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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름을 떳떳하게 즐기는 법

톰 호지킨슨 지음 | 청림출판
AM 08:00 - 왜 벌떡 일어나는가?



미국의 일벌레 합리주의자이자 대표적인 근면지상주의자인 벤저민 프랭클린. 그는 1757년, 청교도적인 이상이 세상을 지배하던 시절, 사람은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야 건강하고 부유하고 지혜로워진다는 투의 너무나 위선적이고 진부한 금언들을 대중에 보급, 장려했던 인물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세상 사람들의 삶을 얼마나 비참하게 망쳐 놓았는지, 프랭클린 자신은 알고나 있었는지 궁금하다.



일찍 일어나는 것이란 너무나 부자연스러운 행동이다. 오히려 반쯤은 깨고 반쯤은 자는 상태로 침대에서 뭉개는 것(학자들은 이것을 최면 상태라고 부른다)이 건강과 행복에 훨씬 더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예를 들어 아침 시간 30분 정도를 침대에서 뭉개다보면, 그 날의 일과와 해결해야 할 문제들에 대비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이것은 내가 좋아하는 철학자 임어당의 주장이기도 하다.



사실 위대한 사람에게 있어 늦게 일어나는 습관은 따로 분리할 수 없는 천성이다. 늦게 일어난다는 것은 정신의 독립이자 일, 돈, 야망의 노예가 되기를 거부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위대한 인물은 아니지만 내 경우를 예로 들자면, 알람시계를 없애면서부터 삶이 극적으로 개선되었다. 이렇게 자기 자신을 훈련시키면, 천천히, 자연스럽게, 그리고 기분 좋게 잠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다. 남들의 요구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준비가 될 때 잠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이 방법은 우리를 게으름으로 안내하는 첫 단계이기도 하다.



건강하고 부유하고 지혜로운 예술가, 작가, 음악가들을 살펴보자. 그런 인물들 가운데 일찍 일어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아이디어를 창출하고 그것을 현실화시키는 방법을 계획하기 위해서, 독창적인 사람들은 책상, 전화, 그 밖의 복잡한 일상과 가정사에서 벗어나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아침에 침대에서 뭉그적거리는 때는 그런 일을 하기에 안성맞춤인 것이다. 일찍 일어나는 사람들은 건강하지 못하고 부유하지 않으며 지혜롭지도 않다. 그들은 주로 병약하고 가난하며 어리석다. 오히려 그들은 늦게 일어나는 사람들 밑에서 일한다. 내 말을 믿지 못하겠다면, 아침 8시와 9시 사이에 대도시 지하철을 방문해 보라.



AM 09:00 - 비참한 일의 세계



개인에 관한 것이든 사회 전체에 해당하는 것이든, 모든 불안 요인들에 대한 해결책이 '일자리' 하나로 귀결되는 현상은, 현대 사회가 신봉하고 있는 가장 어리석은 통념 가운데 하나다. 이른바 '좋은 직업'을 가지면 돈, 지위, 풍족한 생활, 그리고 우리가 그토록 원하는 '보람'을 얻을 수 있다는 그릇된 통념만을 심어주고 있다. 지배 계급이 대중에게 주입시키는 관념이 늘 그러하듯이, 직업에 대해 우리 사회가 심어주는 환상과 현실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일단 일이라는 비열한 세계에 발을 들여놓고 나면, 그곳에서 처음 맞닥뜨리는 굴욕감에 우리는 이내 충격을 받는다. 내가 경험한 직장생활은 재미, 만족, 돈과는 거리가 멀었고, 내가 노예가 됨으로써 얻는 유일한 보상이라고는 비참함과 빈곤, 그리고 분노뿐이었다.



우리가 아무 것도 원하는 게 없다면 일할 필요가 없다. 욕망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그러한 욕망을 채우기 위해 돈을 벌어야 하고 일을 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 가장 깊은 곳에는 공포가 도사리고 있다. 그 공포가 우리를 꼼짝 못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두려움을 버리고 직장을 그만둔다 해도 우리가 잃을 것은 불안과 빚, 그리고 궁핍 정도일 뿐이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팔리는 날들보다 자유롭게 보내는 날들이 더 많다면, 일에 한층 더 매진할 수 있고, 나머지 시간은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즐길 수 있게 된다. 물론 금전적인 타격이 있겠지만, 수입의 손실은 여유 시간에 의해 쉽게 채워진다는 것을 곧 알게 될 것이다.



