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미친 짓이다
주디스 워너 지음 | 프리즘하우스
제1부 엄마라는 환상
엄마라는 환상 나는 가족과 특히 엄마를 위해 놀랄 만큼의 혜택을 제공하는 나라, 프랑스에서 두 아이를 낳았다. 지역 사회에서 제공하는 무료 탁아모 추천 서비스로 쉽게 아이 돌볼 사람을 구했을 뿐 아니라 세금 특혜를 받아 일 년에 1만 500달러의 비용으로 하루 종일 탁아모를 고용했다. 큰딸은 좋은 서비스를 제공하면서도 한 달에 150달러 이상 받을 수 없는 유치원에 다녔으며, 세 살이 되어 공립학교에 입학하였을 때는 매일 오후 5시까지 학교에 머물 수 있었다. 최소 4개월의 유급 출산휴가와 최장 3년까지 직책이 보장되는 육아휴직이 있었고, 현금으로 제공되는 육아 보조금은 둘째 아이 출산 후 매월 105달러씩 제공되었다.
이러한 프랑스의 사회보장제도보다 더 놀라운 것은 바로 프랑스의 문화, 분위기였다. 그 분위기에 영향을 받은 나는 애 둘을 낳고도 사무실에서 일하면서, 헬스장에서 운동하면서, 밤에 저녁 먹으러 외출하면서, 남편과 둘이서 짧은 휴가를 다녀오면서도, '엄마'로서의 죄책감을 느껴 본 적이 없다. 그곳 사람들은 오히려 일이란 현대를 살아가는 엄마의 정상적 생활의 일부일 뿐이고 심지어 이상적으로까지 여겼다. 연애하고 사회생활을 하느라 시간을 보내는 것처럼, 사람은 '균형 잡힌' 삶을 살아야 한다는 프랑스의 일반적인 믿음이 엄마들에게도 진지하게 적용되었다. 그리고 엄마들이 자식만 바라보며 사는 것을 강박적이고 적절하지 못하며 그냥 이상한 것으로 취급했다.
세 살이 넘은 큰딸과 태어난 지 6개월이 된 둘째 딸을 데리고 워싱턴으로 다시 돌아오고 얼마 안 되어 미국 엄마의 현실은 프랑스와 같지 못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탁아 문제' 때문에 계속 일을 못하게 되었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전업주부의 세계를 경험했다. 완벽한 현모양처 이외에는 자아를 실현하기 위한 선택의 여지를 부여하지 않는 사회에서 여성들은 하던 일을 포기하지 않는 이상 좋은 엄마가 아니라는 죄책감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상황에 있었던 것이다. 내 주변의 직장 생활하는 엄마들은 거의 폭발 직전 수준의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고, 피곤하고 초췌하며 나이 들어 보였다. 그녀들은 직장에 다니지 않는 엄마들과 같은 수준으로 양육에도 욕심을 냈다. 그렇지만 집 밖의 일에 몸이 매여 있었고, 죄책감이라는 짐마저 짊어져야 했다. 언론이 키워 낸 죄책감이라는 것은 그녀들로 하여금 매일같이 자신이 올바로 살고 있는 것인지를 되묻게 만들었다.
언론은 끝없는 악의적 보도로 놀이방에 아이를 맡기는 것이 얼마나 해로운지 공격하고, 직장 생활하는 엄마를 비난했다. 자연 분만을 해야 하고, 적어도 일 년은 모유 수유를 해야 하고, '애착 관계 형성을 위한 부모 역할'을 해야 했고, 이런 일들의 경계가 무너지는 상황마저 견디어 내야 한다는 압박감이 팽배했다. 이 모든 압박감은 성인 여성으로서 엄마가 필요로 하는 욕구에 대해 잔인할 정도로 무감각했다. 더 심각한 것은 여성 스스로가 자신들의 삶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엄마 노릇은 원래 걱정과 죄책감, 그리고 피곤함으로 가득한 것이며 그게 정상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프랑스라는 나라가 제공하는 온갖 종류의 삶을 윤택하게 해주는 사회보장제도가 미국의 엄마들에게는 보장돼 있지 않다는 사실과도 별로 상관이 없는 문제일 뿐 아니라 개인의 성격이나 사적인 문제는 더더욱 아니었다. 주변 사람들과 방송 매체를 통해서 나는 미국의 엄마들이 뼈를 깎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엄마로서 스스로 만족하기는커녕 죄책감에 시달리며 살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 결론을 얻었다. 그것은 수많은 완벽한 모델들을 제시하면서 여자를 지치게 하는 미국 문화 중 하나인 '엄마라는 환상'이었다. 그것은 아이 양육, 결혼과 성 역할, 그리고 현 상태를 지지하는 사회 등에 대한 종교적 집착에서 비롯된 생각이다. 정신과 육체, 영혼을 다 바쳐 아이들을 위해 무언가 해 주느라 우리는 지쳐 버렸다. 그 결과 우리 자신을 다 퍼주고 남은 게 없기 때문에 오히려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해 줄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우리를 이 지경까지 끌고 온 사회, 남편 그리고 전문가들을 향해 느끼는 분노를 우리 자신에 대해서도 역시 느끼고 있다. 또는 그 분노의 감정의 표적은 자신과는 다른 입장에 있는 엄마들이 될 수도 있다.
