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서브쓰리를 꿈꾼다
원희룡 지음 | 꽃삽
프롤로그 - 달리기는 늘 새로운 꿈을 꾸게 한다마지막 1km를 앞두고 잠실운동장 스타디움에 들어섰다. 이미 온 몸은 땀으로 범벅되어 있고 어떻게 41km를 달려왔는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내 다리는 마비상태였다. 언제나 그렇듯 오늘도 쉽지 않은 여정이었다. 스타트 라인에서의 긴장감과 설레임이 30km를 지나는 시점에서 무력감으로 돌변했다. 잠시 쉬고 싶었다. 천천히 걷다가 호송차량을 타고 편하게 가고 싶은 생각이 스쳤다. 아무리 완주 횟수가 늘어나도 그 유혹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오버페이스를 했다고 변명하면서 그냥 쓰러져 버릴까? 꼭 완주를 해야 하는 것은 아니잖아? 이 정도까지 달린 게 어디야. 당장 달리기를 그만 둬도 될 백 가지 이유를 생각해 보았다. 그러는 와중에도 나는 달리고 있다. 조금만 힘을 내자.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조금만 더 견디자. 포기하기에는 이미 너무 먼 거리를 달려오지 않았는가.
달리기는 인내와 겸손을 가르쳐 준다. 달린다는 것은 자기 페이스를 유지하면서 완주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깨닫게 해준다. 그리고 달리는 것은 곧 그 완주가 마지막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임을 알게 한다. 달리면서 나는 내 안에서 말하는 소리를 듣는다. 달리는 동안 그동안 보지 못했던 나의 다른 모습을 만나게 된다. 달리는 동안 나는 지혜를 얻는다. 복잡하게 얽혀있던 문제들도 마음을 열고 있는 그대로 직면하게 되면 해결의 길이 보인다. 부족한 나에게 지혜와 큰 마음으로 복잡한 문제를 바라볼 수 있게 하는 시간은, 달리는 동안이다. 그 시간 동안 나는 눈이 맑아지고 마음이 가난해짐을 느낀다.
달리기를 처음 시작한 사람들은 더 빨리 달리려고 애쓴다. 그러다 더 멀리 달리려고 한다. 하지만 달리다 보면 기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자신의 참 모습과 한계를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달리기의 진정한 즐거움과 의미를 즐길 수 있게 된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빨리, 얼마나 긴 거리를 달리는가가 아니다. 달리기는 그 자체가 목적이고 과정이다. 달리기를 통해 나는 존재감을 확인하고 내 자신의 참 모습을 찾을 수 있다. 그리고 늘 새로운 꿈을 꾸게 된다. 우리는 이미 다 알고 있다. 인생에서의 '성공'이 반드시 많은 부를 쌓고 더 높은 지위에 오르는 것을 의미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달려가는 동안의 즐거움과 숨쉬는 것의 고마움, 땀 흘리는 것의 기쁨을 알고 있다. 그래서 꿈을 꾸며 다시 길 위를 달리고 있는 것이다.
1장 스타트 라인에 서서첫 번째 풀코스의 경험2001년 10월 22일 춘천마라톤, 나는 스타트 라인에 섰다. 42.195km마라톤 풀코스 완주에 처음으로 도전하게 된 것이다. 달려본 사람들은 하프코스에서 풀코스까지는 곱절로 힘들다고 말한다. 거리상으로의 2배가 아니라 4배가 더 힘들다는 얘기이다. 무엇보다 걱정이 되는 것은 발가락이었다. 2000년 총선을 치를 때였다. 당시 상대 후보 진영에서는 나의 병역면제 사실을 크게 언급하며 맹비난을 하고 나섰다. 하는 수 없이 나는 유권자들에게 진실을 밝혀야 할 의무가 있었다. 애써 착잡한 마음을 추스르며 세상을 향해 벌거벗은 발을 내밀었다. 여기저기서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
내 발가락 기형을 의학용어로는 '우중족 족지관절 족지강직'이라고 표현한다. 발가락 관절의 움직임이나 근육이 뻣뻣해 진다는 뜻이다. 어린시절 리어카 바퀴에 발이 말려 들어가 부러진 발가락의 접합수술이 잘못되어 발가락 아래 관절이 밖으로 나온 채 붙여진 것이다. 발가락 밑의 관절 이상과 발가락이 위로 추켜세워져 있어서 행군이나 구보 등에 지장을 받을 수 있다는 판단 아래 병역 심사때 '제2국민역 판정(5급)'을 받았다. 병역을 면제 받고 난 뒤 오랜 세월 동안 많은 구설수에 시달렸으나 나는 결국 국회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어린시절부터 나의 신체적 콤플렉스였던 구부러진 기형 발가락은 마라톤을 통해 그 자존심이 회복되며 통쾌하게 다시 일어섰다. 나는 내 못생긴 발가락에게 종종 말하곤 한다. '다른 발가락보다 더 쓰임새 많은 훌륭한 발가락이 되어라.'
