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사코
마틴 프리츠ㆍ요코 코바야시 지음 | 눈과마음
제1장 궁정에서 펼쳐지는 드라마2004년 5월 10일 월요일 오후, 왕실 출입기자들은 동궁 기자실에 모여 나루히토 왕세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일본 왕실에서 약속 시간보다 늦게 모습을 드러내는 일은 역사적인 사건이나 다름이 없다. 기자회견은 15시로 잡혀 있었는데 나루히토 왕세자는 예정보다 30분이나 지난 15시 30분에 나타났다. 기자들은 왕세자가 30분이나 늦게 나타난 사실을 의아하게 생각했다.
6개월 전부터 마사코 왕세자비는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이번 유럽 일정에도 동행하지 않았다. 하지만 왕세자비가 공무를 보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았다. 얼마 전 궁내청은 왕세자비가 대상포진(바이러스 감염으로 일어나는 수포성의 질환)을 앓고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마사코 왕세자비가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이유가 단지 대상포진을 앓고 있기 때문이라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이번 기자회견에서 질문할 사항 3가지 중 2가지는 마사코 왕세자비에 관한 질문으로 협의되어 있었다.
일본 언론에서는 왕세자비가 대상포진을 일으킬 만한 심리적 원인과 병에 대한 많은 추측들을 쏟아냈다. 아이코 공주를 기르면서 공무를 돌보는 것이 마사코 왕세자비에게 힘든 일이 아니었을까?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계속되는 강박관념이 병의 원인은 아니었을까? 왕실 규범에 따르면 왕위 계승자는 남자여야 하는데 왕실의 후손들 중에는 아직까지 아들이 없었다. 왕실 출입기자들은 예의상 이런 민감한 주제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묻지 않았다. 대신 왕세자비의 근황에 대한 질문만을 던졌다.
왕세자는 기자들의 질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했다. "마사코는 왕실에 들어오면서 외교관직을 포기했지만 왕실의 일원으로 국제 우호관계를 위해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마사코의 해외 순방은 허락되지 않았고 이 사실에 왕세자비는 몹시 괴로워했습니다." 말을 마친 왕세자는 충격적인 한마디 말을 더 던졌다. "왕실에서 마사코의 경력과 인격을 부정하려고 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왕세자의 이 말은 마치 고발하려는 것 같기도 했고 복수하려는 것 같기도 했다.
기자회견실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그제야 왕세자가 늦게 기자회견실에 들어온 이유를 알게 되었다. 왕실 관계자들이 마사코의 현재 상황을 공식적인 자리에서 밝히는 것을 끝까지 막으려 했던 것이다. 왕실 안에서 무언가 삐걱거리고 있다는 사실을 일본인들은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일본의 신문과 방송은 궁내청 관계자들이 마사코의 능력을 인정하지 않고 왕위를 계승할 아들의 출산만을 바란다고 보도했다.
제2장 일본인의 사랑
궁정 여관(女官)의 시대제2차 세계대전까지 일본의 귀족들은 딸들을 왕실 남성들과 결혼시키려고 애썼다. 그것이 안 될 경우에는 일왕의 첩이 되게 해서라도 왕실과 관계를 맺으려고 했다. 이 때문에 귀족 가문의 딸들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어려서부터 궁정 교육을 받아야 했으며, 상류층의 예의범절 교육과 대학교육, 전통 예술교육을 받았다. 귀족들은 왕실과 인척관계를 맺기 위해 딸들을 궁정 여관(女官)에 들여보내려 했다. 여관은 직업의 명칭과 업무의 내용에 따라 여러 등급으로 나뉘었다. 왕궁으로 들어간 13, 14세의 소녀들은 가임 능력이 생기면 일왕이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아들을 출산한 여성은 여러 시녀를 두게 되고 자신의 방을 갖게 된다. 그리고 친정은 많은 보상을 받게 되었다.
일본은 19세기 말에 메이지유신으로 근대화에 성공했고 이로 인해 궁정의 생활도 변했다. 메이지 일왕 이후의 다이쇼(大正)시대의 요시히토 일왕(1912~1926)은 소실 제도를 없애고 일부일처제를 시작했다. 그리고 요시히토의 후계자인 쇼와(昭和)시대의 히로히토는 좀 더 진보적으로 생각하여 결혼 전에 이미 소실 제도를 없앨 것이라고 통보했다. 히로히토는 서양 교육을 받아 매우 합리적이었다. 그래서 1924년 결혼과 동시에 39명의 궁정 여관들이 '밤일'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히로히토의 아내 나가코 왕비는 일왕과 함께 대관된 첫 왕비였고 1984년에 다이아몬드혼식(결혼 60주년을 축하하는 행사)까지 치렀다. 이렇게 일본 국왕들은 점차적으로 결혼 생활을 바꾸어 나갔지만, 사랑이 전제된 결혼은 거의 없었다.