이름조차 붙이기 힘든 새로운 문제들 인생이 품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오래된 환상에 대해, 사람들은 여전히 불안해하고 그 꿈이 무엇인지 아직 정의를 내리지 못해 알지 못하는데도, 그 환상은 결코 사라지지 않 는다. 아마도, 교양 있는 아내라면 산더미처럼 쌓인 더러운 기저귀 앞에 선 채 절망에 차서 이런 질문을 할 것이다. "결혼이란 게 전부 이런 건가요?" 동시에 그녀는, 자신이 만족하지 못함을 깨닫고 당황할 것이다. 그녀는 지성과 삶에 대해 현실적 견해를 갖춘 여자로서 이를 넘어서야 한다. 하지만 그녀 자신이 그렇게 현실을 넘어설 능력이 거의 없다는 데 모순이 있다. 그녀는 하루하루 더 나아지길 바라며 살 것이다. 아이가 태어나면, 또는 아이가 용변 을 가리게 되면, 아이가 모두 학교에 들어가면, 좀 쉬워지겠지. 그러면 다시 젊을 때처럼 지적이고 아름다워질 시간을 가질 수 있겠지.
- 노라 존슨, <결혼이라는 구속The Captivity of Marriage>(1961)
미국의 아내와 어머니들이 정신적 황폐함으로 괴로워하며 살고 있음이 심각하게 논의된 것은 40년 전 부터이다. 최근 사회과학 분야에서 일어난 혁명에 따르면, 어린이는 자신만의 기질적 특성을 가지고 태어나지만 자라면서 환경의 영향을 받아 성인의 품성으로 점점 진화한다. 환경이 아이의 인격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은 엄마에게는 엄청난 책임을 던지는 말이었다. 엄마들은 먹이고 입히고 필요한 물건들을 아이들에게 공급하는 의무뿐만 아니라 자녀의 잠재력이 최대한 발휘될 수 있도록 적절한 조건을 형성해 줘야 했다. 아이들의 건강과 복지 뿐 아니라 심리적 건강과 잠재력에까지 새롭게 책임의 영역이 확대되자 대부분의 엄마들은 당황하였고, 많은 엄마들이 자아정체성 혼란으로 고통스러워했다. 이들의 엄마 세대가 누리던 전통적인 육아 방식, 즉 여자 친척들이 서로서로 도와주던 전통적인 환경과는 거리가 먼 도시 외곽에 살면서 그들은 소외감을 느꼈다. 자신을 위해서 쓸 시간은 하나도 없는 채로, 마치 집에 몸이 묶인 듯한 느낌을 가졌다.
전문가들의 견해에 따르면, 남성과 평등주의적 관계를 꿈꾸며 성인기를 시작한 대졸 여성들에게 이러한 문제들은 더욱 심각하게 나타났다.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학교에서 논리적 사고를 하도록 훈련받은 이들은 임무중심적이고 이성적이었으며 나아가 결혼을 '동반자적 관계'로 인식했다. 그러나 그녀들에게 실제적인 결혼생활은 스스로가 받아온 교육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으며, 심지어 자신이 '바보 같은' 삶을 살고 있다고 느끼게 만들었다. 여자들은 아이들의 사회생활을 곧 자신들의 사회생활로 대체하면서 아이들의 삶 때문에 자신의 삶을 소모시키기 시작했다. 우리는 이렇게 소모적으로 자신의 삶을 낭비해 온 어머니들의 손에서 자라면서 그녀들을 닮지 않겠다고 다짐했으면서도, 지금 우리들의 아이를 키우면서 더 나은 엄마로서의 삶의 방식을 찾지 못해 쩔쩔매면서 똑같은 소모전을 되풀이하고 있는 것이다. 더욱 이상한 것은, 결혼생활에서 우리 부모 세대에서 끝났다고 생각했던 성 역할이나 권력의 구조를 그대로 따라서 하고 있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이다.