그 날 5시간 25초의 기록으로 힘겹게 완주를 해냈다. 그러나 42.195km를 달리기 위한 시간과 힘의 안배에서 이미 균형이 깨진 경기였다. 초반에 너무 많은 힘을 쏟는 바람에 전체적으로는 무척 고전이었다. 하지만 풀코스를 마친 후 내가 왜 달렸는지 명확히 알 수 있었다. 나의 한계에 도전했던 것이고, 어렵고 힘들었지만 그 한계를 넘어섰던 것이다. 새로운 세계에 대한 도전에는 반드시 준비와 연습이 필요하다. 한순간의 일시적 감정이 아니라 긴 호흡으로 느긋하게 멀리 가려는 여유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도정에 만나게 될 시련과 고통을 억지로 인내하는 것이 아니라 즐겁게 맞이하고 돌파하려는 자세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용기이다. 용기를 내어 첫 걸음을 내딛을 때 풀코스의 피니시 라인이 내 앞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도서관을 나오다나는 자갈밭을 팔아 대학을 다녔다. 집과 고향에서는 당연히 기대가 컸다. 나 또한 대학에 들어온 후 오직 학문에 몰두해 그간 굶주렸던 지적 호기심을 채우며 배움의 기쁨을 한껏 만끽하고 싶었다. 사실 그 무렵 내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장학금을 받아야 할 처지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집안 사정이 악화일로를 달리고 있었다. 부모님을 돕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오직 공부 뿐이었다. 그렇다고 늘상 도서관에서만 살았던 건 아니다. 1982년 5월 김태훈 '열사'의 추도식이 열렸을 때였다. 도서관 창 밖으로 전경들에 의해 진압당하는 친구들의 모습이 보이고 도서관 안의 학생들도 하나 둘 밖으로 달려 나갔다. 문득 강한 의혹에 사로잡혔다. '내가 지금 이런 상황에 꼭 열람석을 지키고 앉아 있어야 하는가.'
차츰 나는 변하기 시작했다. 수업이 비는 시간에 도서관이 아닌 학생들의 시위 대열 속에 서 있곤 했던 것이다. 아버지가 아들의 공부를 위해 팔아 넘긴 자갈밭이 고스란히 시대의 황무지가 되어 내 인생 앞에 펼쳐져 있었다. 그것은 단 하나의 진실을 향한 험난한 여정의 시작이었다. 나는 유인물을 주머니에 넣고 있다가 발견되어 관악경찰서로 연행되었다. 바로 그 날 밤 훈방조치 되긴 했지만 학교 측에서는 가혹한 징계를 내렸다. 유기정학이었다. 그 때의 '유기정학' 사건은 내 인생의 국면을 순식간에 바꿔 놓은 한 계기가 되었다. 광주의 진상을 알게 되고 폭압적 정치 현실에 눈 뜬 나에게 이미 캠퍼스의 낭만은 꿈 같은 현실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나는 학생운동에 전념하기 위해 과외를 그만 두고 노량진 달동네로 이사 갔고, 스스로 이념서클을 찾았다. "기왕 하는 것 좀 더 확실히 하고 싶습니다."
그들을 위해 살겠다'위장취업'은 당시 학생운동을 했던 대학생이면 누구나 선택을 고민했던 길이었다. 공장으로 가는 것을 우리는 '투신'이라고 불렀다. 그 때 우리들에게 투신은 삶의 목표였다. 캠퍼스 안에 갇혀 있었던 학생운동의 한계를 넘어서 진짜 세상에 뛰어드는 것이었고, 지식인의 나약하고 관념적인 운동의 한계를 넘어서 땀냄새 나는 민중의 바다에 뛰어드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 투신의 과정은 곧 '존재 이전'의 과정이었다. 노동자로 산다는 것은 지식인으로서 가졌던 특권과 우월의식을 포기하는 것이었고 또 한편으로는 본격적으로 '운동'의 대열에 뛰어드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과연 내가 노동자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내가 이 도전을 견뎌낼 수 있을 것인가? 혹시 나에게 오만함이나 거짓 공명심이 있지는 않은가?
