교류는 그들의 일생 동안 계속되었다. 책상에는 항상 좋아하는 꽃들이 놓여 있었다. 그림 형제는 관사를 방문한 여관업주, 도공, 대장장이, 농부, 소시민들에게서 민담과 속담을 들었고 업무를 보러 간 아버지를 따라나선 쉴뤼흐테른에서도 <그림 동화>에 수록될 이야기를 들었다. 그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훗날 민담을 모아 동화집으로 정리할 기초를 그때부터 다지고 있었다.
1796년 1월 10일, 형제는 인생에서 가장 슬픈 일을 맞는다. 아버지가 마흔 다섯 살의 이른 나이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아버지의 죽음은 그들에게 행복한 유년 시절과의 영원한 이별이었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들이 역사를 넘어 살아있는 인물로, 큰 미래로 가는 출발점이기도 했다. 아버지의 죽음과 동시에 그들의 안락하고 천진난만한 유년의 삶은 완전히 끝나고 말았다. 어머니와 여섯 아이들은 생계가 막막한 가운데 관사를 바로 비워주고 빈민수용소로 옮겨가야 했다. 하지만 그때부터 슈타인나우의 교육이 성에 차지 않던 형제에게 마침내 교육의 기회가 열렸다. 그들은 이모 헨리에테 침머의 도움으로 상급 교육을 받기 위해 1798년 카셀로 향할 수 있었다. 그들은 평화, 우정, 사랑, 고통, 믿음, 동경이라는 단어로 정리할 수 있는 슈타인나우에서의 생활을 평생 잊지 않았다. 이렇듯 슈타인나우는 그림 가족에게 단지 '체류지'가 아니라 '마음의 고향이자 보금자리'였다.
3장 동화 제국의 수도 카셀, 도약하는 그림 형제더 나은 미래를 위해 카셀로카셀은 동화 제국의 수도라고 부르기에 손색이 없다.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힌 책이라는 <그림 동화>가 계획되고 민담이 모아진 곳이자 출판이 결정된 곳이며, 그림 형제가 30년 가까이 살았고 그들에게 민담을 이야기해 준 사람들이 거주한 곳이기 때문이다. 슈타인나우 역에서 기차를 타면 카셀 빌헬름스회에 역까지 불과 1시간 20분 정도가 걸린다.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창 밖 풍경에 빠져 있다 보면 어느새 카셀의 상징인 빌헬름스회에 언덕에 있는 헤라클레스 신전이 서서히 눈에 들어온다. 카셀은 동독과 서독의 접경에 있으며 독일 주변국으로 가는 고속도로망이 잘 조성되어 있고 기차 환승도 용이한 교통의 요충지다.
그렇다면 18세기 말, 19세기 초에 카셀로 가는 여행길은 어땠을까? 철도 시대가 개막되기 전 사람들은 어떻게 여행했을까? 18세기 말까지 육로의 주요 교통수단은 마차였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투른-탁시스 우편 역마차를 이용했다. 돌투성이의 들길이거나 질퍽한 점토로 이루어진 시골길은 통행하기가 힘들었고 마차가 습지에 처박히는 일이 다반사였다. 18세기 말까지 마차의 하루 평균 이동거리는 25킬로미터에서 60킬로미터였으며 광활한 숲에는 강도와 의적이 숨어 있어 위험하기까지 했다. 얼마나 위험했으면 여행을 떠나기 전에 다리와 목이 부러지지 않기를 바라는 여행 축복 미사를 올렸을까. 19세기 초 한 숙녀는 "다행이야. 올해는 다시 여행할 필요가 없으니까!"라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고 한다. 역마차의 도착을 알리는 호른 소리는 이들에게 여행의 설렘을 일깨우기보다는 고생이 시작된다는 의미였다.