이상적인 여성을 찾아왕세자 나루히토는 영국에서 청년기를 보냈다. 옥스퍼드 대학 머튼 칼리지에서 2년간 템스 강의 역사를 연구하면서 청바지와 스웨터를 입고 자전거를 타고 주변을 돌아다녔다. 다른 학생들처럼 기숙사에 살면서 빨래도 직접하고 다리미질도 했다. 단열이 안 되는 기숙사에서 길고도 추운 겨울을 보내기도 하면서 나루히토는 자신감을 키웠다. 나루히토는 자신의 아내가 될 사람이 '당당하게 자신의 의견을 말할 수 있는 여성'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한 외교를 위해서 외국어도 구사할 수 있는 여성을 아내로 맞이하고 싶었다. 이러한 생각을 기자회견에서 밝히기도 했다.
나루히토가 일본으로 돌아오자 궁내청의 관료들은 결혼준비를 시작했다. 그 중 토루 나카가와는 왕세자비 후보를 물색하는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과거 소련 주재 일본대사였다. 나카가와는 모스크바에 있을 때부터 마사코를 알고 지냈다. 당시 마사코의 아버지도 소련 주재 일본대사관에서 근무했다. 마사코는 그때 두 살이었는데 동그랗고 총명해 보이는 눈을 가진 무척 귀여운 아이였다. 나카가와는 마사코를 잘 알고 있던 터라 궁내청에 마사코를 추천했다. 궁내청에서는 그 제안을 받아들여 후보자 명단에 그녀의 이름을 올렸다.
궁내청은 왕세자비 후보자들이 왕세자와 자리를 함께할 수 있도록 티타임과 음악회를 자주 열었다. 마사코는 1986년 10월 18일, 스페인 공주 엘레나를 영접하는 자리에 초대되었다. 일본은 승마를 좋아하는 스페인 공주를 위해 에도시대의 전통 승마기술을 선보였다. 그러나 이 영접식의 실질적인 주인공은 나루히토 왕세자였다. 초대된 손님 중 3분의 1이 마사코처럼 20대 초반의 여성들이었다. 토루 나카가와는 마사코를 왕세자에게 데리고 가서 서로 인사를 시켰다. 나루히토는 약 10분 동안 마사코와 대화를 나눈 후 '마사코는 자신의 이상형보다 더 훌륭한 여성'이라고 생각했다.
국가에 봉사마사코는 1963년, 히사시와 유미코 오와다의 맏딸로 태어났다. 마사코의 아버지 히사시는 당시 31세로 외무성에서 근무하는 공무원이었다. 그는 도쿄대학 졸업 후 케임브리지에서 유학했고 돌아와서는 일본 외무성의 협약부서에서 근무했다. 마사코의 어머니는 일본의 명문대학인 게이오 대학에서 불어를 전공했다. 졸업 후에는 프랑스 항공사인 에어 프랑스에서 근무했다. 마사코가 20개월이 되었을 때, 히사시는 소련의 일본주재 대사관에 서기관으로 부임했다. 모스크바에서 생활한지 2년 9개월이 지나자 히사시는 유엔에서 일본을 대표하는 첫 사무관이 되어 뉴욕으로 가서 3년을 근무했다.
5년간의 외국 생활을 마치고 일본에 돌아온 마사코는 문화적인 충격을 방았다. 입학식이 뭔지, 운동회는 뭔지, 여자아이가 남자친구와 놀면 왜 놀림을 받는지 어머니에게 질문했다. 1979년, 고교에 입학한지 3개월 만에 마사코는 다시 일본을 떠났다. 그녀의 아버지가 하버드에서 국제법 객원교수로 일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보스턴에서 고교를 다니는 동안 마사코는 최고의 학생으로 뽑히기도 했다. 졸업 후에 마사코는 하버드에 입학해 경제학을 공부했다. 졸업할 때는 우수학생 15%에 포함되었다.
마사코는 15세부터 22세까지 미국에서 사는 7년 동안 정체성 문제로 고민했다. 진정 자신이 일본 사람인지 확신이 없었다. 인생의 반을 외국에서 보낸 그녀는 자신이 뿌리가 없는 사람 같았다. 그래서 조국으로 돌아가 일본을 위해 일하고 싶었다. 마사코는 월스트리트의 금융가에서 좋은 조건을 내밀었으나 이를 거절하고 일본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일본에 돌아온 그녀는 외교관 시험에 합격하였고 일본 외무성 역사상 두 번째 여성 외교관이 되었다.