1985년 6월, 인천 공장에서의 생활은 단순했다. 종업원이 3천 명이 넘는 공장이었는데 일당이 2천 9백 원이었다. 프레스에 손가락 한 두 개 잘리는 일이 다반사였다. 하지만 생활적인 어려움이나 일하면서 겪는 어려움은 오히려 크지 않았다. 무엇보다 큰 고민은 내가 지식인이었다는 것이다. 내 몸은 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하고 있었지만 머리는 여전히 지식인에 머무르고 있었다. 나는 진지하게 이른바 존재 이전을 꿈꾸었던 나의 시도가 허위의식이거나 적어도 무리한 시도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1985년 말 공장 활동을 그만두며 노동운동의 현장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결국 현장 활동가가 되겠다는 나의 시도는 실패한 것이다. 나는 나의 한계를 인정하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하지만 내 삶 자체가 실패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당시 규정된 내 삶의 울타리를 넘어서고자 했고, 그 시도는 내 삶의 지평을 넓혔다. 캠퍼스에 갇혀 있었던 관념적 지식인이 생산 현장의 노동자들과 함께 생활하고자 했고, 그들과 같은 삶을 살고자 과감히 투신을 감행했기 때문이다. 소외 받은 이웃과 함께, 그들을 위해 살겠다는 '투신'의 열정은 지금도 내 삶의 가장 근원적인 원동력이다.
새로운 세계로의 마중아내는 예전에도 그리고 지금도 가장 든든한 후원자이자 가장 믿음직한 동지이다. 내 아내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얼마나 쓸쓸했을까 싶다. 지금 돌이켜보니 우리의 만남은 오래 전부터 예정돼 있었던 숙명 같기도 하다. 우리는 같은 대학, 82학번 동기, 똑같은 제주도 출신의 유학생이었다. 그러나 처음 만난 곳은 제주도가 아닌 서울에서였다. 제주 출신 서울대 신입생들의 모임에서였다. 유난히 화통하고 이해심이 많았던 아내는 당시 대부분의 모든 남학생과 허물없이 지내던 성격 좋은 여학생이었다. 나는 차츰 순수한 아내의 매력에 반했고, 좀더 아내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특별한 존재로 인정받고 싶었다.
내가 만학도로 뒤늦게 고시준비를 하고 있을 때도 아내는 늘 내 곁에 있었다. 내가 시대의 변화를 겪으며 우울해 하고 있을 때는 아내는 어김없이 큰 위로와 격려가 되어 주었다. 사법시험에 합격해 연수원에 들어가기 전 나는 비로소 아내에게 청혼했다. 낭만적인 프로포즈 대신 서로 이해하고 살아가자는 말로 고백을 대신했다. 아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에게는 많은 말들이 필요하지 않았다. 나도 이제 두 딸의 아버지가 되었다. 나는 아내를 만나기 전에, 딸들을 선물로 받기 전에는 내 자신의 삶을 경영하기에도 벅찼다. 이제 아내와 가정을 이루고 두 딸의 아버지가 되면서 가정이라는 새로운 세계를 만나게 되었다. 아내와 두 딸, 삶은 세상에서 가장 든든한 동지를 나에게 선물해 주었다.
2장 마라톤에서 배운 것들
달리기를 결심하다2001년, 먼저 마라톤 동호회에 가입한 선배가 만날 때마다 내게 마라톤 이야기를 했다. 그의 입에서는 늘 마라톤에 관한 화제가 끊이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선배는 이전보다 한층 혈색도 좋아지고 몸도 탄탄해진 듯 했다. 거기에 알 수 없는 강한 에너지와 생기가 넘치고 있었다. 전에 은행에 근무한 바 있었던 선배는 얼마 전 꽤 명성있는 로펌에서 금융전문 변호사로도 활약했던 경력도 있었다. 그런 사람이 빌딩을 나와 거리를 뛴다고 생각해 보라. 문득 '마라톤'이라는 운동에 호기심이 생겼다. 과연 마라톤에 어떤 강렬한 매력이 있길래 은행과 법원에 익숙한 저 말쑥한 선배를 거리로 뛰어나오게 했을까 궁금했다.
나는 당시 비대한 체중은 아니었으나 건강이 극도로 나빠지고 있었다. 만성피로와 격무로 인한 스트레스에서 언제나 자유로울 틈이 없었기 때문이다. 할 일은 많고 시간은 부족했다. 체력을 보강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무엇보다 체력과의 싸움에서 나 자신을 이겨보고 싶었다. 마라톤을 흔히 '자기와의 싸움'이라고 하지 않던가. 내 자신에게 선전포고를 하는 기분으로 단단히 결심했다. 일단 마음을 먹자 바로 실행에 옮기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아! 나도 달리고 싶다. 그렇게 시작된 달리기는 분명 내 삶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달리기를 시작하고 2년이 지나면서 나 또한 훨씬 날렵한 모습으로 변해 갔다. 달리기는 내 삶의 일부가 되었다.