왜 이런 일이 계속되는 것일까? 완벽한 엄마의 이미지는 상당 부분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 낸 것이다. 남자와 여자가 원래부터 평등했다는 믿음을 가진 시대이지만, 여성 진보 안에 깔려 있는 우리 자신의 이미지에는 많은 모순이 숨겨져 있다. 통제 중심의 현대 정치적 요동 속에 진행되어온 페미니즘의 주장과 그에 따른 교육에 영향을 받아 정립된 성 정체성은 결과적으로 여성이 스스로의 몸을 '통제'시켜야 할 대상으로 만들어 버렸다. 주변의 환경과 세계를 지배하기 위해 습득한 자기 권력의 도구를 사용하지 않고, 대신 우리는 그 자기 권력의 도구로 내면을 겨누어서 우리 자신을 통제하는 데 사용했다. 그 신호는 섭식장애, 유당과민증, 획일적인 음식에 대한 알레르기 등의 형태로 곳곳에서 발견된다.
우리가 엄마가 되어도 통제에 광적으로 집착하는 행동양식은 계속되었는데 요즘에는 아이들의 환경을 정화하고 규제하는 일에 나서고 있다. 여성들이 열광하는 육아 잡지와 광고들은 주변 세상의 불안감을 가중시키고 이를 보면서 엄마들은 자신들이 취해야 할 올바른 행동을 더욱 의식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점점 우리는 대중 매체가 제시하는 기준에 우리를 맞추기 시작했다. 자연분만, 가족계획, 올림픽 경기 수준의 모유 수유 등에 통달했으며, 완벽한 엄마, 엄마 노릇의 달인이 되어갔다. 미국 여자들은 무엇엔가 쫓기는 사람처럼 내몰아 쳐지고 있으면서도 책임감이 강하고 질서있게 생활하는 이미지에 취해서 단 한번도 발걸음을 멈추고 왜 이리 삶이 하찮고 무의미하냐고 묻지 않는다. 혼돈의 수렁 속으로 빠져들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고 삶이란 으레 그렇게 흘러가야 한다고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사회와 집단 심리라는 더 큰 맥락에서 보면 그것이 정상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우리가 정상적이지도 않고 자연스럽지도 않으며 필요하지도 않은 방법을 일반화해왔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때이다.
아이들의 삶을 모든 면에서 통제해야 한다는 믿음, 삶이란 개인적인 선택이 모여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믿음, 우리의 한계는 잘못된 선택에서 비롯되며 우리의 문제는 공공의 문제가 아니라 원래 사적인 일일뿐이라는 믿음은 '엄마에 대한 환상'으로 인해 야기되는 혼돈이지 개인의 문제가 절대 아니다. 여성 개개인이 각자 다룰 문제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이는 실제로는 사회의 병폐이며 비뚤어진 개인주의이고, 선택의 인과응보에 대한 자기 파괴적 집착에 바탕을 둔 것이다. 이 혼란은 또한 사회적 범위에 속하는 문제를 사적인 것으로 만드는 방식이며, 진정한 해결책이 없을 때 타인의 통제력에 기꺼이 따르게 한다. 최소한 우리 모두 이를 인식해야 한다. 일단 문제를 인식하면 집단적이고 구조적인 노력이 있어야 이 혼란과 문제들을 치유할 수 있다. 이 혼돈으로부터 빠져 나올 길을 만들어서 우리 시대를 지배하는 엄마라는 종교를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대안으로 바꿔 놓아야 한다.
제2부 엄마라는 종교
희생을 감수하는 엄마들 엄마 노릇이란 주어진 것이 아니라 선택된 사항이며, 임신을 생명의 기적으로 여기기보다는 기술적인 문제로 보아 임신과 출산을 돕는 과학적 기술들이 존재하는 현재에도, 엄마의 역할과 관련된 단어(소명, 부르심, 희생 등)는 모두 종교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을 뿐 아니라 모성이라는 주제와 견고하게 밀착되어 있다. 미국인은 모든 것을 종교로 만든다. 엄마가 되는 것도 마찬가지다. 복음 교회파의 개신교도와 계몽 성향의 합리주의가 결합하여, 모유 수유를 할 것이냐 말 것이냐를 결정하는 문제가 천당과 지옥을 오가는 것처럼 위급한 문제이던 시절인 18세기 후반 이래, 엄마가 된다는 것은 '생산'이라는 결과를 위한 것이었다.