1798년 가을, 더 밝은 미래를 위해 슈타인나우에서 카셀로 가는 그림 형제. 아무리 배움에 대한 의지가 컸더라도, 또 형제가 서로 위안이 됐더라도 사랑하는 가족과 떨어져 불편한 마차를 타고 가는 여로는 어린 형제에게 즐겁기보다는 고행에 가까웠으리라. 며칠 간의 힘든 여행 끝에 카셀에 도착한 형제는 사랑하는 이모 헨리에테 침머에게 진심 어린 환영을 받았다. 그들의 시작은 고독하고 미약했지만 그들이 카셀에 남긴 영향력은 세기를 넘어 찬란한 빛을 발하고 있다. 그들은 카셀에서 카셀을 동화 도시의 중심으로 만들었다.
슈타인나우에서 더 이상 배울 것이 없어 분한 마음에 울기까지 한 그림 형제는 동화의 주인공들처럼 역경을 이겨내고 세계적인 인물로 도약할 발판을 카셀에서 마련한다. 하지만 결혼하지 않은 이모 헨리에테 침머가 정성껏 보살펴주지 않았다면 오늘날의 그림 형제도 없었을 것이다. 야곱은 "선량하고 사랑스러운 분이었다. 그녀는 우리를 공부시켰고 계속 후원했다"라고 이모에게 감사의 마음을 표했다. 공부 외에 다른 것을 할 시간적인 여유가 거의 없었지만 형제는 조금이라도 시간이 나면 그림을 그리거나 책을 수집했다. 사고 싶은 책은 있는데 돈이 없으면 필경사처럼 책을 베꼈다. 베이컨은 "독서는 완성된 사람을 만들고 담론은 재치 있는 사람을 만들고 필기는 정확한 사람을 만든다"고 했다. 그들의 메모, 필기 습관은 후에 민담 수집에 그대로 발휘된다.
리체움의 뛰어난 학생들슈타인나우 시절에 부지런함과 집중력 외에 배운 것이 없었던 그림 형제는, 슈타인나우에서의 한을 풀 듯 공부하고 또 공부해 월반을 하며 리체움을 수석으로 졸업했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대가가 따르는 법인지 4년 동안의 과도한 공부는 빌헬름의 건강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쳤다. 어린아이가 하루 열 시간씩 의자에 꼼짝없이 앉아 오로지 공부만 했었던 것이다. 야곱은 다행히 이 시절을 잘 견뎌냈지만 빌헬름은 성홍열을 앓고 난 후 천식과 심장부전증을 얻어 평생을 고생했다. 빌헬름은 "성홍열을 앓고 난 후 나는 숨쉬기가 힘들었다. 곧 가슴에 통증을 느꼈다"고 했으며, 죽는 날까지 요양을 거듭했고 긴 여행도 할 수 없었다. 형제는 어린 시절 하나우의 광장을 손을 맞잡고 뛰어다녔지만 이제는 산책할 때도 나란히 걸을 수가 없었다. 건강한 야곱은 걸음이 빨랐지만 빌헬름은 숨이 가빠 빨리 걸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산책하다 마주치면서 서로 손짓하다 다시 각자의 길을 걸었을 형제의 모습에서 '같이'이면서도 '따로'인 그들의 삶의 공식을 느낄 수 있다.
리체움을 수석으로 졸업한 야곱은 1802년 여름 학기에 마르부르크 대학에 입학했다. 아비투어를 치른 후 대학에 입학하는 오늘날과는 달리 당시 학생들의 대학입학 여부는 전적으로 신분의 특권과 교사의 판단에 달려 있었고, 귀족의 자제와 제7계급의 자제들만이 특별한 허락 없이 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 제7계급에 속하지 않은 그림 형제는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영주에게 청원을 해야 했다. 1802년 4월 6일 영주는 슈타인나우의 미망인 그림 부인의 청원을 받아들여 야곱에게 대학 공부를 허락하고, 야곱은 4월 말에 법학부에 등록했다. 사실 야곱은 법학 공부를 원하지 않았지만 아버지와 같은 공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