마라톤을 하며 내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묻곤 한다. '과연 끝까지 달릴 수 있을까? 지금이라도 포기해 버릴까? 내가 너무 과욕을 부리는 건 아닐까?' 그 질문은 다시 꼬리를 물고 '도대체 내가 왜 달리는 것일까?'로 이어진다. 밀물처럼 엄습하는 고통을 견디며 달리다 보면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나는 4년이 넘는 시간을 달리면서 그 이유에 대해 조금씩 답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인간 유전자속에 있는 '달리는 본능' 때문이다. 달리면 달릴수록 자연과 조화된 나의 동물적 본능이 되살아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다음, 달리기를 통해 나 자신을 만나게 된다. 평상시 못 느끼던 몸의 상태, 몸의 각 부분이 보내는 신호와 끝없는 대화를 하면서 달리게 된다. 한바탕 육체와의 격렬한 대화가 끝나고 나면 가난한 마음 만큼이나 홀쭉해진 육체를 만날 수 있다.
또한 순전한 나의 존재감을 느낄 수 있으며 스스로 자유로워질 수 있었고 남을 의식하는 행동과 생각에서 나를 해방시킬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일과 휴식을 바라보는 태도가 바뀌었고, 완전히 새로운 관점과 각도에서 24시간 달라진 내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변화된 눈으로, 다른 사람의 시선이 아니라 나만의 시선으로 삶을 바라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것은 곧 자신감으로 이어졌다. 과거 내가 열심히 공부해서 얻은 성적이나 자격증과는 다른 것이었다. 나 자신을 만나면서 얻은 자신감은 세상에서 요구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었지만 세상의 진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으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그것은 곧 '내가 왜 사는가'에 대한 답과도 연결되었다.
빚이 벗이 되다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아버지는 안 해본 일이 없이 장사란 장사는 다 손을 대보셨다고 한다. 그러나 운이 없었는지 연이어 손을 대는 사업마다 실패를 거듭하셨다. 대체로 동네 사람들을 상대로 하다 보니 인정상 외상미수금을 정리하지 못해 망하기 일쑤였던 것이다. 아버지는 모질게 장사를 하지 못했다. 장사꾼으로서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냉철한 프로의식이 없었던 것이다. 아니면 흔히들 하는 말로 장사꾼 체질과는 거리가 멀었던 것이 틀림없다. 아버지의 거래 장부는 깨알 같은 미수금 내역으로 가득 차 있었다. 외상을 가져갈 때는 온갖 너스레를 다 떨던 사람들도 며칠 후 막상 돈을 받으러 가면 피하거나 나중에 갖다 주겠다고 얼버무리곤 했다. 대충 그 상황만 때우면 그만이라는 식이었다.
어느 날, 결국 올 것이 오고 말았다. 술에 취한 빚쟁이가 집에 들이닥친 것이다. 그는 마루에 시퍼런 칼을 꽂으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채 열 살도 되지 않았던 내게 그것은 너무나 무시무시한 광경이었다. 물론 부모님은 우리 형제들을 모두 나가 있게 했으나 나와 형은 숨어서 그 끔찍한 장면을 모조리 엿보고 있었다. 마루에 엎드려 오들오들 떨며 눈물을 훔치는 어머니를 보면서 나는 힘주어 입술을 깨물었다. 그때 '가난'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충격적인 깨달음이었다. 세상에는 한없이 순박하고 성실한 사람들에게도 시퍼런 칼날을 들이밀 수 있는 권력이 있었던 것이다. 가난이 내 소중한 어머니를 울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 날 똑똑히 보았다.
나는 가난에 익숙한 삶을 살아왔다. 그러나 가난을 벗어나는 것이 얼마나 절박한 것인지도 잘 안다. 병들어 아프고, 불우하고, 돈이 없는 사람일수록 하고 싶은 것이 많은 법이다. 그 간절한 바람이 얼마나 절실한 것이라는 것을 잘 안다. 그런데 단순히 가난하다는 이유만으로 고통 받아야 하고 욕구가 좌절돼야 한다는 것은 슬프고 잔인한 일이다. 하물며 빚은 사람에게 얼마나 많은 모욕과 설움을 주는가. 그런 면에서 내 아버지는 희한한 일생을 살아오셨다. 평생을 빚과 벗하며 살아오셨으니 얼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