시간은 돈이 아니다! 일과 여가는 다시 하나로 합쳐질 수 있다. 즉 우리가 자주적이고 유쾌하게 살아간다면 일은 더 이상 부담스러운 존재가 되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일과 삶을 스스로 다스리고, 그것들을 다시 행복한 조화 상태로 되돌려 놓을 때가 되었다.



AM 11:00 - 유쾌한 반항, 농땡이



농땡이를 부리는 것은 학교와 일터에서 주입받는 무미건조한 생활 원리, 즉 '지금 고생하면 나중에 행복해진다'는 통념에 대해 직접적으로 반발하는 행위다. 그들은 내일까지 기다릴 수가 없다. 가상의 안정된 미래를 위해 즐거움을 늦춘다는 것은, 부르주아들이 생각해낸 얕은 속임수일 뿐이라고 여긴다. 이처럼 농땡이를 부린다는 것은 위에서 내리누르는 압력에 저항하는 개인 의지의 표현이다. 또한 현재의 순간을 놓치지 않고 살아가는 자유이며, 동시에 권위에 대한 조롱이자 기쁨 그 자체이기도 하다.

농땡이가 실리적인 면에서도 이롭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게으름의 위대한 벗이었던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글을 인용하고자 한다. "학교에서는 차갑고 무미건조한 지식들을 배운다. 그러나 따뜻하고 생생하게 고동치는 삶의 진실들은 우리 주변에 널리 흩어져 있어, 그것들을 배우려면 그만큼 찾아다닐 수밖에 없다. 1주일도 되기 전에 절반은 잊어버리고 말 영어 단어들을 억지로 머릿속에 쑤셔 넣는 그 시간에, 농땡이를 피우고 달아난 사람들은 진실로 유익한 기술, 즉 인간관계의 원리를 배우고 좋은 담배의 맛을 배우며 편안하게 대화를 나눌 줄 알게 되고 다양한 사람들과 접할 기회를 갖는다." 이처럼 농땡이를 피운다는 것은, 도둑맞은 시간을 도로 훔쳐 와서 정열적이고 풍부하게 사용한다는 데 의미가 있다.



PM 01:00 - 사라진 점심시간



21세기를 사는 현대인들에게 점심 식사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서글프게도 점심은 아주 현실적인 용도의 의미로 축소되었다. 한가한 식사라는 전통은 새로운 노동 윤리에 무참히 패하고 말았다. 단시간 내에 배고픔을 해결할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수단으로써 샌드위치가 급부상했고, 그 결과 영국에서는 고급 샌드위치 체인점이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점심시간이 사라진 것은 나처럼 게으른 사람들에게는 신의 죽음보다 더욱 불경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임어당 역시 1930년대 뉴욕을 관찰한 소감을 밝히면서 불만을 토로했다. "현대인들은 삶의 템포가 너무 빨라서, 먹고 요리하는 문제에 점점 더 적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 먹기 위해 일하는 게 아니고 일하기 위해 먹는다면 그것은 정말 미친 짓이다."



단순한 에너지 공급 차원으로 음식을 보는 관점은, 파시스트들에 의해 적극 장려되었고, 1980년대 영화 '월스트리트'에 이르러 신격화 경지에까지 이르게 된다. 일하는 데 쓰면 더 가치 있을 1시간을 점심 먹는 데 허비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사람 사이의 사귐과 즐거움이란 점심 메뉴에서 사라져버렸다. 이제는 누구도 여유롭게 점심을 즐기지 못한다. 오늘날 도시에서는 맥도널드, 버거킹, KFC에서 혼자 식사하는 게 흔한 현상이 되었다.



우리는 점심시간을 돌려달라고 요구해야 한다. 점심시간은 일의 능률과 효율에 대해서는 모두 잊어버리는 시간이다. 제대로 된 점심이란 육체적으로, 그리고 정신적으로도 영양을 공급하는 것이어야 한다. 편안하고 유쾌하며 흥겨운 교제의 장, 그런 점심시간이야말로 게으름꾼을 위한 것이다.



PM 02:00 - 병, 또는 꾀병의 즐거움



몸이 아플 때야말로 게으름 피울 시간을 되찾을 수 있는 신나는 기회다. 세상에 그 사실을 모르는 아이는 없을 것이다. 아이들은 몸이 아프면 공부를 하지 않고 침대에 누운 채 하루종일 보살핌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아이들뿐 아니라 성인들도 이 사실을 깨닫고 병(물론 생명에 위협이 되지 않는 수준의)을 기쁘게 환영해야 한다. 질병이란 실로 게으름을 피울 수 있는 몇 안 되는 합법적인 경로라 할 수 있다.