기나긴 구애스페인 공주 영접식에서 처음 본 마사코에게 반해버린 왕세자는 마사코와 다시 만나기 위해 많은 준비를 했다. 그래서 두 달 후, 왕세자는 10명의 저녁식사 초대객 중에 마사코와 그녀의 가족을 포함시켰다. 그리고 4개월 후인 1987년 4월, 왕세자는 사촌 타카마도 왕자의 집으로 신입 공무원 마사코를 초대했다. 왕세자는 마사코가 도착하자 직접 문 앞까지 가서 그녀를 맞았다. 그날 마사코는 새벽 1시가 넘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6개월이 지난 1987년 10월, 왕세자는 마사코를 티타임에 초대하면서 절친한 친구인 마사노리 카야를 분위기 메이커로 함께 초대했다.
1987년 말경, 일본 언론에서는 나루히토와 마사코가 만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어느 날 아침 마사코가 평소처럼 대문을 나섰을 때, 대기하고 있던 20~30명의 사진기자들이 플래시를 터뜨렸다. 생각지도 못했던 언론의 습격을 받은 지 며칠이 지나서 한 남자가 마사코의 부모를 찾아왔다. 그는 마사코가 왕세자비가 될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부모의 의견을 물었다. 마사코의 부모는 당황했고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마사코는 평생 외교관으로 일할 겁니다. 게다가 이번 여름에 연수를 받기 위해서 2년 코스로 영국으로 떠납니다." 그들은 왕세자의 청혼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하고 없었던 일로 해달하고 부탁했다.
두 사람의 결혼을 반대한 이들은 마사코 부모뿐만이 아니었다. 일본 왕실의 보수적인 사람들은 마사코의 가계를 조사하다가 마사코의 외할아버지인 유타카 에가시라가 '쉬소 화학회사'를 잠시 경영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 회사는 환경 문제로 큰 물의를 일으킨 적이 있는 회사였다. 왕실 관료들은 마사코의 외할아버지가 이 사건이 발생한 후에 회사 대표로 부임했다는 사실을 알고 안도했으나 반대표를 던지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마사코의 신장이 163㎝로 왕세자보다 2㎝나 더 크다는 점, 마사코의 집안이 딸만 낳은 집안이라는 점 등을 지적했다. 또한 마사코가 성격이 강해 왕세자 후보로는 적합하지 않다는 점도 반대이유로 들었다. 1988년 7월, 마사코가 옥스퍼드에서 국제 관계를 공부하기 위해 영국행 비행기에 오르자 그들은 마사코를 후보자 명단에서 지워버렸다.
두 번째 시도마사코가 떠난 지 3개월 후, 87세의 일왕 히로히토는 장암에 걸렸다. 이 때문에 왕세자비를 찾는 일에도 가속도가 붙었다. 약 100명 정도의 후보자들이 언론에 오르내렸다. 기자들은 그 여성들을 찾아다니면서 마이크를 들이대고 사진을 찍었다. 또한 후보자들을 여러 각도에서 찍기 위해 헬리콥터를 동원하여 자택 부근을 선회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어떤 후보자의 부모들은 몇 주 동안 집안에만 갇혀 있어야 했다. 아키히토 일왕은 이를 진정시키기 위해 "근거 없는 기사로 여성들을 고통에 빠뜨리지 마라"고 일갈했다.
1990년 옥스퍼드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마사코는 외무성의 북아메리카 부서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이제 28세가 된 마사코는 공무원으로서 자신의 일에만 열중하는 인생을 살고 있었다. 동궁에서 왕세자를 마지막으로 만난 후 벌써 4년 6개월이 흘렀다. 나루히토는 그 사이에 32세가 되었고 왕실의 무능한 노총각이 되어가고 있었다. 궁내청 장관인 후지모리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결혼을 성사시키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왕세자를 만나 어떤 이성을 원하는지를 물었을 때 놀랍게도 "마사코와는 어렵겠죠?"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 후지모리는 중개자를 내세워 다시 마사코 부모에게 협상을 진행했다. 마사코의 부모는 '벌써 5년이나 지난 일을 다시 시작하기 싫다'며 청혼을 거절했으나 4개월 동안의 긴 설득에 조금씩 수그러들기 시작했다.