20세기 초가 되자, 모성에 대해 확고했던 기독교는 속세의 새로운 종교라 할 수 있는 과학에 의해 추월당하면서 '과학적 육아' 기술을 가르치는 전문가들의 독단적 충고로 이어졌다. 그러나 역시 엄마노릇의 중요성은 줄어들지 않았다. 프로이트 정신분석학, 페미니즘, 개인주의, 성공 등에 이어 '엄마노릇'이 20세기의 새로운 종교가 되었다. 20세기 말에는, 급기야 갑자기 진화는 중단되고, 아이에게 희생하는 엄마가 우리 시대가 표방하는 어머니상으로 떠오르는 일이 벌어졌다. 이 시대의 여자는 엄마가 되기 위해 '영혼'을 바치는 일 뿐 아니라 아이에게 몸과 마음과 결혼 생활 등 모든 것을 줘야 한다. 여자는 엄마라는 역할 속에서 자기 자신을 아예 버려야 한다고 생각하며 '새천년의 엄마'는 자아를 상실하고 자기를 희생하는 것을 더 이상 상실이라 여기며 슬퍼하지도 않는다. 희생적인 엄마란 모든 것을 수용하고 축복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제, 엄마가 된 여성은 '더러워진 기저귀를 갈면서 다른 해결 방법을 찾으려는 것이 아니라 그런 일 자체에 뛰어들어 즐기고' 있으며, 남편은 집안일과 그녀를 분리해서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도 아무렇지도 않다. 왜냐면 엄마는 평생 자기 꿈을 실현시키지 못할 수도 있음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자신의 욕망도 깨끗이 포기한 '도인'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엄마들은 아이로 인해 자기 자신이 소모되고 있다는 느낌과 아무리 자기를 희생해도 아이에게 무엇을 충분히 해 주지 못한 결과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지쳐간다. 2000년 실시한 설문 대상 엄마의 70%가 엄마 노릇이란 극도로 스트레스 받는 일이라고 대답했다. 이것은 엄마들이 아이를 안아 치대고 어르고 이야기하고 노래하고 아이스 바에 풀을 붙여 뭘 만드는 것과 같은 일이 즐거워서 견딜 수 없는 지경이 아니라면, 너무나 당연한 결과이다.
이기적인 엄마, 버려진 아이들1980년대에서 1990년대로 넘어갈 무렵 엄마에 대한 잡지 기사에는 온통 '죄책감'이라는 단어가 넘쳐났다. 일하는 데 대한 죄책감, 필요할 때 아이 곁에 충분히 있어 주지 못한데 대한 죄책감이었다. 일하는 엄마는 더 이상 영웅도 아니고, 엄마들의 페미니즘 운동으로 새롭고 건강한 자유를 획득한 성공의 상징도 아니었다. 일하는 엄마는 사악하고 이기적이고 '자연에 거스르는' 사람이었다. 이것은 상당부분 유아가 엄마와 유대 관계를 형성하는 방식에 대해 연구한 영국의 심리학자 존 볼비의 '모성의 박탈' 개념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는 유아 시절에 엄마와 어떤 애착 관계를 형성하느냐에 따라 한평생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는 방식이 결정된다고 믿는 '애착 이론'을 주장하였는데, 현재는 이미 이 이론이 주류가 되어서 우리는 이와 관련한 내용의 상당 부분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볼비 시절의 심리 분석학자와 행동주의자들이 남긴 지혜로운 내용 중 하나는 유아가 엄마에게 가지는 애착은 대부분 신체적인 욕구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볼비는 정반대로 심리적 욕구 때문에 애착 관계가 형성된다고 주장했는데, 심리적 필요 욕구는 매우 깊고 강력하고 결정적인 영향력을 가지기 때문에 엄마와의 애착 관계를 망칠 경우 아이는 남은 평생 깊은 상처를 가지고 살게 된다는 것이다.
볼비의 영향으로 '애착', '상실', '모성의 박탈감' 등의 단어는 어린이의 유년기를 이해하기 위한 기본 어휘가 되었다. 그러나 버려진다는 감정이 아이들에게 공포와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한 불안', 또는 감정적 박탈감 등을 불러일으킨다는 이 이론은, 엄마들을 유령처럼 따라다니며 괴롭히기 시작했고 유기되고 버려진 아이들이 겪은 악몽 같은 경험과 잠깐씩 부모와 떨어지는 일상의 생활을 연결시켜 버리는 현상이 일어나 문제가 되었다. 이와 같은 공포의 흔적은 우리 세대의 여자들이 엄마가 될 때 감정적 배경을 이루게 되었다. "엄마가 했던 일을 당신은 하지 않는 법"이 인기를 끌기 시작하고 조건 반사적으로 많은 여성들이 성인이 된 후의 문제도 결국은 '아이를 유기하고 방치하는 문제'로 돌아가서 연관되고, 또 성인으로서 겪는 문제에 대한 원인은 바로 '나쁜 엄마'에 연결되었다.
과거를 바로잡고 현재를 완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이 회복의 시대에 부모가 된 베이비붐 세대는 '세상의 모든 것을 완벽하게 만들 의무를 가진 세대'라는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세상을 수