병을 앓을 때의 이득에 관해 좀더 깊이 생각해보자. 신체적 고통이 오히려 우리의 인격을 긍정적으로 발전시키는 계기가 될 수 있고, 우리의 정신세계를 한 단계 더 성숙시킬 수도 있다. 현명한 고용주라면, 직원들에게 단 며칠 간의 휴가만 제공해도 그들의 태도가 훨씬 더 긍정적으로 변한다는 사실을 인정할 것이다. 이들은 회사에 대한 분노는 줄어들고, 생산적인 아이디어를 잔뜩 지닌 채 복귀하게 된다.



다른 종류의 게으름과 마찬가지로, 질병 역시 '파괴'가 그 올바른 해결책이 될 수는 없다. 대신에 우리는 새로운 대처 전략을 개발해야 한다. 몸을 앓는 것은 어차피 우리 삶의 한 부분이다. 이를 얼마나 가치 있는 고통으로 승화시키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그렇게 하면 질병은 충분히 즐거운 경험으로 바뀔 수 있다. 먼저 우리는 몸이 아픈 것에 대한 죄의식에서 벗어나야 하며, 다음으로 필요한 기간만큼 충분히 쉬어야 한다. 질병을 환영하고 질병과 친해져야 하며, 더 머물다 가라고 청하고 헤어질 때는 아쉬워해야 한다.



PM 03:00 - 천국에서는 모두 낮잠을 잔다



천국에서는 모두들 낮잠을 잘 거라고 나는 확신한다. 낮잠은 완벽한 쾌락이요, 유익하기까지 하다. 낮잠을 자면, 낮잠 전후로 양분되는 하루의 남은 시간들을 더욱 수월하고 즐겁게 운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낮잠은 절대 양보할 수 없는 권리다. 그것을 산업계의 앞잡이들에게 빼앗겨버린 것은 너무나 부당한 일이다. 낮잠 잘 수 있는 선택권이 부여되면, 사람들은 어김없이 낮잠을 잔다. 낮잠을 자지 않는 경우란, 그것이 허가되지 않을 때뿐이다.



안타깝게도 이제 낮잠은, 더 이상 노예 같은 근로 환경에서 안정을 되찾을 수단으로 쓰이지 않는다. 대신 돈이 들고 해롭기까지 한 커피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점심을 먹고 나서 온 몸이 노곤할 때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해결책이란 결국 낮잠이 아닌, 커피를 들이마셔서 카페인 기운으로 버티는 것이다. 커피는 일시적으로 신체의 감각을 각성시키기는 하지만 동시에 신경을 예민하게 하여 밤에는 잠을 방해하기도 한다. 우리는 자유를 박탈당하고, 오히려 자신의 몸을 상대로 전쟁을 벌여야 하는 처지가 된 셈이다. 하지만 잠에 대항해 전쟁을 벌여봐야 결국은 이길 수가 없다. 그러므로 싸우지 말고 굴복하라!



실리적인 관점에서 보아도 잠과의 전쟁은 말이 되지 않는다. 윈스턴 처질은 복잡한 업무를 처리하려면 하루 일과 중에 낮잠이 꼭 필요하다고 다음과 같이 변명했다. "낮에 잠을 잔다고 해서 일을 덜 한다고는 절대 생각하지 말라. 그것은 상상력이 부족한 사람들이나 하는 어리석은 생각이다. 낮잠을 자면 오히려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이틀에 걸쳐 할 일을 하루에 다 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전쟁이 터졌을 때도 나는 낮잠을 잤다. 내가 짊어진 무거운 책임을 제대로 완수하기 위해서는, 낮잠이 무엇보다도 우선시해야 할 일과였기 때문이다."



PM 04:00 - 철학자의 차 한 잔



차를 마시는 조용한 의식은, 요 몇 년 사이 생산성과 이윤의 논리에 희생돼버린 게으른 즐거움 가운데 하나다. 오후 4시에 차 마시는 걸 처음 생각해 낸 사람은 아마 천재였을 것이다. 오후 4시는 바닥까지 떨어진 에너지를 다시 한번 끌어올리는 전환점이기 때문이다. 이때는 차와 더불어 가벼운 담소와 깊은 사고, 담배, 약간의 정신적 수고가 동반된 시간이어야 한다. 그러려면 최소한 30분 정도는 소요가 된다.