1992년 8월 16일, 왕세자는 마사코를 만나기 위해 중개자인 야나기야의 집에 도착했다. 거실에는 마사코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날 이후 나루히토는 마사코의 퇴근 시간에 맞춰 마사코의 집에 2개월 동안 계속해서 전화를 걸었다. 마사코는 나루히토의 집요한 구애에도 흔들렸지만 결정적으로 왕세자의 말에 결혼을 결심하게 되었다. "당신이 외교관으로 일하는 것과 왕실의 일원으로 일하는 것이 같지 않을까요? 두 경우 다 나라를 위해 일하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나를 도우면서 왕실 외교를 할 수는 없겠습니까?" 마사코는 '왕실 외교'라는 말에 왕세자의 청혼을 받아들였다.
제3장 왕세자비가 되는 길
신들의 시대관습 속에 사는 일본 사람들은 신토(神土), 즉 종교상의 의식, 기도, 축제, 조상 숭배를 통해서 신과 죽은 혼령을 잊지 않는다. 그들이 신토 신사를 짓는 이유는 자신들의 신이 세상과 인간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일본과 일본 사람만을 창조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러한 믿음으로 일본 사람들은 자신들이 유일무이하고 특별한 존재라고 믿고 있다. 이것은 가미카제(神風-자연종교)가 일본에서 발전하고 오늘날까지도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신토는 일본의 국가종교이고 그 중심에는 일왕이 있다. 일본의 역사서에는 일왕의 조상이라 여기는 신들의 시대까지 기록되어 있다. 제사장으로서 일왕은 매년 수많은 의식을 거행하면서 신들과 만난다.
일본의 왕세자비들은 결혼 전에 신들의 시대에 대해 배우고 그들의 역할을 배운다. 마사코는 지금까지의 삶 중 3분의 2를 외국에서 보냈기 때문에 이러한 신토사상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왕세자비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전통에 따라야 했다. 그래서 신토의 세계를 영어로 된 책으로 수업을 받았다. 이 밖에 궁중 예절과 제사의식, 왕실체계 등을 3개월 동안 수업 받았다.
궁내청에서는 서구문명 속에서 교육받고 외교관으로서 활동해온 장래의 왕세자비가 이러한 전통을 몸에 익힐지 염려스러워 했다. 이러한 염려는 1993년 1월 19일, 나루히토와 마사코가 약혼을 발표하는 기자회견에서 드러났다. 논평가들은 이날 마사코가 '나'라는 단어를 13번이나 사용했으며 나루히토 왕세자가 9분 9초를 말한 반면, 마사코는 9분 37초로 왕세자보다 28초나 더 말했다고 비난했다. 그들이 보기에 이처럼 자의식이 강한 사람은 자신을 희생하여 남편의 명예를 높여주는 왕세자비로는 적합하지 않았다.
결혼식1993년 6월 9일, 마사코는 새벽 4시가 조금 넘어서 일어났다. 6시 20분이 되자 왕세자의 집사가 왕세자비를 모시기 위해 초인종을 눌렀다. 마사코는 푸른색의 실크 투피스를 입고 같은 색의 모자를 썼다. 그녀의 부모와 쌍둥이 여동생들은 눈물을 훔치며 딸을 배웅했다. 왕실에 도착한 마사코는 먼저 신토 신자들이 치르는 의례적인 세척을 했다. 머리를 올려서 동백나무 기름을 바르고 그 위에 가발을 고정시켰다. 그런 후 얼굴과 팔, 손을 하얗게 분칠했다. 도우미들은 신부에게 12겹이나 되는 기모를 입혔는데 실크로 된 기모노의 무게는 10㎏이나 나간다. 나루히토는 흰색의 속치마 위에 넓은 실크 기모노를 입고 머리에는 신토 제사장이 쓰는 검은 색 망사로 된 모자를 썼다.
결혼식 장소는 일왕 가족의 시조인 태양의 여신을 모시는 카시코도코로 신사였다. 전통에 따라 일왕부부는 참석하지 않고 왕세자의 형제자매와 신부의 가족, 고위관직자 등 812명의 하객이 참석했다. 결혼식 의식은 15분정도 걸렸다. 신들에게 신고식을 마침으로써 결혼식이 끝난 왕세자부부는 일왕부부를 찾아 결혼을 신고했다. 그리고 식사를 하고 결혼 퍼레이드에 나섰다. 퍼레이드가 행해지는 거리는 일장기가 펄럭이고 녹색 공중전화는 황금색 칠을 한 전화기로 교체되었다. 신랑은 화려한 훈장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