동양에서는 차 마시는 절차 자체가 거의 종교화되어, 다도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특히 중국인들은 차 마시는 행위의 정신적인 면뿐만 아니라, 형식적인 면에도 매우 정성을 기울였다. 실제로 공자는 사교적인 자리에서 적절한 행동을 취하는 것은 사회의 기능을 원활히 하는 것이며, 그럼으로써 하늘을 기쁘게 한다고 설파했다. 차가 집단과 개인을 하나로 연합시킬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다시 말해 차 마시는 것은 개인의 내면세계가 외부와 접하는 계기가 된다는 뜻이기도 했다. 우리 모두 차 마시는 일을 신성한 일과로서 매일 같이 준수할 수 있기를 바란다.



차의 가장 강력한 적을 말하라면 물론 커피다. 미국에서는 지난 10년 사이 커피가 알코올의 자리를 대신하게 됐으며, 현재 그러한 미국 스타일의 커피 문화가 세계를 강타하고 있다. 그러나 커피는 승리가, 수완가, 차를 무시하는 자, 점심 식사를 거르는 자, 일찍 일어나는 자, 죄의식에 매달려 발버둥치는 자, 돈과 지위에 집착하는 영적으로 공허한 자들의 것이다. 그것은 우리 삶을 무기력하게 만들 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커피를 거부하고, 고대로부터 시인, 철학자, 명상가들의 음료였던 차를 수용해야 한다.



PM 05:00 - 배회하라, 최대한 천천히



참으로 고상한 단어 '뚜벅이pedestrian'에 우리는 다소 조롱하는 의미를 부여한다. 물론 더 화려하고 빠른 교통수단들과 비교해 볼 때, 걸어 다니는 건 따분하고 촌스러워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걸어다니는 자, 어슬렁거리는 자, 산책하는 자, 즉 플라뇌르flaneur에는 게으름의 숭고한 정신이 깃들어 있다. 그러므로 걷는 자는 고귀하고 강한 존재다. 그는 즐거움을 위해 걷는 것이며, 관찰하되 끼어들어 간섭하지는 않는다. 또한 서두르지 않으며 자신의 마음을 벗삼아 걷는 것만으로 만족해한다. 혼자서 초연히 지혜롭고 즐겁게, 그리고 신처럼 거룩하게 떠도는 그는 진정한 자유인이다.



그러다 대도시의 거리를 터벅터벅 걷는 사람들 대부분은 걸어다니는 걸 그다지 기꺼워하지 않는다. 그 노정 자체는 중요하지 않으며 걸음에 소요되는 시간은 그저 낭비라고만 여긴다. 오직 목표 지점이 중요할 뿐이다. 사실 이렇게 짧은 거리를 걷는 것으로는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의식적으로 조금만 노력을 기울이며, 마음속에 분주하고 소란스러운 하루 일과들이 가득 차 있다고 해도 충분히 깊은 사고를 하면서 걸을 수 있다. 지금 이야기한 걸음걸이의 가장 좋은 예가 앞서 언급한 '플라뇌르'다.



게으름 그 자체가 그렇듯이, 플라뇌르에는 모순적인 의도가 숨어 있다. 즉 천천히 걷는 것은 바쁜 현대인들에게 있어 시간 낭비로 보일 수 있겠지만, 창조적인 사람들에게는 대단히 보람찬 활동인 것이다. 플라뇌르가 깊은 사고와 아이디어를 가능케 하기 때문이다. 창조적인 사람들에게 있어서, 걷는 행위는 일과 놀이를 조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실천해 보라. 작은 일부터 시작하라. 점심시간에 플라뇌르를 해 보라. 어슬렁거리며 유유자적하게 빈둥거려 보라. 걷는 속도를 천천히 하고 여기 저기 빈둥거리다보면, 자신이 다른 누구보다 우월하며 스스로의 운명을 컨트롤한다는 유쾌한 느낌이 들 것이다. 이런 식으로 걷는 것은 도시의 희생물이 되는 걸 거부하고, 오히려 자신의 운명을 손에 쥐고 즐기고자 함이다. 당신은 성인(聖人)이지 죄인이 아니다!



PM 07:00 - 무위를 낚으라



사닐 나는 낚시광은 아니고 그저 가끔씩 즐길 뿐이지만, 그것이 게으름꾼에게 가장 어울리는 스포츠라는 생각은 확실하다. 뭐니뭐니 해도 낚시의 묘미는 완벽한 정적과 무위에 있다. 꼼짝 않고 조용히 기다리는 걸 즐기는 스포츠인 것이다. 낚시는 철학자와 시인들을 위한 것이요, 사실상 낚시 자체가 철학이고 시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왜 저녁 7시가 낚시의 시간이냐고? 이 시간을 낚시 타임으로 설정한 이유는, 물고기를 낚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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